외갓집 추억
임병식 rbs1144@daum.net
내 유년의 추억 중 가장 잊히지 않는 것은 외갓집을 혼자서 다녀온 일이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에는 어머니를 따라 처음 다녀온 후로 아홉살 때 나서 혼자서 다녀오게 되었다. 버스를 타면 중도에서 내리는 법이 없이 곧장 가게 되어서 감행을 했다.
외갓집은 내가 사는 시골집과는 달리 읍내 중앙에 있어서 정류소에 내리면 곧잘 찾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보내는 어머니도 안심하고 떨쳐나선 나도 별 두려움이 없었다.
장흥 읍내 외가를 가려면 시골 벽촌에 산 나는 ‘군머리’라는 먼 사거리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집에서 대략 4Km 남짓한 거리로 아이의 보행으로는 벅찬 거리였지만 오직 외갓집을 간다는 설렘으로 지루하거나 피곤한 줄을 몰랐다.
처음으로 어머니를 따라나설 때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든든한 보호자가 계시니 치마꼬리만 놓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의기양양했다. 그렇지만 혼자서 가게 될 때는 다소 걱정이 앞섰다. 전화도 없던 때라 길을 어긋날 줄 몰라 여러 차례 어머니가 일러준 말씀을 귀를 세우고 경청을 했다.
혼자서 단독으로 가게 되었을 때다. 별교에서 장흥을 오가는 금성여객을 타기 위해 군머리에 도착했다. 당시는 비포장도로라서 차가 한 번씩 지나가면 일대가 흙먼지로 뒤덮였다. 차체에 붉은 띠를 두른 버스가 마침내 눈앞에 나타났다. 머리가 트럭처럼 불쑥 튀어나온 차인데. 내가 차에 오르자 어머니가 꼭두새벽에 일어나 만들어주신 떡 동구리를 창문 안으로 밀어 넣어주었다.
손을 흔들 사이도 없이 버스는 금방 먼지를 일으키더니 내닫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흙먼지를 뒤집어쓴 어머니가 자리를 뜨지 않고 그대로 서 계셨다.
이렇게, 젊은 청춘은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이소(移巢)의 경험을 했다. 내가 외갓집에 가는 걸 감행한 것은 순전히 외할머니 때문이었다. 외할머니는 이야기 박사로 모르는 이야기가 없었다. 뛰어난 구연동화 할머니로, 사람들의 음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짐승 소리며 온갖 새소리도 기막히게 잘 내셨다.
어려서 내가 들었던 이야기로는 강태공 이야기, 지네와 관련된 김자점 이야기, 독살새 이야기, 바보온달 이야기 등등. 처음 외갓집을 갔을 때의 풍경을 잊지 못한다. 마당 가에 채송화가 피어있는 가운데 부엌 한쪽에는 왕겨가 가득했다. 아궁이에다 왕겨를 집어놓고 풍로로 바람을 불어넣는 것이 여간 이색적이지 않았다.
아마도 땔감을 자유롭게 구하기 어려운 여건상, 그것을 이용하신 것 같았다. 그 연기가 어찌나 메케하고 따가운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내가 떡을 내려놓자 외할머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니 에미는 귀찮게 이것을 해서 보냈다냐.”
그러면서 식구들을 불러 모아 떡 잔치를 벌였다.
그때 외갓집에는 과년한 이모가 있었다. 어머니의 처녀 시절의 모습을 빼어 닮은 이모였다. 내가 가던 날 이모는 다른 처녀와 함께 수틀에 고개를 묻고 수를 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다음 해이다. 당시 교편을 잡고 있던 나보다 열다섯 살이 많은 사촌 형님이 결혼하고 신부가 도착했을 때다. 친인척이 모였는데 보니, 형수가 바로 내가 외갓집에 갔을 때 이모와 함께 있던 그 아가씨였다.
내가 전후 사정을 여쭈어보지 않아 모르지만 아마도 외할머니께서 중신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한 일가붙이로서 같은 동네에 살아 양가를 잘 아시기 때문이다. 나중에 반가운 모습을 다시 뵈니 무척 반갑고 신기하게 여겨졌다.
뒤돌아보면 70여 성상도 넘은 오래 적 이야기다.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러 그때 건장하신 형님도 돌아가시고 꽃다운 형수님도 세상을 떠나셨다.
외갓집을 생각하면 잊히지 않는 일이 더 있다. 외삼촌은 내가 가면 나를 데리고 고기잡이에 나섰다. 소위 피리 병이라는 물고기잡이 용 유리병에 된장을 풀어서 놓아두면 피라미들이 들어가는데 그것을 적쇠에 소금을 뿌려 구워주었다. 그 맛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하루는 할머니를 따라서 물을 맞으러 갔다. 집에서 한참을 걸어가니 깊은 골짜기가 나타나고 그 끄트머리에 물줄기가 그리 굵지 않은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은 수건을 머리에 쓰고서 물을 맞았다. 어린 내가 보아도 아프지 않고 맞을 만했다. 물을 맞고 나서는 삶은 계란을 먹었는데, 외할머니는 지켜보며 “언친다. 천천히 묵어라” 말씀하셨다. 옛날을 떠올리면 그러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생각이 난다.
돌아보면 내가 처음 이소를 시작한 지도 어언 70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직장생활을 하느라 얼마나 떠돌아다녔던가. 젊은 시절은 1년이 멀다고 직장을 옮겨 다니며 이사도 십여 번이 넘게 했다. 그런 동안에 청춘은 지나가고 지금은 추억을 곱씹고 사는 노인이 되었다.
이제 고향을 가면 내 또래의 사람들도 만나기 어렵다. 거의 산자락에 묻혀서 나직한 봉분 아래 잠들어 있다. 가만히 외갓집이 그리운 이유를 생각해 본다. 그곳은 어머니의 고향이기에 본향을 그리는 본능적인 것이 아닐까.
사람이 나이를 드니 한 가지 부조화 현상을 느낀다. 몸은 늙어 기력은 쇠하여지나 머릿속에 가슴속에 담긴 추억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뚜렷하게 떠오르곤 한다.
그런지라 외갓집을 그리는 나의 마음속에는 흙먼지 날던 신작로길, 채송화 피어있던 외갓집 마당, 풍채 좋으신 외할머니의 모습, 그리고 아리따운 이모의 섬섬옥수의 손이 오롯이 간직되어 있다. (2024)
첫댓글 외가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외갓집에 가서 풍채 좋고 얘기 잘하시는 외할머니 통해
강태공, 김자점, 독살새, 온달장군얘기 참 재밋는 추억입니다.
섬섬옥수 예쁜 이모님과의 그리움,
외삼촌과 냇가에 가 파리병으로 고기 잡아 구워 먹던 추억,,
몸은 늙어 기력은 쇠하여져도 가슴 속에 담은 추억은 그대로 이니
늙으면 추억을 먹고 사는 것 같습니다.
옛날을 반추하는 추억의 보물 단지 잘 감상했습니다^^
사람은 나이들면 몸은 늙어도 마음은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어릴적 추억이 더욱 새록새록 짙어만 갑니다.
장흥이 외가인데, 당시 벌교에서 장흥을 다니던 금성여객 버스를
타면 한시간 후쯤 장흥 외가에 닿았습니다.
그때보던 채송화, 왕겨타던 메캐한 내음, 풍채좋으신 외할머니,
곱디고운 이모, 외삼촌 생각이 많이 납니다.
버스머리 군두 사거리에서 처음으로 혼자 버스를 타고 외갓집을 향하던 아홉 살 시골뜨기 소년의 두근거리는 가슴과 먼지나는 행길을 그려봅니다 외할머니와 예쁜 이모님 그리고 외삼촌과 함께 고기잡이하던 추억이 아득한 70여 년 전의 일이런만 추억 속에 고이 간직되어 오히려 새로우니 알다가도 모를 것이 세월인가 싶습니다
어려서 버스를 타고 장흥 외갓집을 가던 기억이 또렸습니다.
어머니가 언겨주신 떡 동구리를 안고가는데 내일때 까지고 따뜻했습니다.
할머니는 옛날 이야기를 잘 하셨는데 내가 글을 쓰는 작가가 된것도
그런 유전적 요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2024그린에세이 9.10월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