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식란(消息欄)
임병식 rbs1144@daum.net
어떤 신문 사회면 한쪽에는 ‘궂긴 소식’란이 마련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주요인물의 죽음에 대해서는 눈에 띄도록 박스기사로 처리하여 싣고 그 밖의 인사에 대해서는 여기에 싣고 있다. ‘궂기다’는 말은 순 우리말로 상사가 난 것을 높임말이다.
최근에 이 난을 통해서 최인호소설가의 부인 황정숙 여사의 부음을 접했다. 상주로 이름이 올려진 ‘최다혜’를 보고서 새삼스레 최인호소설가를 떠올렸다. 최인호 소설가는 2013년 설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부인은 그보다 12년을 더 살다가 작고한 셈이다.
최인호 소설가는 나와는 자치동갑이다. 정확히는 1945년생으로 한 살이 위다. 그래서 학창시절이나 살아온 삶을 돌아볼 때 늘 기준점이 된다. 나는 늘 그의 문학인생을 추적해왔다. 아니 추적했다 기보다는 지켜봐왔다. 문학에 발을 들여놓은 시기가 같으니 알게 모르게 지켜보게 되었다.
그는 문청(文靑)시절 대단한 문재로 서울고 2학년 때인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공모'에 가작 입선하였다. 당선작 없는 뽑힘이었다. 제목은 ‘벽구멍으로’. 당시 목욕탕 이층집에서 살았던 모양으로 벽구멍을 통하여 목욕탕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재삼은 것으로 기억한다.
‘다혜’라는 이름도 내 기억에 각별하다. 그는 ‘셈터’ 잡지에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10년 넘게 연재를 했는데, 어느 글에서 딸의 이름을 짓게 된 내력을 언급했다. 황순원소설가를 찾아가 작명을 부탁하니 자신의 작품 '일월(日月)속 주인공인 ‘다혜 ‘를 내주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몰랐는데 부인의 성씨가 황씨인 것을 보니 부인 쪽으로 연고가 닿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다혜’는 그렇게 탄생한 이름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수일 전 5월 8일에는 윤후명작가의 궂긴소식이 알려졌다. 이때는 본인이 유명작가라서인지 동 신문에 비중 있게 박스기사로 보도가 되었다. 향년 79세였다. 그는 1946년생이다.
지방 시골에 산 나는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서울과 지방으로 하늘의 천체로 말하면 그들이 북극성이나 카시오피아처럼 빛나는 스타였다면 나 같은 존재야 미미한 은하 속에 감춰진 작은 흔적에 불과했지만 한 하늘아래서 함께 숨쉬며 문학을 붙들고 있다는 게 하나의 자부심이었다.
나는 어려서 윤후명이 개명이전에 쓴 ‘윤상규’를 주목했다. 최인호는 나보다 한 살이 많기도 했지만 내가 문학에 발을 디뎌 걸음마를 할 때, 이미 등단을 하여 날개를 달고 있어서 아득한 존재였고, 윤상규는 그래도 습작하는 동네에 함께 있어서 우러러 보면서도 어깨를 겯고 있다는 동료의식이 있었다.
그렇지만 내 의식 속에서는 ‘그는 천재야’하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생각이 기발하고 사물을 붙잡아 표현해 내는 핍진력이 대단했다. 그래서 나는 은근히 ‘윤상규는 끝까지 살지 못하지’하는 위태로움을 안고 바라보았다. 나의 문청시절만 해도 무슨 자살이 유행병처럼 퍼져서 사회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청년들이 많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마지막까지 온전히 살아서 고종명을 했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는 일찍이 문재를 발휘하여 돈도 벌었다. 30대에 서울에 17평 아파트를 샀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 그 이후는 내가 위태롭게 바라본 대로 한동안 실크로드의 돈황을 전전하더니, 술만 마시고 사는 폐인의 길을 걷고 있다는 말이 들려오기도 했다.
그런데 가족이 바로 일으켜 세웠는지 대학원에서 교수생활도 하고 말년을 아름답게 마쳤다. 그의 말년의 얼굴은 많이 이그러졌는데, 그것은 그의 방황한 고뇌의 흔적일 것이다. 나는 그의 얼굴표정에서 늘 토스토에프스키가 지은 내면의 고뇌를 읽었다.
그의 궂긴 소식에서 세 딸의 이름 앞에 접두사로 모두 ‘하나’라는 것이 붙었는데 그 이유는 물어볼 수가 없어 할 수가 없다. 그들은 말려가는 세월에 하염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나는 그들과 먼발치에서나마 함께 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
최인호는 살아생전에 멋진 말을 남겼다. ‘인간의 육신은 영혼을 싣고 떠나는 배’라는 것이다. 윤상규는 교교시절 나비라는 시에서 나비의 날갯짓을 보고 ‘방랑의 자유를 노래 한다’고 했다. 그들의 말처럼 최인호는 지금은 영혼을 실은 육신을 내려놓고 천상에서 편히 쉬고, 윤상규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이승에서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하늘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훨훨 날고 있을까.
나는 그들의 은밀한 삶은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문학하나를 붙들고서 살아온 삶은 얼마나 고달팠을까 하는 마음은 능히 짐작을 한다. 나의 사례를 들어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점에 대해서 다른 문인의 얘기로 대신하여 한다.
등단하고 나서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접했다. 장백일 문학평론가와 박연구수필가는 동향사람이기도 하지만 내가 좀 아는 분들이다.
두 분 역시 문필생활을 했는데 아픔을 겪은 상처가 있다. 장백일 평론가는 유신말기에 큰 곤욕을 겪었다. 소위 문인간첩사건이라고 하여 직장에서 해직이 됨과 동시에 인신구속을 당한 것이다. 일본에 있는 조총련잡지에 글을 투고했다하여 정보부에서 간첩죄를 씌운 것이다. 이때 연루된 분은 선생을 비롯한 김우종 평론가, 임헌영 평론가, 정을병소설가. 나중에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일상은 무너졌다.
선생이 직장을 잃자 부인이 생활전선에 나섰다. 조그마한 기원을 연 것이었다. 어느 날 선생은 가게를 나게 보게 되었다. 남자 목소리가 들려 손님이 있구나 하고 문을 여는 순간,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손님 중 한 사람이 부인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그 대목을 선생은 어느 글에서 언급하며 “마음 같아서는 당장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고 했다. 자신의 처지에 비추어보아 얼마나 분노가 끓어올랐으면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싶어서 가슴이 찡해진다.
박연구선생은 어느 날 부인이 노점상을 하는데 단속당한 현장을 목격했다고 한다. 단속반이 집에서 마련한 음식물을 거칠게 걷어가는 과정에서 길바닥에 내팽개쳐진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그걸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찢어져 내렸을까.
문인은 누구보다도 감성이 예민한 존재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곁을 머물다 떠나갔다. 눈을 감고 헤아려보니 그런 저런 일들이 무성 영화 속에 비친 풍경만 같다.
그것은 60년대를 지나 70, 80년대를 거치면서 최근 2020년대에 목격된 것이다. 그것을 지켜본 조망자, 혹은 관찰자인 나도 그런 풍경에 휩쓸려 사라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세월은 그렇게 흔적들을 남기고 사라져간다. (2025)
첫댓글 '어떤 소식'란을 통해, 언제 사라질 날도 얼마 남지 않는 때
지나간 文友 흔적들을 남기 시니 한 폭의 문학 정원을 보는 듯 싶습니다.
최인호 작가가 황순원소설가를 찾아 소설 속의 주인공 '다혜'를 딸 이름으로 얻어 짓고,
윤후명 작가와 동시대를 살면서 10대 부터 文名을 교류했으니 아름다운 추억이셨습니다.
최인호, 윤후명 작가들이 중앙 무대에서 활동하여 크게 명성을 날렸으나 임작가님도 절대 뒤지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미미한 은하수가 아니라 나중에는 샛별이 될 때가 올 것입니다.
5~60년대 농촌의 풍경과 실상을 청석님 만큼 잘 남긴 작가도 드물기 때문입니다.
장백일, 김우종, 임헌영, 정을병 작가들이야말로 민중 속에 울림을 준 작가라 생각합니다.
작가라면 자유로운 서사로 먼저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100년도 못 살지만 문학 작품은 후세에 길이 남기 때문입니다.
독재자 박정희 전두환은 죽어서도 그들을 증오하는 사람이 있지만,
올곧게 살다 간 정몽주, 성삼문, 매천 황현, 김구, 장준하선생은 그리워합니다.
'세월은 그렇게 흔적들을 남기고 사라져간다' 共鳴을 줍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최인호소설가와 윤후명작가는 동시대를 살면서 글을 함께 써와서인지 남다른 생각이 듭니다.
두사람은 확실히 문학천재로 주위사람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작품속에서 당시 학원잡지에 실렸던 것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어서 신기해 하면서도 동료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잘 모르겠는데, 장백일선생님과 박연구선생님의 어려운 삶의 형편을 엿보면서
왜 아버지가 글을 쓰지 말라고 그토록 극력 반대를 하셨는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생활속에서 겪은 두 분의 아품은 사라지지 않고 오래토록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두 두분들은 광주고등학교 후배 오덕력선생의 노력으로 광고 별실 문학관에 작품이 함께
보존되어 있어 묘한 인연도 느끼게 됩니다.
하찮은 이야기지만 문학동네에서 차담을 나누면서 한나절의 소일을 삼을만한 이야기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읽어주시고 정성어런 댓들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과 동 시대를 누빈 문인들의 사연이 단편적이지만 생생하게 느껴지는 건 그들과 호흡을 함께했던 선생님의 체험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최인호 윤후명 최명희 선생은 문학에 전념하여 소설가로 정채봉 선생은 동화작가로 문명을 떨쳤지만 선생님께선 공직에 봉사하시는 중에 오랜 기간 사모님 병수발을 하시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틈틈이 수필을 써오시면서 수많은 역작을 출산하셨고 지금 이 시간에도 건필하고 계시니 존경스럽습니다
이선생님이 저를 꿰고 계시니 최인호 윤후명에 이어 최명희와 정채봉도 이끌어내시네요.
그들은 한곳에서 모여있지 않았지만 늘 마음속에서 함께 하고 있었지요.
최근에 윤후명이 유명을 달리한데 이어 최인호의 부인까지 타계하고 보니 무수한 생각들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들과 엵인 인연이 작기는 하지만 잊을수가 없어서 글로 써봤습니다.
정성어런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