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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의 주인만큼 국가와 국민에게 중대사한 일이 있을까?
이번 대선의 당선자인 대통령이 입성할 원래 청와대는 이승만대통령시절 경무대로 불리웠다.
그런데 이승만대통령이 하야하고 윤보선대통령이 당시 이름이 좋지 않다하여 청와대로 고친 것이다.
청와대는 고려조 숙종 9년부터 궁궐터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고려조의 당시 수도이던 개경의 이궁(離宮)터로서 자리를 잡았다.
조선조에 들어와 태조 4년(1395) 정궁인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이곳을 궁궐의 후원으로 사용하였다.
고종 5년(1868)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신무문 밖(현 청와대 지역)에 중일각, 오운각, 융문당, 융무당, 경무대, 춘안당 등의 건물이 지어졌고 과거장이나 관농장, 연무장으로 사용하였다.
일제가 1910년부터 경복궁을 조선총독부 청사부지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곳에 있던 융문당, 융무당을 철거하여 공원화 하였고, 조선총독의 관사부지로 구본관 자리를 선정하였다.
1939년에 건평 약 586평의 건물을 완성 하였으며, 해방후 1945년 미군정이 시작 되면서 약 2년 3개월 동안 군정장관(하지 장관)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대통령은 과거 이곳에 있던 경무대의 이름을 따서 "경무대"로 명명하여 집무실 겸 관사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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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혁명후 윤보선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경무대에 대한 국민의 인상이 좋지 않다하여 이름을 개칭하였는대 본관 2층 화강암 석조에 청기와[靑瓦]를 덮어 ‘청와대’란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그후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전대통령이 사용하였으며, 6공화국에 들어와서도 계속 사용하여 왔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독립한지도 70여년이 지났으며 그동안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내는 등 세계 각국에 대한민국이 널리 알려지고,
세계 10대 무역국가로 발돋움하면서 경제적 지위 또한 높아짐에 따라 6공화국 정부는 청와대 본관을 비롯한 주요시설들의 신축· 건립에 착수했다.
청와대 자리는 고려시대의 궁터였고 조선 시대 1426년(세종8년) 경복궁이 창건됨에 따라 궁궐후원으로 정해져 연무장, 융무당, 경농재, 과거장이 서고 왕의 친견장소로 쓰였다.
1927년 일제총독이 오운각 외의 모든 건물을 헐고 관저를 지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군정장관 관저가 되고,
1948년 정부 수립후 대통령 관저로 경무대란 명칭이 붙었 으며, 1960년 4.19혁명후 대통령에 취임한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로 개칭하였다.
청와대는 행정구역상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에 속하며, 지리적으로는 서울시의 주산인 북악산과 북한산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고 시청, 종로, 을지로 등의 상업·업무 지역의 북쪽에 위치한다.
청와대 지번은 일제시대인 1911년 12월 20일 경성부제를 실시 할 때 광화문 1번지로 정해졌는데,
해방후 1946년 1월 1일자로 일본식 동명이 한국식으로 개명될 때 세종로 1번지가 되었다.
일제때 광화문 1번지 대지면적은 194.911 평이었으나 1946년 세종로 1번지로 개명 되면서 69.871평으로 조정되었다.
현재 청와대 경내 대지는 세종로 1번지, 삼청동 157-94번지 외 9필지, 영빈관, 101단, 구연무관 위치인
세종로 1-91번지 외 17필지, 궁정동 1-2번지 외 43필지 등 총 면적이 3개동 73필지 76,685평에 달한다.
청와대 일대는 예로부터 풍수지리상으로 길지(吉地)중의 길지에 속한다고 알려져 왔다.
북으로는 북악산을 주산으로 좌청룡인 낙산(駱山), 우백호인 인왕산(仁王山),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명당수인 청계천이 북북서에서 통과해 동쪽으로 흘러가고 객수(客水)인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 매우 길한 배산임수 (背山臨水)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위치한 세종로 1번지 일대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숙종때인 1104년경, 고려의 이궁(離宮)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고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개경과 함께 서경(평양), 동경(경주) 의 세곳을 삼경(三京) 으로 삼았는데 숙종때 동경대신 이곳에 이궁을 두고 남경으로 삼았다.
숙종 이후 예종, 인종때까지 계속 번성 했던 이곳은 충렬왕의 삼경제 폐지로 한동안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청와대 자리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수도를 옮기자는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부터였다.
태조 이성계는 재위 3년째인 1394년 새 수도건설을 위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만들었다.
그리고 관리들을 보내 궁궐터를 물색하게 했는데 고려 숙종때의 이궁터는 협소해서 새로 궁궐을 짓기가 어렵기 때문에 좀 더 남쪽으로 이동해서 궁궐을 지어야 한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즉 오늘날의 청와대 터에서 좀 더 내려간 평지에 왕궁을 짓기로 한 것이다. (주.건물이 평지로 내려오지 않았어야 될것인데 내려서쓴 터를 잘못 잡은 것이서 비운의 터가된 것으로본다)
태조는 그해 12월 정도전(鄭道傳)으로 하여금 궁궐짓는 일을 시작하도록 했다. 태조 4년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9월에 궁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바로 경복궁이다.
이런 유구한 역사를 지닌 청와대의 새로운 주인이 될 후보자를 우리는 잘 선택해야 할 현명한 목요일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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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 대통령
"호세 무히카"
소설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우루과이에 거주하고 있는
"헤랄드 아코스타"는
자신이 일하는 공장에 출근했으나
신분증 기한 만료로 작업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던 그는
더위를 피해서 승차 요청(히치하이킹)을
시도했고, 지나가든 관용차 한 대가
그를 태워 줬다.
차 안에 탄 ‘헤랄드’는 깜짝 놀랐다.
운전석에는
‘호세 무히카’우루과이 대통령이
조수석에는 부인인
‘루시아 토폴란스키’상원의원이 타고 있었다.
헤랄드는 그때 상황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대통령이 나를 차에 태워줬다.
그리고 상황을 설명하니
집까지 데려다 주셨다.
이 사실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대통령 부부는 매우 친절했다.
그날 하루동안 비록 일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 짧은 여행은 더 없이
소중하고 유쾌했다"
자신의 월급 상당액을
기부하는 것으로 알려진
"호세 무히카" 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다.
5년의 재임 중에 받은 월급 중
약 6억원을 기부했고,
이 중 4억 3천만원은 서민들을 위한
주택건설 사업에 사용됐다.
신고된 재산은
약 3억 5천만 원인데,
이 중 1억 5천만 원은 농장이고,
나머지는 약간의 현금과 트랙터 2대,
농기구, 1987년형 오래된
자동차 한대 등이다.
이 중 농장은 부인 소유이다.
그는 호화로운 대통령 관저 대신
평범한 시민들의 생활을 느끼기 위해
여전히 농장에서 지내고 있다.
그가 기부하는 이유도
평범한 시민들의 평균 소득에 맞춰
살기 위해서였다.
또, 아랍의 부호로부터
대통령의 오래 된 차를
자신의 총재산의 4배인
100만 달러 (13억원)에 사겠다는
제의를 받았지만 그는 제안을 거절했다.
이 사실이 화제를 모으자 그는,
“내가 타는 차에 큰 관심을
두지않기 바란다.
모든 자동차에는 가격이 붙어 있지만,
삶에는 가격이 없다" 고 말했다.
자동차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인간의 삶의 문제에 더 많이
고민 하라는 뜻이다.
"무히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가치있게 삶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다."
삶을 살아가는 가치!!!
가슴에 울림을 준다.
언제쯤이면 우리나라도
만인이 존경하는 대통령,
국민들을 위하는 국회의원들을
만날 수 있을까?
언제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대통령을 본받으라",
"국회의원을 본받으라"고
말해줄 날이 올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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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의 매운 언니 *
대만이 훨훨 날고 있는 동안 한국은 발바닥으로 기고 있어요 .포플리즘으로 나라재정을 박살내고 한심한 짓거리만 하고
있으니 ~
[2년 연속 세계 성장률 1위… 6년 만에 대만 확 바꾼 ‘차이잉원의 기적’]
안철수·윤석열·이재명도 주목...차이잉원 대만 총통의 3대 ‘명품 리더십’ 포인트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세계의 찬사를 한 몸에 받는 국가 정상이 있다. 1956년생으로 대만 역사상 첫 여성이자 미혼(未婚) 총통인 차이잉원(蔡英文) 이다. 2016년 처음 당선된 그는 작년 1월 역대 최다 득표로 재선됐다.
그런 그를 미국 ‘타임’(TIME)은 작년 10월 초 ‘세계 100대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해 표지 인물로 다뤘다. 프랑스 시사주간지 ‘르 푸앵’(Le Point)은 작년 12월 ‘누가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에 5명의 국가 수반 중 한 명에 넣었다.
2년 연속 세계가 극찬하는 정치인
이달 초에는 미국 ‘포브스’(Forbes)지가 차이잉원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여성 100명’ 중 9위로 뽑았다. 영국 로이터통신은 이달 24일 ‘중국에 맞서는 지도자’라는 제목의 장문의 특집기사에서 “차이 총통은 소프트 파워와 하드 파워를 적절하게 구사하면서 더 거칠어진 중국의 공세를 이겨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쯤 되면 한국의 절반도 안 되는 인구 2400여만명의 섬나라 지도자라고 그를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그의 인기는 최고 명문인 대만대 법학과 졸업→미국 코넬대 로스쿨(LLM)→영국 런던정경대(LSE) 법학박사(JD)→만 28세 최연소 대만정치대학 교수 같은 화려한 ‘스펙’ 때문 만이 아니다. 크고작은 7번의 최근 선거에서 모두 이겨 ‘선거의 여왕(女王)’으로 불려서만도 아니다.
집권 6년여만에 ‘용(龍)의 귀환’을 연상시킬 정도로 대만의 국력과 국격(國格), 체질을 확 바꿨기 때문이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드문 발군(拔群)의 ‘국정 성적표’가 그 증명서이다. 그가 취임한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대만의 평균 경제성장률(4.46%)은 한국(1.85%)의 두 배를 웃돈다.
“올해도 6%대 성장”...증시 상승률 韓·中·日 압도
지난해 대만의 실질 경제성장률은 30년 만에 중국을 제치고 세계 주요국 1위에 올랐다. 차이 총통은 “올해 대만 경제성장률은 11년 만에 최고인 6% 이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달 26일 말했다. 이게 현실화되면, 작년에 이어 올해도 대만은 중국을 능가해 2년 연속 세계 1위 성장률 국가가 된다.
대만 경제는 올들어도 10개월 연속 강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1984년 이후 37년 만의 최장기 호황이다. 올들어 이달 27일까지 대만 증시 상승률은 22%로 각각 4%대에 그친 한국·일본·중국을 압도한다. 시장 투자자들이 세계 경제 규모 21위인 대만의 성장성을 세계 10위, 2위, 3위인 한·중·일 보다 밝게 보는 것이다.
똑같이 IT가 주력 산업인 대만과 한국의 격차도 눈에 띠게 벌어졌다. 2017년부터 이달 27일까지 5년 동안 대만 증시의 자취안(加權)지수는 95% 넘게 올랐고, 한국 증시의 코스피(KOSPI) 상승률은 46%대에 그쳤다.
차이 총통의 집권 초만 해도 대만은 중소기업의 집합체이자 중국의 하청 공장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하이테크 아일랜드(hightech island·첨단 기술의 섬)’로 달라졌다. 경제 구조 개선과 반도체 등 수출 호황, 통화 가치 강세라는 3박자도 갖췄다. 집권 6년 만에 이룬 ‘차이잉원 기적(miracle)’이다. 요즘 전 세계 자동차·스마트폰·노트북·항공기·게임기 제조 기업들이 대만 반도체 업계 동향 모니터링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①기술 중시·기업 친화 정책...경제 부흥
세계 무대에서 대만을 ‘포효(咆哮)하는 갑(甲)’으로 만든 첫번째 요인은 기술 중시(重視)와 기업 친화(親和) 세계관이다. 차이 총통은 “기술(technology)이 대만 안보의 보장판이다” “민간 기업이 일자리 창출의 주인공이다”는 자신의 믿음을 6년 내내 실천에 옮기고 있다. 2019년 초부터 금융·세제(稅制)·용수(用水)·전력·인력 지원을 묶은 패키지 인센티브 제공으로 해외에 나가있던 대만 기업들의 국내 귀환을 유도했다.
2년여 만에 중국 등에 진출해 있던 209개 기업이 호응했고, 이들이 대만에 재투자한 돈은 31조 9139억원에 달했다. 이로 인해 6만5000개가 넘는 일자리가 생겼다. 문재인 정부 4년 8개월 동안 정부 수립후 가장 많은 기업들이 한국을 탈출하고 있는 것과 정반대이다.
차이 총통은 이달 24일에는 “각 대학이 반도체 전공 신입생을 1년에 1번이 아닌 6개월마다 1번씩 뽑고 방학 기간을 조정해 연중무휴로 반도체 인재를 키우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국가전략 산업인 반도체 초격차 유지를 위해 관련 인력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는 업계의 요청을 전폭 수용, ‘1년에 두 번’ 입학생을 뽑는 ‘특단 조치’를 내린 것이다.
더 결정적으로 대만 경제를 도약시킨 원동력은 따로 있다. 격화되는 미국·중국의 전략 경쟁 속에서 ‘친미·반중(親美反中)’이라는 확실한 지정학(地政學)적 선택을 하고 어떠한 공갈·위협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친미·반중’ 노선은 차이 총통이 선거 승리를 위해 내놓은 일시적 전술이나 카드가 아니다.
②‘親美·反中’ 노선...자유민주동맹의 선봉
인류 사회의 열망이자 이상(理想)인 ‘자유’와 ‘인권’을 사수(死守)하고 확산해 세계사(史)에 이바지하겠다는 차이 총통의 철학과 가치관, 소명의식의 결정체(結晶體)이다. 그는 2021년 11-12월호 미국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실은 특별기고문에서 “대만에 대한 중국의 위협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더욱 노골적이고, 더욱 확신에 찬 권위주의의 도전”이라고 규정했다.
14억명의 중국인들이 누리지 못하는 자유와 민주를 대만에서 꽃피움으로써 중국과 차별화하고, 세계적으로도 ‘꼭 필요한 나라’가 되겠다는 담대한 청사진이다. 이로써 대만 해협을 사이에 둔 양안(兩岸) 대립은 큰 나라 중국과 작은 나라 대만의 대립을 넘어 전 세계 ‘자유주의 대(對) 전체주의’의 대결로 재해석되고
차이 총통의 결단은 대중(對中) 무역 의존도가 40%가 넘고 직선 최단거리 130km 남짓한 대만의 특성상, 불굴의 용기와 뱃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중국이 반복적으로 가하는 실질적 군사 위협과 경제 보복, 인신 공격에도 그녀는 요지부동이다.
차이 총통의 외골수 ‘반중 노선’으로 양안 관계는 외관상 최악이다. 그러나 중국은 대만산 제품 수입 규모를 매년 더 늘려오고 있다. 대만산 첨단 반도체와 전자(電子) 부품, 중간재 등은 중국이 안 사고는 못 배기는 ‘꼭 필요한 제품’이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인권을 보검(寶劍) 삼아 세계 ‘자유주의 국제연대 동맹’의 핵심 축(軸)이자, 반중 전선(反中戰線)의 최선봉에 선 대만에 서방 국가들은 일제히 정치·경제·외교적 지원으로 화답(和答)하고 있다.
미국은 대만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추진 중이고, 유럽연합(EU) 의회는 올 10월 대만과의 관계 강화 결의안을 압도적 찬성표로 통과시켰다. 미국, 일본과의 ‘반도체 및 IT 3각 동맹’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어정쩡한 ‘중국 눈치보기’가 아닌 ‘확실한 반중’이 경제 활성화의 기폭제이자, 지렛대가 되고 있는 셈이다.
대만 경제의 장기 호황은 세계 최고의 시스템 반도체 생산 기지로 탈바꿈한 자체 혁신에다, 서방 민주진영이 대만을 글로벌 공급망의 중핵(中核)으로 삼고 밀어주면서 더 장기화할 전망이다.
차이 총통은 1984년부터 매년 벌이는 한광(漢光) 군사 훈련의 실시 기간을 올해부터 기존 5일에서 13일로 늘렸다. 미국과는 최근 2년간 380여개의 군사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골리앗 중국’에 맞서서 자주 국방과 동맹 강화를 동시에 주력하는 것이다
③私心없는 人事와 정치적 결단력
만 48세이던 2004년 정치에 입문한 차이 총통은 항상 단발머리 차림이며, 지금까지 한 번도 본인과 측근이 부패 스캔들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통찰력과 결단력도 갖추어 현지에선 ‘라타이메이(辣台妹·대만의 매운 언니)’로 불린다.
정실(情實)을 떠나 실력과 전문성 위주 인사로 국정(國政)을 쇄신한 게 대표적이다. 그는 정치 경력과 공직 경험이 전무한 ‘화이트 해커’ 출신의 오드리 탕을 디지털장관으로 임명해 2016년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 오드리 탕은 대만 역사상 사상 초유의 최연소(당시 35세)·최저 학력(중학교 중퇴)·최초 트렌스젠더(남성에서 여성으로) 장관이다.
2017년 2월 차이 총통이 발탁한 천스중(陳時中) 위생복리부 장관도 마찬가지다. 치과의사 출신으로 첫 장관인 그는 역대 위생부 장관 중 최장기간 재임 중이다. 뿐 만 아니다. 젊은 디지털 세대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대만의 모든 장관은 지금 35세 이하 청년 멘토를 2명 두고 있다.
무사(無私)하고 시대감각에 맞는 인사(人事)로 대만은 코로나 방역 세계 최고 모범국이자 디지털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이달 27일까지 대만에서 발생한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1만6931명, 총사망자는 850명으로 한국(61만 5532명 확진, 5346명 사망) 대비 각각 3%, 16%에 불과하다.
차이 총통은 여론조사에서 불리한 미국산(産) 락토파민 함유 돼지고기 수입 허용을 포함한 네 개 안건을 국민투표에 올리는 승부수를 띠워, 이달 18일 투표에서 예상을 깨고 모두 압승을 거뒀다. 그래서 정치적 결단력과 감각이 남다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2012년 총통 선거에서 마잉주 당시 총통에 패배하는 아픔도 겪었다. 직후 차이잉원은 샤오잉기금회(小英基金會)를 세우고 ‘상상논단(想想論壇)’이라는 온라인 포럼으로 국민들과 밑바닥에서부터 소통했다. 4년 동안 정치 의지(意志)와 신념을 담금질한 다음 2016년 오뚝이처럼 재기했다.
“自由가 북극성”...우리는 언제 세계적 정치인 갖나?
그는 자서전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원하는가
(원제 點亮臺灣的這一哩路)·2015년>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치란 인내심을 갖고 뚫리지 않을 것 같은 두꺼운 널빤지를 뚫는 것처럼 서서히 성실하고 정확하게 꿈을 이뤄내는 일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나의 기풍(氣風)이다.”
테드 크루즈(Ted Cruz) 미국 연방상원의원은 작년 10월 ‘타임’지에서 “비관론자들은 고립된 소국(小國) 대만이 중국의 야심에 맞설 수 없다고 했지만, 이 작은 여성은 중국에 기죽거나 겁먹지 않고 맞섰다. 차이잉원의 북극성(North Star·선택과 결정 기준)은 자유(freedom)”라고 말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1456km 떨어진 대만은 명품 리더십으로 이렇게 전 세계에 감동의 물결을 낳고 있는데,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
한국 정치권에선 무책임한 포퓰리즘 공약과 말 바꾸기 같은 구(舊)시대적 행태만 돋보인다.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 윤석열·이재명.안철수 후보들도 차이잉원의 ‘명품 리더십’에 주목해야 한다.
600년 전 태종 이방원(1367~1422년)은 봉건 조선의 왕이고, 차이 총통은 민국(民國)시대의 살아있는 정치 교본(敎本)이다.
그는 미·중(美中) 대결과 디지털, 팬데믹이란 3대(大) 글로벌 난제 해결 방법을 온 몸으로 보여주며 쾌주(快走)하고 있다.
이제 곧 새 지도자를 맞는다. 우리도 차이잉원을 능가하거나 최소한 버금가는 세계적 정치인(global politician)을 갖고 싶다.
옮긴 글
첫댓글 청와대 유래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