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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25일(주일) 주일설교 마태복음 12:46~50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 새찬송가 549장 내주여 뜻대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한국의 가정은 해체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국민일보의 [가정 해체의 위기, 어찌할까나] 라는 기고를 보니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코로나19 장기화와 경제적 이유 등의 영향으로 위기가정이 급증하고 있으며, 가족해체의 대표적인 원인은 이혼율의 증가라고 봅니다. 또한 고용과 소득 불안정 등 경제적 문제가 가족해체를 심화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양육 부담 등으로 저출산 현상이 이어지고, 극심한 취업 경쟁으로 결혼 연령이 높아지는 만혼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경제적 부담으로 인해 결혼을 피하는 청년층이 증가하며 혼인율도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제 ‘1인’ ‘홀로’의 시대를 맞았고 지금은 ‘혼밥’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혼자 밥을 먹는다’는 혼밥은 그리 즐겁거나 낭만적인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밥이 고독과 단절의 슬픈 상징이자 시대상을 묘사하는 단어가 되고 있고 이에 따라 급격한 가정의 해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나라 출산율이 현재 0.84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먼저 소멸할 국가로 대한민국이 꼽히고 있는 현실에서 기존의 가족들의 해체가 걱정되는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관 변화는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 사항으로 여겨지고, 자녀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인식도 줄어들고, 기존 가정들도 부부의 성격차를 이유로 쉽게 별거하거나 이혼하는 현실입니다. 별거, 이혼, 졸혼 이라는 이름으로 가족 결속력이 심각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또한 이제 우리나라는 ‘초고령 사회’에 접어 들었습니다. 초고령사회는 인구 5명 중 1명 이상이 65세 이상이라는 의미인데요, 이제 노년의 삶은 공통 관심사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롭고 현명한 부모가 되어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해야 합니다. 플라톤은 한 가정의 두 기둥을 남편과 아내로 비유했는데요, 아이들은 부모 사이에 맺어진 사닥다리를 타고 자라는데 그 사닥다리가 사랑의 끈으로 묶여져 있으면 아이들은 안정감 있게 자라나고, 사닥다리가 흔들리면 아이들도 불안정하게 자란다는 것입니다. 결국 부부의 안정된 삶이,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삶의 그림을 그리게 하고 서로 사랑하는 법을 올바르게 배우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산을 받은 자녀는 온전한 가능성의 그릇을 마음껏 활용하면서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플라톤은 주장했습니다. 가정은 언어를 배우고, 생활을 배우고, 모든 것을 배우는 현장의 학습이기 때문에 매일 반복되는 학습의 기회가 아름다운 교훈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픔으로, 고통의 날들로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정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아내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한 가정은 거룩하고 영화스럽고 소중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50절에서 또 하나의 가족을 말씀하고 있는데요. 5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작년 9월 26일에 사랑의 교회에서 개최한 ‘한국교회 섬김의 날’에 저희 목회자 부부가 참석했는데요. 그 때 사랑의 교회를 소개하는 한 프로그램에서 교회 교인들을 ‘영가족’이라고 부르더라구요. 우리는 ‘영가족’입니다. 참으로 생소한 개념이었는데요. 그 의미를 세 가지로 말씀해주셨습니다. 영가족은 1. 영적인 가족 2. 영원한 가족 3. 영광과 고난을 함께 하는 가족이라는 의미더군요. 그리고 매 예배 시간마다 고백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도 함께 고백해볼까요? “우리는 영가족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아시는 영가족 즉, 예수님의 가족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 되려면 첫째,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영접해야 합니다(요 3:16). 오늘 이 시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이런 자부심과 긍지를 갖는 이유는 자신들이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고 또 현재 별문제 없이 건강하게 잘 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사람이 이 땅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고 있다 할지라도, 또한 그가 아무리 인격적으로 사회적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살고 있다 할지라도, 죄 아래 있는 모든 인간은 결국 ‘절망’이요, ‘불행’이라고 말씀 합니다. 그 불행한 확실한 증거가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그 죽음은 지위 고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나이에 상관이 없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버립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그랬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피조물 중 가장 아름답게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불순종하므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에서 허덕이며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죄인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과의 언약을 어기고 죄로 가득한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사 인간들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래서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할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여기서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벌써 심판을 받았다는 말씀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은 영원한 절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옥행 열차’ 안에 있다는 말로 재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늘도 하나님 없이 자기 자신과 가정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이것이 영원한 사망을 향해 달려가는 ‘지옥행 열차’를 타고 있다는 그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지옥행 열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무리 그 안에서 남을 돕고 섬기며 착하고 선한 일을 해도, 또 성공을 해서 그 객차를 수백 개를 사서 자기 혼자 넉넉하게 즐기며 간다 해도, 또한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고 산다 해도, 그가 무엇을 하든지 그 열차는 오늘도 여전히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이 세상 모든 인간의 운명은 싫든 좋든, 그것을 인정을 하든 안 하든 이미 지옥을 향해 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영원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우리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을 통해 천국행 “구원열차”를 보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았든지 묻지 않으시고, 그 누구든지 내 아들의 천국행 “구원열차”로 바꾸어 타라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예전 주일학교 다닐 때 많이 불렀던 찬양이지요 [구원열차] “나는 구원열차 올라 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 죄악역 벗어나 달려가다가 다시 내리지 않죠 차표 필요 없어요 주님 차장 되시니 나는 염려 없어요 나는 구원 열차 올라 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 이제 이 땅을 사는 모든 인생은 이 구원 열차로 바꾸어 타야 합니다. 아직 구원열차로 바꾸어 타지 않았다면 열차가 종점에 도착하기 전 바꾸어 타셔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으로의 초청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았던 주인의 자리를 예수님께 양도해 드리고, 예수님을 내 인생에 주인으로 바꾸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구원열차의 기관사이신 주님은 우리를 안전하게 천국까지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적용) 나는 구원열차에 올라타고 내 인생의 주인되신 예수님을 기관장으로 모시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지옥행 열차에 타고 가면서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둘째,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 되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50절).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구절로는 마태복음 7:21-23의 말씀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행 2:21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했고, 좀 전에 읽은 마태복음 7:21에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 라고 했는데, 행 2:21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고, 마 7:21에서는 ‘주여 주여’ 하더라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즉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7:21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면서, 핵심은 아버지 뜻대로, 즉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주여 주여’하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주의 이름을 불러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서로 상반된 말씀인가요? 아니면 ‘구원받은 것’과 ‘하나님 나라(천국)에 들어가는 것’과는 서로 다른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 믿고 구원받고 난 이후에,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 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인가요? 이는 상반된 말씀도 아니고, 천국 가는 것이 구원받은 것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길거리에서 구걸하던 걸인이, 그곳을 지나가던 예수님에게 ‘주여 주여’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그 걸인이 예수님에게 ‘주여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라고 간절히 부르짖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걸인이 예수님을 향해 ‘주여’라고 부르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단지 한 푼을 주님께 얻어 내기 위해서 부르는 호칭에 불과하지요. 그러므로 ‘주여’를 부르는 데, 그 ‘주(主)’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주’는 일반적으로 신하가 임금을 부를 때, 혹은 제자가 스승을 부를 때에 사용하는 호칭이지만, 대개는 ‘종’이 ‘주인’을 부르 때 사용하는 호칭입니다. 그래서 ‘주’라고 부를 때에는, ‘나는 당신의 종이고, 당신은 나의 주인이십니다’는 고백이 되는 것이죠. 일반적으로 ‘종’은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살지 않고, 오직 주인의 생각과 계획대로 살아갑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를 때에는,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며, 나는 예수님의 종입니다’는 고백입니다. 하지만 걸인이 몇푼 도움받기 위해서 ‘주여 주여’라고 부를 때에는, ‘당신의 나의 주인입니다’는 고백이 아니라, ‘제발 저 좀 조금만 도와주세요’라는 의미입니다. ‘주여 주여’ 부를 때,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심을 고백하며 주님을 부르는 것과, 나의 어떤 목적을 가지고 또는 무엇인가 해결 받기 위하여 ‘주여 주여’ 부르는 경우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며, 나는 당신의 뜻대로만 행하는 종입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이 없이, 오직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주여 주여’ 부른다면, 그러한 사람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마 7:23)’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라는 고백 없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찾는 것이라면, 선지자 노릇하여도, 즉 선지자 역할을 잘 감당하여도, 즉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도,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마 7:22). 주님을 부를 때에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십니다’는 고백 속에서 도우심을 요청하는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내 삶의 주인은 나인데,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도우심을 요청하는 것인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한 믿음의 사람, 로마의 백부장이나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간절함’의 표현이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신하의 질병이 낫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나안 여인은 딸에게 있는 귀신을 물리쳐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간절함’ 속에는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다’는 고백이 강하게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 백부장의 고백입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 8:8,9)’ 가나안 여인의 고백입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 결국 오늘 50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은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아 천국,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잘 듣고 이해하고 이를 전심으로 순종하는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를 말합니다. 그러한 자가 진정한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는데, 사랑의 교회에서는 ‘온전한 제자들 헌장’(사랑의 교회)이 있어서 이렇게 제자를 정의합니다.
우리는 땅끝까지 이 세상 끝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들이다.
1. 온전한 제자는 예수님의 온전한 희생에 감사하며, 예수님처럼 되고, 예수님처럼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을 지닌 성도를 말한다.
2. 온전한 제자의 태도는 육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령님의 권능을 의존하여, 1) 가치관을 바꾸고 2) 자아를 깨뜨려 감정을 치유하고 3) 사랑의 관계를 통해 복음적 삶의 열매 맺는 일에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것이다.
3. 온전한 제자의 삶에는 ‘회색지대’가 없다. 삶의 전 영역에서 온전한 제자로 살든지 아니든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영가족이다. 영적 가족, 영원한 가족, 영광과 고난을 함께할 가족이다. 아멘.
적용) 나는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듣고 이해하고 순종합니까? 아니면 나는 하나님 말씀에 무관심하고 나의 필요에만 관심을 가집니까?
셋째,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 되려면 가족우상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46~48절).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실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 서서 예수님을 부르려고 합니다. 나의 부모와 형제라도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구원의 일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관심한채 혈연관계에 집착하여 가족의 성공만을 바라는 가족우상주의로는 하나님 나라의 가족에 속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실 때 ‘네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떠남이 없이는 새로운 문화, 새로운 가치체계, 또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 떠남은 쉽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도 당신들의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누가복음 14장 26절에 보시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나 자매나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부모, 처자, 형제, 자매, 목숨이지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받은 가장 중요한 선물이 바로 우리의 부모, 처자, 형제 그리고 자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의 목숨이 없이는 우리들은 존재조차 할 수 없기에 생명이 소중합니다. 이것은 다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 소중한 선물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그 부모는 우리의 부모가 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내 사랑하는 아내, 남편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자식들, 우리의 형제와 자매 역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내 목숨, 하나 밖에 없는 목숨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그것들을 주신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에 몰두한 나머지 그 선물을 주신 그 분을 망각하기 시작할 때 그 선물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선물이 우상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우상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우상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드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질 않게 되죠.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다가설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방해가 됩니다. 물론 우리는 내 부모, 자식, 처자, 형제를 돌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마땅한 것입니다.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다 하면 그것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데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와서 말씀 전하는 것을 방해하도록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하게 배제하셨습니다. 무리에게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일이 소중하기에 그것에 집중하셨습니다. 다시 주제를 아브라함으로 돌아가면 나이가 백세가 되어서 얻은 독자 아들 이삭,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기막힌 아들입니까? 아브라함은 아들을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이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아들을 받은 후 아브라함은 얼마나 흥분했을까요? 이삭을 볼 때마다 아브라함은 가슴이 뛰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기적의 선물,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이 점점 이삭에게 몰두해 가면서 서서히 이삭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망각해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서서히 이삭이 아브라함의 삶에서 우상이 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보신 하나님이 어느 날, 이 우상을 헐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나에게 바칠 수 있느냐?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나에게 바칠 수 있느냐?”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나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야 아브라함은 비로소 ‘아~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가져 가시는구나’ 아마 이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몇일 고민한 후 아브라함은 아마도 욥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니 제가 하나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드디어 제단에 올려놓고 칼로 내리치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막으시고 이제 네 마음을 알았다. 네 아들을 바치지 않아도 돼~ 라고 급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어린 양 제물을 이미 준비해 놓았단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지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도록 만든 사건이 바로 아브라함에게서 가족우상주의를 깨뜨리려하시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나의 부모나 처자나 자매가 소중하다고 느낄수록 이것들을 주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께 시선을 맞추어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살 때 이 소중한 존재들도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깨달음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가족우상주의의 본질’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가족우상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독교는 ‘가족무시주의’도 또한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아버지 데라도 데리고 나왔고, 조카 롯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이해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가족이라는 시스템을 존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면서 가상 칠언중 세 번째로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는 보시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슬픔이 봇물처럼 터져나가는 어머니 마리아를 향한 아들 예수의 자애로운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육적인 가족을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 되도록 초청하는 것이 부모와 형제에게 세상에서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요, 효도요, 우애입니다. 사도행전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적용) 내가 지금 깨뜨려야 할 가족우상주의는 무엇입니까? 내가 가족에게 바라는 것은 세상 성공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까? 내 육적 가족을 어떻게 예수님의 가족으로 초청하겠습니까?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정과 교회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 구원받은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가정이 육적인 가정에서 영적인 가정으로 승화되기를 소원하며, 우리 수정교회가 진정한 예수님의 가족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눈은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며 구원열차에 올라타고 믿음의 길을 가는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영가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