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봉(李玉峰)/우리나라 대표적 사랑의 시인
옥봉(玉峰)의 이름은 원(媛). 옥봉은 그녀의 호이다. 일반적으로 이옥봉이라 부른다.
옥봉은 조선 선조(宣組)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후손으로 충북 옥천군수를 지냈던 이봉(李逢)의 서녀였었다.
비록 서녀였지만 옹손으로서 그녀의 가계는 당당했고 또 지위도 높았다.
옥봉는 출가했다가 일찍 남편을 여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번 결혼했던 여성은 재혼할 수 없었다. 왕손이라도 불가능했다.
여성이 재혼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며 재혼하게 되면 파문을 당하고 파멸은 면치 못했다.
그래서 왕손이었던 옥봉도 재혼은 불가능했다. 그녀가 서녀 출신이어도 양반의 후손 아닌 왕손이었으므로 더욱 그랬다.
옥봉는 수절하면서 고독을 달랬다. 그녀는 다행이 시문(詩文)에 능했기 때문에 시를 짓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옥봉의 시는 또 재기발랄한 풍류를 갖추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녀의 시가 우연히 승지벼슬까지
하게 된 조원(趙瑗)에게 알려졌다. 조원은 시로써 그녀를 존경하게 되었다.
옥봉에게 조원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자연히 왔다. 그때 조원의 늠름한 모습에 반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생겼다.
홀로 되어있던 옥봉은 체면불구하고 조원에게 부실(副室·첩)이 되기를 청했다. 그러나 선비의 법도에 철저했던 조원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옥봉과 조원의 사랑과 풍류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옥봉과 조원의 사랑은 맺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극적으로 사랑은 맺어졌다. 조원의 장인 사위에게 옥봉을 부실로 맞아들이도록 한 것이다. 옥봉과 조원의 사랑은
조선시대에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옥봉이 강원도에서 출생한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삼처과 영월과는 출생관계의 연고가 없는데도 강원의 여성으로
알려지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한때 삼척에서 살았다는 것이 그것이며 다른 하나는
삼척과 영월에 대한 시문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옥봉을 부실로 맞아들였던 조원은 호를 운강(雲江)이라 했다.
선조6년(1575) 정언(正言) 벼슬에 있던 그는 당쟁의 폐해를 상소하고 파당을 짓는 자들을 벌주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선조16녀(1538년) 삼척부사를 지냈고 후에 승지까지 올랐다. 삼척부사로 조원이 부임했을 때 옥봉은
그를 따라와 삼척부중에서 살았다. 그래서 삼척부사의 부실이었던 그녀가 삼척부기(三陟府妓)로 와전되었던 것이다.
삼척부기로 알려진 것은 몰론 영월 여성으로서 알려진 것도 와전된 것이었다.

조선시대 여류시인 이옥봉(李玉峯)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은<성소부부고>의 <학산초담>에서 "나의 누님 난설헌과 같은 시기에
이옥봉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조백옥(趙伯玉)의 첩이다.
그녀의 시 역시 기상이 맑고 굳게 분가루의 자태가 없다"라고 높였다. 그러면서 영월로 가는 도중
지은 시를 인용했다. "광동 길은 오일이요 영월길은 삼일인데/ 노릉 구름에 슬픈 노래 애를 끓네/
첩의 몸도 왕손의 여식이라/ 이곳의 두견 소리는 차마 듣지 못하겠구나. 노릉은 단종의 무덤인데,
단종이 영월로 쫓겨와 자귀(두견)의 울음을 듣고 "네 슬피 우는 소리 내 듣기 괴롭구나"라고 읊은
것을 감정이입한 시다.
이옥봉의 부친 이봉(李逢)의 본관이 완산(完山:전주)이기에 '왕손의 여식'이라고 쓴 것이지만
그녀는 서녀(庶女)였다. 그래서 옥봉은 백옥(伯玉)이란 자를 쓰는 운강(雲江) 조원(趙援)의
첩으로 들어갔다.
빼어난 재주를 가지고 남의 첩으로 들어간 인생이 산산하지 않을 수 없다.<규방의 정>이란 시가
그런 처지를 말해주고 있다. "약속했던 낭군 어찌 그리 늦는지요/ 뜰 앞의 매화가 시들려고 합니다
/ 갑자기 가지 위에서 까치소리 들리니/부질없이 거울 앞에서 눈썹을 그려봅니다.)
이별의 밤을 노래하는 <이별의 한(別恨)이란 시도 마찬가지다. "내일 밤이야 비록 짧고 짧더라도
/오늘 밤만은 기나기길 원했지만/ 닭소리 들리고 날이 밝으니/ 두 뺨엔 눈물만 흐르네).
이옥봉 외에도 서익의 소실 등 많은 재능 있는 여성들이 신분제의 족쇄에 눈물 어린 삶을 살았다.
신분제란 족쇄에 여성이란 족쇄가 덧씌워진 삶이 서녀의 삶이었다. 조원의 고손자인 조정만
(趙正萬)이 남긴 <이옥봉 행적(行蹟)>에는 에피소드가 한편 실려 있다.
조원이 관직을 그만두었을 때 책력을 달라는 편지가 왔다. 조원이 없는 것을 어찌 주느냐면서
옥봉에게 답장을 쓰게 하자 "어찌 남산의 승려에게 빗을 빌려달라고는 안 하시오? 라고 썼다.
그러나 이옥봉의 인생은 엉뚱한 사건에 휘말려 일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웃집에 사는
백성이 소를 훔쳤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는데, 그 부인이 옥봉에게 소장(訴狀)을 써달라고 부탁
했다.
이옥봉은 소장 끝에 자신의 자작시를 덧붙였는데 "세수할 때 물동이를 거울로 쓰고/ 머리 빗을 땐
물을 기름으로 쓰지요/ 첩의 몸이 직녀가 아닌데/ 낭군이 어찌 견우리요.
거울과 기름이 없이 가난하게 살지만 '견우(牽牛:소 끄는 사내)'가 아닌 남편이 어찌 소를 훔쳤겠
느냐는 항변이었다. 덕분에 이웃집 남편은 석방되었지만 조원은 "함부로 시를 써주어 나라의
옥사를 풀어주고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는 이유로 내쫓았다. 조원의 이런 행위는
당시에도 문제가 되었던 듯 고손자 조정만은<이옥봉 행적>에서 세상 사람들이 옥봉을 받아들
이는 것이 군자다운 포용력이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조원은 재주가 덕보다 승한 것을 미워했을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누명을 쓴 백성을 풀려나게 한 것 자체가 덕이다. 그나마 조원의 아들
조희일이 이옥봉의 시를 모은<가림세고(嘉林世稿)>를 편찬한 것이 그녀 인생의 위안이라고
위안일 것것이다.
글. 이덕일 한가람 역사문화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