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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 명예교수의 '節祀' 논문을 한국인성예절교육원 카페에서 옮겨 보냅니다.
참고하시고, 추석 잘 쉬시기 바랍니다. 조기완 교수님 보내주신 메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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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절사(節祀)
1 머리말
설이나 추석 명절이 되면 우리나라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다. 秋夕에 지내는 제사(祭祀)는 절사(節祀)라고 하여 名節에 지내는 제사를 말하며, 차례(茶禮), 차사라 하기도 한다, 이러한 조상에 대한 제사는 수천 년 전부터 미풍양속(美風良俗)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래서 이 명절이 가까와 오면 신문(新聞)사나 방송국(放送局)에서는 차례에 대한 의미, 절차, 방법 등에 대해 반드시 언급(言及)하여 왔다.
그런데 우리나라 고유(固有)의 예절(禮節)이 일제식민지 통치 (日帝植民 統治)에 의해 파괴(破壞),말살(抹殺)된 후, 아직까지 그 예절을 회복(回復) 소생(蘇生)시키지 못했으므로, 이것을 옳게 이해하고 아는 이가 매우 드물다. 그러므로 통일(統一)된 예절(禮節)이 없이, 집집마다 제각기 다르고, 또, 무질서(無秩序)하게 행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더구나 오랫동안 정부(政府)의 일관성(一貫性) 없는 정책(政策) 때문에 아직도 신정(新正)을 설로 하느냐 구정(舊正)을 설로 하느냐 하는 문제가 국민들의 머리속에 확실히 정착(定着)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국민들 대부분이 음력(陰曆) 정월 초하루가 옳은 설인 것으로만 여겨오면서 그럭저럭 수십 년을 지내왔다.
이에 따라 음력(陰曆) 8월 보름인 추석은 아무런 이의(異議)가 없이 당연(當然)히 년 중 큰 명절로서 자리를 굳혀 오고 있으며,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명절제사를 답습(踏襲)해 왔다. 그러나 일부 젊은이들, 특히 여성 쪽에서는 힘들고 귀찮다는 생각을 점점 굳게 하면서 기피(忌避)와 거부감(拒否感)마저 가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현실임과 동시에 그 의미와 절차와 형식 등을 근본적으로 재검토(再檢討)하여야 하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에, 그 방법과 절차를 살펴보고, 몇 가지 문제점과 시정(是正)할 점을 제시(提示)하여 본다.
2 추석 절사(秋夕節祀 茶禮)
1) 신주(神主)와 지방(紙榜)과 신위(神位)
신주(神主)나 지방(紙榜)은 북쪽에 남향(南向)으로 모신다. 방안의 구조(構造)가 부적당(不適當)하여 실제 방향과 다르더라도 신주나 지방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한 것으로 본다.
신위(神位)에는 밤나무로 만든 신주(神主)를 모신다. 옛날에는 소상(塑像)으로 했을 때도 있었으나, 후대에 와서 소상제도는 폐지(廢止)된 듯하다.
신주는 제상 위에 모시지 않고 따로 교의(交椅)를 마련하여 모신다.
신주(神主)가 없으면 지방(紙榜)으로 대신한다. 이 신주나 지방에 조상 신이 와 계신다고 생각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지방은 제사가 끝나면 불에 태워 버린다.
지방은 아래와 같이 써 왔다.
고조부(高祖父) : 현고조고처사부군신위(顯高祖考處士府君神位), 현고조고학생부군신위
고조모(高祖母) : 현고조비유인김해김씨신위(顯高祖妣孺人金海金氏神位), 현고조모밀양박씨신위조부모(祖父母) : 현조고서기관청송부군신위(顯祖考書記官靑松郡守府君神位)
현조비영천고등학교교장밀양박씨신위(顯祖妣永川高等學校長密陽朴氏神位)
부모(父母) : 현고동국무역주식회사사장부군신위(顯考東國貿易株式會社長府君神位)
현비대구여성유도회장오천정씨신위(顯妣大邱女性儒道會長烏川鄭氏神位)
현(顯)字는 ‘훌륭한’ ‘빛나는’의 뜻이고, 고(考)는 돌아가신 아버지, 비(妣)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뜻이다. 학생(學生)이란 말과 처사(處士)라는 말은 모두 벼슬하지 않은 선비의 뜻인데, 대개 가문(家門)의 전통(傳統)에 따라 달리 쓰는 것이다. 일제시대(日帝時代)에 한 벼슬은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大韓民國이 수립(樹立)된 후, 현재까지의 직함(職銜)을 쓰는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한문(漢文)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어려운 한문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한글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쉬운 한글 지방(紙榜)을 연구 창안(硏究 創案)해 내는 것도 생각해야 할 일이며, 앞으로의 중요한 과제(課題)이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며, 또 가르치면 어렵지 않게 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지방(紙榜)은 일정(一定)한 규격(規格)이 없지만 대략 신주(神主)와 같게 하거나 조금 크게 하면 된다. 신주의 모양은 위가 둥글고 아래는 모나지만 지방은 위를 둥글게 하지 않고 사각형(四角形)그대로 둔다. 받침을 제거(除外)하고 높이는 대략 23 센치미터 정도이고 가로 6.5 센치미터 정도이다.
절사(節祀)를 지낼 때는 평소에 기제사(忌祭祀)를 지내는 조상(祖上)은 모두 함께 모신다. 그러므로 불천위(不遷位)를 모시고 있는 집에서는 최대한(最大限) 오대(五代)까지가 될 수 있다. 五代를 모시면 고비위(考妣位)를 합해 최소한 10位이다. 부인(婦人)이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럿일 수도 있으므로 10위 이상일 수도 있다. 맏집이 아니고 기차(其次)인 경우에는 증조부모(曾祖父母)부터, 또는 조부모(祖父母)부터 지내거나, 아버지와 어머니, 두 位만 지내는 집도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진은 옛날에 쓰지 않았다. 없어서 쓰지 않은 것이 아니다. 화공(畵工)이 그린 초상(肖像)이 많이 있었지만, 쓰지 않은 까닭은 ‘우리 할아버지의 본 모습이 아니라’는 이유, 또는 죽은 이의 얼굴을 똑 바로 쳐다보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라 하는데, 확실(確實)하지는 않다. 불천위(不遷位)나 高祖父, 曾祖父, 祖父의 사진이 남아 있기가 어려운 점도 있지만 있다 하더라도 신위(神位)에 모시지는 않았다.
2) 제상(祭床)의 설치(設置)
불천위(不遷位)가 있고, 高祖父母, 曾祖父母, 祖父母, 父母 등 5대 봉사(奉祀)를 하는 종가(宗家)이면, 대수(代數)에 따라 고위(考位)와 비위(妣位)를 합설(合設)하되, 각각 따로 제상(祭床)을 설치(設置)해야 하므로 다섯 개의 제상(祭床)이 필요하게 된다. 제상(祭床)은 병풍(屛風)을 친 다음에 윗대부터 서쪽에서 동쪽으로 제상을 차례대로 놓는다.
조부모와 부모만 봉사(奉事)하는 경우는 두 개의 제상, 또는 하나의 큰 제상을 조부모 상(祖父母 床)과 부모 상(父母 床)으로 구분(區分)해서 차리면 될 것이고 부모만 봉사하는 집에서는 물론 한 상만 차리면 될 것이다.
부자간(父子間)이나 고부간(舅婦間)을 한 상에 차리는 것은 예의(禮儀)가 아니다. 지금 사람들이 민주적이라 해서,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밥을 한 상에 차려 놓고 먹는 경우가 있지만, 마음이 불편하고 거북한 점이 더 많은 것이다. 더구나 뷔폐식이라고 해서 음식을 종류별로 다른 그릇에 담지 않고, 모두 한 그릇에 담아 여러 代 조상을 함께 모시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예절(禮節)이란 절도(節度)에 맞는 질서(秩序)이다. 몸이 편하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몸이 편한 것보다는 마음이 편하고 즐거워야 하는 것이다. 몸의 편함을 위해 질서(秩序)를 파괴(破壞)시키면 마음이 편하고 즐거울 수가 없는 것이다. 옛 사람들은 예(禮)를 중시(重視)하여 마음이 서로 편하도록 한 것이다. 현대의 우리들도 이를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3) 제수(祭需)의 마련
제수(祭需)는 아주 간소하게 마련하는 것이다. 그래서 검소절약(儉素節約) 정신을 살려야 한다. 신정(新正 설) 차례에 떡국, 육적(肉炙고기적), 어적(魚炙생선적), 소적(蔬炙 두부 및 채소적), 전(煎), 탕(湯),포(脯), 나박김치, 나물류, 간장, 식혜, 과일, 닭, 시루떡 등을 들고 있는데, 이렇게 여러 가지를 다 각 위마다 마련하여 차릴 수는 없는 것이다.
설 차사에는 떡국을 주로 하고, 그밖에 약간의 실과와 고기 나물 등을 쓰면 되는 것이고, 추석(秋夕) 차사에는 햇 쌀밥과 송편을 주로 하며, 나물과 고기 등을 추가한다. 추석 차사에는 밥이 있기 때문에 국이 있어야 하고 따라서 밥반찬이 따르게 마련이다. 밥을 놓지 않으면 반찬이 필요 없는 것이다.
칠석(七夕) 차사에는 국수와 여름 실과인 참외 수박을 주로 하고, 동지(冬至) 차사에는 팥죽과 몇 가지 실과 및 고기 나물 등을 주로 쓴다. 이것이 시식(時食) 인 것이다. 제사(祭祀)에 반드시 무슨 음식을 꼭 써야 한다는 법은 없다. 제사 지낼 그 시절(時節)에 생산되는 일반적인 음식물을 깨끗하게 마련하여 쓰면 되는 것이다. 시루떡을 쓸 수도 있지만 차례에 일부러 시루떡을 쓸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옛날에는 바다와 먼 곳에서 생선을 쓰기 어려웠으므로 포(脯 말린 고기)를 쓸 수밖에 없었고, 여름철에는 곶감과 밤 대추 등을 구할 수 없으므로, 참외나 수박을 주로 썼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기를 반드시 써야 하는 것이 아니며, 상어 토막고기가 꼭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옛 제도(制度)에는 삼탕(三湯)은 대부이상(大夫 以上)이라야 쓸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일반인은 湯 한 가지만 쓰거나, 없을 수도 있었다. 벼슬에 따라 차등(差等)을 둔 것은 사치(奢侈)와 낭비(浪費)를 피하고 검소(儉素)하게 하라는 뜻이다.
차례에는 탕(湯)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물 삼색(三色)을 마련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두 가지 정도면 충분하다. 반드시 三色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 육, 적(魚 肉 炙)과 함께 곁들여 한 접시에 쓸 수도 있다. 각각 다른 접시에 담으면 좋겠지만 접시가 많으면 제상이 비좁아서 다 놓을 수가 없게 된다. 제상(祭床)을 작게 한 것과 제기(祭器) 접시가 작은 것은 가난하고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검소(儉素)하고 절약(節約)하는 정신(精神)을 살리라는 것이다.
차사에 실과(實果)는 모두 합하여 한 접시나 두 접시에 담는다. 실과(實果)가 흔하니까 여러 가지를 마련할 수는 있지만, 여러 가지를 여러 位에 모두 다 차리기는 어렵고 번거로우므로, 당시에 생산 되는 것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마련하여 간소(簡素)하게 차리는 것이 좋겠다.
사과나 배 감 밀감 같이 껍질이 있는 것은 반드시 깎아서 슨다. 아래위만 조금씩 깎거나, 위쪽만 도려내는 것은 옳지 않다. 부모, 조상께 드리는 음식을 껍질 채로 드리는 것은 자손의 도리라고 할 수 없다. 그냥 드실 수 있도록 깍든가 썰어서 드리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4) 제수(祭需)의 진설(陳設)
제수(祭需)는 가급적 굽이 달린 접시나 받침이 있는 것을 사용한다. 같은 종류의 음식은 한 접시에 괴어서 접시 수를 줄인다. 굽이 없는 쟁반에 여러 가지 음식을 각각 나열(羅列)하면 제상이 비좁아서 차릴 수 없다. 제상(祭床)과 접시가 작은 것은 가난해서가 아니라 검소하고 절약하는 유가의 근본정신을 나타낸 것이다. 조상(祖上)의 은혜에 보답(報答)하려는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이 깃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제기에 담을 때는 정성 들여 그릇에 따라 둥글게, 또는 네모나게 정열(整列)하여 괸다. 반드시 여러 불 많이 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결(淨潔)하고 깔끔하게 해야 한다.
제수(祭需)를 진설(陳設)하는 데는 여러 가지 설이 많다. 대제(大祭)나 기제사(忌祭祀)의 경우는 제수가 조금 많으므로 진설이 복잡하지만 차례의 경우는 간단하다. 진설(陳設)은 지방(地方)에 따라 문중(門中)이나 가정(家庭)에 따라 다르다. 4열 또는 5열로 놓는 것으로 알지만 차례는 차린 음식이 많지 않으므로, 3렬 정도가 알맞을 것이다.
고기는 보통 이서위상(以尾爲上)이라 해서 꼬리를 서쪽으로 놓는다. 어동육서(魚東肉西)라 해서 생선은 동쪽에, 고기는 서쪽으로 놓는다. 좌포우혜(左脯右醢) 또는 서포우혜(西脯東醢)라 해서 포는 왼쪽에 젓갈은 오른 쪽에 놓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음식물을 어느 곳에 놓아야 꼭 옳다는 규정(規定)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조율이시(棗栗梨柿 대추 밤 배 감), 홍동백서(紅東白西 붉은 것은 동쪽에, 흰 것은 서쪽에), 조동율서(棗東栗西 대추는 동쪽에, 밤은 서쪽에)의 원칙(原則)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영남지방(嶺南 地方)의 남인계통(南人 系統) 사람들은 조율이시(棗栗梨柿)를 주로 해 왔고, 기호지방(畿湖 地方)의 노론계통(老論 系統 )사람들은 홍동백서(紅東白西)를 주로 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이렇게 해야 된다고 고집(固執)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가장 간단한 추석 절사(秋夕節祀)의 제수(祭需)와 진설을 아래 표로 보인다. 이 표는 한 代의 고비위(考妣位)를 한 상(床)에 차린 것이다. 여러 代를 봉사(奉祀)할 경우는 물론 제상이 따로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하였다.
증조고위 증조비위 조고위 조비위 고위 비위
잔대 시저 잔대 시저 잔대 시저 잔대 시저 잔대 시저 잔대 시저
밥 국 밥 국 밥 국 밥 국 밥 국 밥 국
생선 적 송편 생선 적 송편 생선 적 송편
白菜 醬 靑菜 (沈采) 白菜 醬 靑菜 (沈采) 白菜 醬 靑菜 (沈采)
實果 實果 (實果) 實果 實果 (實果) 實果 實果 (實果)
香床 茅沙 酒煎子
수저는 가운데 놓지 않고 왼쪽 가에 놓아도 좋다. 밥과 떡은 햅쌀로 짓는다. 생선은 접시에 담을 수 있는 것 두 마리 정도로 하고 적은 채소(菜蔬)적 위에 생선, 적(生鮮,炙)이나 고기적 또는 고기를 놓을 수도 있다. 채소는 청색(靑色 시금치) 백색(白色 도라지)으로 나누어 두 접시 정도로 하고, 포(脯)나 김치를 곁들일 수 있다. 실과는 두세 접시 정도로 한다.
다만 이것이 반드시 표준(標準)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지극한 정성을 가진 자손들은 제사를 이것 보다 훨씬 더 잘 지낼 수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제사 때문에 지손(子孫)들이 고통(苦痛)을 겪는다든가, 특히 주부(主婦)가 제사 때문에 정신적(精神的), 물질적(物質的)으로 괴로워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5) 절사(節祀)의 절차와 방법
(1) 진설(陳設) : 집사지(執事者)는 마련한 음식물을 제상(祭床) 위에 모두 다 차린다. 제사(祭祀)에 참석(參席)한 모든 사람들은 제복(祭服)을 입고, 남자는 동쪽에 여자는 서쪽에 늘어선다. 여자는 제사(祭祀)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제사(祭祀)는 반드시 주부(夫婦)가<內外> 함께 지내는 것이다.
(2) 제지방(題紙榜) : 차례대로 지방(紙榜)을 써서 붙인다. 지방을 붙이는 제상의 북쪽 병풍 앞에 지방 붙일 곳<의 椅>을 마련한다. 판자(板子)를 세우거나 두꺼운 책을 세워 놓고 그 위에 깨끗한 흰 종이를 바른 다음 지방을 붙일 수도 있다. 병풍이나 벽에 붙이지 않는다.
(3) 분향(焚香) : 주제자(主祭者)인 주인이 향 세 까치 정도로 불을 피우고 재배(再拜)한다.
(4) 뇌주(酹酒) : 주제자가 술 한 잔을 모사(茅沙) 그릇에 세 번 나누어 따르고 재배한다. 분향과 뇌주를 합하여 강신(降神)이라고 한다.
(5) 참신(參神) : 제주이하 모두 재배한다. 강신과 참신은 신주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리 한다. 신주 가 있으면 참신을 먼저 하고, 신주 없이 지방을 사용하면 강신을 먼저 한다.
(6) 헌작(獻爵) :제주가 각 位마다 헌작하고 재배한다. 기제사(忌祭祀)는 祝이 있고, 삼헌(三獻)을 하지만, 차례에는 무축단헌(無祝單獻)이다. 따라서 첨작(添爵)도 하지 않는다. 여러 位를 함께 제사 지내기 때문에 삼헌(三獻)을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제주 혼자서 모든 가족들과 남녀노소 참제자(參祭者)를 대신한 것이다. 헌작(獻爵)할 때 술잔을 들고 향 위에 절대로 돌리지 않는 것이다.
제주의 아내인 주부나 주제자의 동생에게 헌작(獻爵)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해서 소외(疎外)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 둔다. 특히 오래 만에 온 사람, 멀리서 온 사람, 직위가 높은 사람이라고 해서 헌작을 시키는 것은 가정의 질서를 문란(紊亂)하게 하는 것이며, 불목(不睦)의 소지(素地)를 마련하는 것이므로 지극히 삼가야 하는 것이다.
(7) 시저정저(扱匙正箸) : 숫가락을 밥그릇에 꽂고, 젓가락을 제자리에 바로 놓는다. 젓가락을 제상에 세 번 소리가 나도록 간추리거나, 고기 접시 위에 얹어서 고기를 많이 드시라고 하는 것은 俗된 것이다.
(8) 합문(闔門) : 문을 닫거나, 병풍(屛風) 등으로 가린다.
(9) 부복(俯伏) : 주제자 이하 문 밖이나 가린 병풍 앞에 잠시 동안 엎드려 다 드실 동안을 기다린다.
(10)계문(啓門) : 세 번 기침을 하고 문이나, 병풍을 연다. 기침은 사람이 와서 문을 열려고 함을 뜻한다. 기제사와는 달리 유식(侑食)과 국궁(鞠躬)의 순서가 없다. 이것도 번거로움을 피한 것이다.
(11) 하시저(下匙箸) : 수저를 제자리에 내려놓는다.
(12) 사신(辭神) : 주제자 이하 모두 재배한다. 祖上神과의 이별이다.
(13) 퇴작(退爵) : 집사자(執事者)는 술잔을 제상 아래로 내려놓는다.
(14) 분지방(焚紙榜) : 지방을 불사른다. 禮를 모두 마친다.
(15) 철상(撤床) : 제상에 차려 놓은 음식물을 걷어치운다.
(16) 음복(飮福) : 제주에게 먼저 복주(福酒) 잔을 드린다. 그리고, 차렸던 술과 음식물을 제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다.
이 제사는 짧은 시간 안에 다 지내야 한다.
시간을 오래 끄는 것은 잘못이라 생각된다. 엄숙(嚴肅)하고 정중(鄭重)하게 하면서 동작(動作)을 빨리 하여 길어도 30분 정도 이내에 끝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3 성묘(省墓)와 묘사(墓祀)
1) 성묘(省墓)
성묘는 직접 산에 가서 묘를 살펴보는 것이다. 성묘는 수시(隨時)로 할 수 있지만 형편에 따라 봄이나 가을에 한다. 봄에 하는 것은 추운 겨울을 지나는 동안 별 변고(變故)가 있지나 않았는가를 살피면서 문안(問安)을 하는 뜻이고, 가을에는 여름 더위와 장마를 겪었으니까 그와 같이 하는 것이다. 설이나 추석에 반드시 성묘(省墓)를 해야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산소 가까이 고향에 왔을 때 하는 것이 좋고, 자손들이 함께 모였을 때 같이 한다는 것 뿐이다.
성묘의 방법은 산소(山所,(墓) 앞에 도착하면 모두 두 번 절한다. 뵈오러 왔다는 인사이다. 다음 묘를 둘러보면서 이상유무(異狀有無)를 살펴본다. 가져 온 술이나 음식물이 있으면 간단히 차려 놓고 두 번 절한다. 돌아 올 때 작별의 인사로 두 번 절한다.
묘사(墓祀)는 산소에 가서 지내는 제사(祭祀)이다. 묘제(墓祭)라고도 한다. 묘사가 언제부터 시행(施行)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주자가례(朱子家禮) 이후부터가 아닌가 한다. 일년에 한번 정도 가을에 지내는데, 대상은 모든 조상 산소에 다 지내는 경우, 또는 기제사(忌祭祀)를 받들지 않는 먼 조상에게만 지내는 경우가 있다. 먼 조상들의 산소는 실묘(失墓)를 하여 산소가 어딘지 모를 때는 제단(祭壇)을 마련하여 지내기도 한다.
2) 조상 묘(祖上 墓(山所) 보존의 의미와 대상(對象)
부모 조상의 墓를 보존(保存)하여 그 큰 은혜(恩惠)에 보답하고 사랑을 느끼면서 자손(子孫)으로서의 도리(道理)를 다하고 그들의 훌륭한 삶을 배우고 본받으며, 나아가 그러한 마음과 행위(行爲)가 자손(子孫)들에게 본보기가 됨으로써 그들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착하고 즐겁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은 부모조상으로서 너무나 당연(當然)하고 또 고귀(高貴)한 책임(責任)과 임무(任務)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러가고 보면 가까운 조상과 먼 조상, 그리고 훌륭한 조상과 그렇지 못한 조상은 자연히 다르게 인식(認識)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에 적어도 유사이래(有史以來) 4,000여 년 동안 성인(聖人)과 현인(賢人)들이 수없이 살아 왔는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민(平民)으로 이름이 남지 않고 후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자연현상(自然現象)이다. 조상들도 이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 생활과 자연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조상의 묘를 모두 다 무작정(無酌定) 보존(保存)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또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빛나게 살았던 성현(聖賢)들의 山所는 문화유산으로 영원히 잘 보존하여 후세 사람들의 삶의 표본(標本)으로 삼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祖上들의 삶과 가르침은 길이길이 이어받아야 나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렇지 않은 조상들의 墓는 모두 다 保存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또 그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이치에 합당(合當)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나 생물은 죽으면 썩어서 흙이 되어, 자연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제사는 모든 조상들에게 다 지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직위(職位)에 따라서 천자(天子)는 七묘(廟), 제후(諸侯)인 王은 五묘(廟), 대부는 三묘(廟), 士와 庶人는 二묘(廟) 곧 조부모(祖父母)와 부모(父母)의 제사만 받들도록 예제(禮制)를 마련하여 시행(施行)하도록 한 것이 先王과성현(聖賢)들이 뜻이고 가르침이었다. 새로 제단(祭壇)을 만들어 번거롭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바른 도리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3) 묘사(墓祀)와 신주(神主) 및 위패봉안(位牌 奉安)
성묘(省墓)할 때 그냥 성묘만 하기에는 너무 허전한 감(感)이 있기 때문에 약간(若干)의 음식물(飮食物)을 마련했던 것이 묘제로 발전했을 것이다.
봉사대상은 墓가 보존되어 있는 모든 조상이지만 기제사를 지내고 있는 조상 묘에는 지내지 않는 경우가 있고, 실묘(失墓) 했을 경우 앞에서 논(論)한 것처럼 설단(設壇)을 해서 지내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묘사에 대한 관념(觀念)이 매우 희박(稀薄)해 져서, 앞으로는 조상에 대한 향념( 向念)이 극진(極盡)한 일부 사람들을 제외(除外)하고는 없어져버릴 가능성(可能性)이 높다.
조상묘에 대한 자손들의 향념이 많이 줄어 든 탓도 있지만 조상 묘가 있는 시골에는 젊은 자손들이 거의 없고, 일부 노인들만 살고 있는 실정(實情)이기 때문에 묘사를 지낼 사람이 없게 된 것이 그 큰 이유이다. 그리고, 비바람과 추위로 墓에앞에서 묘사를 지내기 어려운 때도 있고, 산이 높고 험하며 나무가 너무 울창하여 墓에까지 접근이 불가능한 경우가 없지 않다.
그래서 묘사제도가 엉뚱한 방향으로 변천(變遷)해 가고 있는 것이다. 묘아래 제실(齋室)이 있으면 제실에서 지내기도 하지만 제실이 없는 곳이 많으므로, 山所 아래 산기슭에 제수를 진설하여 지내기도 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壯談)하지 못한다.
최근에 와서 기발((奇拔)한 착상(着想)이 나와 자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 근처에 묘사를 지내기 위한 사당(祠堂)을 마련하여 자손들이 거기에 모여서 묘사를 지내는 門中이 생겼으며, 이에 따라 이러한 현상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趨勢)인 것 같다. 조상 묘가 있는 산 아래도 아니고 묘와는 거리가 먼 곳에다가 묘제를 위한 사당(祠堂)을 짓고 거기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필자(筆者)는 도저히 찬동(贊同)할 수 없다.
묘사를 반드시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묘사를 위하여 사당을 따로 짓고 신주(神主)인지 위패(位牌) 등으로 신위(神位)를 새로 마련한다는 것이 이치에 맞는 것인가. 과거에 모셨던 가묘(家廟)의 신주(神主)도 거의 없애고 말았는데 다시 먼 조상들의 신주나 위패를 만들어 누가 언제까지 어떻게 보존하며 모실 것인가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기제사와 마찬가지로 제수(祭需)를 완전히 갖추어 묘에 가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은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누구도 부인(否認)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부모 조상 묘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것이다. 고례(古禮)를 참작(參酌)하여 그 원리(原理)를 살리고, 현실 생활에 알맞은 제도(制度)를 마련하여 인정과 도리에 소홀(疏忽)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 현대인의 책무(責務)이다
묘사를 완전히 폐지(廢止)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먼 조상이라 하더라도 역사상(歷史上) 큰 인물(人物)로서 훌륭한 祖上이라면 물론이고, 가까운 부모 조상의 墓에는 자손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를 다해야 할 것이다. 부모 조상을 爲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자신들의 할 일이며 자기 자손과 이웃 사람들에 대한 본보기로서 교화차원(敎化 次元)의 교육적인 깊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수 천 년 내려오면서 성현(聖賢)들이 마련하여 가르쳤으며, 우리의 훌륭한 조상들이 行하던 것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부정하거나 무시(無視)하는 것은 후생(後生)과 후손(後孫)들의 도리가 아니다. 가급적 따르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들의 태도이다. 현실적인 중용(中庸)의 道를 다시 발견해야 한다.
옛날에 없었으며 하지 않았던 것을 함부로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의례(儀禮)와 제도(制度)는 아무나 만드는 것이 아니다. 현대와 미래까지를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그 의례와 제도가 빛과 생명을 오래 유지하지 못할 것이며 現代人에게도 도리어 부담(負擔)이 되고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될 것이다.
4 이등방문(伊藤博文)의망령(妄靈)가가례( 家家禮)
우리나라의 모든 예법(禮法)은 고대(古代)부터 주(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인 삼례(三禮)에 근거(根據)하여 마련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들어와 보급(普及)된 뒤부터는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비롯한 일반 예절이 모두 이에 따라 행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즈음 을 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가례’란 말을 함부로 써 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가가례란 말은 집집마다 다른 예를 행하고 있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제사나 상사(喪事)에 있어서 지방이나 문중(門中)마다 약간 달리 시행하고 있는 예절에 대해 가가례란 말이 주로 언급(言及)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가례란 말을 이와 같이 아무렇게나 써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래서 가가례란 말의 유래를 한번 고찰해 보기로 한다. 가가례란 말을 대부분의 국어사전들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여 놓았다.
‘각 집안을 다라 달리 행하는 예법’ <한글학회 큰사전, 1957>
‘집집마다 달리 행하는 예법’ <홍웅선 김민수 편 새사전, 1959>
‘집집마다 달리 행하는 예법 풍속 습관’ <이희승 편 국어대사전, 82>
‘(國)집집마다 달리 행하는 예법 풍속 습관’ <장삼식 대한한사전, 82>
‘집안에 따라 달리 행하는 예법’ <한글학회 편 우리말 큰사전, 91>
몇몇 개의 사전에 이와 같이 풀이해 놓았지만 이 사전들은 다 일제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외의 사전들에서는 이 말이 없다. 더구나 사서삼경(四書三經)은 물론, 조선시대의 그 많은 예서(禮書)들에서도 이 말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찾아보아도 이 말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 ‘가가례’란 말은 예절 용어가 아님이 분명하다. 옛 문헌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현대 사전에만 나타나는 이 말이 항간(巷間)에 그렇게 유행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의심이 없을 수 없는 일이다.
‘가가례’란 말은 일본의 이등박문이 만들어 퍼뜨린 것이라는 설이 있다. 또 이등박문이 식민지(植民地) 정책상 우리 고유의 예를 파괴(破壞)하려는 책동(策動)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 있어 왔다. 우리나라 조선시대(朝鮮時代)의 禮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행해 왔는데, 이 가례를 가가례(家家禮)로 하도록 한 것이다. 가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한 가지 통일된 예를 따르는 것이고, 가가례는 제 각기 집집마다 따로따로 달리 행하는 것이다.
가례대로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협동 단결을 해 왔던 것인데, 가가례로 하게 함으로써 예법(禮法),풍속(風俗), 관습(習慣)을 달리하도록 하여, 분리 투쟁(分離 鬪爭)을 조장(助長)시키려는 것이다. 한 민족이, 한 문중(門中)이, 어찌 예법, 풍속, 관습을 달리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하면 결과는 뻔하다. 서로 다투고 질시(疾視)와 빈목(反目)을 하며, 스스로 허물어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상례(喪禮)를 행할 때나, 제사(祭祀)를 지낼 때, 우리나라의 훌륭한 선비들이나 옛 어른들이, 가가례란 말씀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전혀 없는 것이다. 禮를 옳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서서 가가례라 하며, 이래도 할 수 있고 저래도 할 수 있다고 主張하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우리 고유문화를 크게 그르치는 한 例라 하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일민족(單一民族)으로서, 고대부터 모든 뭄물제도(文物制度)를 같이 해 왔다. 온 나라가 같은 문화를 가지고, 그것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살아 왔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 전통 문화를 굳건히 유지하고 이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무서운 가가례의 망령을, 우리 생활 속에서 하루 빨리 말끔히 몰아내고 씻어버려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4 맺는 말
한 해 봄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하여 햇곡식을 먹으려 할 때,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참으로 뜻있는 일이다. 조상의 은혜에 보답(報答)하려는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은 사람의 기본적(基本的)인 도리(道理)이다. 은혜(恩惠)를 알지 못한다거나 잊어버리는 것은 사람다운 사람이 못되는 것이다.
자손(子孫)들이 조상(祖上)으로부터 福을 받겠다고 제사를 지내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큰사랑과 은혜를 잊지 않고, 그 가르침을 되새겨 보자는 것이다. 조상들의 아름답고 훌륭한 삶을 본받고 이어 가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는 조상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윤택한 삶을 위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자손들의 올바른 교육을 바라는 것이다.
제사를 통해 조상에 대한 자신의 도리를 다함으로써 마음이 편하고 즐거우며, 자손들에게 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보고 듣고 실천하게 함으로써 참다운 人間性을 길러 가게 하는 것이다. 어른을 공경(恭敬)하고 어진 이를 높이며, 공손(恭遜)하고 경건(敬虔)한 태도와 양손(謙遜)하며 사양(辭讓)하는 언행(言行)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제사를 소홀히 한다거나 귀찮은 것으로 생각하여 없애야 한다는 주장(主張)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이다.
명절(名節)인 추석(秋夕)의 의미(意義)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고 올바르게 인식하여, 秋夕에 절사를 지내고 조상 산소에 성묘하는 것은 우리 고유(固有)의 오랜 미풍양속(美風良俗)이므로, 그 현대적 가치와 의미를 재확인(再確認)하여 인간적, 교육적으로 떳떳하게 발전할 것이다. 김시황(金時晃) : 경북대명예교수, 동양예학회장, 한국인성예절교육원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