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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순위 |
重要 史實(年代) |
選定 理由 |
1 |
8.15 해 방 (1945.8.15) |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드디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35년간의 일본 제국주의의 학정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
2 |
38선 획정 |
국내에서의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대립이 날카로워져 가고 있을 때에 미.소 양군이 각기 진주하였다. 먼저 진주한 것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소련군이었다. 소련은 일본의 패망이 거의 확실하여진 8월 8일에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고 한.소 국경을 넘어오더니 일본이 항복한 뒤에 계속 진군하여 평양.함흥 등 북한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다. 한편 미군은 9월 7일에야 비로소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에 들어오고 점차 남한 일대에 주둔하였다. 미. 소양군은 북위 38도선으로써 경계를 삼아 남북으로 갈라져 점령하였다. 이 부자연스러운 38선은 장차 한국민족의 분열과 비극을 초래하는 요인이 된 것이다. |
3 |
남한과 북한의 단독 정부 수립 <남한(1948.8.15)> <북한(1948.9.9)> |
1948년 5월 10일 남한의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남북협상파가 불참하였고 북한에 배정된 100석을 제외한 것이었으나, 198명이 국민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에 5월 31일에는 국회가 열리었는데, 이 제헌국회는 즉시 헌법에 제정에 착수하여 7월 12일에는 국회를 통과시켰고 7월 17일에 드디어 이를 공포하였다. 이 헌법의 절차에 따라 7월 20일에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이어 행정부가 조직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의 수립이 국내외에 선포되었다. 1948년 1월에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는 유엔의 결의에 반대한 북한은 남북정치협상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들은 8월 25일 총선거를 실시하여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이어 내각을 구성함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
4 |
6.25동란 (1950.6.25) |
북한에서의 유엔한국위원단의 활동을 거절한 북한은 남북정치협상을 제의하였는데, 그 목적은 위원단의 활동을 저지하고 미.소 양군을 동시에 철수시킴으로써 군사력에 의한 전국의 제압을 꾀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므로 벌써부터 강력한 군대가 조직.훈련되고 있었다. 인민 공화국을 세운 뒤에 군대는 더욱 강화되어서 6.25동란 직전의 북한의 병력은 어마어마하였다. 이에 대해 이승만이 자주 힘에 의한 통일을 부르짖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군대의 병력은 8개 사단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북한은 1950년 6월 25일에 불의의 남침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
5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0.5.18) |
원인은 신 군부세력(전두환)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민주화를 빼앗아 갔기 때문에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5.18이전에 서울의 봄(10.26~5.18까지)를 서울의 봄이라고 하는데 민주화 요구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그리고 5.18은 전두환이 광주와 타협을 하지 않고 군대로 무차별하게 진압했기 때문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래서 광주 시민들이 경찰서를 털어 총으로 무장을 합니다. 5.18의 결과는 1980년대 민족 민주운동의 토대를 마련했고, 학생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
6 |
4.19혁명 (1960.4.19) |
이승만 정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 장기 집권하였다. 그리고 1960.3.15 제 4대 정 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에서 자유당은 반공개 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그러자 같은 날 마산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당국은 총격고 폭력으로 강제 진압에 나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무고한 학생과 시민을 공산당으로 몰면서 고문을 가했다. 그리고 1960.4.18 4천여 학생들이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 들자""는 선언문을 낭독,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중 괴청년들의 습격을 받아 일부가 피를 흘리며 크게 부상당했다. 이에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이 다음날인 1960.4.19 총 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 ""를 위한 혁명적 투쟁으로 발전하여 독재정권은 총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탄압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
7 |
88 올림픽 (1988. 9/17~10/2) |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일간에 걸쳐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주요도시에서 개최되었다. 전세계에서 159개국 1만 3,304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여 올림픽 사상 최대 대회규모를 기록했다. ‘화합과 전진’을 기본이념으로, ‘최다의 참가, 최상의 화합, 최고의 성과, 최적의 안전, 최대의 절약’을 대회목표로 했다. 한국은 1979년 9월에 제24회 하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기로 결의하고 1981년 2월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본부에 올림픽 유치신청서를 정식 제출했다. 같은 해 9월 30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IOC 총회에서 일본의 나고야를 52 대 27로 누르고 개최지로 서울이 선정되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는 두번째, 그리고 세계에서는 16번째로 올림픽 경기대회 개최국이 되었다. |
8 |
2002 한.일 월드컵 (2002. 5/31~6/30) |
2002년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한국과 일본의 20개 도시에서 열린 21세기의 첫 월드컵이자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개최된 월드컵이다. 우승은 브라질이 차지하여 월드컵 5회 우승을 기록했으며, 준우승은 독일, 3위는 터키, 4위는 한국이 차지하였다. 한국은 특히 7전 3승 2무 2패라는 성적으로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서 최초로 4강 신화를 기록하여, 월드컵대회 참가 48년만에 첫 승·16강·8강·4강에 오르는 기록을 경신하였다. 또한 한국축구대표팀의 서포터스인 붉은 악마를 중심으로 온 국민의 길거리 응원도 전 세계의 이목을 받았다. |
9 |
5.16 군사 쿠데타 (1961.5.16) |
민주 정치하에서 여러 계층의 갖가지 욕구가 일시에 분출하여, 각종 시위가 연이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은 당연히 국민 여론의 비판을 받았지만 이는 민주 정치가 행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혼란으로 규정하고 이 혼란을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일어난 것이 1961년 5월에 있었던 5.16 군사 쿠데타이다. |
10 |
6.15 남북공동선언 (2000.6.13~6.15) |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을 가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발표한 남북공동선언이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남북의 정상들이 6월14일 오후 3시간 넘게 진행한 회담에서 합의하여 밤 11시 20분경 서명, 다음날인 6월 15일 공식 발표한 것으로 다섯 개항의 합의 내용과 함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적절한 시기에 서울 방문을 명시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6.15공동선언 이후 이산가족방문단 교환, 남북장관급회담,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의 구성 등이 이루어졌으며, 남북분단으로 단절되었던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을 위한 복원공사가 착수되었다. |
다음 발표자 : 박인승
다음 발표 주제 : 종합토론
오혜림 학우의 발표 잘 들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사이에, 전라남도와 광주(당시 전라남도 광주시) 시민들이 신군부와 계엄군에 맞서 군부퇴진과, 계엄령 철폐, 체포된 민주 인사 석방 등을 요구하며 벌였던 항쟁입니다. 이에 공수부대는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반대하며 민주화를 요구했던 시민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하고, 시민들은 이로 인해 다치고, 피를 흘리고, 목숨까지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점점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에게 무차별적 폭력을 가한 정부에 맞서 시민들의 분노가 쌓여가고 더욱더 시위를 넓혀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억울하게 죽어간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자유를 위해 이토록 운동을 벌였던 것입니다. 5·18민주항쟁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자발적인 민중운동의 소산입니다. 조선말기의 갑오농민혁명, 일제 강점기의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온갖 탄압에도 굴하지 않는 민족해방투쟁,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학생혁명 등의 정신을 이어받은 밑으로부터의 개혁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항쟁이었던 것입니다. 5·18민주항쟁은 깨어있는 민중이 민주사회 발전의 원동력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적인 통일,
평등 세상을 향한 사회진보 운동의 일대 전환점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 운동은 저항과 단죄를 넘어 나눔과 자치, 연대의 공동체 실현을 위해 우리 모두가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남겨주는 소중한 민주화운동인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이러한 서로 나누는 정신, 자발적인 태도, 실제적인 행동 등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가져야 할 많은 덕목들과 값 진 교훈을 보여주었습니다. 남이 시켜서 한 운동이 아닌 자발적인 운동이었다는 것을 통해 자주 의식을 배울 수 있고, 소수의 사람들이 벌인 운동이 아닌 한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싸웠다는 점을 통해 협동과 공동체 의식을 배울 수 있으며,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고 힘든 사람에게 도와주는 정신을 통해 남을 위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도덕적 정신과 윤리적 정신, 도전하는 아름다움, 민주주의 꿈을 향한 열정, 부당함에 맞설 줄 아는 용기 등, 저는 이 발표를 준비하면서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이런 5.18 민주화 항쟁에서 독재 정치에 맞선 시민들의 용기있는 자세는 다, 과거 우리 민족들의 역사로부터 이어져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주체는 우리다 라는 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싸워준 우리 민중들이 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5. 18 운동은 민주화로 향한 민중들의 피 흘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운동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민중들의 요구가 얼마나 대단한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주도 세력은 깨어있는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과거의 권력자들의 정권유지를 위한 피지배층의 지적활동을 제한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은 스스로의 권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보입니다. 이러한 주체의식의 성장이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전병진 : 1) 과거의 권력자들의 피지배층의 무지를 위한 정권유지 정책에도 ->>
수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가 이렇게 성장해온 민주주의를 꽃 피우기 위해 주체의식을 가지고 과거의 피 흘리는 참여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요구를 충분히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의 발전으로 정치의 독재는 힘들어졌다고는 하나 그만큼 확장된 우리의 참여권을 우리가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작은 참여 하나하나가 민중의 피로 꽃피운 민주주의의 열매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에 대한 참여 의식이 중요하다는 말에 동감합니다.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고 참여하지 않는 것은 소수 지도자들만이 정치를 하도록 일부로 이끌어주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민중들의 피와 희생으로 만들어 진 민주주의 정치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국민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아무 의미없게 되어지는 것은, 정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겠죠. 댓글 감사합니다^^
* 전병진 : 2) 그 만큼 ->
수정하였습니다.
중학교 때, 5월 18일이 다가오면, 교육적 차원에서 도덕시간이나 창재 시간에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한 영상물을 보여주었는데 그 내용이 문득 생각난다.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시위를 하던 광주 시민들을 계엄군들이 몽둥이와 총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심지어는 임산부의 배를 장검으로 찌르기까지 하는 장면들이다. 과연 이들은 무엇을 목적으로, 누구를 위해 이처럼 잔혹한 일들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일까? 한편, 이에 대항하여 광주 시민들은 서로 주먹밥과 도시락을 나누어 먹고, 인근 경찰서의 무기고를 털어 획득한 권총을 가지고 맞서 싸웠으며 수배령이 떨어진 사람을 숨겨주었다. 이들 또한 무엇을 목적으로 누구를 위하여 이처럼
용기를 낼 수가 있었던 것일까? 광주 민주화 운동은 이처럼 인간성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불의에 대항하여 맞서 싸우고, 어떤 사람은 무고한 시민을 잔인하게 죽이고, 어떤 사람은 잔혹한 자행을 저지르라는 명령을 내리고, 어떤 사람은 이처럼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멀리 떨어져 방관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 같은 부류의 사람들 중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 인식하는 바에 따르면 불의에 대항하여 맞서 싸우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상황이 닥치게 되면 누가 방관자의 입장을 취하게 될지 모른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도 처음에는 소극적인 저항만 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학생들이
최초로 적극적으로 맞섰다. 젊음의 정신이 없이는 해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젊은이들의 정신이야말로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가능하게 한 기본 정신이 아닐까? 이 땅에 사는 청년인 우리들이야말로 불의한 사회를 바꾸어 나가야 할, 그리고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중추적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새 것을 추구해 나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지금 우리 사회는 우리의 손으로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역사의 주체는 우리입니다. 부당한 사회에 맞서 싸울 줄도 알아야 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때 당시의 역사는 그때를 살고 있던 젊은이들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싸웠지만, 지금의 역사의 주체는 우리입니다. 불의에 맞서는 용기와 열정을 가지고 임하는 자세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 오혜림 : 1) 만들어가야 -> 2) 그 때 당시의 -> 3) 그 때를 ->
수정하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선생님께 많이 들었으며 학교에서도 영상물을 많이 접한 5.18 민주화 운동 주제는 소풍 때도 5.18공원에 가서 무자비한 그 때 상황을 전하는 사진을 많이 보아온 친근한 주제였습니다. 이로 인해 독한 광주인, 오기있다, 꼬라지있다 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경상도 쪽 뿐 아니라 광주나 전라도 사람이 아니면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하고 폭동이니 어쩌니 하는 사람이 있는데 역사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을 바로 잡아야겠습니다. 편협한 사고, 선입견에 싸여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이 하나로 뭉쳐야겠습니다. 민주시민의 역을 잊지 않고 끊임없는 힘의 견제와 균형을 통하여 주인의 이익이 최저선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책임의식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분명하지 않은 역사의 내용을 비판없이 수용한다든가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이 아닌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올바른 역사에 대한 교육과 왜곡된 역사를 비판하는 능력에 대한 교육이 시행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 조은정 : 1) 선입견에 쌓여 ->> 선입견에 싸여 2) 한 국민이 하나로 ->> 온 국민이 하나로 3) 민주 시민의 역을 ->> 4) 주인의 이익을 최저선으로 ->> 5) 길러야할 ->
* 오혜림 : 1) 고쳐야한다고 ->
교수님.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수정하였습니다^^
5.18운동은 독재정권하의 암울한 역사 속에서 민중들이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투쟁한 민주화운동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5.18운동을 ‘광주폭동’ 가르치는 교사가 존재하며 사람들의 의식 속에 ‘폭동’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역사를 왜곡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또 어떻게 왜곡될 것인가 하는 우려가 듭니다. 역사를 바르게 탐구하고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우리의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를 결정하는 일이므로 왜곡된 역사적 사실은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왜곡된 역사가 수정되는 것은 사람들이 관심과 깨어있는 의식을 갖고 있을 때 가능합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만약, 이 민주화운동이 광주에만 머물지 않고 한반도 전체에 퍼져나갔더라면 하는 그런 바람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독재정권은 쉽게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독재정권은 그것을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자비한 탄압과 언론통제, 타지인에 대한 통제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광주사람들은 그들과 열심히 맞서 싸웠지요. 여기서 미국은 용인을 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민중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는 이야기겠지요.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독재정권과 싸울 수 있었던 힘. 그것은 깨어있는 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을 겁니다. 비록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을지는 모르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생각보다는 계란이 깨지면서 남긴 흔적. 그것이 더욱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발표를 준비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항쟁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력이 크면 클수록 더 유리하게 작용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광주 시민들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부당한 독재 정치에 맞서 싸웠더라면 조금 더 수월하게 민주정치를 실현시키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광주 시민들은 비록 한반도 전체에 비해 터무니 없이 적은 인원이었지만 이루고자 하는 목표와 그 것에 대한 신념이 뚜렷했기 때문에 끝까지 싸울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도전하는 정신과 용기있는 실천력을 가진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민주주의 정치가 실행되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 오혜림 : 1) 좋았을껄 하는 ->> 좋았을걸 하는 2) 클 수록 -> 3) 시민들 뿐만 아니라 ->
수정하였습니다^^
민중들의 의식이 얼마나 성장했는가에 따라 민주주의도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사실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알 수 있으며, 배우는 학생도 일방적인 수용보다는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학문에 임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올바른 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저도 동감합니다. 특히 역사를 배우고 있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잘못된 교육은 과거 우리 역사를 우리 손으로 왜곡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후손에게 올바른 역사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부터 올바른 역사 의식을 가지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역사에 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 오혜림 : 1) 잘못 된 교육은 -> 잘못된 교육은
수정하였습니다^^
당시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는 당시 언론은, 광주에 대해서는 진실에 대한 침묵과 왜곡으로 일관했습니다. 잔인무도한 폭도들이 일으킨 광주 사태라는 이름에서 광주 민중 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오혜림 학우가 발표를 시작하면서 아직도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들이 일으킨 것이냐는 질문을 하는 게시글을 봤다고 하니 아직까지 그 당시의 왜곡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왜곡, 즉 진실 부정의 피해가 얼마나 심각하며 또 그토록 오랜 기간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진실보도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언론만 진실을 왜곡하지 않습니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이 그러합니다. 사실과 진실을 밝혀 널리 알려야 할 기자나 학자 등의 배운 자들은 도덕적 자질을 갖추고 자신이 저지르는 일에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외부의 압력이나 불평 부당한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사명감 또한 가져야 합니다. 미래의 교사로서 우리들에게 모두 정말 필요한 덕목들입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역사 왜곡은 정말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는 독재 정치를 물리치고 민주화를 실현하려 했던 민중들의 항쟁을 폭동으로 매도시키는 것을 보았을 때 정말 후손들에게, 직접 우리 손으로 올바른 역사를 물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우리에게 미치는 언론의 영향은 정말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언론을 수용할 때 비판적인 시각과 정신을 가지고 임해야 할 것이며, 더불어 왜곡된 역사를 올바르게 고치기 위해 많은 지식을 쌓고 학문에 힘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 오혜림 : 1) 힘써야 겠다고 ->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