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역할/靑石 전 성훈
강릉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 어디일까?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그림을 그릴 것 같다. 겨울바다를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 백사장를 거니는 젊은 연인을 생각하는 사람, 해변의 멋진 카페에서 달달한 커피 한 잔 마시며 흐뭇한 표정으로 비 내리는 바다를 바라보는 중년부부를 떠올리는 사람, 나이 지긋하신 분들 중에는 달빛이 교교히 비치는 경포호수의 밤경치를 생각하거나, 대나무 숲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는 오죽헌(烏竹軒)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오죽헌하면 율곡 이이 선생과 그 어머니 신사임당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애틋한 사랑과 가르침이 후세에 전해 내려오면서, 살과 뼈가 덧붙어지면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된다. 율곡 선생과 신사임당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뇌리에 훌륭한 조상의 위대한 유산으로 가슴에 새겨져 있는 것 같다. 공평(公平)이 아니라 공정(公正)을 모토로 한다는 요즈음 젊은 세대의 가슴에는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알 수 없지만, 50대 이상 기성세대에는 집안과 문벌 그리고 학식의 가치에 대하여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오죽헌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신사임당의 그림 초충도(草蟲圖)이다. 풀과 벌레를 그린 그림을 보면서 어떻게 이토록 섬세한 표현을 할 수가 하고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신사임당 자신이 어린 시절을 오죽헌에서 보내면서, 늘 가까이 보고 정답게 여기던 꽃과 풀 그리고 벌레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이 마음속에 간직되었다가, 훗날 그림으로 되살아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신사임당의 〈초충8곡병풍〉으로 널리 알려진 이 작품은 “ 나비·벌·매미·방아깨비·메뚜기·잠자리·하늘소 등과 같은 곤충이 패랭이꽃·맨드라미·나팔꽃 등의 식물과 단출한 구도를 이루며 어우러진 것으로, 신사임당 특유의 섬세한 필치와 단정한 채색이 돋보인다.”고 한다.
율곡 선생과 어머니 신사임당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그림은 우리나라 지폐 속의 등장인물이다. 한국은행에서 화폐를 발행할 때 도안에 들어갈 적합한 역사적 인물을 정하는 기준과 원칙이 있고, 대상 인물에 대한 일반 국민의 선호도를 조사하기도 한다. 지폐의 인물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오만원권 신사임당, 만원권 세종대왕, 오천원권 율곡 이이, 천원권 퇴계 이황, 백원 동전 이순신 장군이다. 지폐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공교롭게도 조선시대 인물뿐이다. 화폐 등장인물의 선정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다. 인물 선정과정의 내막이야 어떠하든 간에 어느 한 집안에서 지폐 인물로 두 사람이 선정되었다는 것은 한 때 시중의 유행어였던 ‘가문의 영광’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덕수이씨 문중의 두 인물, 율곡 선생과 이순신 장군이 지폐와 동전의 모델로 나왔다는 것도 정말 가문의 영광이자 문중의 명예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가정이나 부모자식간의 일은 대부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부모의 지극한 사랑과 관심 속에 자녀가 성장하느냐 혹은 부모의 무관심이나 방임 속에서 자라느냐에 따라서 자녀의 삶은 크게 달라진다. 집안의 배경이나 경제적인 여건 등 환경적인 요소도 중요하고, 타고한 성격과 성품 등도 중요한 덕목이다. 환경요소와 인품, 어느 한 면만이 그 사람의 일생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고, 두 가지 요소가 합쳐져서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된다고 여겨진다.
지나온 세월을 뒤돌아보며 자식들에게 어떤 부모 노릇을 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자상하지 못하고 잔정이 거의 없어 살갑지 못한 차가운 아버지 노릇을 한 것만 기억되어 부끄럽기 그지없다. 자식들이 아비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이나 얻을 수 있을까? 후한 점수는 언감생심이라 그저 창피하고 씁쓸하기만 하다. 이 모두 자업자득인데 무엇을 탓하리요. 늦었지만 이제라도 아이들과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 (2022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