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세 딸들과 강릉 여행
결혼하고 캐나다 유학길에 올랐다가 그곳에서 정착한지 어느 덧 21년 된 우리 둘째딸! 국제 도예페스티벌에 참가하느라 1년에 한 번씩은 한국에 와서 얼굴은 보고 살았는데 코로나19 이후 5년만에 방한했다. 글로벌 시대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딸과 함께 살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다. 힘들어도 오손도손 정을 나누며 함께 사는 게 가족인데 말이다.
딸을 해외에 보내고 하늘만 쳐다보면 눈물샘이 고장이 난 것처럼 눈물이 줄줄 흘러 주체를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망각의 동물, 인간인지라 딸과 헤어져 죽을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럭저럭 살아지더라. 어찌됐든 그리움으로 가슴 저리는 둘째딸이 두달 동안 한국에 머물게 되어 하루하루가 신난다.
그래서 주말에는 나의 로망이었던 딸들과의 여행을 계획했다. 누군가에게는 대단한 일이 아닐수도 있지만 딸 하나를 지구 반대편 타국에 보낸 입장에서는 이렇게 딸셋 완전체(?)와 함께 여행 가는 건 큰 이벤트다. 며칠을 설레며 주말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하늘이 질투를 했는지 일기예보에는 주말 온통 우산에 비 주루룩…
과연 여행을 무사히 갈수 있을까 걱정 했는데 엄마의 맘을 하늘도 헤아렸는지 빗방울이 조금 떨어지다가 말았다. 우리가 선택한 여행지는 강릉. 강릉에서 뷰가 가장 좋다는 호텔을 예약해서 나도 호캉스라는 걸 해봤다.
여행가서 관광지 구경 안하고 호텔에만 지낸다는 건 정말 이해불가였는데 기력이 떨어지니 천국이 따로 없다. 평소 ‘여행은 가슴 떨릴때 가야지 다리 떨릴 때 가면 안된다’는 우스개 소리들을 들었지만 두 다리 벌벌 떨리는 나이라도 여행은 삶의 활력인 것 같다.
뒤늦게 합류한 손자와 딸들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고 야간에는 바다가 보이는 호텔 수영장으로 GoGo! 바다 경계에 자리한 수영장은 파도 소리와 야경이 환상이다. 저녁이 되니 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는데 딸들과 함께하니 낙원이 따로 없었다. 몇 시간을 놀고 방에 들어와서 뽀송한 침대에 딸들과 함께 누웠다." 세상 부러울 게 없도록 편안하고 오래 만에 누리는 호사다.
다음 날은 딸들이 강릉 핫플(?)을 데려가겠다고 한다. 먼저 점심은 강릉에 가면 사람들이 꼭 들른다는 넘버원 맛집, 짬뽕 순두부집을 가기로 했다. 워낙 인기가 많은 곳이라 웨이팅이 길다고 하는데, 길어봤자 얼마나 길까 했는데… 워낙 사람이 많아 휴대폰 앱으로 원격 줄서기를 하는 시스템이 있다고 한다. (살다살다 이런 시스템이…) 막내딸이 11시쯤 원격 줄서기를 신청 했는데 대기자가 130팀이 넘는다. 체크아웃을 하고 식당에 갔더니 대기 중인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대기자 순번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대기팀이 몇명인지 실시간 확인을 하며 기다린다. 우리 둘째 딸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오고부터 구닥다리 우리 세대는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다. 카페고 어디고 키오스크 교육을 받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문명이 고도로 발달 할수록 우리 세대는 바보가 된다.
원격 줄서기를 미리 하고 왔지만 한 시간 정도를 기다리고 나서야 드디어 식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러가지 메뉴를 시키고 앉은 초당 두부집의 점심 식사, 반찬으로 나온 특허까지 낸 물김치는 어디서도 먹어 보지 못한 특별한 맛이다. 이러니까 황금 같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먹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강릉에서 보통 한 두 시간은 기다려야 마실 수 있다는 한 카페도 들렀다. 흑임자 라떼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이곳도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커피가 얼마나 특별한 맛이길래 이렇게 웨이팅이 길까 생각했는데 막내딸 친구 중에서는 이 흑임자 커피 한잔을 마시기 위해 서울에서 강릉까지 내려올 정도로 마성의 맛을 자랑한다고 한다.
큰딸이 대표로 줄을 서고 한 시간 반을 기다린 후에야 흑임자 라떼 커피 한잔을 마실 수 있었는데… (솔직히 시간은 너무 아까웠다) 뭔가 고소하면서도 달달한게 어디에서도 맛보지 못한 특별한 매력이 있긴했다. (하지만 다시 줄서서 먹으라면 글쎄…ㅎㅎ)
점심 한 끼 먹기 위해, 커피 한잔 마시기 위해 한 두시간을 대기하는 웨이팅 문화가 나에게는 번거롭다. '유명'자가 붙은 카페나 음식점에서 무조건 한 잔, 한 끼 먹고 가야하는 문화가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진 않았다. 하지만 딸들과 아니라면, 내가 언제 이런곳에 와보겠냐는 생각을 하니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게 맛집과 유명 카페 투어를 하고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유명하다는, 바다가 보이는 미술관에 갔다. 자연을 소재로 섬세하게 작품을 구성하고 묘사하는 기발함이 돋보인다. 자연과 예술이 공존하는 종합 예술 공간이다. 매표소 입구 장작더미처럼 나무로 만든 거대한 예술 작품이 눈길을 끈다. 쇠파이프를 굽혀서 갈대모양을 창출한 아이디어도 특이하다. 여러 가지 테마로 전시된 작품들로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다.
이곳의 특이한 점은 현대 미술관스럽게 다양한 재료와 방식으로 꾸며져 현란하다는 점이다. 작품에 대한 설명이 따로 없고 본인이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자유롭게 감상하는 것을 권장한다고 적어 놓았다. 미술관 곳곳에 있는 포토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인생샷 한컷 찍을수 있다. 문제는 웨이팅으로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 그러나 그 대열에서 기다리는 그 마음은 헛헛하고 뭔가로 채우고 싶은 욕심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여러 가지 작품 중 놀라운 것이 많지만 작품에 대한 나의 느낌은 다음으로 미룬다. 이번 여행에서 느낀 건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사람들이 즐기면서 산다는 것이다. 예전에 우리가 여행하던 형태와는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세 딸과 손자와 함께 한 여행은 행복하고 특별해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 특히 오랜만에 만난 둘째딸과 선물 같은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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