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것”(시100:1-5)
2025.3.9,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다. 그래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누군가(또는 무엇인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어떤 아이는 어려운 공룡의 이름을 줄줄이 꿰뚫고, 또 어떤 아이들은 각종 자동차들의 이름이나 특징을 훤히 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아가고 싶어 한다(나이, 생일, 가족, 학교, 취미, 좋아하는 음식 등). 심지어 그들을 흉내 내면서 신나게 춤을 추기도 한다. 그래서 옆에 사람들이 “야~ 너 미친 X같아 같아”라고 말하면, “그래 나 미쳤어. 아무도 몰라!”라고 하면서 싱글벙글해 한다. 전도할 때도 그 사람에게 옳은 사람이 되기 전에,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런데 어쩌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알려고 하는지를 스스로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하나님을 정말 좋아하고 있는지 또는 아닌지를 쉽게 체크할 수 있다(현재의 영적상태). 간절히 바라기는 본 설교자를 비롯한 우리교회 모든 성도님들이(아직 교회 밖에 있는 동네 분들까지도) 매일매일 어제보다는 오늘 더 하나님을 좋아하고, 알아가는 사람들이 되어가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지 못하면,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된다. 이것은 마치 그릇이 주인의 손에 붙잡힐 때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원리와도 같다(“아하 나는 커피잔이었구나” 등).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성경말씀을 통해서다. 성경말씀 앞에 서는 것이 곧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고, 성경을 가까이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히 스스로를 열어서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신(=계시) 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나를 향한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계신지를 깨달으면, 그 순간에 ‘내가 누구인지가 깨달아지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진다.
그러면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또 우리(나) 자신에 대해 뭐라고 기록하고 있을까? 오늘은 시편 100편 말씀 속에 기록된 하나님과 우리들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자. 먼저 3절 말씀을 다 같이 읽어보자.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우리(나)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이 우리(나)를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당연의 “그의 것”이며, “그의 백성”과 “그의 기르시는 양”이다. 역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왕이시며, 우리를 기르시는 목자이시다.
그런데 이 말씀들을 자세히 보면, 이 모든 하나님과 우리(나)와의 관계를 단 한 마디로 명확하게 집약한 표현이 있다. 그것은 “그의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사야 43장 1절에서는 좀 더 단호하게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내 것”이라고 하신 이유는 우리를 창조하셨고, 지명하여 불렀기 때문이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그의 것”이나 “내 것”이라는 말씀들은 공통적으로 우리의 모든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다는 말씀인가?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이다. 또한 이 말씀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신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에 아무리 지금의 삶이 어렵게 느껴진다 할지라도 여전히 나는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은 나의 주인과 왕이시며, 나를 책임지시고 길러주시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의 것”이라는 표현에서 시편 100편뿐만 아니라 성경전체에서 일관되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강조하시는 중요한 교훈(=주님이 원하시는 삶의 태도 등)을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이것이다.
“상황 때문에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찬양하라!”
우리는 다만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믿고, 그분을 높여 드리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이 이처럼 “그의 것”이기 때문에 모든 상황 속에서(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 상황과 상관없이 절대기쁨과 절대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것을 말씀한다(시100:1-4, 살전5:16-18).
“1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100:1-4)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바로 이 지점에서 굳센 믿음이 요구된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강조한다(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로마에 가면 콜로세움(Colosseum)이라는 로마제국 시대의 원형경기장이 있다. 콜로세움은 직경의 긴 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의 타원형이다. 외벽은 높이 48m의 4층이며, 약 5만 명을 수용하는 경기장이다. 이곳에서 각종 검투사들의 대결이나 맹수들과의 싸움 등이 열렸다(사진).
그런데 또한 이곳은 초대교회 당시에 수많은 성도들이 맹수의 먹잇감으로 순교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성도들은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을 찬송했다. 그들이 찬송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상황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었다.
구약의 하바국 선지자가 온통 없고 없는 것 투성인 환경에서 찬송했던 이유도 상황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었다(합3:17-19).
“나는 여호와를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합3:18).
그렇기에 우리들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그의 것”, “그의 백성”, “그의 기르시는 양”)를 확실하게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만약 어려운 상황 때문에 하나님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서운함을 자주 느낀다면, 계산하는 습관을 멈춰야 한다. 그 대신 믿음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높여드려야 한다. 이것이 가장 용기 있고 지혜로운 행동이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는 낙원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을 떠난 곳에 진정한 행복은 없다. 우리가 거부해야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포기하려는 마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상황은 우리에게 절망을 주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래부터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황 때문에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찬양하자. 어떤 상황 속에서도 계산하지 말고, 하나님과 거래나 협상하려 하지도 말자. 그 대신 예배의 자리에 나와 믿음과 정성을 다해 함께 하나님을 높여드리자.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들 자신에게도 복이 되는 가장 현명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