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연적 戀敵
이틀 후,
향기는 자신의 애마가 이제 건강을 회복했다는 걸 확인하고, 말을 타고 사정으로 달려간다.
달리는 마상에서 맡는 아침 초원의 풀 내음은 상큼하고도 싱그럽다.
마음 바쁜 주인의 뜻을 아는지, 말의 걸음걸이도 날렵하다.
한편,
중부는 그날따라 서누리와 사냥하다가 발 빠른 회색늑대를 한 마리 발견했는데, 상당한 거리를 추격하여 활로 겨우 맞혀 잡았다.
누리도 무예를 배운지 겨우 이태 정도이나, 본시에 강골 체격으로 타고났고, 누구보다 열심히 한 덕으로 이제는 다른 동료에 비해 별 차이가 없을 정도의 고수급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늑대를 잡은 장소가 설걸우 천부장의 진영 근처란 걸 알았다.
구릉 두어 개만 지나면 될 것으로 보였다.
마침 잘 되었다는 생각에 모용 사부를 뵈려 막사를 찾아가 사부님께 인사를 올렸다.
혈창루 모용 사부도 실종되었던 애제자가 삼 년만에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니 반갑기 그지없다.
모용 사부님을 모시고 한준과 차를 마시며 지난 일을 아뢰었다.
조선하의 박달촌에서 적의 계략에 말려, 적 진영을 습격한 후에 부상을 당하여 해천 백 부장과 함께 만리장성으로 도피하였으며, 홍산에서 서로 헤어진 것까지 개략 槪略적으로 설명해 드렸다.
모용 사부는 대릉하의 금주에서부터 제 2기 수련생들을 맡아 지도하여 왔으며, 이제 막바지 수련단계에 있으며, 한준과 향기가 1년 전부터 제 3기생, 20여 명을 지도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향기를 찾으니, 향기는 현재 천부장의 군사 君師 직책 職責으로 군의 전체 업무를 담당한다고 한다.
누리는 중부의 친한 여자 친구가 젊은 나이에 천부장의 군사 君師 직무를 맡고 있다는 사실에 속으로 상당히 놀라워했다.
그런데 향기가 지금은 어딜 간 건지 자리에 없다고 한다.
근처에 산책하러 갔거니 여겨 한참을 기다렸으나, 결국 만나지 못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한편,
향기는 이런저런 생각을 해가며 운이 좋으면 중부를 만날 수도 있고, 아니면 최소한 중부의 소식은 들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애마를 급히 몰아 사정 수련장에 도착하였다.
마침 이슬비와 박지형이 출입구 쪽에 나와 있었다.
인사를 하고 천부장 군사 君師의 죽패를 보여주며 이름을 밝힌 후,
“이중부가 여기 있습니까?”
“어, 우리 오빠인데 왜요”
“아, 그래요. 반가워요. 오빠는 지금 어디에 있죠?”
“좀 전에 사냥 간다고 나갔는데요”
향기의 입가에 자리했던 옅은 미소가 사라지며, 기대감에 부풀어 반짝이던 눈빛은 실망감으로 인하여 암회색으로 바뀌어 간다.
“어느 쪽으로 사냥 나갔죠?”
“글쎄요, 그것 까지는...”
그때,
막사 안에서 늘씬하면서 쾌활해 보이는 한 낭자가 나오더니,
“누구신데~, 사부님은 갑자기 왜 찾지요?”
“아, 이중부가 사부님이 되세요?”
“네, 맞아요, 우리 사부님이신데요”
“아! 그래요, 조선하 박달촌에서 같이 지내던 친구인데 여기에 있다기에 만나려고 왔죠”
“사부님은 여자 친구 있다는 얘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는데~”
“아~ 박달촌에서 수련시, 병서 兵書 공부도 같이하던 동문수학 同門修學한 사이죠”
“아하~ 그래요”
아리따운 두 낭자가 입은 미소를 띠고 있으나 눈에서는 새파란 불꽃이 튄다.
서로가 중부와 상대방 낭자와의 관계를 따져보는 듯한 눈빛이다.
서로 알고 있었다면, 친하다면, 그 선이 어디까지인지 감지하고자,
재빠르게 두뇌를 회전시키고 있다.
뇌의 회전 回轉하는 속도가 워낙에 빨라, 그 진동을 옆 사람도 느낄 정도다.
이슬비는 물론, 박지형마저 두 낭자의 치열한 눈치싸움에 전율을 느낀다.
할 수 없이 박지형이 나선다.
“우문 문주님, 오신 분은 설 천 부장님의 군사 軍師시고 또, 중부형과 동문 수학한 친구분이라 하시니 귀한 손님이죠, 막사에 모시고 차라도 대접합시다.”
그제야 우문청아가 날카로운 눈빛을 속으로 갈무리하며 말한다.
“네, 바쁘게 오셨는데, 안으로 드시죠”
“예, 감사합니다”
네 명은 일단 막사 안에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이슬비가 큰 청동화로 靑銅火爐에 동복 銅鍑을 걸고 수태차를 끓인다.
두 낭자는 적대감을 감추고는 곁 눈길로 상대방을 서로가 연신 훔쳐본다.
상대방의 미모와 체격, 옷차림새, 교양까지 눈치로 탐문 하느라 여념 餘念이 없다.
그중 제일 중요한 요점은 ‘내가 이중부와 더 어울리겠느냐?’
‘아니면 상대방이 더 잘 어울리겠느냐?’ 하는 점이다.
그러니 막사 안의 분위기가 냉랭해지고 서먹서먹하다.
무술 실력은 고수지만 말주변 없는 박지형도 이러한 미묘한 분위기를 파악 把握하였으나, 어떻게 할 방도를 못 찾고 어물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동방향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고 쪽을 돌아보더니, 단창 短槍을 한 자루 들고는 박지형을 바라보며,
“어머, 이 단창은 중부가 사용하던 창이네요?”
“어, 맞아요, 동방 군사님께서 어떻게 아시죠?”
“아, 5년 전에 백부님께서 중부 친구에게 선물한 철창이죠”
“아하, 그래요?”
“그 당시, 내가 어릴 때 조선하 강변에서 승냥이 떼에 쫓겨 위급한 상황일 때, 중부 동무가 구해줘서, 백부님께서 고맙다며 선물하신 거예요”
“백부님은 어떤 분이시죠?”
“금성부에서는 ‘십칠 선생님’으로 불리고 있어요”
“와! 백부님이 대단하신 분이시군요, 대릉하에 우리 동이족들이 자리 잡았던 것도 십칠 선생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고 들었어요”
“아, 백부님을 알고 계셨군요”
“알고 말고요, 지금은 사로국으로 가신 걸로 아는데요?”
“네, 맞아요”
“그러니, 저렇게 좋은 철창을 선물하셨구나”
순간,
청동제 화롯가에 서서 수태차를 끓이던 이슬비가 왼발로 박지형의 오른발을 지그시 밟는다.
박지형은 느낀 대로 얘기하다가 ‘아차’ 한다.
곁 눈길로 얼른 우문청아를 바라본다.
다행히 우문청아는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막사 밖에서 뛰어다니는 망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저 여시가 중부를 나보다는 늦게 알았다지만, 조선하에서 3년 동안 상당히 친하게 지내고 있었네’라며 내면에서 일어나는 질투심을 애서 억누르고 있었다.
우문 청아의 혼란스러운 심정 心情.
동방향기가 노린 심리전이다.
일종의 시샘이다
자신이 중부와 어릴 적부터 서로가 친하게 잘 알고, 지내온 사이라고 그 물증 物證으로 철창을 제시해 버린 것이다.
이를 직감한 이슬비가 얼른, 각자의 찻잔에 뜨거운 수태차를 따라 준다.
차를 따르는 슬비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떨리고 있다.
따뜻한 우유 냄새가 막사에 펴지니 냉랭하던 분위기를 어느 정도 걷어내는 효과를 보인다.
수태차의 맛은 차 茶라기보다는, 우유를 첨가한 곰탕 맛이다.
솔직히 표현하면 ‘차’ 茶라기 보다는 ‘영양탕 營養湯’이 더 어울리는 호칭이며 맛이라고 여겨진다.
박지형이 차를 권한다.
“자, 차 한잔하시죠?”
“네, 고마워요”
“여기는 초원지대라, 녹자 綠茶를 구하기가 어려워요”
“네,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수태차를 녹차 대용 代用으로 마시고 있어요”
“어쩔 수 없지요, 상황에 맞추어 살아야죠. 하 하 하”
“그렇지요. 호 호 ”
“요즘 천부장 군 진영 陣營의 분위기는 어때요?”
“봄철이라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바쁘죠”
“아, 그러시군요, 우리도 양과 말들이 새끼를 낳아, 이를 관리하는 병사들이 요즘 정신이 없어요”
“맞아요, 우리 군영 軍營에도 어미를 찾느랴, 우리에서 탈출하여 훈련 시 방해하는 어린 망아지들이 더러 있어요”
“하하, 봄철에는 다 그렇죠. 그리고 중부형이 돌아오면 동방군사께서 다녀갔다고 전해 드릴게요”
“네, 차 잘 마시고 가요, 다음에 또 들리면 되죠”
서로가 함께 있기가 불편하다.
향기는 박지형의 대화 내용이 배웅하겠다는 의미임을 알고는 선선히 인사를 하고 막사를 나와 본대로 복귀하였다.
말을 타고 돌아가는 향기의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진다.
‘제자인지, 뭔지 여우 같은 계집애가 중부 옆에 있었구나.’
‘우문 문주인지, 우라질 문짝인지’ 하여튼, 중부와의 사이가 단순 사제지간은 아니라는 느낌이다.
‘그럼, 언제부터 사제지간 師弟之間이 되었을까?’
‘우문 여우가 중부를 좋아하는 것은 분명한데, 과연 중부도 그 여우를 좋아할까?’
‘서로가 좋아한다면 어느 정도 가까운 사이일까?’
갑자기 중부가 미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지난 삼년 동안 중부만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지금까지 괴로워했었는데.
자신이 땅에서 이탈되어 허공에 ‘붕~’ 떠버린 느낌이다.
이 년 반의 헤어짐이 둘 사이에 이토록 큰 공간이 생기게 될 줄은 미처 몰랐었다.
하여튼 중부를 만나 확인은 해봐야겠다.
중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런데 중부를 만나봤자, 중부가 나와는 단순 친구 간이라고 생각한다면 난 뭐야?
아니지, 지금은 사용하지도 않을 철창을 깨끗이 닦아 손질해 놓은 걸 보면, 나를 잊지 않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맞아.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만큼 중부도 나를 좋아할까?
그 여우와 비교 한다면?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그늘이 없는 초원이라 낯에 햇볕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풀들이 힘이 없어 보이고 그 내음이 텁텁하게 느껴진다.
향기를 등에 태우고 가는 백마의 다리도 힘이 빠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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