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경 [兪大儆]
유대경의 행장(行狀)
저자 시남(市南) 유계(兪棨)
이명
자 : 성오(省吾)
왕고(王考)의 휘(諱)는 대경(大儆)이고, 자(字)는 성오(省吾)인데, 기계 유씨(杞溪兪氏)는 휘 의신(義臣)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시조(始祖)는 신라 말 고려가 혁명할 즈음에 전조의 세신(世臣)으로 복종하지 않은 죄로 경주 속현 기계 호장(戶長)으로 강등되어 예속되었다. 몇 대 후에 다시 현달해져서 고려 말엽에 휘 선(僐), 휘 승계(承桂) 부자가 이어서 판지부(判地部)를 역임하였다. 고조 휘 기창(起昌)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증조 휘 여림(汝霖)은 예조 판서로 경안공(景安公)에 증시(贈諡)되었고, 할아버지 휘 강(絳)은 호조 판서인데, 양세(兩世)가 명덕(名德)으로 선조의 공업(功業)을 잘 계승하여 당대의 중망(重望)을 받았다. 아버지 휘 함(涵)은 성균 진사(成均進士)로 의정부 좌참찬에 추증되었는데, 광주 안씨(廣州安氏) 목사 안한준(安漢俊)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신해년(辛亥年, 1551년 명종 6년) 7월 11일에 공을 출생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리하였으며 조금 자라서는 부지런히 공부하여 병자년(丙子年, 1576년 선조 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시흥도 찰방(時興道察訪)에 제수되었고,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에 별시(別試)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임되었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에는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천거되고,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로 옮겼다. 얼마 후에는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고,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천거되어 들어갔으며,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두 번,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세 번씩 역임하였다. 외직에 나아가 순변사(巡邊使)를 보좌하여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년)에는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거쳐 수안 군수(遂安郡守)가 되었다.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년)에는 임금이 공이 군(郡)에 있으면서 전후로 공로가 많다고 하교하여 특별히 명하여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올렸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에 실언(失言)으로 인해 삭직당하였다가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 6월 19일에 돌아가시니 춘추 55세였다. 그해 모월 모일에 고양(高陽) 불암리(佛巖里) 선영 옆 정향(丁向) 언덕에 반장(返葬)하였다.
공은 효우(孝友)와 돈목(敦睦)을 천성으로 타고났다. 또한 홍의(弘毅)하여 국량(局量)이 넓었고, 식려(識慮)는 장원(長遠)하였으며, 특히 통민(通敏)하여 일을 처리하는 재주가 남달랐다. 그래서 포의(布衣) 시절부터 벌써 여망(輿望)을 받았으며, 벼슬을 하면서부터는 동료들이 큰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공이 순변사의 막좌로 있을 때 호남의 한 죄수가 사죄(死罪)를 벗어나고자 수십 인에서 백 인에 이르는 도내의 이름난 선비들이 장차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하여 그 이름을 열거해 투서하였다. 순변사가 즉시 열읍으로 하여금 고소된 자들을 체포하게 하고는 여러 막좌들을 불러 처리할 대책을 논의하였다. 막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는 큰 일이어서 급히 치계(馳啓)하여 보고하지 않을 수 없는데, 하물며 혐의를 받게될 일도 많으니, 더더욱 덮어버려서는 안됩니다.” 하여 의논이 매우 분분하였다. 그러나 공은 홀로 견지하기를, “간사한 사람이 죽게 되자 살 방도를 찾느라 한 무고이니 법으로 보아 들어주어서는 안 되며, 더군다나 사건이 전혀 정실(情實)이 없으니 이로써 선량한 사람이 화를 입게 해서는 안됩니다. 마땅히 빨리 죄수를 참하고, 체포하라는 명을 정지할 것이며 보고하는 일도 중지해야 합니다.” 하였다. 순변사가 처음에는 매우 난처하게 여겼으나 얼마 후에는 마침내 공의 의논을 따르면서 탄복하기를, “무고(無辜)한 줄 알면서도 사람을 죽여 혐의를 피하는 일을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 유공(兪公)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하마터면 잘못을 저지를 뻔하였다. 아마 유공은 후손이 잘 될 것이다.” 하였다.
공이 수안(遂安)을 맡아 다스릴 때에는 병란으로 나라가 황폐해진 뒤였는데, 성의를 다해 무마하여 은혜를 베풀고 기아에 허덕이며 떠도는 자들을 모아 의복과 음식을 주어 고을의 묵은 들판을 개간시켜 수천만 곡(斛)의 곡식을 수확하였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에 왜적이 다시 기보(畿輔)를 핍박하자 의인 대비(懿仁大妃)가 먼저 해서로 피난하여 거의 1년 동안 수안에 머물렀는데, 백관과 분사(分司)의 종자(從者)들이 거의 조정의 반이나 되었고 친고(親故, 임금의 친척)로 적병을 피해 귀의한 자들이 또한 백여 명은 넘었다. 공은 위로 행조(行朝)를 받들고 백료들을 접대하는 데 부족함 없이 잘하면서 자신은 철저하게 검소하고 쓰임새를 줄여 친고까지 주선하였고, 곤경에 처해 떠돌던 하찮은 나그네들까지도 모두 의지하게 하니, 공에게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중국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관서에서 급히 호남으로 달려가게 되자 도신(道臣)이 본군에 공문을 보내 군량을 운반하여 황주(黃州)에 교부해 주라고 하였다. 당시는 난리를 당해 이민(吏民)이 흩어져서 공문대로 봉행하는 열읍(列邑)이 없었으나 공은 지성으로 이민들을 깨우쳐서 하루 안에 수백에서 천 곡(斛)의 곡식을 다 운반하여 기일을 어기지 않으니, 중국 장수가 크게 기뻐하였다. 안찰사가 계문하니, 임금이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으나 자력(資歷)이 되지 않아서 단지 조산 대부(朝散大夫)로 올렸다.
군에 사나운 도적 떼가 산골짜기에다 소굴을 두고서 밤이면 모이고 낮이면 흩어지며 마을에 출몰하니, 양민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으나 주군에서 추포(追捕)하지 못하였다. 이에 공이 계책을 내어서 그 무리를 불러모아 생포하니, 관병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서도 수백 명을 잡아들였다. 자세하고 명백하게 신문하면서 동시에 인자하고 간절하게 하였으니, 목숨을 보존한 자가 매우 많았다. 소민(小民)들이 더욱 감읍하여 공을 부모라고 일컬었다.
공은 평생 동안 지론(持論)이 방정하여 당조(當朝)한 권귀(權貴)들에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끝내 술자리에서의 실언으로 미워하던 자의 모함을 받아 도신(道臣)이 아뢰어 파직되었다. 당시 재상 홍여순(洪汝諄)ㆍ기자헌(奇自獻) 등이 헐뜯고 공을 논핵 삭직하여 수원(水原) 전리로 돌아간 지 7년 만에 서용(敍用)하라는 명이 내렸는데, 다시 시배(時輩)들이 격환(繳還,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도로 바침)하였다. 그래서 공의 덕과 재능으로 일찍이 당시에 조금도 시험해 보지 못하고 마침내 곤고(困苦)하게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었겠는가?현조비(顯祖妣) 정부인(貞夫人)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의 6세손인데, 증조 휘 목(霂)은 청원정(靑原正)이요, 할아버지 휘 경(經)은 금양 부정(金壤副正)이요, 아버지 휘 흠례(欽禮)는 전라도 수군병마절도사요, 외조 현령 김수증(金壽增)은 언양(彦陽) 사람이다. 부인은 공과 동갑으로 월일(月日)만 조금 앞서며 만력(萬曆)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 10월 13일에 졸(卒)하니, 향년 39세였다. 성품이 순의(純懿)하고 정숙한 덕이 있어 한 집안의 모범이 되었으니 모두 내칙(內則)이 있다고 일컬어 돌아가신 후에도 칭찬이 그치지 않았다.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다.
선군자(先君子)께서 일찍이 공의 유사(遺事)를 써서 공손히 책 상자에 보관해 비문을 쓰는 자료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돌아가시고 그 글은 병화(兵火)로 잃어버리고 말았다. 불초 등이 고로여생(孤露餘生, 어릴 때 부모를 여읜 사람)으로 보고들은 바가 점점 멀어져 참으로 끝내 민멸(泯滅)되어 전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감히 소싯적 가정에서 들은 바를 수록하고 그 전말을 대략 적는다. 관차(官次)의 제배(除拜)는 이미 상고할 바를 많이 잃어서 일편(一編)을 이루지 못할 정도인데, 하물며 언행과 사공(事功)의 상세함은 어찌 그 만에 하나라도 방불(彷佛)하겠는가? 아! 슬프다.
수안공 13대손 병은(炳銀) 이 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