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이사람] (514) 하루 10원씩 늘려가는 저축으로 동전을 모아 많은 단체에 아낌없이 성금해온 진정군(73) 그린전파사 사장. 사람들은 그를 진정한 기부왕이라 부른다.
서울 방화동에서 조그마한 전파상을 운영하지만 나눔을 실천하고 베풀면서 살아가는 그의 마음은 누구보다 부자다. 어려운 환경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 노력하며 꿈을 일궈왔다.
진정군 사장의 기부는 독특하다. 한일월드컵이 열린 2002년 어린이날(5월5일)에 매일 10원 더하기 저축을 실행해 모은 2002만원을 출금하여 10살 소년소녀가장 100명한테 20만원씩 장학금으로 한국 복지재단을 통해 기증했다.
1995년 6월12일 한일 월드컵 개최 확정을 기념하기 위해 그날 오전 10시 월드컵 공식 지정은행인 서울은행 역삼동 테헤란지점에서 10원짜리 1개로 통장을 개설하여 매일 10원씩 늘려가는 저축을 2002일간 계속해서 모은 돈이다.
2002일간 2002만원 저축(1000+ 1000+2= 2002)은 그에게 아주 특별하다. 10원이라도 천(1000) +천(1000) +이(2) 쌓아 나가면 큰 돈(2002)이 된다는 의미다.
“매일 아침 10시면 서울은행 174개 지점을 모두 돌아가면서 저축하여 2150만원 모았어요.”
10원 동전 모으기 2002일째 동전 2002개로 10원짜리를 상징하는 다보탑을 쌓았다. 그 때 그가 기증한 다보탑이 하나은행 본점 유리관에 지금도 보관돼 있다.
그는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경의선 복원이 결정된 2000년 8월 1일부터 3000리강산에 무궁화를 심어보자는 의미에서 무궁화 꽃이 새겨진 화폐단위 1원 추가 저축을 시작하여 2012년 2월16일까지 매일 오전 10시 은행에 3000회를 다녔다.
우리의 소원은 하나라는 이미지를 살리고 싶어서 하나은행을 택하여 3000일동안 매일 10시에 맞추어 교통비가 더 많이 든 ‘1원 추가하기 저축’을 하였다.
도보, 자전거, 버스, 지하철, 기차, 비행기(제주)를 이용하여 남북으로 갈라진 삼천리강산을 하나로 잇고자 하는 마음으로 전국 614개 지점을 모두 찾아다니며 1원씩 모은 돈이 12년간 448만원이다.
“448만원을 모아서 통일부에 가증하려니까 루트가 없어서 못 받는대요. 청와대 신문고에 민원 넣어서 통일부로 갔지요. 제 설명을 들은 류우익 통일부장관이 감격해서 직접 통일항아리 6개를 빚었어요.”
지난 6월12일 열린 통일 토크쇼에서 그가 모은 448만4087원을 기증하는 통일항아리 전달식을 최초로 했다.
1원 한 닢, 10원짜리 동전 하나가 쌓이고 모이면 태산처럼 큰 돈이 된다는 사실을 그는 저축을 통해 증명해 보였다.
그는 지금도 아침 10시면 어김없이 하나은행 방화지점으로 달려가 10원 더하기 저축을 한다. 은행직원은 휴가가면 더러 빠지기도 하지만 그는 은행문이 열리는 한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른다.
일본에서 태어난 진 씨는 태평양 전쟁 와중에 아버지를 잃고 살 길이 막막해진 어머니, 동생과 함께 해방되기 직전 한국에 돌아와 서울 용산에 정착했다.
한국말을 잘 몰라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이로 지내다가 6.25전쟁이 터지고 피난길에 어머니, 동생과 헤어져 졸지에 천애 고아가 되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허드렛일을 전전하며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단지 국가에서 먹여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군에 자원입대 하였다.
당시는 복무기간도 길고 집단구타가 하루 일과였지만 그에겐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는 군대가 천국이었다. 제대 후에 갈 곳이 없어서 제대 날짜가 두려웠던 시기였다.
군에서 제대하고 취직을 하려 해도 초등학교 3학년 밖에 안 다닌 그를 받아주는 회사가 없었다.
오기가 생긴 그는 중학교 졸업 이상자에게만 응시 자격이 주어지는 전기회사에 이력서와 함께 열 손가락을 이빨로 물어뜯어 흘러나오는 피로 ‘모범사원이 되겠습니다’는 혈서를 써서 제출하였다. 기적은 일어났고 사장님이 단독면접하면서 특채의 영광이 결정되는 순간 너무 감격하여 펑펑 울고 말았다.
열손가락으로 혈서를 쓰고 특채되어 입사한 날이 공교롭게도 1966년 광복절(8월15일)이었다. 회사에 입사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 주어진 업무 외에도 일을 만들어서 했다.
회사가 날로 번창하자 거기서 나오는 쓰레기양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쓰레기가 오물이 아니라 관리만 잘하면 돈이라는 생각으로 쓰레기들을 모으고 분리수거하자 몇 년 안가 큰 목돈이 마련되었다. 적금을 부어 6년간 6000만원을 모았다. 그 돈으로 그가 다니는 회사에 통근버스 3대를 기부했다.
그에게 10이라는 숫자는 특별하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또 아침 10시면 어김없이 10원 더하기 저축을 하고 있다. 10 손가락을 물어뜯어 직장을 구한 혈서도 다 10자와 관련이 있다. 방송대도 10년만에 졸업을 했다.
“무학(無學)의 설움을 딛고 세상 사람들에게 뭔가 말해줄 수 있고 모범을 보여줄 수 있으니 인생이 재미있고 기쁠 뿐이죠.”
IMF가 터진 1997년엔 외화를 모으는 방식으로 매일 1달러씩 1004일 동안 저축한 1004달러를 유진벨재단을 통해 ‘북한 어린이결핵환자 돕기’에 기부했다.
한 번에 기부를 하지 않고 굳이 복잡하게 저금하는 이유가 있다. 누구나 기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과 어려운 사람들에게 끈기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서다.
이후에도 10원 모으기 운동을 계속하여 2003년 8월 강서구 자원봉사센터에 1000만 원을 전달하였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동전벽화를 제작했다. 12년 동안 전국에 있는 하나은행 614개 지점을 다니며 10원 동전 모으기의 뜻을 전달하고 10원짜리 동전 11만개를 모아 밤낮없이 4개월간 고생하여 동전태극기를 만들었다.
그가 제작한 초대형 동전벽화 태극기(가로 6m × 세로 4m = 24㎡)는 한국, 세계 기네스기록으로 공식 인증 받았고 벽화 속 동전 110만원은 어린이재단에 기부하였다.
그는 동전벽화를 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비록 작은 돈이지만 10원짜리를 모아 나누면 큰 힘을 발휘한다는 나눔의 철학을 전해주고 싶었다.
그는 회사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원으로 인정을 받으면서도 무학이라는 이유로 승진 때마다 탈락되는 수모를 당했다.
입사 동료는 물론 뒤에 들어온 후배까지 부장으로 승진하였고 그는 27년을 근무하는 동안 말년까지 말단 사원으로 숨죽여 울어야 했다.
지난 50여 년 동안 못 배운 슬픔과 한을 풀기 위하여 그는 정년퇴직 이후 50이 넘은 나이에 검정고시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는 대학으로 이어져 한국방송통신대학 영상정보학과에 들어갔으나 기초가 딸려 10년 만에 겨우 졸업했다.
그의 공부 욕심은 계속되었다. 이웃과 나눔에 대하여 좀 더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싶어서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진학하여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사회 복지사가 됐다.
그는 장학사업에 뜻을 품고 청주에 학교를 지을 계획으로 땅을 매입했지만 과학단지가 들어오면서 그 꿈을 뒤로 미뤄야 했다.
그 보상금으로 방화동에 작은 건물을 구입하고 1층에서 전파사를 운영하면서 쉬지 않고 동전 모으기를 해왔다.
10원 추가 운동과 1원 추가 저축운동을 통하여 계획을 세우면 반드시 실천하고 작은 돈이라도 정성껏 모으면 태산이 된다는 진리를 증명해 보이고 있다.
작은 돈이지만 꾸준히 저금해 큰돈을 만들고 그 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그야말로 지금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의 진정한 기부천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못 배운 설움에 초등학교 검정고시부터 시작하여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기부 천사로 살아가고 있는 그는 말한다.
“제 한은 다 풀었어요. 대학원까지 공부도 했고, 기부도 꾸준히 해오고 있고요. 못난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아들은 조종사 기장으로, 딸은 약사로 올바르게 잘 자라주었으니 아이들에겐 늘 고마울 뿐입니다.”
그는 지금 이순간도 매일 10원 추가 통일저축을 해나가고 있다.
기자가 인터뷰를 진행한 2012년 10월24일 현재 26권째 이어지고 있는 그의 통장에 10원 추가 저축액 88만5928원이 찍혀있다.
그는 통일기금으로 기증할 생각으로 요즘도 매일 아침 10시면 하나은행 방화동지점에 가서 어김없이 10원추가 저축을 한다.
“통일되는 그 날까지 계속 해야죠. 동네사람도 저를 보면 통일기금으로 보태라고 동전을 주고 가요. 식당아줌마, 학생, 이웃, 사무실 직원들이 10원짜리 동전 있으면 주고 가요.”
그는 실버넷뉴스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글쓰기 공부하려고 기자가 됐다는 그가 웃으면서 던지는 마지막 말이 압권이다.
“무학(無學)이 천하를 누비고 다니니 사람들이 신기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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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코리아/ 김명수기자 people365@paran.com>
2012년 10월 27일 15시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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