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주말이 낀 연휴가 되어, 시간 때문에 미뤄두었던 〈호프〉를 봤습니다. 관람객들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영화였고, 특히 좋았다는 사람들의 열성적인 반응이 무엇때문인지 궁금했습니다. 극장에서 내리기 직전, 거의 마지막 기회처럼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유독 귀에 들어온 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씨*.” 욕설이기에 다소 거칠게 들릴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 표현의 적절성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표현이 영화 안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감정을 전달하는지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같은 욕설이 다르게 들렸습니다. 누군가는 분노해서 내뱉고, 누군가는 두려워서 내뱉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한 놀람처럼 들리고, 어떤 장면에서는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탄식처럼 느껴집니다. 때로는 상대를 향한 공격이라기보다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 새어 나오는 절규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분명 같은 단어인데,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달랐습니다. 저는 이 차이가 꽤 흥미로웠습니다. 욕설의 적절성이나 거친 언어 사용의 문제를 떠나, 한 편의 영화가 하나의 표현을 통해 서로 다른 정서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감정은 생각보다 훨씬 세밀하다 우리는 흔히 감정을 몇 가지 기본적인 범주로 이야기합니다. 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 하지만 실제 우리가 경험하는 마음은 이렇게 단순하게 나뉘지 않습니다. 2005년 박인조·민경환의 연구에서는 한국어에서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들을 수집하고 분석하여 434개의 감정단어를 선정했습니다. 여기서 434개는 한국어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단어의 총개수가 아니라, 연구의 기준에 따라 선정된 감정단어 목록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감정뿐 아니라 미묘한 정서적 차이를 표현하는 다양한 단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운함과 섭섭함, 불안과 두려움, 답답함과 억울함, 허탈함과 허무함.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마음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차이를 언어로 구분해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프〉에서는 흥미로운 역전이 일어납니다. 감정을 이렇게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있음에도, 영화 속에서는 하나의 욕설이 서로 다른 정서를 전달합니다. 같은 단어가 다른 감정으로 들리는 이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씨*”이라는 단어 자체가 분노나 공포를 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욕설은 욕설입니다. 그런데 그 표현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목소리로, 어떤 표정과 함께 나왔느냐에 따라 우리가 받아들이는 의미는 달라집니다. 말의 의미는 사전에 적힌 뜻만으로 완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억양과 강세, 말의 속도와 크기, 표정과 몸짓, 앞뒤의 상황과 관계. 이런 정보가 함께 작용합니다.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내뱉는 “씨*”과, 갑작스러운 위험 앞에서 크게 터져 나오는 “씨*!”이 다르게 들리는 이유입니다. 하나는 분노나 억울함에 가까울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놀람이나 공포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같은 음절이지만, 그 안에 실린 정서적 정보가 다른 것입니다. 감독이 이러한 차이를 의도적으로 설계했는지는 저로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는 영화를 보는 동안 그 차이를 분명하게 경험했습니다. 영화가 “이 인물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그가 말을 내뱉는 순간의 표정과 목소리, 그리고 그를 둘러싼 상황을 통해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감정을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남긴 흔적을 통해 알아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감정을 듣는 동시에 추론한다 사실 상대방의 감정 자체를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표정이고, 들을 수 있는 것은 목소리이며, 관찰할 수 있는 것은 행동입니다.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관찰한 단서들을 가지고 상대의 정서를 추론합니다. 친구가 평소보다 말이 없습니다. “괜찮아.” 라고 대답합니다. 말만 보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고, 표정이 굳어 있고, 대화를 빨리 끝내려고 합니다. 그때 우리는 말과 행동 사이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정말 괜찮은 걸까?” 바로 이때 우리는 상대의 감정을 읽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주의점이 있습니다. 단서를 읽는 것과 상대의 마음을 안다고 확신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너 화났지?” 라고 단정하는 순간, 관찰은 판단이 됩니다. 정서 인식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정확하게 맞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관찰한 것과 내가 추론한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화난 것처럼 보이는데, 혹시 다른 마음도 있어?” 라고 물을 수 있는 여지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정서를 이해하려면 세밀함과 겸손함이 함께 필요하다 감정을 잘 읽는다는 것은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두는 유연한 태도를 유지할 때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말의 내용만 보지 않고 억양을 살피고, 표정만 보고 판단하지 않고 상황을 살피고, 내가 해석한 것이 맞는지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다른 사람을 이해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짜증난다”고 느꼈다고 해봅시다. 그것을 곧바로 최종적인 감정 이름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무시당해서 서운했을 수도 있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 답답했을 수도 있고, 실패할까 봐 불안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짜증'은 감정의 결론이 아니라, 더 깊이 살펴볼 감정의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과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정서 수용의 문제가 남습니다. 우리는 감정을 알아차린 뒤에도 그 감정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런 일로 화내면 안 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예민하지?” “별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속상하지?” 이렇게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다시 평가합니다. 하지만 감정을 수용한다는 것은 그 감정이 옳다고 인정하거나, 감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내 안에서 실제로 그런 감정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것에 가깝습니다. 화가 났다면 화가 난 이유를 살펴보고, 두려웠다면 두려움을 알아차리고, 서운했다면 서운했던 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감정은 없애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이해해야 할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 속 “씨*”이 다시 보인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씨발”도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그 말 자체가 여러 감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같은 표현이 서로 다른 정서적 맥락에서 사용되면서, 관객에게 다른 감정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장면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표정을 살피고, 앞뒤 상황을 연결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로소 그 말에 담긴 정서를 이해합니다. 결국 감정은 언어 안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하는 방식에도 있고, 침묵에도 있고, 표정에도 있고, 행동에도 있고,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이해하려면 말의 내용만 듣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을 잘 이해한다는 것은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호프〉를 보며 흥미로웠던 것은 감정에는 하나의 표현 방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감정단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들은 마음의 미세한 차이를 표현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감정은 언제나 정확한 이름을 달고 나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욕설로,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짜증으로, 때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정서를 잘 이해한다는 것은 감정단어를 많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표현된 것과 그 안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것 사이를 살펴보는 능력. 그리고 내가 보고 있는 것을 곧바로 상대의 마음이라고 단정하지 않는 태도. 어쩌면 이것이 정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능력일 것입니다. 영화 속 같은 “씨*”이 장면마다 다르게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한마디도 그 사람이 놓인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것은 타인의 감정뿐 아니라 나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지금 화가 났다.” 에서 멈추지 않고, “그 화 아래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하고 한 번 더 들여다보는 것. 감정을 없애려고 하기 전에 알아차리고, 판단하기 전에 바라보고, 단정하기 전에 조금 더 머물러 보는 것. 어쩌면 정서 인식과 수용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호프〉에서 반복되던 같은 한마디가 장면마다 다르게 들렸던 것처럼, 우리의 감정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처음 이름 붙였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섬세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테니까요. 참고한 연구 박인조·민경환(2005). 「한국어 감정단어의 목록 작성과 차원 탐색」. 한국심리학회지: 사회 및 성격, 19(1), 109-129. #영화호프 #영화속심리 #정서인식 #정서수용 #감정이해 #감정단어 #심리학 #심리칼럼 #영화심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