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공평한 구원을 원하십니까?
오해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회가 가진 중요한 교리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불공평한 예정이 아니라 공정하고 자비로운 예정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어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들을 이미 예정해 놓으셨다고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매우 불공평한 분으로 몰아간다. 하나님 자신만이 가지는 주권을 사용하여 모든 사람의 구원과 멸망을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 예정론의 중심 가르침이다.
예정론은 중세기에 어거스틴에 의해서 처음 이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다음과 같은 반대와 의문에 부딪혔다. 만일 모든 사람의 구원과 멸망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전도할 필요는 무엇이며 성경을 공부할 필요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멸망 받을 사람들을 이미 예정해 놓으셔서 각 사람이 그 예정대로 멸망을 받는 것이라면 왜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악인의 죄를 책망하고 심판하는 말씀이 나오는가? 어차피 모든 사람의 구원과 멸망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넓은 길을 걷지 말고 좁은 길을 걸어야만 구원에 이른다는 경고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예정론이 이 세상에 나온 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러한 도전과 질문에 대한 명백한 답을 내놓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비 성서에 따른 예정론을 따라가는 현실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여전히 하나님의 예정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예정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예정 하심 그 중심에는 온 인류에 대한 깊은 사랑과 동정이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4). 주의 약속은 &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예정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 즉 누구든지 주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하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다. 참으로 공평하고 자비로우며 사랑이 충만한 예정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예정이야말로 다른 어떤 가르침보다도 하나님의 성품을 정확하게 반사하는 교리이다. 하나님의 예정을 올바로 이해해야만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희생이 분명하게 우리의 가슴에 와서 닿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진리를 올바로 알면 감사의 정신을 가지고 좁은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멸망하게 될 것을 이미 아신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그렇게 되라고 강제로 정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미리 아시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강제적인 예정이 아니라 공평한 예정이며 또한 우리의 인생 전체를 한 눈에 보시는 예지(豫知)이다. 불공평한 예정을 믿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 절을 가지고 자신들의 믿음을 주장하지만, 이 말씀은 불공평한 예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지하시고 당신이 종을 미리 선택하시는 모습이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렘 1: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한평생의 삶을 미리 내다보실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끝까지 구세주를 거절하거나 소홀히 여김으로써 멸망 받게 될 것을 아신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어머니 복중에 있는 태아를 당신의 선지자로 선택하는 예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인정한다면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사고락과 구원과 멸망을 모두 아시지만 우리 모두에게 십자가의 은혜를 허락하시고 그것을 붙잡고 믿을 기회와 선택의 권리를 주심으로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요 3:16). 구속의 역사가 이렇게 이루어져야만 각 사람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자신이 범하기로 선택한 죄와 그리스도를 등진 반역과 진리를 거절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때 아무런 원망이나 불평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참으로 공평한 예정이다.
덫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구원을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불공평한 예정론을 믿게 되면 그것은 곧바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로 이어진다.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구원의 예정에 포함되지 않았을 때는 지옥의 유황불 속에서 엄청난 형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길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구원과 멸망에 대해서 전혀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왜 하나님은 이렇게 불공평하게 우리를 취급하실까? 라는 음성을 듣게 되지만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런 질문이나 의문도 표현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된다.
불공평한 예정을 믿는 사람은 어차피 자신의 구원과 멸망 여부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결정되었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경고와 권고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그 결과 그의 삶과 신앙 속에는 철저한 순종과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열심이 일어나기 어려워지며 점점 더 세속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의 예정에 대하여 오해를 한 사람들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한 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한 번 받은 구원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 와 같은 교리에 아주 쉽게 넘어가게 된다.
한 가지 두려운 사실은 수많은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예정보다는 불공평한 예정론을 믿기 원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불공평한 예정론은 구원을 매우 쉽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불공평한 예정론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단번에 자신의 구원을 확정 지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한 번 얻은 구원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고 믿게 하기 때문이다. 예정론을 가르치는 설교자들은 항상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한 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한 번 받은 구원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 와 같은 말로써 예정론을 매혹적으로 포장하고 있다. 얼마나 매혹적인 교리인가?
믿기만 하면 구원은 바로 결정되고 한 번 얻은 구원은 자신의 삶과 신앙에 관계없이 항상 보장된다는 식의 설교가 얼마나 아름답게 들리는가? 아무리 심한 죄를 범하고 배도 하며 진리를 부인하더라도 이미 결정된 구원 속에서 평안과 안전감을 느끼면서 사는 길을 누가 거절하겠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불공평한 예정론을 가르치는 교회마다 교인들이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을 믿으며 구원을 경험했던 사울 왕도 교만과 이기심에 빠져 배도의 길을 고집함으로써 결국에는 멸망하게 되었던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사울에 대하여 그가 새사람이 되 었다고 기록했다.
네게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그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 (삼상 10:6). 그러나 사울은 그의 높이 들린 위치에서 뒷걸음질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삼상 31:1-6). 사울 왕은 새사람이 되었으나 뒤로 물러나서 죄악 속에 빠지게 되었고 끝까지 하나님께 반역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다가 결국에는 아무런 회개도 하지 못한 채 죽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 6:4-6).
진실로 하나님의 예정속에 포함되기 원하는가?
오늘날 불공평한 예정론은 교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르침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만일 성경 학자들과 목사들이 하나님의 예정을 올바로 교인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친다면 예정에 대한 가르침은 교회에서 가장 인기 없는 가르침이 될 것이다. 만일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예정을 참으로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예정 하심을 앞에 놓고서 고뇌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받게 될 사람들은 가시밭길을 걷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좁고 가파른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핍박과 박해, 가난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교회로부터 쫓겨남, 악인으로 취급받음, 그리고 모든 의무를 짊어지고 인생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그 길을 걷게 될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을 받은 자들의 삶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을 받은 자의 모습일진데 누가 하나님의 예정을 받으려고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을 예정하셨다고 마냥 좋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이 가진 나머지 절반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들어가는 특권을 누릴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도 참여해야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통이 먼저 오고 영광이 나중에 온다. 좁은 길이 먼저 나타나고 하늘 도성이 나중에 나타난다. 만일 불공평한 예정론을 믿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들 중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예정 속에 포함되지 않게 해 달라고 간절히 원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늘의 예정을 받았던 예수 그리스도마저도 십자가의 고통을 목전에 두시고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시지 않았던가! 옛적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예정을 받은 사람들의 삶을 성경 속에서 살펴보아라. 그런 다음에 나는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구원이 확정되었다! 라고 말하라. 세상은 하늘의 예정을 받았던 사람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부러워하거나 흠모했던 적이 없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 예정 받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그것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애를 썼다. 예정 받은 자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므로 세상은 그를 미워한다. 예정 받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주인인 그리스도를 닮아서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2-3).
불공평한 예정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구원과 멸망을 결정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별로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구원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있다. 라고 말하면 예정론을 믿는 사람들은 곧바로 그렇다면,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행하여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닌가? 라고 질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해야 하고, 그분께 계속해서 붙어 있어야만 한다. 그분께 확고부동하게 붙어 있으면 그 결과로 우리의 성품과 생애 속에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진다.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 바로 그것이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분명한 몫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내쫓지 않으신다. 그분에게서 우리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자신을 그분에게서 스스로 끊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져 있다. 우리는 지성을 사용해서 취사선택할 수 있는 도덕적인 존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우리의 의지와 판단력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하늘의 사물들 대신에 세상의 사물들을 선택하기로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과 결심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우리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옳은 일을 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단지 성령께서 마음속에서 역사 하신 결과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께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이 끊임없이 샘솟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복음을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나는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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