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민의 ‘김소월의 시’ 이야기
김소월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없다.
그의 시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한(恨)이 뭉쳐져 있다. 그의 시에는 조선의 전통적인 서정성을 통해서 한국의 향토성까지 진솔하게 담아냈다고 한다. 내가 한국 사람이다 보니 그의 시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많은 시 중에서 ‘팔베게의 노래’라는 시의 이야기를 하겠다.
소월은 1902년에 평북의 구성군에서 태어났으나 유년의 대부분을 곽산군에서 보냈다. 곽산 보통하교를 다녔다. 아버지는 소월이 어릴 때 철도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가 일본인 목도군에게 폭행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소월은 영변에서 광산을 운영하는 할아버지에게 가서 지내면서, 오산학교를 다니다가 서울의 배재학교를거쳐 일본 도코 상대로 갔다. 이때부터 시를 쓰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동경 대지진 때 학업을 포기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 지식인은 일거리도 없으니 고등 룸펜 생활을 하였다. 소월도 하는 일이 없어서 할아버지에게 찾아가서 일을 도운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세월을 보냈다.
그가 머문 집은 담을 사이에 두고 술집이었다. 기생도 있었다. 이때 채란이라는 기생이 부른 ‘팔베게의 노래’라는 노래가 소월의 가슴을 울렸다. 이에 쓴 시가 ‘팔베게의 노래’이다. 채란이가 불렀다는 노래는 전하지 않으나 소월의 시는 남아있다.
팔베게의 노래
김소월
첫날에 길동무/ 만나기 쉬운가
가다가 만나서/ 길동무 되지요
날 글다 말아라/ 家長님만 님이라
오다가다 만나도/ 정 붓들면 님이지
화문석 돗자리/ 놋촉대 그늘엔
70년 고락을/ 다짐 둔 팔베게
드니는 결방의/ 미닫이 소리라
우리는 하룻밤/ 빌어 얻은 팔베게
조선의 강산이/ 내가 그리 좁더냐
삼천리 서도(西道)를/ 끝까지 왔노라
삼천리 서도를/ 내가 여기 왜 왔니
서포(西浦)의 사공님/ 날 실어다 주었소
집 뒷산 솔밭에/ 버섯 따던 동무야
어느 뉘집 가문에/ 시집가서 사느냐
영남의 진주는/ 자라난 내 고향
부모 없는/ 고향이라오
오늘은 하룻밤/ 단잠의 팔베게
내일은 상사(相思)의/ 거문고 베게라
첫닭아 꼬꾸요/ 목놓지 말아라
품속에 있던 님/ 길 차비 차릴라
두루두루 살펴도/ 금강 단발령
고갯길도 없는 몸/ 나는 어찌 하라우
영남의 진주/ 자라난 내 고향
돌아갈 내 고향은/ 우리남 팔베게
채란이는 영남 땅 진주가 고향이다. 배운 것도 없고, 권번 출신도 아니다. 손님따라 이리저리 떠돌이를 해야했던 돌뱅이 즉 삼패기생이었다.(삼패란 가무도하고, 술시중도 하고 몸도 팔았던 최하류의 기생이었다. 아예 기생으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술집 작부라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채란이는 13세 때 정신이상을 앓던 아버지가 집을 나가자 어미는 돈 몇 푼을 받고 행상에게 넘겼다. 채란은 어린 나이에 이리저리 팔리는 몸이 되어서 조선 팔도는 말할 것도 없고, 홍콩, 중국, 대련, 청도 등으로 떠돌다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서 고향 진주와는 수천리 떨어진 평안도 땅 영변의 싸구려 술집까지 흘러들어왔다.
이때의 소월도 갈곳을 잃고 할아버지가 계시는 영변 땅에 머물고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서러움과 애환에 사무친 시를 발표했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등을 발표했다. 이때 채란이라는 기생이 먼 남쪽 고향 진주를 바라보면서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담을 넘어 소월이 머무는 집으로 흘러왔다. 감성이 예민하였던 소월은 자기의 처지와도 닮은 노래에 빠졌다. 담 넘어로 들려오는 슬프고도 절절한 노래를 채록하여 쓴 시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소월의 시만 전해오고 채란이가 불렀다는 노래는 전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소월의 시를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편다. 노래에 이끌리어 담 넘어 술집으로 채란을 찾아갔으리고 말한다. 내 생각에도 그랬으리고 믿어진다. 채란이에게 팔베게를 해준 사람이(수많은 사람이 있었겠지만 시의 주인공은 소월이었으리고 믿어진다.) 소월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라면 ------. 2014년에 소월과 채란이의 사랑을 다룬 연극을 공연하여 인기를 얻으므로 이 시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많은 사람이 그러기를 바랐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제 소월의 시 ‘팔베게의 노래’를 읽으면서 채란이의 마음도 읽어보자.
시의 시작은 채란이가 지금의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이다. 결혼하여 함께 사는 가장이어야 님인가. 오다가다 만나도, 이 말은 하룻밤을 보내도, 라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말이다. 그러면서 조선의 남쪽 땅 진주에서 서도의 땅의 연변까지 흘러온 자신의 신세를 말한다. 서포의 사공님이 실어주어서 왔다는 것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고, 이리저리 떠밀려서 여기까지 흘러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룻밤 팔베게를 해준 사람을 님이라 여기고 ---. 팔베게를 해준 사람이 소월이라고 여겼다면, 연극처럼 눈물이 나도록 아픈 사랑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진주 고향의 뒷산을 함께 올라서 송이버섯을 따던 친구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어느집 양반가에 시집가서 며느리로 잘 살고 있겠지. 진주는 부모도 없는 땅인데, 그 땅이 왜 이리도 사무치게 그리운지, 갈 수 없는 땅인데도 마음에서 놓지 못한다. 채란이에게는 어릴 때의 친구를 회상하는 것이 마음의 유일한 위로였으리라.
오늘은 하룻밤 팔베게 해주는 사람이 님인데, 날이 새면 또 떠나가버릴테니, 새벽을 알리는 닭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자란 곳은 영남의 남쪽 땅 진주인데. 가고 싶어도 고갯길도 없으니 나는 어쩌라우 라며 슬프게 노래한다.
채란이가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은 우리님의 팔베게이다. 그 팔베게도 날이 밝으면 또 떠나버릴테고------.
소월은 이렇게 노래했다.
채란이의 처지가 자기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였으리라, 채란이를 통해서 자신의 아픔을 노래하였으리라고 본다. 왜냐면 조부의 광산 사업이 망하자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돌아간다. 남서면에 개설한 동아일보 지국마저 실패하자 술로 세월을 보내다 33세에 생을 마감한다. 일부에서는 자살설까지 도는 것을 보면, 채란이의 신세가 자기의 신세나 같다고 생각했나 보다.
첫댓글 영변 약산 진달래도 채란을 생각하며 썼을까요....
이런 사연은 소월시대 뿐 아니라 1950년대 1960년대에도 있었지요...
제가 남산동 자취방에서 들었던 이름모를 누님의 노래 <동백아가씨>처럼... 휴... ~*~...
제가 소속되어 있는 '영남문화회'에 음악사를 하는 손태룡 선생님이 계십니다. 나는 게을러서 책상에 앉아서 책을 뒤지고, 인테넛으로 뛰어다니면서 자료를 구하는데 손선생님은 발로 뛰어다닙니다. 왜정 때의 유행가를 소리하는 기생이 많이 취입했다네요. 동백아가씨 처럼 히트하지 못하면 잊혀지고, 사라지고 ----- 10년 쯤 전에 경주의 노 기생이(그때 80대라고 했음) 노래를 불렀다면서, 인터뷰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채란이도 노래를 부른 기생인지, 그때 유행하던 노래에 자기의 한을 실어서 불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채란이 이야기를 읽고는 가슴이 싸아해오는 걸 느꼈습니다. 나의 공부방에 소개했더니 다들 -----
김소월의 시 <팔베게의 노래>에 그런 사연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시가 태어난 배경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자나깨나 앉으나 서나>에는
사랑을 해본 사람만이 느끼는 진솔한 정서가 아른거립니다.
이동민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