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부름받은 것으로, 바로 거기에서 예배의식, 시편, 그리고 종교의 내용이 나왔다. 시인은 자연 현상에 직면하였고, 초기에는 부름받은 자기의 직업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를 제사장이라고 불렀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대 시인은 자기의 시를 방어하기 위해 거리에서 대중들 사이에서 얻은 옷을 입는다. 오늘날의 사회적 시인은 아직도 초기의 제사장 계열의 일원이다. 옛날에 그는 어둠과 결탁했지만 이제 그는 빛과 결탁해야 한다.”(위의 책, 파블로 네루다) “나는 독창성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시대가 만든 또 하나의 물신숭배로서 어지러운 속도로 붕괴되고 있다. 나는 어떤 언어, 어떤 형식 그리고 어떤 창조적 수단으로든 시인이 자기의 개성에 이른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철저한 독창성은 현재적 발명품이고 부정 선거이다. 자기 나라에서 자기 나라 언어의 또는 세계의 계관시인이 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선거인단을 찾으러 날뛰는데, 그 왕자에 경쟁자가 될 만큼 가까이 온 사람들을 향해 욕을 퍼붓는 것을 일삼음으로써 시는 익살극으로 변해 버린다. 자신의 내적 기준을 지탱하는 것과 자연, 문화 그리고 사회적으로 개입하는 삶이 부여하는 새로운 추가적 재료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는 것, 이것이 시인에게서 가장 좋은 성과를 끄집어내는 데 있어 여전히 중요하다. 시인은 자기 작품에 스며드는 자기의 감정을 엄격한 손길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 시인은 말하자면 위급한 상황에 대비해 주머니에 예비물자를 준비해 놓아야 한다. 첫째, 기존의 시 형식들, 단어들, 소리들 또는 벌처럼 윙윙거리며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들을 예비해 놓아야 한다. 이런 것들을 재빨리 낚아채서 자기 주머니에 넣어 놓아야 한다. 마야코프스키는 항상 뒤져 볼 수 있는 작은 공책을 지니고 다녔다. 내 작품 상당 부분에서 나는, 시인은 주어진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공동체 전체로서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 고대의 거의 모든 위대한 작품들은 요청에 응해 씌어졌다. <농경가>는 로마 농촌의 농업을 위한 선전물이었다. 시인은 대학 또는 노동조합, 숙련 노동자나 전문직 종사자를 위해 글을 쓸 수 있다. 자유는 단순히 이것 때문에 잃은 것이 아니다. 신비스러운 영감과 신과 시인과의 교통은 이기심에 의한 발명품이다. 가장 위대한 창의력이 발산되는 순간, 그 산물은 시인이 읽은 책이나 외적 압력의 영향이 스며 있는, 부분적으로 다른 사람의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네루다는 에리히 프롬이 말한 선택처럼 이 시대의 시인들에게 강조한다. “그 선택은 장미 정원은 절대 아니다. 잔혹하고 부정의한 전쟁들, 끊임없는 압박, 돈의 공격성, 모든 부정의가 매일 매일 더욱 강력하게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온갖 유희를 미끼로 유혹하는 체제까지. 오늘날의 시인은 그의 고뇌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어떤 사람들은 신비주의로 도피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이성의 꿈속으로 도피하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의 자생적이고 파괴적인 폭력에 매료되었는데, 이로 인해 그들은 오늘날과 같은 교전적인 세상에서 이러한 경험을 항상 탄압과 불모의 고뇌로 이어졌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직관주의자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곧 그가 칠레 민중과 민족을 위해 걸었던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인간의 고통에서 우러나오는 대의를 부둥켜안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회의주의의 참호를 고집하는 개인주의적 자부심에서 배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한 말에서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시의 길은 중심의 외로움이자 비워둠으로써 숱한 목숨을 피워내는 자리이다. 치열한 중심의 괴로움과 함께 오는 빎을 새롭게 채우는 일인 것이다. 장황한 말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보고 느끼고 깨닫는 탁마 작업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장닭공화국
새벽녘 목청을 다듬으며 칠성무당벌레마냥 높은 곳에 오른다 누구나 아침 맞을 준비를 하고 있을까 잠깐 벼슬을 쭈뼛거리다가 길게 한 소리 뽑는다 높은 곳에 올라보니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가 거느린 암탉들처럼 멍청해 보인다 폐계 천원 폐계 천원 한다는 양계장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 튀김닭으로 팔려 가고 닭도리탕감으로 팔려가는 저 수백 단으로 쌓인 유통의 나라를 굽어보며 그레코로만 선수처럼 발바닥을 닦아본다
아침이 온다고 다 같은 아침이 아닌데 아침만 질러놓고 보면 이 나라 모두 아침 빗자루질 같을 거라는 막연한 몽상을 하며 지난밤 닭장 횃대에서 자다 쥐들에게 뜯겨 살이 다 드러난 암탉들을 거느리고 한껏 목을 꼿꼿이 세운다. 양계장에서 팔려온 암탉들 끌고 운동도 시켜야지 그래야 살이 맛있어지지 자, 이제 휴게소로 나가 볼까 존경하는 주인 아저씨, 벌써 일어나 나를 보러 오는 걸 잘 봐 내가 얼마나 신임받는 줄 조금 있다가 보면 알게 될 거야 몸 생각한다고 촌닭, 토종닭 아니면 먹질 않는 사람들의 머리속이나마 꽉 채워주려면 꼭 내 연기가 필요하지 단칼에 쓰러져 죽는 시늉하는 일품 연기를, 연기가 끝나면 양계장 닭으로 바꿔치기 하는 아저씨도 일품이지 어차피 못쓰는 날갯죽지 조금 아픈들 대수로냐 휴게소 가든 벼슬살이 이만하면 좀 좋아 휴계소 가든 닭도리탕 정치하는 맛에 세월 가는 줄 모르는 재미말이야 ㅡ1998. 조선일보 신춘ㅡ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자작나무 눈처럼 ㅡ이종수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면 -저 나뭇잎처럼 부대끼면서도 제 갈 길을 준비하는 저 혼자의 몫? - 이렇게 몸을 불태우는 생각도 없겠지 쓸쓸한 내 껍질을 빌려 먼 편지를 쓰며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눈을 가지고 싶어 했던 날들 ( ...... ) 봄 여름 가을 겨울 뒤의 오체투지를 견딘 싱싱한, 이토록 환한 몸을 본 적이 있는가
내 다시 가슴 속의 칼길을 꺼내 저 눈 속으로 걸어가리라 눈이 멀고 천 길 낭떠러지의 얼음을 깨고 또 낭떠러지에 떨어져도 오체투지의 밝은 눈 속으로 들어가리라 그 눈처럼 살리라 자작나무 눈처럼
시집 ㆍ자작나무 눈처럼ㆍ실천문학사ㆍ2002.9.25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눈이 푹푹 내리는 사계의 끝에서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눈을 가지고 싶어' 인고의 세월을 견딘 '싱싱한, 이토록 환한' 자작나무에게 다가가 다짐합니다. '오체투지의 밝은 눈 속으로 들어가/ 그 눈처럼 살리라/ 자작나무 눈처럼'이라고. 이런 표현이야말로 '자작나무 눈처럼' 순결한 영혼을 가진 시인만이 쓸 수 있는 말이지요. 겹이미지로 다가오는 중의적 표현 또한 언어미학의 진수을 보여줍니다. 백석 시인의 절창 '白樺'도 함께 읽을 기회입니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켕켕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나무 하나로 이렇게 아련하고 애틋한 북방정서를 들려줍니다. 순은으로 빛나는 새날 새아침, 자작나무 눈으로 서 잇는 당신을 향하여 햇살이 달려갑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달함지 ㅡ 이종수
대학교 다닐 때 써클실마다 떡 팔러 올라오던 아주머니 아직도 떡 팔고 있다 김밥말이 인절미 절편 튀김 담긴 고무대야를 내려놓으며 떨이떡이니 팔아달란다 아니 할머니가 다되어 등장할 대목이 아닌데 누가 쓴 쪽대본일까 떡 팔아 빌딩 몇 개는 샀다는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 줄 알면서도 괜히 믿고 싶어진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르내렸던 언덕길만 해도 지구 몇 바퀴는 되었을 텐데 간간히 오리배 타는 유원지에도 나타나곤 했던 신출귀몰한 떡들은 왜 아직도 생계형 떡으로 달라붙어 있을까 아직도 밖으로 내모는 떡의 자식들 돈 없어 못 사먹던 그때나 있어도 안 먹는 지금이나 떡은 마천루를 짓고도 남을 이문 없는 일이거나 늘 꼭대기나 벼랑에 부리고 돌아가는 저것을 달함지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시집ㆍ달함지ㆍ푸른사상, 2012년, ㅡㅡㅡㅡㅡ떡함지를 이고 다니는 생활을 할머니가 되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의 삶은 화자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떡함지를 신비로운 달함지로 바꾸어서 바라본다. 그래야만 변함없이 고단한 생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여자의 생을 납득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화자가 “떡 팔아 빌딩 몇 개는 샀다는/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 줄 알면서도/괜히 믿고 싶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설화가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불가능한 꿈들이 실현되는 설화적 상상이 우리의 삶에서 결여된 부분, 그 빈틈을 메운다.
기린은 사슴 몸에, 소 꼬리, 말발굽과 갈기를 단 사후세계의 수호자이자 천 년을 산다는 덕의 화신 더러운 것은 입에 대지도 않으며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 밟지 않으려 겅중겅중 허방걸음을 딛는 상상 속의 동물이었다가 망할 놈의 자본과 결탁(상상하라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슬로건에 포획된)하여 마천루를 낳는 매판이 되었다 그나마 환속한 굴뚝도사 기질을 어쩌지 못해 구름이나 먹고 산다고 알려졌지만 건초 더미보다 못한 생계에 식구통 같은 눈, 핌프의 형상이지만 국기봉 같은 이념의 뿔 때문에 몇 켤레의 나사와 볼트로 남는 노동자들은 망루를 오르듯 노동의 깃발을 달 수밖에 없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상상 속의 대방광전(大方廣殿)이 되었다 벼랑에 몰린다는 말도 이제는 저 85호 기린에 오른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기린이 생계형 굴뚝이 되고 덕의 화신으로 돌아오는 날을 위하여 저 하늘 꼭대기에서 상상을 끌어내리는 사람들이여
-「기린(麒麟) 85호」 전문
기린은 용이나 봉황처럼 성스러운 의미를 갖는 상상의 동물이다. 이종수 시인은 위의 시에서 신비로운 동물인 기린과 85호를 결합시켜 놓는다. 85호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맞서서 크레인 위에서 항의 농성을 한 김진숙 지도위원과 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한다. “벼랑에 몰린” 노동자들이 기어오르는 크레인의 망루는 기린이라는 상상 속의 세상과는 너무나 현격한 간격을 갖는다. 이처럼 기린의 상상과 절박한 생계의 망루 위로 내몰린 노동자의 ㅡㅡㅡㅡㅡㅡㅡㅡ 새를 본다/ 이종수
새는 늘 '새'라는 접두어처럼 앞서간다 새롭다는 말마저도 새를 두고 한 말, 그늘이란 애시당초 없는, 있더라도 날갯짓으로 털어 낼 줄 아는,
아이에게 종이비행기를 접어 준 사람은 알리라 몇 번 접는 것만으로도 솔숲의 피톤치드 같은 날개가 옆구리에 돋던 것을
그래서 새는 뒤에서 튀어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애면글면 사는 무대 그 양 옆에서 주연배우처럼 당당하게 나온다 늘 앞뜰에 먼저 나와 먹이를 먹고 대사를 읊조리듯 고개를 까닥이고 꽁지깃을 흔든다 목청을 가다듬듯 부리로 나뭇가지를 닦고 나면 여지없이 살구나무에서는 살구꽃이 피고 매화나무에서는 매화곷이 핀다 물고기들이 휘휘 몰아가는 강물처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름을 잊고 신산한 삶에 또 하나의 접두어를 꺼내들게 된다
새롭지 않으면 갖다 붙일 수 없는 묵은 것도 새롭지 않던가 오늘 보고도 내일 아침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처럼 새를 보는 일
이종수시집 ㆍ달함지ㆍ푸른사상, 2012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국숫집 ㅡ이종수
올 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날 제천역 광장 모퉁이 가락국숫집에서 국수를 기다리는 사람들 영월, 태백 지나 강릉, 원주 지나 청량리, 청주, 조치원 지나 대전, 단양 지나 영주 가는 사람들 시린 손 비비고 재재거리며 면발부터 뽑는 작은 국숫집에는 휴가 복귀하는 군인 서류가방 든 영업 사원 친정집 김장 끝내고 돌아가는 아주머니 먼 아들네 딸네 집 가는 할머니, 할아버지 그저 기차가 좋아 하릴없이 국수 먹으러 온 사람들 가지가지 고명을 얹는다
뜨거운 국물에 고춧가루 팍팍 뿌리고 아무래도 겨울은 추워야지 암 추워야지 하며 후루룩 면발 삼키면 주인장은 기차 시간 훤히 꿰뚫고 있어서 대전 손님은 천천히 나가도 된다고 단양 지나 영주 가는 손님은 꼼꼼히 짐 챙겨 나가라는 말 잊지 않으며, 다들 먼 길 잘 가시라고 재게재게 국수를 말아 내놓는다 속내야 세상 가장 손쉬운 국수에 지나지 않지만 다들 잘 먹고 간다는 말 꼬박꼬박 남기고 가는 국숫집 장작불에 손 쬐고 가듯 몇 마장 더 힘내고 가는 올 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날
이종수시집 ㆍ달함지ㆍ푸른사상, 2012 ㅡㅡㅡㅡㅡㅡㅡㅡㅡ
복화술 ㅡ이종수
막걸리 공장의 마지막 유산인 붉은 별돌 굴뚝이 굴삭기 삽날 한 방에 무너졌다 누룩누룩 들러 붙었던 시커먼 속을 드러내면서 목을 젖히는가 싶더니 굴, 뚝! 하고 복화술을 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살지 않았기에 편지 한 장 남기지 않았다 굴뚝 옆에는 연리지처럼 고락을 함께 했던 은행나무, 빚탕감이라도 한 듯 직박구리, 박새를 불러 229-10번지와 223-10번지 맞물린 그 자리에 'ㅁ'자 도근점을 찍어주었다 대궁을 타고 어슬렁거리듯 걷다가 느닷없이 공중부양을 하듯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 옛날 미나리꽝을 지나 막걸리 심부름을 왔을 아이의 입이 은근슬쩍 주전자 주둥이를 물었을 때 그 달착지근하고도 낙지 뻘판 들러붙듯 쭈욱! 하는 소리 같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굴뚝이 사라진 허공 중에 검은 목젓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오소리와 함께 산길을 ㅡ이종수
산에 올라가다가 오소리를 만났다 산길 한가운데 몸을 말고 엎드려 있기에 마을에서 올라온 개인 줄 알았는데 주둥이에 검은 줄 나 있는 오소리, 겨우내 뒹굴었던 냄새, 지하 셋방에서 막 나온 세입자처럼, 배고픔보다 햇볕에 녹여내고 싶은 게 많은 듯 반들반들해진 길에 엎드려 있었다 멈칫 서서 저 백년 동안의 잠처럼 늘어진 투레방석 같은 자리를 지켜주고 싶었다 소스라쳐 놀랄 법도 한데 침대 밖으로 가까스로 내놓는 손처럼 고개를 들었다 놓을 뿐 "어디 아프니?" 하는 말이 불쑥 나왔다 노란 양지꽃이라도 돌돌 찧어 발라주고 싶었다 그러나 뒤에 오는 사람들 때문에 끄응, 일어설 수밖에 없는 천근만근의 몸 질러 갈래야 갈 수 없는 길을 통째로 걸으면서 느릿느릿 올라가는 통에 내 발이 오소리 발처럼 쪼그라들어 오랜만에 산벗을 만나 꽃 이야기, 훨쩍 걸친 날망이여 낮술을 걸친 듯 간잔지런한 바람 이야기 총총 『달함지』, 푸른사상, 2012년, 82쪽~83쪽.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멸 ㅡ 이종수
된장국을 끓이는 아내 곁에서 멸치를 다듬는다 머리를 떼어내고 똥을 추려내니 치가 달아나고 멸만 남는다 스프링이 빠져나간 빨래집게처럼 속절없는 빨래처럼 아물다물 촘촘이 난 이빨 사이로 바닷물을 삼키고 뱉을 때 났을 물소리가 들린다 숲길을 사붓사붓 지나가는 바람처럼 천년 고목에 새로 난 나뭇잎처럼 육시랄! 하다가 허공에 대걸레질을 하듯 먹그림을 그리는 되새 떼처럼, 그것이 곧 적멸(寂滅)이지 않을까 싶어 세멸, 대멸의 밤하늘이 내린 그물질로 한통속을 만들어버렸다가 푹푹 우린 국물에 말아먹는 국숫발처럼 나붓해지는, 멀리 청산 앞바다에 몰렸다가 돌아오는 그것이 적멸이지 않을까 그물에서 별처럼 튀는 그것들을 보다가 다시 야광으로 빛나는 밤바다를 생각하게 되는 것인데 먼바다에서 상어나 고등어 떼에 쫓겨 돌아와 몰린 남쪽 바다가 꼭 그렇지 않을까 싶어 댓발 위에서 꾸덕꾸덕 말라갔을 그 바다가 적멸보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달함지』, 푸른사상, 2012년, 104쪽~105쪽.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용산에서 본다 ㅡ이종수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진실로 몸으로 맞서는 자는 단식을 한다 자본에 살어리랏다 치고는 너무 갸륵한 몸으로 단식을 하며 벼랑 끝에 선다 끝내 목숨줄 하나 붙들고 싸우다 죽어도 모자란 몸, 진실 앞에 떳떳하지만 진실로 죗값을 사하지 못할 만큼 부도덕한 자는 입원을 한다 기름진 몸에 호의호식한 지병이 오리발도 모자라 자유주의를 수호하는 투사가 된 척 입원을 한다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표적수사니 시대와의 불화라며 버티다가 자살로 진실을 묻기도 하고 끝내 몸통을 숨기고 너무도 가볍게 떠가는 깃털이 되어 역사에 더러운 이름 하나 묻는다 제 몸에 기름 부어 등신불이 되고 보탑이 될 수밖에 없는 용산에서 본다, 먼 전방으로 떠나는 새벽 기차 같은, 자본의 심장 위에 떠가는 별, 용산에서 저들이 짓밟고 간 땅 민들레로 뜨는 걸 본다 『달함지』, 푸른사상, 2012년, 110쪽.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꼬막 ㅡ이종수
사는 내내 고통은 내 몸 빌어 숨을 쉴 것이다 뻘숨을 쉬며 자란 고통은 검붉은 눈물을 덮고 있는 깡깡한 껍데기일 뿐이다
어둠의 궁륭을 걷는 별도 뻘배처럼 흐르는 밤, 등에 하나씩 늘어나는 고통의 좌표를 찍지 않으면 별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것을
그래서 벌교 사람들은 꼬막 하나 까먹을 힘이 없으면 죽는 날이 가까워졌음을 안다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꼬막 앞에서 뻘짓하지 말라는 말이다
『달함지』, 푸른사상, 2012년, 56쪽. ㅡㅡㅡㅡㅡㅡㅡ 늙은 개 ㅡ이종수
20년은 훨씬 넘었을 버즘나무에 묶여 어느덧 버즘이 되어버린 듯한, 엷은 바람에 설렁대는 나무처럼 알은체를 하며 귀와 꼬리를 흔든다 문종이를 뚫고 바라보는 건넌방 속의 눈마냥 쳐다본다 순간 누나라고 부를 뻔했다 반투명 유리창 너머 목욕하던 누나를 훔쳐보던 사춘기 시절 그 더운 김 속에서 보았던 꽃과 같았던 신열을 느끼듯 넘겨다 본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말없이 가슴에 버짐처럼 남기고 떠나간 누나의 눈빛을 쓰다듬어 주었다
길 옆에 키워서 길과 아주 친한 개 가끔 발소리에 놀라지만 내미는 손에 머리를 비비고 소같이 뜨거운 혓바닥을 핥아대는 딱정이처럼 눌러앉은 젖꼭지 수보다 많은 새끼들을 낳았지만 한 마리도 옆에 거느리고 살지 못한 개 눈빛은 딴 데다 두고 팔뚝에 다리를 척 걸친다
ㅡㅡㅡㅡㅡㅡㅡ 고등어자반 -이종수
내 소금에 절어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지 내장들은 뜯겨져 나가고 살과 가시로 바람에 널려 햇살 한 조각 한 조각을 만났지 목숨 저 뒤에도 살아 있는 바닷가를 두리번거리며 썰물처럼 빠지는 눈물에 내 생애의 詩들이 긁혀 내려가고 마침내 옆구리에 와 꽂히는 대꼬챙이들
골목 골목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쓰디쓴 소금빛 햇살 너머 작살 끝에 묻어 있는 바다의 폐를 보았지 목숨 저 뒤에 남아 있는 염전을 보았지 연탄불 위에 나는 산동네 꼭두배기에 올라 소금에 절여진 전생들 위를 아슬히 걸으며 그믐달 같은 눈을 치켜뜨고 살과 가시에 힘을 주고 있었지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ㆍ시가 쓰여진 과정 2ㆍ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1강 먹는다는 것 - 김사인 '어린 당나귀 곁에서' ▶2강 가만 있자 그러니까 그게 거, 할 때의 그 가만있자에 대하여 - 고증식 '아직도 처음이다' ▶3강 스침에 대하여 - 송수권 '퉁' ▶4장 세 사람이 함께 쓴 시 - 문정희 '응' ▶5강 서정적 구조 - 박순원 '주먹이 운다' ▶6강 어젯밤들은 어디로 가나 - 양애경 '내가 암늑대라면' ▶7강 달서리 - 장문석 '꽃 찾으러 간다' ▶8강 경계마다 꽃이 핀다 - 신준수 '매운방' ▶9강 지병처럼 찾아오는 것들 - 이재무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10강 별이 말하는 동안 - 박미산 '태양의 혀' ▶11강 몸국 - 손세실리아 '꿈결에 시를 베다' ▶12강 이해인 수녀의 동백가지 꺾는 소리 - 손택수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13강 저수지는 고요의 힘이다 - 장인수 '유리창' ▶14강 고독한 혀, 즐거운 이빨 - 최금진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15강 나무는 겨울에 뜨겁다 - 이진희 '실비아 수수께끼' ▶16강 사람이어서 미안하다 - 김수열 '빙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