뭇가름
미나리 맛이 감치는 것은 봄이 가까워졌다는 기별이다. 미나리는 얼음을 깨부수고 싹틔우며 잠자던 대지에 생기를 불어넣는 풀잎이다. 삼겹살 한 점에 미나리를 돌돌 말아서 먹으면 알싸한 내음이 입안을 감돌며 온몸의 세포를 깨운다. 그 맛을 진정으로 즐길 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유년 시절의 풍경이 영사기 필름처럼 드르륵거리며 돌아간다.
새벽부터 쌓아 올린 몇 개의 더미는 올망졸망한 산봉우리 같았다. 시래깃국에 보리밥을 말아서 후루룩 마시듯 먹는 엄마 곁에서 먼 산을 바라보며 나는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빈 그릇을 받아들고 여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재촉했다. 그릇을 건네는 엄마의 왼쪽 손가락을 동여맨 무명천 끝자락이 물에 젖어 너덜거렸다. 또 손가락을 베인 것이다. 한 줌이라도 더 베기 위해서 숨 한 칸 쉴 틈이 없는 엄마의 곁을 나는 떠나지 못했다.
엄마가 미나리를 베어주면 밑동을 잡고 손가락으로 빗질을 했다. 갓 치장하고 나온 동네 언니의 파마머리처럼 한 올 한 올이 탱탱하게 살아 있었다. 누런 곁 잎을 떼어내고 나무 도마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엄마의 손은 빼고 보태기를 반복하다가 몇 가닥의 지푸라기로 미나리를 묶었다. 칼로 줄기 앞부분을 깔끔하게 쳐내면 단이 완성되었다.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미나리 탑이 올라갔다.
“아주머니는 저울이 필요없는기라.”미나리 단의 무게를 달던 장사꾼의 농 섞인 칭찬에 셈을 넉넉하게 쳐달라고 받아치는 엄마의 얼굴에 함박꽃이 피었다. 엄마의 새벽잠을 파먹고 쌓아 올린 미나리 탑은 트럭을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부드럽게 봄바람이 인다. 옆 논배미에서 흔들대는 미나리의 비릿한 물 냄새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엄마는 논둑을 한 바퀴 돌고는 몇 단쯤 나오겠다고 혼잣말을 하시고는 허벅지까지 오는 빨간 장화를 벗어 던졌다. 논의 크기에 따라 미나리 단이 몇 개쯤 나오는지 엄마는 눈짐작으로도 어림잡았다.
명절 음식에 물렸는지 아이들이 피자를 사 왔다. 여덟 조각의 피자는 한 사람에게 두 개씩 돌아갔다. 피자를 별로 내켜 하지 않는 남편이 한 조각을 남겼다. 서로 먹겠다며 뾰족한 날을 세우는 남매의 모습이 낯설다. 입 짧은 딸이 오늘은 두 조각을 먹고도 남은 것을 차지하겠다고 욕심을 부리고 있다. 어제도 치킨을 남겨두었더니 오빠가 도둑고양이처럼 싹 먹어 치웠다고 볼멘소리를 해댄다.
성인이 된 남매의 셈법은 칼로 무 자르듯 했다. 깍둑썰기하다가 채 썰기를 하며 정확하게 자기 몫을 챙겼다. 나는 어릴 때 그러지 못했다. 엄마의 마음 저울은 언제나 장남인 오빠에게 향해 있다는 걸 알았다.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포기에 익숙한 나를 돌아보며 내 아이들은 제 몫을 당당히 요구하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랐다. 마음도 자를 수 있다면 저울에 달아서 똑같이 나누어 주려 애썼다. 근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고 딸의 서운함은 굳어지고 있던 터였다.
언젠가부터 아들이 집에 오는 날이면 딸은 제 방에 틀어박힌다. 낯선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것 같다는 딸의 고백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아득했다. 자기를 가르치는듯한 오빠의 행동과 말투가 거슬린다면서 속내를 드러냈다. 돌이켜보면 무슨 일을 결정할 때면 딸의 입장보다 첫째의 상황에 따라 계획을 세웠다.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 올 때도 아들의 상급학교 진학에 맞추었다. 친구를 사귀기 힘들다는 딸의 외침을 외면했다. 유적지 답사를 위해 떠났던 여행도 딸의 눈높이에 맞추지 않고 아들의 의견에 따랐던 거 같다. 삼 년의 터울에 맞는 합의점을 찾아야 했지만, 한쪽에 더 무거운 무게추를 달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둘의 마음이 함께 닿을 수 있는 중심점을 만들지 못했다. “저번에 말했는데 귀담아듣지 않았다.”며 입술까지 새파랗게 질렸던 딸의 표정이 가슴을 후빈다.
내가 쏟은 관심만큼 대가와 보상을 바란 것은 아닌지, 아이들이 성취한 결과에 따라 얼굴에는 꽃이 피고 낙엽이 졌을 것이다. 언제나 살갑게 다가왔던 아들에 비해 딸은 크면 클수록 나와 엇박자를 쳤다. 서로의 마음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미나리꽝에서 오빠에게 돈을 건네고는 환하게 웃던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참고서 사야 한다는 말을 차마 꺼내놓지 못하는 내 모습도 보인다.
하세월 미나리 탑을 쌓았던 엄마의 뭇가름은 손길 따라 정확했지만, 그보다 더 시간이 얹혔던 자식을 향한 생각 탑은 언제나 고민과 회한으로 가슴앓이를 해야 하였을 것이다. 그 흔적은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엄마는 팔순이 넘은 지금도 텃밭을 가꾼다. 참기름이며 고춧가루를 당연한 듯이 갖다 먹었다. 오 남매에게 참기름 한 병이라도 똑같이 나누어 주기 위해 참깨를 사서 기름을 짜주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아이의 대학 등록금에 보태라고 옆구리에 찔려 주었던 돌돌 말린 신문지에는 미나리 잎이 납작 엎드려 있었다. 초록의 색과 향기를 그대로 품은 채였다. 성치 않은 다리를 질질 끌며 미나리꽝에 붙박인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지금도 그 돈은 서랍 한 켠에 있다. 어쩌다 서랍 문을 열면 생각할 틈도 없이 눈물버튼을 누르고 만다. 이등분 한 내 마음이 오등분 한 엄마의 마음보다 크다고 할 자신이 없다.
제일 까다로운 뭇가름은 자식들에게 주는 마음을 가르는 일이 아닐까. 두부 자르듯 토막 내지지도 않는 일이다. 때론 그게 물건이나 돈으로 교묘하게 둔갑한다.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고 크기를 비교하는 어리석음으로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고 만다. 깍두기나 무생채에 들어가는 양념은 거의 같다. 며칠 지나 먹어 보면 맛은 천지 차이다. ‘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크기에 따라 양념을 흡수하는 능력이 다르다는 것을 나중에야 눈치채고 내 양념 뭇가름이 잘못된 걸 알았다.
뭇가름은 균형이다. 오늘, 쌀 오십 킬로 생선토막 천 개, 수박 열다섯 통 그리고 북엇국으로 천 명의 식사를 준비했다. 언제나 똑같이 나누어 주길 애쓰지만, 많이 남아서 버리는 일도 있고 적은 양에서 또 뭇가름해서 나누어 주기도 한다. 매일 배식하면서도 끝나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개운치 않다. 아이들이 적은 양으로 상처를 받지 않을까 염려도 된다. 군대에서의 배식 실패는 총알 빠진 총이라고…. 남편은 곧잘 그 말을 하였다. 배식할 때면 비장함마저 든다. 밥 짓는 일을 복 짓는 수행의 길이라고 했던가. 매일 그 뜻을 헤아려 본다.
며칠 전부터 군대의 배식이 언론에서 떠들썩하다. 사진에 찍힌 도시락에는 건더기 하나 없는 오징어 국, 김 하나가 전부였다. “먹지 못한 자의 서러움을 아냐.”고 어느 군인의 외침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부모님에게서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듣던 말이 젊은 청년의 입에서 나왔다. 밥 굶는 나라도 아닌데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군대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민다. 분명 오징어가 들어가고 무와 파도 함께 끓여졌을 것이다. 김치나 다른 반찬도 있었을 것이다. 군 당국은 뒤늦게 사과하면서 재발 방지를 약속하지만, 불신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콩 한 쪽도 나누어 먹어야 한다. 배고픈 서러움이 제일 크다.’ 고리타분하고 시대에 뒤처진다고 생각했던 그 말들이 절로 새겨진다.
인생의 나이를 뭇가름해본다. 널빤지 같은 엿 덩어리에서 한 조각씩 나누듯 삶을 쪼개었다. 엿장수 마음대로의 뜻에 나의 삶에서조차 주인공에서 비켜 선적이 있었다. 최선을 다하지 못한 한 지점에서 언제나 무릎이 꺾이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서 무릎에 든 푸른 멍이 없어진 줄 알았다. 더 깊이 파고들어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깨닫는다. 숱한 뭇가름의 지난한 시간을 합쳤다가 다시 나누면 지금과 다른 내가 되었을까.
판판하고 넓게 켠 나뭇조각으로 만든 의자보다 여러 조각을 이어서 만든 나무 의자가 더 안락하고 여유롭다. 틈새가 연결해주는 그 공간에 바람과 공기가 넘나들기 때문이다. 뭇가름되어지고 뭇가름하면서 든 멍을 다독이며 내 삶의 뭇가름에도 작은 행간이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