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차원적 인간] ㅡ kjm / 2021.9.19
내 안에 내가 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참 아름다운 세상이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는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무질서한 세계다.
내 안의 나와 내 밖의 나가 이렇게 너무도 다르다면, 그래서 이해가 안 되고 적응하기도 어렵다고 느낄 때, 분노가 일어나는 동시에 비판적 의식이 싹튼다.
이렇게 새로운 이상향이 생겨나고,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에서 고민을 하는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이상향은 현실적으로 있는 세계가 아니라, 가능하다고 믿는 가능성의 세계다.
그것이 저 너머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곳으로 가려고 하지만 현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점차로 현실의 거대한 벽을 느낀다.
현실과 이상과의 모순은 긴장 관계를 낳고, 비판적 생각은 점점 적대적으로 변해간다. 가로막고 있는 뭔가를 부셔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사회는 현실의 나를 '끊임없이 소비하는 존재'로 만들려 한다는 것이다. 즉, "일차원적 인간"(마르쿠제)이 되어간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선배에게 처음 듣는 소리가, "너 아직도 진보 놀음하냐?"는 힐난이다.
적당히 타협하고 굴복하라는 소리다.
내 안의 내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이상 세계가 불가능 세계로 바뀌어지는 최초의 순간이다.
선배로부터 배워지는 것은, 체념 굴복 타협 약속 복종과 같은 것들 뿐이다.
내 안의 내가 점점 지워져가는 '소외된 인간'의 자신을 참담한 심정으로 느낀다.
머릿속을 휘젓는, 인간부속품, 끊긴 사다리, 길들여진 노예, 소비적 존재감, 소모적 인간, 저항의 봉쇄, 복종의 강요, 거세된 사회 등등의 단어들이 머리 위를 날아다닌다.
내가 가치를 두던 것들은 족족 '허위 의식'(거짓 이데올로기) 속에 파묻혀버린다.
내가 원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해서,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강요받아왔던 것이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비판 의식은 점차 무뎌지고, 내게 허용되는 것은 오직 돼지우리 안에서의 자유다. 평등에 대한 생각은 사치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는 시장의 자유를 말하는 거지, 나의 자유를 뜻하는 게 아니다. 또 시장안에서의 나는 자유로운가? 내 자유란 그들(생산자)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소비의 자유일 뿐. 그들은 그것을 공정하다고 말한다.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는 건 나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
나의 노력은 가진자를 위한 노력이고, 나의 능력은 가진자를 위한 봉사인 것이다.
반드시 그럴 때에만 나의 노력과 능력이 인정받고 빛난다.
가령, 남들 연봉이 삼사천일 때, 그 연봉의 두 배를 받고 어느 부잣집의 가정부나 관리인으로 들어갔다고 치자. 주인의 신뢰로 30년을 근무했으면, 내 젊음과 노력들은 결국 주인을 위한 봉사였던 것이다.
자기가 자기 길을 개척하지 않고 남의 길을 대신 가주는 것이 내가 처음 바라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주인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주인의 비위를 거슬러서는 안 되고, 주인의 손가락질에 따라 움직이고, 주인에게 금제당하고, 주인집 반경 내에서만 인생이 허용되는. 그리고 아주 가끔씩 허락받는 자유에 감지덕지하고.
모순을 일으키는 원인들에 대한 적대적 감정은 어느새 마사지되어 복종심으로 바뀌어지고, 따라서 비판 의식도 사라져, 일차원적 인간으로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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