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교리를 사사받고 있는 스승님 글
해인사에서 발간하는 월간 해인에 실은 글
약간의 편집으로 올려봅니다
인간은 선택(選擇)된 존재라 한다. 뭇생명 가운데 만물의 영장으로서 태어난 자체가 선택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인연의 소치라고 보는 것은 불교의 교설이요 일반적으로는 선태된 존재라는 쪽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인연에 의한 존재란 인과(困果)의 법칙(法則)에 따라 이루어져가는 변화의 한 순간이 포착된 상태를 뜻하므로 더욱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데도 우리는 보통 선태에 촛점을 맞추곤 한다.
태어나면서 선택에 길들여진 존재, 우리 인간은 성장하는 단계 매 순간마다 또 다른 선택을 강요당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네 마음에서 선택을 스스로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백화점이나 시장에 가서 장난감을 고르고 유치원에 들어가서는 숫자를 고르고 색깔을 고른다. 학교생활 16년간에 우리가 접하는 모든 문제들도 대부분 선택을 필요로 한다. 대학에서는 그래도 레포트와 같은 주관식 답안지를 많이 요구하고 있지만 학력고사와 같은 가장 중요한 단계에서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사지선다형 객관식 문제를 내놓고 답을 강요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풍부한 감성과 상상력을 감퇴시키는 경우가 있다.
하긴 입시위주의 공부라는 것이, 사지선다형 학력고사에서 쉽게 맞출 수 있도록 암기위주의 공부만을 뜻하므로 언제 자신의 그 풍부한 상상력과 공상력을 키워왔겠는가 싶다.
그렇다고 문학이라든가 철학이 결여된 학생들에게 레포트 작성을 요구한다면 그 또한 문제일게다. 그리하여 자기의 적성에 맞는 대학(학과라는 말이 더욱 적당함)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무조
건 일류대학을 고집하는 것도 공부하여온, 길들여온 선택이라는 말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게끔 부모라든가 어른들의 강요에 의하여 모순을 저지르고 있다.
어려서부터 삶의 가치 추구라든가 삶의 철학에서의 길을 막아버렸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늘 불안하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 암담하다. 그놈의 ‘선택’에만 매달려 상상(공상이라도 좋다)의 나래를 활짝 펼쳐보지 못했고, 또한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졸업을 하고 나서 취직을 하는 데도 제 적성을 살리지 못하고 우선 대우 좋고 장래성이 좋은 곳만을 찾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그것이 결혼에로 연결된다. 고르는 일에 익숙해진 버릇을 이제 좀 바꿔보고자 하지만 부모의 강권에 의해 좌절된다. 이른바 ‘궁합(宮合)’ 때문이다. 어른들이 자신의 삶을 반영하여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평가라든가 삶을 이끌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얼굴도 모르는 처지에 ‘궁합’이 안 좋다고 잘라버린다. 하지만 무턱대고 어른들이 잘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분들이 또한 그분들 부모로부터 익혀오고 강요 당해온 습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시 복잡한 세상을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쌓아온 후유증과 불안감 때문이다. 그분들도 철학이 결여되고 참된 종교관, 인생관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가 금년에는 목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 딸이 언제쯤 시집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올해는 우리 손주녀석을 꼭 넣어야겠는데 어때, 될 것 같아요?” “우리 아들은 무슨 띤데 몇 살짜리가 좋아요?” “스님, ‘궁합’ 볼 줄 아시지요?” “우리 딸 궁합 좀 봐주세요” “아빠(자기 남편)께서 승진할 수 있을 것 같에요?”
그리고는 생년월일시(生年月日時)라고 하는 사주팔자(四柱八字)만을 내어놓는다. 사주팔자란 갑자(甲子) 을축(乙丑)하는 간지(千支)로써 태어난 해, 태어난 달, 태어난 날, 태어난 시에 대한 태세와 월건과 일진과 시진(時辰)이 모두 넷이므로 사주요, 간지로는 여덟 자이므로 팔자라 한다. 얼굴도 모르는 데 사주만 내어놓고 봐달라 하니 내가 언제 궁합보고 사주보는 사람이던가. 사실이지 나는 그런 것을 아예 배우지도 않았고 볼 줄도 모르므로 일러주지 않는다. 하지만 오죽 불안하고 답답했으면 그 먼곳까지 달려왔겠는가 싶다.
그러나 우리 생각해 보자. ‘궁합’이란 과연 신빙성이 있는가 부처님의 말씀을 벌면“모든 중생들은 동업(同業)과 별업(別業)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한다. 능엄경(楞嚴經)의 말씀이다. 이를테면 육도(六道)의 갈래에 태어난 생명은 모두가 동업이지만 인간과 나머지 다섯 갈래와는 별업이다. 같은 인간 쪽에서 보면 동업이지만 서양과 동양은 별업니다. 같은 동양인은 동업 때문이지만 한국과 그외의 동양은 별업이다. 같은 한국인에서 보면 동업이지만 서울과 지방은 별업이다. 같은 서울사람들은 동업 때문이라지만 종로사람과 관악사람은 별업이다. 같은 관악산 기슭에서 사는 사람은 동업이지만 봉천동 사람과 남현동 사람은 별업이다. 같은 남현동 사람은 동업이지만 다른 터(番地)에 사는 사람은 별업이다. 같은 터에 사는 사람은 동업이지만 어떤 방을 쓰느냐에 따라 별업으로 나뉘어진다. 특히 아파트 같은 경우는 그 별업이 극심하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생년월일시를 갖고 사람의 운명을 판단하지 말라 하셨다.
요즈음처럼 인구가 마구 늘어나는 시대에는 한 시간(120분=干支로 보았을 경우)에 남한에서만 약 100명이 태어난다. 누가 이들의 운명을 판단할 것인가. 아무리 같은 시간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핏줄(유전공학에서 말하는 유전인자도 포함하여)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추구하는 세계가 다르고 종교와 철학, 사상과 문화체계가 다르고, 교양이나 교육수준이 다르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고 피부가 다르고 생김새마저 같지 않은데 어떻게 사주만 갖고 운명을 판단한단 말인가. 특히 그의 전생(前生)에서의 업(業)이 어떠한 것이었느냐도 모르는 상태에서 말이다.
하지만 시간적인 면에서 본다면 남한에서 100분의1은 맞는 셈이다. 그러나 궁합이란 두 사람의 결합을 의미할진대 이는 100의 자승(自乘), 10,000분의 1밖에 안맞는 셈이 된다. 공간적인 동업과 별업은 차지하고라도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여기에는 이론으로만 따질 수 없는 또 하나의 불가사의가 있다. 그것이 심리적인 것이든 뭐든 간에. 그래서 오늘날처럼 문명이 발달한 세상에서도 꾸준히 궁합들을 보는가보다.
신라 경덕왕 때의 진표율사(眞表律師)는 우리나라에 점찰법(占察法)을 대성시킨 위대한 고승이다. 점찰법이란 대나무로 만든 간자(簡子)에 길흉화복이라든가 갖가지 번뇌의 이름을 쓰고 그것을 공중에 던져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아 길흉선악을 점치고 참회하는 법을 선택하는 법인데 이 간자는 본디 지장보살로부터 받았다는 것이다.
밀교에서는 투화득불(投花得佛)이라는 방법을 써서 자신의
귀의할 바 불보살을 선택한다(〈코스모스와 만다라〉필자 졸역
고려원刊다마르 총서⑮참조)는 설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점무(占 )들이 산통(算筒)을 흔들거나 쌀알을 흩어 길흉화복을 점치고 소재강복(消災降福)을 기원하는 것도 점찰법의 일종이거나 변화한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표율사를 점찰법의 대성자라고 하나 그것은 중생 교화의 한 방편이었을 뿐 사실은 부처님에게 대한 자기의 철저한 구도적 자세와 일실경계(一實境界)에 들기 위한 피나는 수행, 그리고 참회하여 계(戒)를 얻겠다는 일환으로 취해진 것이었다.
그는 율사였다. 그가 특히 계율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속가에 있을 때에 개구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꿰어놓은 것에 대한 참회와 부끄러움, 그리고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깨닫고 나서였다. 그러한 그 분이 점찰법을 대성시킨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첫째, 점찰법은 그가 참회하여 지장보살의 현신수계(現身受戒)를 받을 당시 지장보살이 간자와 점찰경을 주어 대성시키라 했음이요, 둘째는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어떠한 번뇌부터 다스려나가야 할지 몰라 불보살에게 간택을 기원하기 위해서였으며, 셋째는 그것이 곧 불보살에게 다가가기 위한 방편으로 가장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태어나면서 죽음에 이르는순간까지 우리는 무엇인가 선택해야 한다.
심지어는 장지(葬地)에 대한 명당터도 선택의 대상이 된다.
어디에 묻히거나 결국은 흙으로 돌아간다. 소사대(小四大=小宇宙)에서 대사대[大字宙〕에게로 귀환할 뿐이다.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입장에서 보면 진표율사는 후예들에게 또 하나의 선택을 몰려준 결과로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그 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을 필요로 하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