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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구원의 상속자
히브리서 2:10~18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오늘 <놀라운 구원의 상속자>라는 설교의 제목은 강해 설교자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저술한 <히브리서 강해>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분은 많은 기독교 서적을 출판하였지만, 특히 구원의 신비와 하나님의 축복을 다룬 것이 히브리서 강해 설교 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를 나누면서 이분의 책을 참고하였음을 미리 밝히는 바입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서 무척 낯뜨겁게 생각하는 몇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둘째 형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1968년도에 강원도 신철원에서 중학교 2학년을 다닐 때입니다. 제 친구 중에 자취하는 아이가 있어 자주 그 집에 놀러 가 국수도 끓여 먹고 그랬습니다. 한창 식욕이 왕성할 때라 김치와 함께 먹는 국수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큰 형님이 보내 주는 학비와 생활비로 지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친구의 형님은 군대의 중사라고 하는데 어떻게 동생에게 그렇게 보살펴 줄 수 있는지 참 궁금하기도 했었지요.
마침 돌이켜 보니 둘째 형님은 소위로 임관하였기에 어린 제 마음에는 중사보다 계급이 높은 소위의 월급이 훨씬 높을 것으로 생각하니 약간 서운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지니고 엄살을 보태 형님께 용돈을 보내 달라고 편지를 보냈지요. 얼마 후 형님의 편지와 함께 우체국 우편환으로 돈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편지 내용에는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으로 작전에 참여하였고 그중에 제 편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형님에게서 들은 당시의 상황은 혹독하였습니다. 1968년 11월 소대장으로 공비 1개소 17명과 교전을 벌였고, 그로 인하여 소대원 2명이 전사하고, 4명이 다치는 안타까운 일을 당했다고 하였습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위중한 상황에서 제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참 부끄러웠습니다.
또 하나는 캐나다에 사는 누님댁에 방문하였을 때였습니다.
누님은 한국에서 보낸 모든 편지를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낸 편지도 섞여 있어 읽어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끝에는 한결같이 돈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쓸 당시는 어려웠기에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받아 든 누님도 남의 나라에서 심히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라고 하였습니다.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 돈을 보내 달라는 철없는 동생의 부탁에 말없이 보내 주었던 것을 기억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려옵니다. 그 후에 형님과 누님도 저의 그런 행동에 대하여 나무라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입니다. 피를 나눈 형제라는 것입니다. 형제이기에 내게 있는 것을 구하면 당연히 베풀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맡겨놓은 것을 달라는 식으로 막무가내로 구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시고 응답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오늘의 말씀은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형제’란 헬라어에서 ‘아델포스 ἀδελφός’라고 하였는데 ‘같은 태에서 태어난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과 우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한 아버지 안에서 피를 나눈 각별한 사이임을 예수님은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나는 형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골 1: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악한 행실로 대적했던 존재가 저와 여러분이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하늘과 땅만큼 벌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간극을 메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심을 가질만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창조주가 되시는 만왕의 왕께서 굳이 자기의 생명을 내주어 수치와 모욕 그리고 고통이 가득하게 담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셔야 했냐는 것입니다. 무궁무진(無窮無盡)한 지혜와 총명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독생자 예수님을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보내시고 그 아들을 죽음에 넘기셨는지 알 수 없는 신비중의 신비입니다.
그에 대한 해답이 한 형제임을 드러내기 위하여 우리 각 사람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거룩하게 하다’는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다는 뜻입니다. ‘거룩’은 하나님만이 갖는 특성입니다. 이 거룩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 2: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죄인을 거룩하게 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하나님께로 인도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구원의 창시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창시자’ 는 ‘인도자’라는 뜻이 있고, 영어성경에서는 ‘the pioneer’ 또는 ‘the founder’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어떤 누구도 이루지 못한 구원의 독특함을 이뤄내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성도가 지니는 ‘거룩함’이란 단순히 죄를 가려 예수님의 보혈로 희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죄가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를 잘 설명하는 내용이 레위기 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7월10일에 치루는 대속죄제일은 대단히 중요한 절기입니다. 이날에 이스라엘 백성의 일 년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게 될 두 마리의 염소가 있습니다. 한 마리는 성막의 번 제단에서 불살라 드리고 또 다른 한 마리의 염소를 아사셀을 위한 염소라고 합니다. ‘아사셀’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완전한 제거’ 또는 ‘내어놓음’이라는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이제 대제사장은 이 염소에게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담당시키고,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냅니다. 한 마리의 염소가 죽어서 속죄소 위에 피를 흘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짓는 1년 치의 죄가 이미 다 사해졌는데, 왜 또 이 염소에게 안수해서 죄를 담당시킵니까?
레위기 16장 8절에 보면,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위하는 염소의 피는 속죄소 위에 뿌려져서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결케 합니다. 두 번째 염소, 즉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그들의 눈앞에서 떠나가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준비된 염소입니다.
자, 이제 대제사장이 7월 10일에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일 년 동안 짓는 모든 죄가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머리로 넘어갑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장면을 지켜봅니다. 그 후에는 미리 정해 놓은 사람이 그 염소를 끌고 광야의 무인지경으로 갑니다. 그 염소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앞에서 점점 멀어져갈 때, 염소에게 옮겨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도 그들의 눈에서 점점 멀어져갈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가면 그 염소가 영영 보이지 않게 되겠죠. 그리고 그 염소는 나중에 악한 짐승에게 잡아먹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 내 죄를 짊어진 염소가 보이지 않는구나. 내 시야에서 영영히 사라졌구나. 그러면 내 죄도 염소와 함께 영영히 나를 떠나갔구나. 이제 더 이상 내 죄를 찾아볼 수가 없네!’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 염소는 우리의 죄를 완전히 제거하는 염소라고 해서 ‘아사셀을 위한 염소’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염소는 백성들의 죄가 그들의 눈앞에서 떠나가는 것을 보고 믿을 수 있게 하려고 준비된 염소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자신의 몸에 모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모든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어 죄를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는 거룩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의구심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33년의 세월을 보내셨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거룩함에 이르러 죄에 대해서 터럭 끝만큼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몸은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명령대로 육은 죽고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의 몸으로 살아날 때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육체의 연약함을 지니고 살아야 할 이유는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함입니다.
마귀를 세상에 버려두어 믿음의 성도를 괴롭게 하는데 성도는 반드시 이 영적인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 이김에 대하여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세상에 있는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였습니다. 죽음 앞에 무서워하고 종노릇을 하는 것이 사람들의 모습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도 사실을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문화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이란 책을 읽고 30여 년간 500건이 넘는 연구관과 실험을 통해 밝힌 바에 의하면 죽음의 공포가 소비, 투표, 재판, 자선활동, 애국심 등 인간의 판단과 활동을 좌우하는 근본적인 동기임을 입증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 인간의 가장 고귀한 행동이나 가장 부도덕한 행동의 바탕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들은 미리 죽음 앞에 달려가서 죽음이 가져다주는 공포를 느끼고 놀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에 대하여 의식하지 않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심층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일생토록 그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러다 죽음의 문턱에 들어서는 순간 “아차! 내 영혼은 어떻게 되지? 아주 없어지나? 그렇지 않으면 나는 어디로 가나?”를 깨닫게 되면 커다란 공포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미리 대비하는 것이 육체로 있을 때 우리가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입니다. 미리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비결은 오직 마귀의 권세를 꺾으신 예수님을 믿으므로 가능합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예수님은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주셔서 우리에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김에 대한 상을 내게로 돌려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그림을 그리는데 소질이 없습니다. 그런 제가 그린 그림이 교실 뒤편에 있는 게시판에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습니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어디서 선을 긋고 어떤 색을 칠해야 좋을지 막막할 때 담임 선생님이 오셔서 제 손을 붙잡고 그림을 그려 주셨습니다. 색칠도 선생님이 골라서 칠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그림에 제 이름을 써서 잘된 작품이라 게시판에 붙여 놓은 것입니다. 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의 그림 작품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죽음의 문제를 십자가의 희생으로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의 능력을 성령을 통하여 내게 이뤄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을 성령의 지배를 받아 날마다 죽음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승리는 내 것이 되어 예수님과 더불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왕같은 제사장의 반열에 이기는 자로 세움을 얻게 될 것입니다. 히 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나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의 은혜로 우리는 이제는 피조물의 단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형제가 되었습니다. 형제는 모든 것을 나누는 관계입니다. 주님의 영광이 내 것이 되고 그분의 모든 풍성함이 내것이 되는 놀라운 구원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나의 형제 되시기를 기뻐하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끝까지 지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계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의 관’이 바로 예수님과 형제의 관계를 맺는 지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조건이 있습니다.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영어로 ‘Be faithful, even to the point of death’죽음의 목전에 이르러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상황이든 어떤 위기를 만나든 하나님이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보내신 사랑을 믿으면 우리는 놀라운 구원의 상속자의 지위를 잃지 않고 견고하게 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