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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 열사 생가 탐방>
오늘은 광주 5.18 민주화운동 44주년 기념일이다. 윤상원 열사 생가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했던 윤상원 열사를 기리는 공간이다. 그는 들불야학을 열어 가난한 청년들과 노동자들에게 배움을 나누던 스승이자, 최후까지 도청에 남아 계엄군과 싸우다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산화한 광주의 대표적 민주열사다. 생가 내부는 자료전시관으로 사용 중인데, 윤상원 열사뿐 아니라 그와 영혼결혼식을 올렸던 박기순 열사의 고귀한 삶과 정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꾸며졌다. 1970년대 후반 들불야학에서 만나 인연을 쌓았던 이들은 민주항쟁과 불의의 사고로 인해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박기순(1957년 11월 7일 ~ 1978년 12월 26일)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로 들불야학의 설립자이다. 1957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전남여고를 졸업하고 1976년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사교육학과에 입학하여 학생운동을 하다 1978년에 정학을 당했다. 1978년에 노동운동을 위해 들불야학을 설립했다. 1978년 12월 26일 광주 주월동의 친오빠 집에서 연탄가스 누출 사고가 발생하여 사망하였다. 사후 동료 윤상원이 들불야학의 주된 운영을 물려받았다. 이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가족과 친지들이 영혼결혼식을 올리게 됐고, 이때 5·18을 상징하는 노래가 된 <임을 위한 행진곡>이 헌정됐다고 한다. 노래뿐 아니라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라고 했던 윤상원 열사의 말은 지금도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인터뷰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윤상원(尹祥源, 1950년 9월30일-1980년 5월27일)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으로서 활약했다. 어렸을 적 이름은 윤개원이었다. 1950년 9월30일 전라남도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 천동마을에서 태어나 임곡국민학교,광주북성중학교,살레시오고등학교,1978년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졸업과 동시에 주택은행에 취업해 서울로 간다. 하지만, 암울한 군부독재 속에서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실망한 그는 6개월 만에 그만두고 광주로 내려와 광천공단의 한 기업에 취업해 노동운동을 전개한다.
이 때 위장취업을 해 노동운동을 하면서 <들불야학>을 꾸려가던 박기순 열사를 만났고 그녀의 권유에 야학에 동참한다. 그리고, 5.18이 터지자 시민군에 합류해 대변인 역할을 하면서, 투사회보를 발행해 광주의 참상과 진실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시민군은 밀리기 시작하고 계엄군은 최후통첩을 보낸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자는 의견과 끝까지 싸우자는 의견으로 도청은 고뇌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윤상원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 뭉쳐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그는 끝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다 산화한다.
윤상원은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발생하자, 처음에는 녹두서점을 근거지로 화염병을 제작하여 공급할 뿐 표면에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김창길의 학생수습위원회가 무기를 반납하고 평화롭게 상황을 수습하려고 하자, 윤상원은 박남선등을 불러 김창길을 배제하고 학생수습위원회를 개편, '민주투쟁위원회’의 대변인과 광주시민의 눈과 귀와 입이었던 〈투사회보〉의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26일 오후 6시, 무기를 반납하자는 온건적인 의견이 다시 나오자, 윤상원과 박남선은 권총을 뽑아들고 공포를 발사하며 '무기 반납하는 놈이나 투항하는 놈은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무기 반납을 주장하던 온건파는 결국 밤 9시경 모두 도청을 빠져 나온다.
윤상원 등은, 5월27일 전남도청 본관 2층 민원실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윤상원의 사인을 두고 '자상', '화상', '총상'이라는 엇갈린 견해가 있었지만,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총상으로 밝혀졌다. 항쟁지도부 기획실장 김영철이 윤상원을 매트에 눕힌 뒤 최루탄 때문에, 불이 붙은 커튼이 매트에 눕혀져 있던 윤상원에게 떨어지면서, 윤상원의 시신에 화상 흔적이 남게 됐다.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태어난 그는, 또다른 전쟁이었던 계엄군의 진압으로 1980년 서른 살 꽃다운 나이에 사망한 것이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떠안은 그는, 결단의 순간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삶이 아니라 죽음을 선택했다. 윤상현과 필자는 한 살 차이로 어린 시절 7살 때까지 광산구 임곡동 천동마을에서 함께 놀았고 같은 초등학교를 다닌 인연이 있다. 참으로 오랫만에 찾은 고향 마을 골목골목은 그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고 어릴 적 기억이 새로웠다. 살고 죽는다는 게 정녕 무엇인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는 5월의 어느 눈부신 날이다. 윤상원의 죽음 앞에서, 눈앞에 보이는 세속적인 가치에 매몰된 삶을 살아온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다. 살아서도 치욕적인 삶이 있고, 죽어서 영원히 사는 삶도 있다.
오월을 상징하는 오각형 기단석위에 역사의 수레바퀴가 올려져 있다. 수레바퀴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가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라는 그의 마지막 연설문이 새겨져 있다. 기념비 중간에 한 자루의 총과 고봉밥 한 그릇을 형상화해놨다. 밥그릇에는 '민주'라고 새겨져 있다. '총과 밥'…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해파'는 고 윤상원의 호▲
광산구청 윤상원 홀↑
산 자여 따르라, 윤 상원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