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2장 1~10절
I. 들어가면서 약한 것이 강함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닉 부이치치) 저는 가끔씩 피곤함을 쉽게 느끼곤 합니다. 그럴때면 가끔씩 몸이 아주 건강한 분들이 부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번주에도 목감기와 피곤함이 몰려이번에 쉬면서 읽은 요약본 책이 바로 김승씨가 쓴 《살아 있음이 희망이다》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두 팔. 두 발이 없이 태어난 닉 부이치치(Nick Vujicic)의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닉 부이치치는 호주에서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 보리스(Boris)와 두시카(Dushka)는 신실한 목회자 부부였습니다. 장애 아들 닉이 태어났을 때 그들은 혼돈에 빠졌습니다. 혼돈의 과정을 거치면서 혹시 하나님이 그들 부부를 저주한 것은 아닌가라는 두려운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난지 4개월이 지나도록 두시카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안지 못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차츰 그들에게 평화를 주셨고,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기로 헌신했습니다. 닉 부이치치는 팔 다리가 없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팔이 없으니 손을 사용할 수 없었고, 다리가 없으니 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여섯 살이 되어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장애를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놀리는 학생들이 싫었습니다. 죽고 싶어 부모 몰래 자살을 시도해 보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지켜 주었습니다. 닉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그가 태어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목적이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닉은 불현 듯 다음과 같은 생각을 품게 됩니다. “팔과 다리가 없다고 가족이나 하나님에게 화내기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어.” 그 날 이후로 닉은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몸을 대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서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두 발가락이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닉의 믿음이 성장하면서 그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닉은 초등학교나 중학교, 그리고 교회에 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닉은 포장지와 선물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합니다. 포장지를 뜯으면 그 속에 선물이 드러나는 것처럼, 겉보다는 속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한 동영상에서 닉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이자리에 있는 것은 “약함때문입니다.” 이 약함으로 인해 저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고, 이 약함으로 인해 오히려 저는 완전하신 주님의 도움으로 살게되었습니다.” 제몸은 가시투성이 입니다. 그런데, 이 가시가 저를 살려주고 있습니다. 왜냐구요? 이 가시 때문에 저는 주님을 부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가시 때문에 저는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참 행복합니다. 나의 약함이 곧 주님으로 인한 강함이기때문입니다.
참 역설적입니다. 세상은 자꾸만 강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그 강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좀더 강하게 무장하기 위해 많은 수고와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오늘 서론에 시작한 닉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말합니다. 약한 것이 오히려 강함이라구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 위로가 되었습니다. 마음도 약하고 우리는 몸도 약하고 우리는 참으로 연약하고 약한 존재인데,,, 정말 위로가 되었습니다.
II. 본문을 열면서 바울의 셋째하늘의 경험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특이한 방법으로 서론을 말하는데 본인의 뭔가를 자랑하겠다고 시작합니다. 사실 바울은 진정한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고전13장4절), 또 자랑하는 사람을 책망하기도 했습니다.(고전4장7절) 그런 바울이 왜 자랑을 하는 것일까요? 본문을 들여다보면 바울은 자신이 자랑할 의도가 없었음을 분명히 찾을 수 있습니다. 그가 14년 전에 경험한 셋째 하늘에 이끌려간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면서 그는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소개를 합니다. 이 말은 단순한 수사학적 기법이 아닌 “나의 체험”으로 자랑하는 것 조차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3층천은(파라데이소스) 원래 에덴동산을 뜻하지만 예수님이 계신 곳이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놀라운 환상은 사실 그 동안 사도권으로 인해 힘들어 했던 바울을 지극히 큰 사도로 자칭하여 사람들을 기죽게 할 수 도 있지만 바울은 그것을 감히 자랑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왜냐면 그 지혜와 능력과 권세가 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울에게 특별히 허락하신 계시와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그는 두려움과 떨림의 이유가 있는데, 이 특별한 체험후에 하나님이 그의 몸에 고통을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고통이며 아품이었는지 그는 그것을 ‘가시” 혹은”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육체의 고통이었습니다.
가시를 위해 3번이나 하나님께 기도했던 바울 이것이 너무 힘들어 바울은 세번이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육체의 가시를 주님은 제거해 주지 않았습니다. 애초부터 그의 교만을 막기위한 것이기에 주님이 거두기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 끝에 하나님이 바울에게 또 다른 음성을 주시는데 바로 “네 은혜가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라고 음성을 들려 주십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하나님의 응답을 감사와 아멘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울은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가시와 같은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 어떤 은혜를 누리고 맛보았을까요? 육신의 괴로움과 고통이 어떻게 그의 영적인 성장과 믿음의 고백으로까지 이어지게 했을까요?
III. 본문을 풀면서 첫째. 바울은 자신의 가시와 같은 연약함으로 인해 겸손하게 되었습니다.(7절) (육체의 가시가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이력이 화려한 바울 7절 말씀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력서를 써보았을 것입니다. 거기에보면 학력, 약력, 포상의 경험등을 적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력서를 쓸 때마다 참 나는 진짜 적을 것도 없다. 이런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적을 것이 엄청나게 많더라구요.
바울을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바울이 만약 이력서를 쓴다면 아마도 굉장히 화려했을 것입니다. 난지 팔일만에 할례받고, 이스라엘 , 베냐민지파, 히브리인 중에 희브리인, 가말리엘 명문학파에서 수학했고, 길리기야 다소 출생에 로마 시민권자입니다. 거기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는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은사를 받은 사람이요 방언을 많이 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목이 곧을 수 있고 얼굴이나 목소리, 표정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겸손해야 함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의 겸손함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육체의 가시에서 나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절제는 멈추어야 할 때 멈출 줄 아는 것이다. 절제란 멈추어야 할 때 멈출 줄 아는 것입니다. 절제란 정도를 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힘은 조절된 힘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움직여지는 힘 바로 절제된 힘입니다. 1999년에 태국에와서 태국의 몇몇 친구들과 함께 촘푸로 유명한 태국의 지방을 간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엄청나게 큰 댐을 보았습니다. 정말 아슬아슬해 보였는데, 참 놀라운 것은 그때 제가 이 댐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엄청난 일이 벌어지겠지요? 그런데 이 엄청난 큰 댐의 물이 잘 조절되어 엄청난 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절제를 잘 할수록 우리는 자유 함에 이르게 됩니다. 음식을 절제하는 사람은 음식 앞에 자유롭습니다.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은 욕망 앞에 자유롭습니다. 어떤 유혹도 이겨낼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그의 전도사역 1,2,3,4차를 경험하면서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무엇을요? 절제되지 않는 힘은 오히려 문제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은 말에 대해 절제하고 아끼라고 권합니다. 또한 바울은 바울 서신을 통해 분을 아끼고 절제하라고 합니다. 또한 바울은 물질을 절제하고 자족할 것을 권합니다.
절제를 통해 겸손을 맛본 바울 절제를 통한 겸손의 열매를 맛본 바울 바울은 자신의 연약하고 아픈 가시와 같은 것들을 통해 철저하게 절제를 배웠습니다. 사역을 통해 때로는 괴로운 인간관계를 통해, 그리고 때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현상을 통해 바울은 절제를 몸에 배워갔습니다. 그리고 이 절제를 마음에 배워갔습니다. 그러던 중에 바울은 자연스럽게 겸손의 열매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이 가시와 같은 연약함이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는 큰 고통이며 참을 수 없는 아픔이지만, 이를 통해 겸손을 배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몸의 연약한 아픔과 같은 때로는 참기 힘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찌르는 가시와 같은 것으로 괴뤄워 하십니까? 실제로 참기 힘든 아픔으로 괴로워 할 때 하나님 안에서 겸손을 맛본 바울을 떠 올렸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고 싶어하십니다. 왜요? 겸손의 그릇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담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고, 또한 헌신되어진 자들에게는 하나같이 깨끗한 겸손의 그릇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십니다.
둘째. 바울은 자신의 가시와 같은 연약함으로인해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기도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가시로 3번이나 기도한 바울 사도바울은 육체의 가시 때문에 3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보통 한번 기도하면 40일씩 작정해서 기도합니다. 즉 여기서 3번의 의미는 40일씩 3번 기도했다는 의미입니다. 사도바울은 육체의 가시 때문에 그것을 해결 받기위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목숨을 건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식음을 전패한 40일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바울은 정말 간절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시를 위한 기도에 대한 응답은 가시가 축복이며, 니 은혜가 족하다라고 주님은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일까요
육체의 가시는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인도한다. 여러분 정말 감사한 것은 믿음의 사람들의 경우, 육체의 가시를 만나거나 경험할 때에 하나님 앞에 나가기 위해 우리가 기도한다는 겁니다. 결국 이 말은 주님께서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이끌어 주신다는 겁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육신의 연약함과 가시가 찾아 올 때마다 새벽 미명가운데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의 예비된 사역의 제일 마지막 현장에서도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언제 기도하게 되는가? 우리의 기도가 언제 길어지고, 언제 깊어지고, 언제 간절해 지는가? 그것은 우리의 인생에 가시가 찾아 왔을 때라는 겁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인생의 큰 가시에 찔리거나 그 아픔과 어려움이 엄습해 올 때면 기도하게 되더라는 겁니다. 그 기도가 복이고 은혜임을 지나고 나니깐 고백하게 되더라구요.
강준민 목사님의 목회서신 고백-기도하면서 초심을 배웠다. 언젠가 읽은 강준민목사님의 목회서신이 생각이 났습니다. 동양선교교회를 담임하다 사퇴하고 나오실 때에 큰 가시와 같은 아픔이 밀려온 것 같습니다. 그때 기도에 대한 목회서신을 쓰시면서 이런 고백을 하셨습니다. 새 생명 비전교회를 새롭게 개척하신 이후인데, 이 가시와 같은 아픔이 밀려왔습니다. 그 가시가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어떤 것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만 주님하고 부른 것입니다. 기도였습니다. 기도 중에 주님이 주신 마음은 바로 초심에 대한 것입니다. 가시 때문에 견딜 수 없어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주의 종으로 이 땅을 살아갈 바른 초심을 가르쳐 주시더라는 겁니다. 잘 알듯이 초심은 첫사랑이며, 처음 마음입니다. 초심은 배우는 자세이며, 배우는 사람은 늘 새롭습니다. 저는 그 목회서신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강목사님께서 어쩌면 하나님께 남은 후반전을 더 바르게, 더 건강하게, 더 온전함으로, 달려가겠구나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결국 가시가 지금은 많이 아프고 힘들지만 바른 기도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긴 사역 여정가운데, 그는 그가 마지막까지 주님의 영광을 그리고 바라보고 달려 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찌르는 듯한 가시의 아픔과 괴로움과 연약함의 연속속에 오히려 그는 무릎꿇는 자로, 오히려 그는 기도하는 자로 길 없는 그곳에서 길있는 곳을 향해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결국 무슨 말입니까? 우리를 연약하게 만드는 가시가 결국 우리로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고 다시 시작하게 하고 우리로 기도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자꾸만 기도의 자리를 잃어버리니까, 하나님은 가시를 통해 우리가 기도하도록 하십니다.
셋째. 바울은 자신의 가시와 같은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담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하나님의 능력을 담는 그릇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본문 1~4절 말씀에 신비적인 영적체험을 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자랑하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인 결함을 드러내 놓고 자랑합니다. 그 이유가 있는데 9절 말씀에 보니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그 연약함속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자신의 연약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것이 있어야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가시는 분명 고통스럽습니다. 우리의 삶에 지장을 줍니다. 우리가 그것 때문에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삶 가운데 나타난다면 분명 그 가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강한 그릇에 담기질 않는다. 언젠가 읽은 대학학보사 신문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연약한 질 그릇에 담긴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아래에 “곽규섭”이라고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 궁금했습니다. 곽규섭이라는 분이 누군지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MT에서 개회예배를 드릴 때 사회자가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오늘 예배를 위해 곽규섭 전도사님께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만나고 싶었던 그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뵙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한쪽팔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저는 그분이 왜 그렇게 고백했는지? 그리고 그분의 고백이 입술의 고백이 아닌 마음과 신앙의 깊은 고백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담기 위해 자꾸만 금그릇과 은그릇이 되려고 합니다. 깨끗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질그릇인 우리가 질그릇으로 있을 때 임하길 원하십니다.
이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의원을 필요로하는 자를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원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영육을 강건케 하실 주님이 너무 필요합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질그릇 같은 나의 인생에 은혜를 부어 주길 원하신다는 겁니다.
하나같이 깨질 듯 말듯한 그릇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 오늘 서론에서 시작한 닉 부이치치를 보면 그의 인생은 깨어질 듯 말듯한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 인생에는 어떤 것도 담길 수 없을 정도로 약하고 깨어질 듯 말듯한 그릇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인생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졌습니다. 처음에는 깨어져 버릴 것 같던 그 그릇은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안깨어질 것 같은 금 그릇도 깨어지고, 은그릇도 깨어졌지만 오히려 깨어질 것 같던 그 그릇은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도 이와 같았습니다. 깨어질 것 같은 연약한 자신, 가시로 인해 견딜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도 바울은 오히려 그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청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더 큰은혜로 그의 삶을 부유하게 인도하셨습니다.
IV. 나가면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그릇도 똑 같습니다. 육신의 가시와 물질의 가시와 관계의 가시가 얼마나 큰지 큰 덤불을 일으켰습니다. 나를 조이고, 나를 힘겹게 하던 그 가시가 이제는 감사이며 은혜입니다. 여러분의 억누르는 가시가 많으십니까? 그럼 오히려 이시간에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요? 가시가 있는 만큼 하나님의 능력도 더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이뤄집니다. 하나님의 종과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멋진 역설이며 아름다운 패러독스입니다. 내가 약한 그 때 강함이라 아멘! 한 주일 동안 여러분의 약함 속에 주님의 강함을 맛보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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