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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師弟)에 살아라
불멸의 ‘정예 10만’ 결집! ⑩-1
‘입정안국’과 제2무로토 태풍.
‘오사카사건’의 재판이 한창일 무렵,
이케다 회장은 ‘입정안국’의 일대투쟁을 시작했다.
반전공세를 펼친 법정투쟁,
태풍 피해로 고생하는 오사카 벗에 대한 격려... .... .
그것은 모든 것을 ‘승리’로 이끄는 미증유의 싸움이었다.
△은사가 서거한 지 3년. 드디어 이케다 회장의 지휘아래 ‘입정안국’의 대투쟁이 시작되었다.(1961년 8월, 시즈오카)
‘입정안국’의 일대투쟁을 개시
단호히 투쟁할 때
“‘국사훈’ 처럼 우리에게는 10만 명의 결집을 이루어야 할 숙명이 있다.”
1957년이 저물 무렵에 쓴 <젊은 날의 일기>다. 직제자는 ‘10만 결집’을 자기 ‘숙명’이라고 결심했다. 결심했으면 완수한다. 이것이 제자가 제자답다는 증거다.
직제자가 결심하고 4년이 지난 1961년, 청년부는 세배로 증가해 50만의 진용이 되었다. 청년부에게는 10만 결집을 머지않아 달성 한다는 기세가 넘쳐흘렀다.
1961년 여름. 학회의 전통인 하계강습회를 8월 2일부터 10일까지 4기로 나눠 본산에서 개최했다. 약 2만 명이 회장의 강의를 듣기 위해 활기차게 참석했다.
어서는 <입정안국론>이다. 전해에 열린 강습회에서는 회장이 <닛코유계치문>을 강의했다. 스승이 돌아가신 후, 참된 제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회장 자신의 각오를 피력한 강의에 참석자들은 사제의 깊이에 눈이 뜨이는 듯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입정안국론>. 회장은 굳이 안국론을 교재로 택했다. 거기에는 ‘입정안국’을 실천하는 대투쟁이 시작됐다는, 예사롭지 않은 결의가 담겨 있었다.
은사가 돌아가시고 3년 후, 직제자는 은사의 구상을 실현하고자 ‘입정안국’의 대투쟁을 일으켜 나라의 숙명까지 전환하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닛코 상인이 국가에 간효하기 위해 <입정안국론>을 다시 제출하려고 움직이신 때도 연조 대성인이 입멸하시고 3년 후였다. 마침 니치렌 문하가 권력에 탄압받는 가마쿠라 법난이 일어난 때다.
입정안국은 세계평화를 위한 투쟁이다.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권력의 마성’과 벌이는 싸움이다. 광선유포를 전진시키려면 창가의 정의를 확립 하고 마의 준동을 쳐부술 수밖에 없다.
이케다 회장은 권력의 마성과 싸우는 한복판에 있었다. 그것은 사실무근한 죄를 뒤집어 쓴 ‘오사카사건’의 법정투쟁이었다.
당시 청년부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하계강습회 교체가 <입정안국론>으로 결정된 때는 7월 상순이었습니다. 마침 오사카사건의 중요한 재판이 열리는 때였습니다. 무죄를 입증할 수 있을지 어떨지.
이케다 회장은 반전공세를 펼치는 싸움에 임하고 계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케다 선생님이 이사실 간부에게 엄한 어조로 하신 말씀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번 하계강습회에서는 <입정안국론>을 연찬하겠습니다. 지금이 바로 입정안국의 투쟁을 단호히 펼칠 때입니다.’ 선생님이 어떤 심정으로 학회를 지휘하시고 있는지 진지하게 귀담아들었습니다.”
박해의 연속
8월 3일 저녁 무렵, 회장이 강의하는 대강당 앞에는 이미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오후 5시 반, 문이 열리자 장내는 금세 가득 찼고 참석자는 로비까지 넘쳤다.
오후 6시 반, 회장은 강의를 시작했다. 범위는 <입정안국론>의 결론부분(어서 30쪽 16행부터 끝까지)이었다.
이케다 회장의 늠름한 목소리가 대강당에 울려 퍼졌다.
“대성인의 일생은 ‘<입정안국론>으로 시작해서<입정안국론>으로 끝난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니치렌 불법은 ‘입정안국’을 지향하는 종교입니다. 밀려오는 파도와 같은 권력의 박해도 이 글을 상정(上程) 한 데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마성’은 인간존엄과 생명존엄을 유린했습니다. 이 마성이 국토에 끝없는 ‘투쟁(鬪爭)’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말법이라는 시대의 본질입니다.
대성인은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려면 사람들의 정신에 근본적인 정의를 확립하고 마성의 준동을 분쇄하는 길뿐이라고 확신하셨습니다. 바로 그래서 당시 최고권력자에게 감연히 이 글을 제출하신 것입니다.”
강의는 열렬한 확신과 기백이 넘치고 있었다.
‘입정안국론’으로 시작한 인생
지금이 바로 국난을 구할 때
마키구치 초대 회장이 감옥에 들어가신 해(1943년) 봄, “지금이 바로 국난을 구할 때다.”라고 외치며 강의를 시작한 것도 <입정안국론>이었다.
그해 6월 종문은 ‘신찰’을 받으라고 강요했다. 겁이 많은 종문은 권력에 굴복해 보신으로 치달았다. 그때 초대 회장은 외쳤다. “지금이 바로 국가간효를 할 때가 아닌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투옥당한 초대 회장은 이듬해 서거했다. ‘안국론’을 몸으로 읽은 옥사(獄死)였다. ‘스승의 원수를 갚겠다.’라며 일어선 도다 제2대 회장과 처음으로 이케다 회장이 만난 좌담회. 그곳에서 은사가 강의하던 어서도 ‘안국론’이었다.
이케다 회장은 당시를 술회하며 이렇게 지도했다.
“도다 선생님을 처음 뵌 곳은 도쿄 오타구에서 열린 좌담회였습니다. 선생님은 <입정안국론>을 강의하고 계셨습니다... .
대성인이 이 <입정안국론>을 당시 최고권력자에게 제출하여 국주 간효를 하신 1260년 7월 16일은 아마 당시 서력인 율리우스력으로는 1260년 8월 24일에 해당하리라 생각합니다. 이 8월 24일이 내게는 대성인의 가르침대로 '입정안국'을 실현하는 출발의 날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케다 회장의 인생 또한 <입정안국론>으로 시작했다.
나와 함께 싸웁시다
이케다 회장은 어서를 토대로 강의했다.
“‘만약 우선 국토를 평안케 하고 현당(現當)을 기원하고자 원한다면 지체 없이 정려(情慮)를 두루하여 빨리 대치(對治)를 가하시라.’(어서 31쪽)
우리가 이 원리만은 일본 지도자다 정치가, 교육자, 세계의 지도자에게도 소리 높여 가르쳐야 합니다.”
“‘국토가 혼란해지려 할 때는 우선 귀신이 혼란하고, 귀신이 혼란해지는 고로 만민이 혼란해지느니라.’(어서 31쪽)
이것도 중요한 방정식입니다. 국토가 혼란한 근본원인은 귀신, 즉 사상이 혼란하기 때문입니다. 아견이 소용돌이쳐 모두 ‘내가, 내가’ 하며 증상만이 되는 모습입니다. 그 결과 나라가 혼란해지고, 민중이 불행해진다는 원리입니다.”
당시 이야기 - 니시오 히사노부 씨
도호쿠의 남여 청년부총회에 이케다 선생님을 모신 지 채 한달도 지나지 않아 하계강습회에서 다시 선생님 강의를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늠름하고 의욕에 찬 목소리로 “창가학회가 바로<입정인국론>의 정신을 근본으로 광선유포에 일어선 사명이 있는 유일한 단체입니다. 앞으로 청년부가 그 중심이 되어 투쟁해야 합니다.”라고 역설하셨습니다.
나는 도호쿠에 지도 차 오신 선생님에게 이동하는 열차 안에서 질문한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결핵으로 한쪽 폐를 잃고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광선유포에 도움이 될까요?”하고 질문했습니다.
선생님은 지긋이 저를 바라보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도 몸이 약했습니다. 그러나 도다 선생님이라는 위대한 스승을 만나 오로지 스승을 따라 투쟁해온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나를 따라 오십시오. 나와 함께 싸웁시다. 반드시 복운이 쌓입니다. 건강해집니다. 열심히 하십시오.” 감싸 안는 듯한 격려였습니다.
당시 이야기 - 쓰치야 미노루 씨
선생님 강의를 듣고 감동한 저는 어서에 빨간 줄을 긋고 선생님 지도를 메모했습니다. 지금도 어서를 펼치면 그때 그은 빨간 줄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대는 빨리 신앙의 촌심(寸心)을 고쳐서 속히 실승(實乘)의 일선(一善)에 귀(歸)할지어다. 그러면 즉 삼계(三界)는 모두 불국(佛國)이니”(어서 32쪽) “실승의 일선에 귀할지어다.”라고 줄을 그은 옆에는 ‘입정’이라고, “삼계는 불국이니라.” 부분에는 ‘안국’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선생님은 “전 세계가 반드시 불국토가 된다고 하는 것보다 반드시 불국토로 만들어야 한다고 읽어야 합니다.”라고 지도하셨습니다. 대성인 법리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선생님은 사력을 다하고 계셨습니다. 깊이 감동받았습니다.
사제일체이면 무엇이든 성취된다
정치를 감시하라
하계강습회에는 전국에서 청년대표 약 5000명도 참석했다. 강습회에서
는 어서강의나 연수회와 그밖에 씨름대회도 열었다.
이케다 회장은 청년들 속으로 들어가 간담도 나눴다. “베를린 문제를 두고 그 문제점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동양의 나라들 중 스무 나라 이상 나라이름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일본의 3대 일간지 사설을 읽고 있는 사람은?”
회장은 청년들에게 잇달아 질문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청년부는 일본과 세계의 정세로 시아를 넓히고, 특히 일본의 정치는 신심을 근간으로 한 예리한 비판의 눈으로 바라보며 정치의 부패와 타락에는 청년다운 분노를 느껴야 한다.”
간담 중에 청년들도 왕성하게 질문했다. 한 청년부원이 말했다.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해 가르쳐주십시오.”
회장은 답했다. “민주주의는 간단하게 말하면 자유, 평등, 존엄입니다. 그러나 부처의 경애 이상의 ‘자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아래 모두 ‘평등’합니다. 또 부처만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존재는 없습니다. 이것이 ‘존엄’입니다. 최고의 불법이 곧 진정한 민주주의입니다.”
“드디어 도쿄 차례군요.”
강습회가 한창이던 무렵, 이케다 회장은 남자부 대표간부들과 간담을 나누었다. 방면간부들이 잇달아 방면별 청년부총회를 대성공으로 마친 보고를 했다.
방면만으로 10만 명이 넘는 청년의 결집이었다. 회장은 말했다. “열심히 싸웠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이제 드디어 도쿄 차례군요. 방심하지 말고 분발합시다.”
당시 이야기 - 구로야나기 아키라 씨
간담 중 이케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10만 결집은 도다 선생님 유언이므로 당연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결집만으로 모두 끝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세계광포의 선두에 서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그러므로 이 10만 결집에 모인 청년들이 나와 호흡을 맞춰 세계광포의 투쟁에 임했으면 합니다. 그것이 앞으로 펼칠 투쟁입니다. 사제일체라면 어떤 일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성취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청년부의 책임이자 사명입니다.”
다가올 국립경기장의 국사 10만 결집을 앞두고 그 일에만 급급하던 우리에게 선생님은 ‘단순한 숫자싸움으로 끝나면 안 된다. 스승과 호흡을 맞춘 청년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청년들 한가운데로 들어가 폭풍처럼 전진
사상 최고의 확대
이케다 회장의 <입정안국론> 강의는 전국 회원의 확신이 되어 넓혀졌고, 경이적인 확대의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8월 한달 동안 8만 세대를 크게 돌파하는 절복성과를 이루었다. 특히 청년부의 활약이 눈부셔 전체의 50퍼센트에 미치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세이쿄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올해 들어 이케다 선생님은 ‘올해는 청년의 해다.’라고 말씀하셨고, 또 ‘40만의 청년들 한가운데로 들어가 폭풍같이 전진하겠다.’고 외치신 사자후에 응해 청년부는 감격과 환희에 넘쳐, 긍지와 사명에 가득 차 대전진했다. ... 11월에는 간토의 청년들만 남자부 정예 10만명, 여자부 7만명이 결집해 남여 청년부총회를 열기로 했다.”
그 총회의 대성공을 목표로, 9월 초에는 남여간부회가 열렸다. 우선 여자부가 4일 저녁, 도쿄 다이토체육관에서 9월 간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여자부 약 1만명이 환희하며 모였다.
간부회에서는 8월의 여자부 절복성과가 ‘1만 3230세대’라고 발표되었다. 체육관을 가득 메운 속에 박수가 터졌다. 지금까지 낸 최고성과는 8000세대였다. 사자분신과 같은 이케다 회장의 지휘에 호흡을 맞춰 투쟁한 결과였다.
요코하마 미쓰자와경기장에서 가을에 열기로 예정된 ‘제9회 여자부총회’의 최종일정이 결정되고 이 자리에서 여자부장이 발표했다. 개최일은 11월 12일 일요일이었다.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고 청년답게
9월 남자부간부회는 9월 5일 저녁 다이토체육관에서 열렸다.
확대전에 질주하는 남자부는 302개 부대, 32만명의 진용으로 발전했다. 간부회에서 청년부 간부가 인사했다.
“1959년 12월에 100개 부대 달성을 계기로 이케다 선생님 슬하에서 힘찬 전진을 시작했습니다. 그 100개 부대를 달성했을 때 이케다 선생님은 다음 목표는 300개 부대로 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에게서 부대기를 받고 오늘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남자부 결성 이래 10년, 도다 선생님의 ‘나라에 10만의 국사가 있다면’이라는 말씀을 실현하는 때가 바야흐로 다가왔습니다.”
이케다 회장은 10만 결집을 목표로 이렇게 피력했다.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는 대성인 제자답게, 청년답게, 지용보살답게 스크럼을 짜고 평화를 향해 당당하게 전진합시다.”
그 며칠 후, 학회본부 2층에서 도쿄 남자부 부대장회가 열렸다. 이케다 회장은 질문회를 열었다. 한 부대장이 질문했다.
“미소 양국이 핵실험을 재개했는데 학회 청년부로서 이 문제를 놓고 어떻게 싸우면 좋을까요?”
회장은 답했다. “근본은 절복입니다. 대화입니다. 한 사람을 절복하는 일이 전부에 통하는 법입니다. 관념적으로 ‘반대다, 반대다.’라고 명예를 구걸하듯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지만 무엇도 통하지 않습니다.
지금 어본존을 수지하고 전 인류의 행복을 원해 밤낮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일념은 ‘일신일념(一身一念)이 법계(法界)에 널리 미침이라.’이며 전 우주에 통합니다.
여러분이 신심을 확고하게 확립하고 한 사람 한사람의 이웃을 구하고 어본존에게 기원하면 수천만의 지도자가 평화를 논하고 행복을 호소하는 것보다 백천만억배나 힘이 있으며 사실상 평화를 이끌고 있음을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서른을 넘기기 힘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청년부 합동추선법요
9월도 청년부간부회가 열리고 일주일 후인 9월 11일, 첫 ‘청년부 합동추선법요’가 열렸다. 10만 결집의 남여 청년부총회가 있기 두달전이다. 발원주는 이케다 회장이었다.
8월에 열린 여자부간부회에서 이게다 회장은 한가지를 제안했다. “광선유포 도상에 요절한 동지를 위해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고 정성스럽게 대간부와 청년부 대표로 추선공양을 하면 좋겠습니다.”
누구도 생각한 적 없는 제안이었다. 회원을 생각하는 마음, 동지를 잃은 슬픔이 회장은 누구보다 강했다. 자애어린 스승이기에 비로소 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법요에는 회장의 부름을 받고 수도권의 남여부대장도 참석했다. 학회가 시작된 이래 획기적인 법요였다. 법요에는 이케다 회장의 초청으로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남여청년부의 유족 40여명이 모였다.
법요는 오후 7시에 도쿄 이케부쿠로에서 열렸다. 이사, 지부장, 남여 부대장 등 400명이 참례했다.
“선생님의 자비로”
근행과 간부의 추모사에 이어 유족 대표가 감사 인사를 했다.
“이케다 선생님의 자비로 추선공양을 할 수 있어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광선유포 도상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들도 얼마나 기뻐할까요. 저희도 언제까지나 강성하게 신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케다 선생님이 인사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몸이 몹시 약했고 입회한 후에도 은사 도다 선생님에게 몹시 걱정을 끼친 몸입니다. 부모님도 제 건강을 무척 걱정하셨습니다.
‘도저히 서른을 넘기기 힘들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병약했습니다. 지금 몸이 약한 것만으로도 부모님이 매우 걱정할 텐데, 하물며 귀여운 자식을 잃은 부모의 비애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그 아픔을 느꼈습니다.”
당시 이야기 - 하치야 유미코 씨
법요에서 이케다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광선유포를 지향하다 돌아가신 동지는 반드시 대복운을 쌓고 또 새로운 젊은 생명의 활력을 받고, 이 세상에 생을 받아 우리 동지와 함께 다시 투쟁하리라는 것은 어서에 비추고, 어본존에 비추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디까지나 생명은 영원합니다.”
이 한마디가 가슴 깊이 울렸습니다. 지금 투쟁하는 동지와 그리고 선생님과 함께 영원히 투쟁할 수 있음에 환희를 느끼며 깊이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사명에 끝까지 살아가자고 다짐했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비단 저 한 사람뿐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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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