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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익상(李益相), 백두산 가는 길에
무산(茂山)에서 이익상
멋없는 상징과 … ◇◇… 인간의 창조성
제1신
◇
여명(黎明)을 통해 어렴풋이 바라보던 삼방(三防) 깊은 산골의 적사(啇肆)와 힘찬 물줄기의 아름다움도 오히려 잊을 수 없고, 동해 연선의 해안은 더욱 여행의 피로를 위로하여 준다.
표삼(漂參)한 수평선, 총유(叢維)한 푸른 솔, 점점이 흩어져 있는 괴석, 우뚝 솟은 기암(奇巖), 길게 이어진 흰 모래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20여 시간의 장거리 여행에 권태와 무료를 느끼지 않는 것은 모두 이것의 힘이다. 아름다운 조선의 동해안!
◇
호산이 적은 관북(關北) 지방에는 ‘아카시아’와 ‘포프라’가 전과 다름없이 길 옆, 논과들에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나부끼고 있다. 언제든지 느끼는 바이지만 조선의 녹화(綠化)가 아카시아와 포프라에 많은 노력을 들어 얼마나 빨리
자랐는가.
□□이었던가.
탈 없이 자라나서 하늘거리는 포프라, 덮어놓고 자라나는 아카시아 이 두 가지가 모두 조선의 모든 현상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수목(樹木) 울창한 관북에 들어서서 이러한 느낌 더욱 새로워진다.
아 헐죽한 조선의 현재 문화여!
◇
주을(朱乙)22)에서 하루 여행의 피로를 풀고 청진(淸津)을 향할 때는 가랑비가 차창을 흐리게 하였다.
차는 다시 산악지대로 들어서서 거뿐 숨을 쉰다. 옛날 무산에서 조선 철도의 관북선(關北線)을 바꾸어 탈 때는 다시 청천(晴天) ‘성냥갑’ 같은 경편(輕便) 기차이다.
22) 함경북도 경성군 남쪽에 있는 읍.
시냇물을 따라 산기슭으로 자꾸자꾸 기어 올라간다. 조선에도 이러한 울림(鬱林) 지대가 있었던가 의심할 만큼 수목이 □천(□天)하였다. 경부선(京釜線), 경의선(京義線)에서 조선의 민둥산을 한탄하는 이에게 참으로 한번 보여주고 싶다. 조선에 산이란 산이 모두 나무가 우거진 산이 될 날은 언제인가.
◇
무거운 짐을 싫은 소동(小僮)과 같은 함북선(咸北線) 경편차(輕便車)의 헐떡이는 소리가 너무 심하여 갈수록 안계(眼界)의 □□은 넓혀간다. 다리 아래로 군산(群山)은 높아졌다 나아졌다.
계곡 사이에 흩어져 있는 인가(人家)는 다수가 기와이다.
이것도 남방 기름진 땅에서 볼 수 없는 경이(驚異)이다. 그리고 가옥의 구조 규모가 다 큼직하다.
관북민족이 얼마나 대륙적 생활의식을 가졌는지 상상할 수 있다.
그 안에서 ‘감자’나 ‘강냉이’ 밥을 겨우 먹고 사는지 누가 알 것이냐.
남방의 작고 초라한 초가집에서 기어들고 기어나는 동포가 먹는 옥□(玉□)이 오히려 가엾은 생각이 든다.
그 가옥주변을 높게 둘러싼 목책(木冊), 1931년 ‘에로’, ‘그로’가 한창 왕성한 오늘날 호랑이에게 당하는 일은 없겠지
만, 그 어마어마하게 빽빽한 목□(木□)은 옛날 무산 지방의 맹수의 사나운 위세가 어떠 하였는가를 연상(聯想)케 한다. 만일 그러한 필요가 없었다면 삼림(森林)이 풍부한 무산 동포의 재목남비(材木濫費)가 아니었던가.
◇
3천 척(尺)의 차□령(車□嶺) 정상 가까운 곳에 있던 차령(車嶺)에 도착한 경편차(輕便車)는 30분 이상을 휴식한다.
이 가파른 고개를 넘을 준비인 듯하다.
산중 작은 역이지만 부근에는 인가가 산재하여 제법 승강객(乘降客)이 있다.
역에는 조그만 정원을 꾸미고 여러 가지의 괴석을 모아 인공산을 꾸몄다. 자연스러운 산악미를 버리고 조그만 인공산
에 마음을 붙인 역 직원의 생활이 얼마나 따분한지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가 무엇이든지 창조해 보겠다는 충동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인간창조성의 구현이다.
차□령에 있는 인공산! 영원한 인간창조성의 상징이 되라.
(컷은 (무산에서). 백두산정상의 천지 사진은 삼방출협(三防出峽) 약수포(藥水浦) 부근의 수봉(秀峰))
<출전 : 李益相, 白頭山 가는 길에, '每日申報', 1931년 7월 25일>
7. 이익상, 만주기행
[7-1]
기억조차 새로운 북대영(北大營) 전적(戰跡)
봉천성(奉天城) 북일리(北一里) □에 있는 만주사변 때에 역사적 사실을 제일 많이 가진 북대영(北大營)을 찾았다.
도로가 험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왜 이렇게 도성과 떨어져 있는 곳에 병영을 두었는지 군사 전문가가 아닌 사람으로
그 뜻을 알 수 없다.
녹음(綠陰)이 우거진 광대한 일대가 북대영이라 한다. 왕이철(王以哲) 동북육군(東北陸軍) 제 7여(第七旅)의 병사요,
학량(學良)의 군대 1만 2천 병사의 합숙소이다.
70만 평 넓은 벌판 가운데에 사령부가 있고, 병사가 있고, 연병장이 있고, 또 농원(農園)이 있다. 혼(魂)없는 군대가 물러간 발자취 위에는 여름풀이 무성했을 뿐이다.
용맹스러운 군사가 뛰어난 것으로 중국 4백 주(州)에 이름을 떨치던 학량 군사 1만 2천이 만주 주둔군 6백에 크게 패하여 숨을 구멍을 찾게 된 재작년 9월 18일 밤의 전쟁 상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밤 10시경이었다. 초승달은 육락이 우거진 서편 지평선 아래로 들어갔다.
봉천 교외에서 연습을 하던 독립수비 제2대대 제3중대의 척후(斥候)대 6명이 남만주철도 선로를 따라 남쪽으로 향하여 북대영의 약 5백 미터 지점에 도착하였을 때에 갑자기 후방에서 홀연한 폭음이 일어났다.
척후대는 깜짝 놀라 폭음이 나는 곳으로 돌아보니 몇 명의 중국군이 북대영을 향해 도망하였고, 철도선은 폭파되어 있었다.
척후대는 도망하는 중국 병사를 추격하여 3명을 사살하고, 전진하였다.
이때에 북대영 남방 고량(高梁) 밖에서 약 5백의 중국 병사가 출현하여 척후대를 향해 맹렬하게 사격하면서 문관툰(文官屯) 분견대(分遣隊) 방향으로 전진하려는 기세가 보였다.
척후병 1명은 원관툰 중대장 카와지마(川島) 대위에게 급히 전하였다.
카와지마 대위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맹렬하게 습격하여 5 백 여의 중국 병사는 북대영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카와지마 대위는 양군 충돌의 보고를 대대 본부에 보고하는 동시에 용감하게 북대영의 서북 쪽으로 맹렬(猛烈)하게 들어갔다.
악전고투(惡戰苦鬪) 수십 분 만에 병사(兵舍) 한편을 점령하고 한편으로 서남 정문을 점령하여 중국군의 퇴각로를 차단하였다.
◇
이 작은 충돌을 들은 당시에 독립수비대 제2대대장 □태(□太) 중좌는 일이 이미 이에 이른 이상 북대영 1만 2천의 군대가 대거 습격하여 오면 불과 6백의 독립수비대의 운명이 어찌 될지 알 수 없어서 기선을 제압하려고 용감하게 공세를
취하여 각지 수비대에 출동명령을 내리고 동시에 관동군사령부 및 기타 연안 각지 대대 본부에 사변(事變)을 보고하고 북대영을 습격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매우 빨리 대응해 오는 공격에 북대영왕이철 군은 몹시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출전 : 기억조차 새로운 北大營 戰跡, '每日申報', 1933년 9월 9일>
[7-2]
감격의 도시 하얼빈(哈爾賓)
◇
동양의 파리라 하는 국제도시 하얼빈의 교외는 처참도 하다. 작년 대홍수 참화의 자취는 아직도 남아있다. 게딱지같이 토굴, 토막이 산재한 댐 위에는 영양 불량한 군중의 걸음이 더디기도 하다.
◇
열차는 정거장 구내로 달려들었다. 보곽(歩廓)에는 원□(猿□), 거고(巨尻), 세□(細□), 제족(蹄足), 고복(鼓腹), 양□(羊□), 장수(長袖)의 내외 남녀 무리의 잡답 훤□(喧□) 등 기이한 광경이 펼쳐진다.
일행은 육교를 건너서 제1보곽에 이르렀다.
하얼빈 시장은 큰 몸을 조그만 단상에 올리며 환영사를 개진(開陳)한다.
만주어이니 알아들을 수는 없으나, 억양과 ‘제스처’는 웅변 대가의 풍모를 보인다.
그런데 시장이 선 곳이 옛날 이토 히로부미 공이 저격을 당한 지점이라 한다.
그 장소를 일부러 찾아서 환영사를 드리는 시장의 □□는 매우 깊지 않은가. 현재와 과거의 감상이 여러 사람의 얼굴에서 교차한다.
하얼빈은 □업(□業), 경제, 교통 방면에서 전 만주의 중심일 뿐 아니라, 정치상으로 봐도 전형적인 국제도시이다.
만주인 30만, 러시아인 8만 4천여 명, 일본인 1만 3천 40여 만의 대도시이다.
조선동포도 만주사변 이후로 격증하여, 오늘날에는 6천 명을 돌파하였다 한다.
시가가 화려하고, 가지런함은 명성 그대로이다.
도로가 청결하고, 수목이 하늘 높이 솟았고, 움직이는 인종이 단아하다. 옛날 러시아의 대동양경영의 발원지여서, 규모가 크고, 빈틈이 없던 것을 이제 다시 일러 무엇하리오.
지사(志士)의 묘, 극락사(極樂寺)를 감격스럽게 구경한 뒤에 짐을 북만(北満) 호텔에서 풀었다.
◇
'하얼빈' 야화(夜話)! 평소에 매우 정취 있게 들리던 말이다.
이국 정조를 느끼게 되리라는 선입견보다 러시아인들의 낙천적 방랑성에는 의외의 □□이 미래를 의심하게 한다.
다정히 팔을 걸고 거리를 산보하는 남녀의 무리 모두 녹수(綠水)의 사사(寫寫)다.
그들 다수는 물론 백로계(白露系)의 유랑민이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서 도무지 슬픔을 찾아낼 수 없는 것은 보는 사람의 둔감이라고나 할까.
<출전 : 감격의 도시 哈爾賓, '每日申報', 1933년 9월 23일>
8. 천장절축일(天長節祝日, 1921·1923년 사설)
[8-1]
삼가 오늘 1921년 10월 31일을 생각한다.
대일본 천황 폐하의 제43회 천장절을 축하하고 기리는 날이라. 욱일중천(旭日中天)에는 상서로운 기운이 영롱(玲瓏)하고, 상서로운 구름이 끼며, 만물은 여호(曦曍)한대, 풍명전(豊明殿) 내에 따스한 기운이 피어나고, 엄숙한 용모와 장중한 태도는 여러 가지이며, 여러 겹의 구름문이 근엄하게 열리자 온 땅의 노란 국화는 향기롭고, 균천(均天)의 광악(廣樂)은 한없이 귀에 가득한데, 임금이 주는 술 3번에 모든 관리가 기뻐 춤을 추고 만세의 환호는 오우치산(大內山)을 스쳐 부는 바람과 어울려 임금의 장수를 축하하리로다.
삼가 생각하면 천황 폐하께서는 문무(文武)의 덕을 겸비하고 계시며, 신과 같아 신기(神器)를 조상으로부터 받았고,
제범(帝範)23)을 계승하사, 메이지(明治)를 세우는 큰 사업을 계승하시고, 다이쇼(大正)의 큰 일을 베푸시니, 화(化)는 초목(草木)에 미치고, 뇌(賴)는 사방에 미쳤도다.
극히 큰 덕을 나타내시며, 속히 큰 계획을 진행시켜 국가는 태산(泰山)의 안(安)에 두시고 백성은 안락한 집에 두었으니, 우리 7천만 동포로 폐하의 백성 된 중에 누가 폐하의 덕을 떠받들지 않으며, 폐하의 은혜를 받지 않은 자가 있으리오.
폐하는 하늘의 덕을 갖춘 예명(睿明)으로서 일찍이 조선 통치에 마음을 써서 극도(克圖)하며, 비시(備試)하여 노력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으므로 친히 중요한 기틀을 만드시고 백채(百采)를 모두 같게 하시기에 정성을 다하여 부지런히 힘썼으므로 옥체(玉體)가 늘 건강하지 못하여 지난달 이래로 늘 편안하지 않다는 것을 삼가 들었도다.
초망(草莾)에 있는 미천한 신하 등은 폐하의 환후가 완쾌하지 못하심에 대하여 백성들이 몹시 걱정하여 하루라도 속히 완치하심을 기도하였는바, 다행히 병세가 위독해지는 지경에 있지 아니하심은 실로 우리 일반 백성의 손뼉 치며 기뻐할 일이로다.
살펴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대통(大統)을 이으시고 임금의 지위로 여러 가지 중요한 정무에 부지런하여 겨를이 없이 몸소 노력하심이 이미 천만 년을 셈하여 온 이래 황제의 위엄의 진작(振作)과 나라를 다스리는 계책의 심오함으로 백성이 모두 기뻐하고 나라의 기강이 크게 성하였다.
황제(황실)의 운명이 번성하고 백성이 살림이 넉넉하여 태평을 칭송하며, 뛰어난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을 즐거워하기에 이른 것은 모두 폐하가 다스리는 정치의 은혜를 입음이라.
그러므로 제국의 앞길은 장차 대륙을 넘어 동양에 용비(龍飛)하고자 하나니 곧 이제 천하 우주 만물의 뛰어난 나라의 한
원수(元首)를 의지하며, 춘추(春秋)는 바야흐로 혈기가 왕성하사 대대(代代) 임금과 비할 수 없는 영광을 발하셨나니, 2천 5백 년 이어진 역사가 영구하지 아니한 바는 아니나, 제국의 광채를 나타냄이 오늘날과 같이 융성함이 없었도다.
옛사람 중에 주(周)의 문무의 덕을 칭송하는 자 있어 위대하고 고귀하다, 문왕(文王)의 책략이여, 위대한 계승이여, 무왕의 공덕이라 하였도다.
우리는 삼가 이를 모방하여 선대(先代)의 황제와 지금의 황제를 칭송하건대 위대하고 고귀하다, 메이지(明治)의 책략
이여, 위대한 계승이여, 현재 임금의 공덕이라 하겠도다.
미천한 신하 등은 삼가 동쪽을 향해 절하옵고 유부(類附),24) 1천8백만의 백성과 함께 매우 기뻐하여, 삼가 남산(南山)의 축하주(壽杯)로서 주 조정(周廷)의 송축하는 말과 중국인의 서축사(西祝辭)로서 함께 국가(國歌)를 삼창하여 우리
황제 만년 무강(無疆)을 기리며 축하하나이다.
23) 중국 당나라 태종이 648년에 친히 편찬하여 태자인 고종에게 하사한 책.
24) 종녀(宗女)와 서얼(庶孼).
<출전 : 天長節祝日, '每日申報' 1921년 10월 31일>
[8-2]
하늘이 동방(東邦)을 춘의(春依)하사 오늘로써 우리 문무의 덕을 겸비하신 천황 폐하 연세가 꽉 찬 마흔 네 살로 천장가절(天長佳節)의 경사스러운 날을 맞이하는도다.
신민(臣民)의 축하가 어찌 같으리오.
더욱이 몇 해 전에 폐하가 환후로 인해 편안하지 않으셔서 여러 정무의 섭정(攝政)을 황태자에게 명하시고 원양(願養) 중에 있으심은 신민이 두려워하던 바라.
요즘 얼핏 들은 바에 따르면 폐하 섭정 이래로 옥체가 날로 건강하고 기력이 왕성하시며, 옛날에 비하여 병세가 좋아지고 있으시다 함은 나라 전체가 모두 함께 경축하지 않을 수 없도다.
□□□ 폐하의 환후가 하루라도 빨리 회복되어서 다이쇼(大正)의 태평한 세상이 천만 년 이어져 7천만 백성이 함께 평안한 복을 누리며, 뛰어난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을 노래하고자 하노라.
보통 매년 지금과 같이 좋은 때를 맞이하면 폐하의 만수무강을 축하하기 위하여 황족으로부터 문무 고관과 명부(命婦)
25)에 이르기까지 풍명전(豊明殿) 위에 모두 함께하며, 특히 본국에 머물러 있는 우방(友邦) 원수(元首)의 대표사절 또한 한자리에 모이는 영광에 더하여 존경(敬視)의 뜻을 표하도다.
또 밤에는 □□ 외상(外相) 관저에 어여쁜 국화가 향기로우며, 아름다운 월계수가 □하는 고당(高堂)에서 연회를 크게
열고 조정과 민간의 이름난 사람들과 내외의 귀신(貴紳)26)이 함께 춤추며 1년에 한 번 있는 좋은 날을 축하하고, 전국의 방방곡곡은 물론이요, 무릇 해외 각지에까지 진실로 일장기(日章旗)가 나부끼며, 야마토 민족(大和族)27)이 있는
곳에는 이 날에 임금의 사진에 절하며, 축배를 높이 들어 우리 황제 만세(萬歲)를 삼창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도다.
25) 봉작(封爵)을 받은 부인(夫人)을 통틀어 일컫는 말.
26) 지위가 높고 귀한 사람.
27) 일본 민족의 자칭.
이는 실로 세계만방에 있지 못한 것이오. 군민이 하나 되어, 서로 사랑하여 의(誼)는 군신이나 정(情)은 부자(父子)라는 일본 제국의 탁월한 단체와 하늘의 도움을 항상 가진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통(皇統)을 영원히 유지하시는 황실을
섬기고 받드는 신하의 충성이 특이한 일본국가가 아니면 보지 못할 바라.
양(襄)의 관동(關東) 일대에 자연재난이 있어 인명과 재물의 손실이 매우 크므로 폐하는 매우 놀라셔서 막대한 내탕금을 풀어 은혜를 베푸시며, 특히 조칙을 선포하시사 신민의 추향(趨向)을 분명하게 보이신지라. 대저 자연재난과 지진은
어느 시대든지 피하지 못할 것이라.
요(堯)의 성(聖)으로 9년의 수(水)가 있으며, 탕(湯)의 덕(德)으로 7년의 한(旱)이 있으니, 이를 헤아려보면, 다이쇼(大正)의 태평한 세상에 크고 작은 자연재난과 이변이 있다 할지라도 충분히 임금의 덕과 관계가 없거든, 하물며 폐하는 척연(惕然)히 마음과 힘을 다하여서 백료유사(百僚有司)로 하여금 정무(政務)의 쇄신을 명하시고 고아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방안에 역불용□(歷不用□)셨다.
이뿐 아니라. 이제 황제가 거하는 도성의 질서가 나날이 더욱 안정하며 당면한 많은 업무가 잘 되어 갔으며, 그 빈민
이나 이재민을 구제하는 더없이 극진한 마음으로 특히 이날에 큰 축하연을 중지하시며, 황태자의 혼례까지 연기하여 잘 다스리고 안정시키신지라.
이것이 신하와 백성을 더욱 떨쳐 일어나게 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바이로다. 우리는 좋은 날을 맞이하여 임금의 뜻을 생각하여 삼가 공경하는 태도로 임금을 대하며, 다만 7천만 동포의 정성스러운 뜻을 모아 삼가 성수(聖壽)의 만세(萬歲)28)를 세 번 부르노라.
<출전 : 天長節祝日, '每日申報', 1923년 10월 31일>
28) 임금의 나이가 끝이 없다는 뜻으로, 임금이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말.
9. 내선(內鮮) 양 민족의 관계를 논하노라(사설)
- 평화는 친애로, 친애는 융화로
현재 천하의 대세를 주장하는 자는 반드시 세계의 평화문제를 부르짖으며 극동(極東)의 평화를 주장하는 자는 반드시 일본과 중국의 친선문제를 제창하며, 또 일국의 안정을 주장하는 자는 반드시 조선인과 일본인의 융화문제를 주장하므로 세계와 극동과 작은 나라의 태평과 강하(講何)는 오직 평화와 친선과 융화로서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함은 뛰어난 지혜가 아니어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문제와 극동문제는 고치(姑置)물론하고 먼저 나라의 현상 및 장래를 생각하는 자는 강하를 다시 묻지 않고 그 주장하는 바는 첫째도 내선융화, 둘째도 내선융화, 셋째도 내선융화로 마무리하니 이는 즉 옛사람의 이른바 여러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한결같다는 것이 곧 이것이로다.
대개 평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친선이요, 친선에 이르기 위해서는 융화이니, 오늘날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절실히 요구되는 바는 평화를 주장할 시기도 아니요, 친선을 주장 할 시대도 이미 지났고, 지금은 융화의 적당한 때라고 말할지로다. 그러나 세상의 일은 이론보다도 실제가 필요할 것이니, 이론으로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실행하지 않으면 이는 이른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아니함이니, 그러므로 우리가 내선융화를 이론적으로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행이 이에 서로 맞은 후의 일이나, 세상의 일은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말하기는 쉽지만 행하기는 어려운 것이라. 그러나 이 융화문제와 같이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서로 그 장벽을 없애고 서로 생각을 막지 않으며, 마음이 □□하지 않으면, 뼈와 살이 가깝지 않더라도 결코 도달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니 이는 옛말의 이른바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이다.
한일합병 이후로 우리 조선과 일본 민족은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같은 땅을 밟게 되었으므로 두 민족의 융화가 점차 그 밀도를 더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에 불행하게도 인제(麟提) 사건이 발생한 후로 우리 조선인의 사상계는 전과 다르게 변화하여 일부 과격분자의 폭동으로 남의 의견에 따라 움직이는 자가 많아졌으므로 일본인에 대한 조선인의 태도가 점차 그 온정이 한동안
냉각(冷却)된 것은 □至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 현상이요, 결코 이것이 오래도록 마음에 있지 않을 것은 명백한 일이니, 우리 조선인은 그리 의식(意識)이 없는 자가 아니며, 또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귀도 있도, 눈도 있으며 그 보는 바와 듣는 바며, 세계의 큰 흐름에도 각오(覺悟)한 바가 있으며, 조선과 일본의 관계상으로도 많은 이해를 한 것은 현재 상황 속에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라. 그런즉 이 각오와 이해로부터 나온 이른바 융화라는 것이 그 산물이니, 작년부터 조선에는 인심(人心)이 대□경론으로 통일되어 험악한 사상은 이미 잠잠해지고 춘풍(春風)에 따스한 기운이 넘치는 중에 일체(一體)로 일본인에 대한 태도는 점차 성실, □만(□満)하게 되었고 □□ 〓 간격 〓 해현의 마음은 마치 음지의 얼음이 따뜻한 봄을 맞이하여 녹아 버리는 것과 같으니 이는 즉 이른바 싸움은 평화로 〓 평화는 친선으로 〓 친선은 융화로 변하여 옛사람의 이른바 ‘일절(一節)이 심어일절(甚於一節)’이라는 가을에 이르렀도다.
그러나 일본인 된 자 □□□□□□□□□□□□□□하며 참된 마음을 발하여 친밀한 정과 온화의 정으로서 상대하지 않을 수 없으니, 사람은 감정적 동물이라.
아주 작은 차이에 천리(千里)가 어긋나니 털끝만치라도 불평불만의 태도로서 조선인의 감정을 해칠 때에는 이는 한 개인, 또는 한 사회의 문제가 아니니 일본인 된 자는 마땅히 이 점을 심각하게 유의할 바이로다.
중국 후한(後漢)의 말에 촉(蜀), 위(魏), 오(吳) 삼국이 정립의 연으로써 서로 갈라졌으나, 오, 촉은 겨우 일격(一隔)의 땅을 지키는 데 불과하였도다. 만일 오, 촉이 서로 어울리지 아니하면 위의 병합을 깨뜨릴 수 있어 이에 손권(孫權)이 일가(一家)가 된 연후에 북(北)으로 조조(曹操)를 막아냈으니 현재 우리 제국의 처지도 이과 같이 동양으로서 서양을 대하며, 황색인종으로서 백인종을 물리치려면, 어떤 것보다도 우선 조선과 일본이 일가가 되며, 일본과 중국이 친선의 정을 결탁한 연후에 가능할지니 이는 일본에 이익이 될 뿐 아니라, 조선에도 이익이 되는 것이라. 이른바 분리하면 공멸하고, 결합하면 공존 된다고 말한 이것은 이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도파(道破)한 지언(至言)이 아니리오. 고인의 시(詩)에 “본디 한 뿌리에서 같이 태어났거늘 서로 괴롭히기가 어찌 이리 심한고”란 시구를 우리 조선인과 일본인은 마땅히 늘 기억해야 할 바이로다.
<출전 : 內鮮 兩民族 關係를 論하노라, '每日申報', 1922년 3월 25일>
10. 매일신보가 본 반도 20년간, 을사에서 병인까지
- 구조선에서 신조선으로 변천을 밟아 (연재기사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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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이 부임하기 전에 한국 정부는 내각의 경질(更迭)이 있어 전(前)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을 참정대신(參政大臣)으로 하고 기타 대신은 한규설 내각 때와 마찬가지로 내부 이지용(李址鎔), 탁지부 민영기(閔泳綺), 법부 이하영(李夏榮), 군부 이근택(李根澤), 학부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 권중현(權重顯)(후일 이동이 있어 군부 이근택(李根澤)이 퇴각하고 권중현(權重顯)이 군부로 옮긴 대신에 성기운(成岐運)이 농상의 뒤를 이음)이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고 시정 개선을 맡았는데 세상 사람은 이를 가리켜 소위 오적내각(五賊內閣)이라 하여 상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토 통감의 원조가 있으므로 그 지위와 기초는 매우 호고하여 종래 유례가 없던 장수(長壽)를 비교적 오래 유지하였고 일본인 고문(顧問)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각종 시설(施設)을 행하였으니 즉 지방제도의 개정을 비롯하여 신교육령(新敎育令)의 발포와 치도사업 및 경찰제도, 세무기관의 창설 등을 □한 것이며 이에 필요한 비용으로 1천 3백만 원의 차관을 일본에서 들여 왔으니 이것이 후일에 와서 단연동맹(斷煙同盟)으로 상환하자 하던 한국 국채의 시초이다.
이에 그때 각 부(部)에 들었던 고문 및 참여 등의 씨명(氏名)을 덧붙여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궁내부(宮內府) 가토 마쓰오(加藤增雄), 내부(内部) 가메야마(龜山理平太), 경무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
재정 메가다 타네타로(目賀田種太郎), 세관 낭아□(永□盛三), 학부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 군부 노즈 시즈타케(野津鎮武), 법부 아즈미(安住時太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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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통감의 부임을 전후하여 경성에서는 윤효정(尹孝定), 장지연(張志淵) 등의 발기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라는
정치단체가 성립되니 그 목적은 한국의 자주권 회복을 바라는 것을 전제로 국민의 정신을 떨쳐 일으켜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교육과 산업개발로써 실력을 양성하여 부강독립을 목표로 한 것이니 당시 조선의 지식계급과 보수주의의 인물은 대개 이에 투입되어 일진회와 대항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파가 항상 정부와 통감부 측으로부터 재미없이 나아가고 물러난 것은 물론이요, 그 간부들은 경시청 명부에 성명을 주□(朱□)하던 소위 주의인물(注意人物)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충남 홍주(洪州)에는 민종식(閔宗植), 최익현(崔益鉉), 김복한(金福漢) 등을 중심으로 국권 회복과 임금 곁의 간신(奸臣)의 주멸(誅滅)29)을 표방하는 의병
소동(騷動)이 일어나 세상이 불(不)□하고 상하(上下)가 의심하여 두려워하던 때이다. 그런데 새 통감은 안팎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면서 경성에 들어왔다.
그의 대한방침(對韓方針)이란 과연 어떤것인지 알 수 없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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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은 부임하자마자 전술한 피로회(披露會)를 이용하여 그 정책을 성명(聲明)하였다.
대강의 뜻에 의하면 일한신협약(日韓新協約)은 일본이 어떤 침략적 야심을 가지고 체결한 것이 아니다.
약한 이웃을 돕고 또 일본을 스스로 지키고 동양의 평화를 위한 어쩔수 없는 행동인 것을 힘써 변론하고 통감은 이후
한국의 보호를 위한 일로 인도주의의 입장에서 서무(庶務)를 개혁하며 민지(民智)를 계발하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큰 뜻을 세워 한국이 뒷날 부강기초(富强基礎)를 확립하게 하여, 일한 친선으로 공존공영을 기약한다는 것을 누누□□□을 비(費)하여 고조하였다.
일본의 국책(國策)은 한국에 있어서는 그 나라의 이익과 국민의 행복을 이루도록 지도하고 두루 베푸는 것과 중국에 있어서는 문호 개방, 기회균등주의를 정성을 다해 지키는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 성명은 확실히 외국인에게 일종의 호감을 주었고 한국 민중에게도 다소의 안심을 준 것은 사실이다(그때 처지로 한국 민중이 반대한데야 별수도 없겠지만).
그리고 이토는 한국 내정개혁에 착수하여 전기(前記)와 같이 자금 대부를 비롯하여 여러 제도 창설을 독려하고 소위
궁궐 숙청을 실행하기로 하여 일본인 경관으로 궁문 수호의 직책을 맡게 하여 출입을 자세히 조사하였다.
이때 한국 민중은 황제를 가둔 것과 같은 것이라 하여 적지 않게 격앙 되었지만 소위 궁중(宮中), 부중(府中)을 구별하여 정치상의 명령이 한 곳에서 나온 점에서는 무익한 일도 아닐 것이다. 이토는 또 유생(儒生) 회유에 착안하여 신기선(申箕善), 조중응(趙重應) 등으로 하여금 대동학회(大東學會)를 일으키어 이를 원조하고 박영효(朴泳孝), 유길준(兪吉濬)
이하 망명객을 사면하여 돌아오게 하며 김윤식(金允植)의 □□를 사(辭)하여 각 방면의 인심 수습에 힘썼었다.
<출전: 每日申報가 본 半島 20년(6), '每日申報', 1926년 9월 6일>
29) 죄인을 죽여 없앰.
군대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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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공의 진의(眞意)가 한국을 다스리는 데 있었음은 그의 전후(前後) 십수차례 공공연설과 평상시 말에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떤 이유로 종전에 여러 사람의 의견을 힘으로 물리치고 부여(附與)하였던 외교 자주권을 회수하였으며, 오늘날에 와서 지도(指導)에 □일(□日)하고 모든 내정을 장중(掌中)에 잡아 한국 정부는 단지 헛된
명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른바 나라 안팎을 지킬 만한 군대에까지 손을 대어 궁성을 지키는 약간의 병사를 제외하고 전부 해산시키고 말았는가.
이는 이토의 마음과 반대라는 것보다도 한국의 외교권 관리라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일본 국민의 의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 즉 바꾸어 말하면 일본 국민은 러일전쟁에 제공한 희생이 컸던 것만큼 또 강화(講和) 조건에 불만이 많았던 것만큼 한국과 만주 경영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적극책을 취할 것을 희망하여 정부의 힘으로도 이를 어떻게 하지 못하게 된 것이 하나요, 또 한편으로 무능한 한국 정부가 이러한 와중에도 오히려 구태의연하여 그 어떤 시설도 개선한 확실한 행적이 없고, 오직 권력투쟁에만 열중하여 민족의 운명을 도외시하는 동시에 시세에 어둡고 자력(自力)을 키우지 못하는 민중이 일본의 과은(寡恩)을 원할 줄은 아나 자강자립(自强自立)하여 실력을 기르는 원칙을 무시하고 행동하지 않은
결과로 더욱 강한 이웃 나라의 진노를 돋우어 자가(自家)의 형편을 더욱 나쁘게 인도하게 한 것이나 이 어찌 오직 일본의 야심과 이토의 □사(□詐)를 탓할 것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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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1일에 이토 통감은 주한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 대장에게 한국 군대의 해산 명령을 정식으로 내리니 이보다
먼저 통감은 이완용(李完用), 이병무(李秉武) 두 대신을 관저(官邸)로 초대하여 한국 군대의 쓸모없음을 역설하고 확실하게 이를 일시 해산하고 후일 적당한 시기에 국민개병주의에 의해 징병제를 실시할 것을 종용하였다.
두 대신은 순순히 받아들이고 돌아와 각의(閣議)에 명하여 해산에 관한 모든 준비를 하는 동시에 만일 군대가 해산에
순종하지 않으면 경성 치안은 일본군대가 담당할 것을 통감에게 의뢰하였다.
이에 하세가와 사령관은 통감의 명에 따라 이군상(李軍相)을 해산하여 8월 1 일로써 훈련원에서 거행하기로 해산순서를 정하고 만일을 대비하기 위하여 오카자키(岡崎) 제13사단장과 미야케(三宅) 헌병대장에게 한번 명령하여 즉시 출동하여 진압하게 하고, 한편 일방으로 마루야마(丸山) 경무고문(警務顧問)은 수백 경관을 단속하고, 미우라(三浦理) 사관(事官) 역시 소방대원 등을 소집하여 비상준비를 하게 하며, 일본인 거류민들은 의용단(義勇團)이니 자격단(自擊団)이니 하는 것을 조직하여 곤봉죽창(棍棒竹槍)등 무기를 들고 여러 가지 용의만단수지불통(用意萬端水池不通)의 매우 세밀한 준비를 갖추었다.
남산 일대에는 살기(殺氣)가 넘쳐 진실로 산이욕래풍좌루(山爾欲來風座樓)의관(觀)이 있었다. 당시 한국에는 □위(□衛), 시위(侍衛) □대(□隊)의 보(步), 기(騎), 포(砲), 공(工) 각 병력과 및 지방진위대(地方鎭衛隊)를 □하여 이루어진 1여단(旅團)의 병력이 있어 그 수가 무려 1만여 명이나 된 즉, 비록 일본의 1사단의 병력에도 미치지 못하나 하여튼 무기를
가지고 신식 훈련을 거쳤으므로 이것이 1차 결속하여 대항한다면 쉽지 않은 일이므로 이와 같이 철통 같은 준비하에
일적(一滴)도 불□(不□)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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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8월 1일 새벽녘부터 각 병영에서는 대장 이하가 출동하여 전 병력의 총기를 수합하여 창고에 넣어 두고, 다음에는 일본 군대가 이를 지키며 맨손과 맨주먹의 병정들은 대오(隊伍)를 갖추어 관청으로 향해 가는 양(羊)의 모양으로
훈련원으로 향하는데 식장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오직 윗사람의 명령하는 대로 순종하면서도
내심은 두려워서 마음이 거북하였다.
그리하여 훈련원 식장에 집합한 것이 오전 8 시인데 이 곳에서 이군상(李軍相)이 조서를 소리 내어 읽고 해산을 명한 후에 일봉(一封)30)의 은사금(恩賜金)을 주어 퇴산시켰다. 예상한 것보다 의외로 해산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보고
당국자들도 겨우 마음을 놓으려던 순간에 서소문(西小門) 방면에서 총성이 일어나며 삽시간에 경성에 굉장한 수라극(修羅劇)이 연출되었다.
<출전: 每日申報가 본 半島 20년(15), '每日申報', 1926년 9월 17일>
전토(全土)의 병화(兵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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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일의 새벽녘부터 음울한 날씨가 계속되더니 오전 7시경에는 빗발이 세차게 쏟아져 무심한 자연도 비장한 기세를 도와 이날의 비극을 조문하는 듯하였다.
30) 사례금이나 상금으로 얼마의 돈을 넣은 봉투.
훈련원 언저리에 무기 없는 1만 여의 병력이 은사금 일봉을 받아가지고 망연자실하고 말없이 칼과창이 □□한 일본 병사의 감시하에 삼삼오오로 귀도(歸途)에 취(就)하는 때에 한성 서남각(西南角)에서 돌연히 □살(□殺), 명천(銘天)하고 총성이 어지럽게 일어나면서 새벽꿈이 정농(正濃)하는 시민의 귀를 놀라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시위(侍衛)31) 1연대(聯隊) 제1대대장 박성환(朴星煥)이 해산의 명령을 받고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병졸(兵卒)의 총기를 회수하여 두고 앞으로 훈련원으로 향하려 하는 중에 분함과 원한을 견디지 못하여 단도(短刀)로 자경(剌頸)하여 무사다운 최후를 마쳤다.
이와 같은 무언의 명령을 받은 병졸은 한꺼번에 봉기하여 무기 창고를 습격하여 회수되었던 총기 탄약을 꺼내 가지고
남대문 병영(현 남대문소학교)이 살기로 충만한 때에 인접한 서소문병영(시위 제20대대)에도 이어져 2영(二營) 병졸이 일본군대와 충돌함으로써 전기(前記)와 같은 활극(活劇)이 생긴 것이다. 만일을 경계하던 군은 사령관의 명령과 함께 13사단의 각 부대가 남대문 방면으로 출동하여 남대문 위에 기관총을 두고 맹렬하게 사격하였다.
강자와 약자는 상대가 되지 않음이요, 적은 수로 많은 수를 대적하지 못한지라. 맹렬한 전투 여러 시간 동안 한국 병사의 사상자가 속출하고 후응(後應)도 업고 탄환도 다하매 힘이 빠진 나머지 무리는 어찌할 수 없어서 조분수진(鳥奔獸震)하여 단병전(短兵戰)32)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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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에 이르러서는 우박도 그치고 전투도 종식되고 다만 남문 부근에 비린내 나는 피가 흥건할 뿐이었다.
그런데 참극(惨劇)은 이로써 그치지 않았고 태평동(太平洞) 일대가 짓밟히는 처참한 비극이 생겼다.
열흘 전 독립 소동이 있었을 때에 일본 거류민 몇몇과 우편배달부 등이 한인의 폭행을 받아 명대로 살지 못하고 참혹하게 죽은 일이 있었음은 전술한 것인데, 이에 분노하였던 이현(泥峴)33)의 거류민의용단(居留民義勇團)은 이 기회에 죽창대(竹槍隊)를 출동시켜 도망간 병사를 체포한다는 구실로 부근 민중에 함부로 들어가 머리카락을 깎은 자만 보면 찔러 죽이거나 체포하는 난폭하기 짝이 없는 참학(慘虐)을 행하였다.
이때 옳고 그른 사람 구별 없이 까닭 없이 죽은 자가 얼마인지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진정한 싸움에 져서 달아난 병사가 숨어 있던 민가에서는 한 집안이 전멸하는 재앙을 당하기도 하였다. 아무리 비상시의 흥분되고 또 적개심과 복수심이 극도로 고조된 때라 할지라도 이토 통감의 □하(□下)에서 이와 같은 불상사가 생긴 것은 그가 평소 표방하던 인도주의에 비추어 보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31) 임금을 모시어 호위함. 또는 그런 사람.
32) 칼이나 창 따위의 단병으로 적과 직접 맞부딪쳐 싸우는 전투.
33) 서울 중구의 이현.
폭력으로 폭력을 고치고 원한으로 원한을 갚은 결과, 오늘날에 와서도 그 감정의 도랑이 쉽게 메어지지 못함은 어찌하지 못할 추세이다. 어린 아이가 밤에 울지 못하고 사람들이 어깨에 짐을 짊어져 췌췌(惴惴)히 체면이 없다던 중국인의 모습이 이에 대한 그 비유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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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 군대 해산은 비록 처참하였으나 오히려 이만한 정도로 그치고 말았거니와 지방 진위대(地方鎭衛隊)의 해산에
이르러서는 그다지 단순하지 않았다.
혈기 왕성한 청년 병졸이 시대의 요구와 대세를 지혜롭게 동□(洞□)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강원도와 충청도 지방에서 해산된 병사들이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키고 유림이 이에 대응하여 도처에 큰 소란이 생겼다.
관리 학살과 친일파 박멸이 그들이 군대를 일으킨 유일한 목적이 되었다.
친일파라 할지라도 그들이 지목하는 것은 일진회원(一進會員)이요, 일진회의 유일한 증거는 머리카락을 깎고 모자를
쓴 것이기 때문에 당시 머리카락을 깎은 자는 갑작스러운 봉변에 어찌할 줄 모르고 의병 측과 토벌대로부터 각각 오해를 받아 비명횡사한 자가 무려 수만 명에 이르렀다.
또한 군읍(郡邑)이 황폐해지고 여염(閭閻)34)이 텅 비어 십 수리(里)를 가도 계견불문(鷄犬不聞)하도록 나라 안의 난리로 인한 재난은 거의 조선 각지에 미쳤다.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첫 시대에 강원, 충청, 경기, 경상 각지에 선유사(宣諭使)35)를 보내며 애통한 임금의 말씀(綸音)을 전달하여 시국 안정에 노력하였지만 형세가 날마다 다르고 사태가 위급함을 보고는 통감부에 의뢰하여 병력으로 진압 할 것을 한 번에 결정하자 소란은 더욱 확대되었다.
<출전 : 每日申報가 본 半島 20년(16), '每日申報', 1926년 9월 18일>
34) 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
35) 나라에 병란(兵亂)이 있을 때에,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백성에게 훈유(訓諭)를 알리던 임시 벼슬.
11. 조선 통치의 정신(사설)
- 의회에서 한 총감 답변
1.
과거 일중의원(日衆議院) 예산 제3분과회(豫算第三分科會)에서 신정구락부(新正俱樂部)의 허전명(許田明) 씨의 질문은 조선 통치에 관한 문제였었는데, 전보문이 너무 간단하여 그 자세한 내용을 판단하여 알기 어렵다 할지라도 옛글의 소위 편□(片□)으로도 충분히 전체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것과 같이 비록 그 문답이 간단하다 할지라도 그 의의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충분히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유아사(湯淺) 정무총감의 답변 중 “일본인이 조선인을 학대하였다 하는 악습관이 이전에 있었는지 알기 어려우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일이 없다.”라는 한 구절이 있는 것을 간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총감의 답변이 거짓 없는 고백이었던 만큼 심히 명백한 사실이니 원래 조선인과 일본인이 뿌리와 근원이 같은 혈통관계가 있는 것은 고사하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일가일족(一家一族), 무피무차(無彼無此)의 관계가 있는 이상 학대를 할 자는 다 없어졌으니, 또 학대를 받을 자는 누구일 것이랴.
2.
우리가 믿는 바에 의하면 병합 이전, 아니 다시 그 이전을 거슬러 청일전쟁(淸日戰爭)의 시대를 회고하면 혹은 일본인이 조선 동포를 □핍한 사실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병합한 이후로는 양자 공존공영(共存共榮)의 필요를 쌍방에서 인식하게 되었음과 함께 다음으로 그러한 사실은 전혀 □을 □함에 이르렀고 병합을 하나의 전환기로 하여 화리첩화의 실(實)이 양차(兩次)로 거하게 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다만 우리 조선인을 형식상으로만 푸대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신상으로도 학대하려는 생각이 없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아는 터이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당연히 존경할 자에 대하여 인격으로든지 재주로든지 또는 전설로든지, 관습으로든지 이에 상당하게 우리를 존경하지않은 예가 없었었다.
3.
또 총감의 답변 중 “조선 통치의 방침으로는 어디까지 일시동인, 내선융화, 공존공영을 위하여 진력하는 중이라.”고
한 구절이 있으니 소위 일시동인, 내선융화, 공존공영은 이것이 조선 통치의 대강령, 대주의이므로 역대 총독 및 총감이 이 강령과 이 주의로써 매진하여 오늘날에 이른 것은 세상 사람이 공통으로 인식하는 바이지만, 그 완전한 영광과 완벽한 공로에 대해서는 다소의 허물이 없지 않다.
분명히 말하면 현 사이토(齋藤)총독이 부임하기 이전까지는 조선의 통치가 바로 시작 중에 있었던 까닭이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현 총독이 장차 해사공(該事功)을 결실하게 하여 완전한 수확을 기약하려는 중이다.
4.
당초 한일병합(韓日倂合)은 이것이 무엇을 위하여 한 것인가 함에 대하여는 이유가 없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일본만을 위하여 소위 식량문제라든가, 인구문제라든가, 국방문제라든가 하는 것 등만을 위함이 아닌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조선만을 위하여서 한 것도 아니다.
그러면 이는 오직 공존공영을 위한 것이오. 이를 위해서는 피폐곤유(疲弊困愈)가 그 극에 달한 약소국의 민족을 궁지로부터 구하려는 특수 관계가 있는 이웃 나라 일본이 아니고서는 가능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그러므로 통치도 일본만을 위하여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또 조선만을 위하여서도 하지 못할 것이니, 즉 일시동인, 내선융화(內鮮融和), 공존공영의 3대강령으로 일관하지 아니하지 못할 것이다.
가령 정치의 형식과 제도에 이르러서는 혹 때를 따라 손익가감(損益加減)이 있을 것이지만 통치의 근본정신에 이르러서는 이후에 있어서도 이것이 □투(□渝)될 것이 아니다. 원래 패도(覇道)는 이(利)를 먼저 취하고 의(義)를 후에 취하는 것이지만 왕도(王道)는 의(義)를 먼저 취하고 이를 후에 취하는 것이니, 우리는 오늘날 조선 통치가 왕도로 되기를 바라며 또는 왕도로 되어 있을 줄로 믿는 바이다.
<출전 : 朝鮮統治의 정신, '每日申報', 1927년 2월 4일>
12. 논조(論爼)에 오른 학교맹휴(상, 하)(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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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맹휴(學校盟休)는 뒤를 이어 속출하여 최근 숙명여고(淑明女高)를 비롯하여 보성고보(普成高普), 중앙(中央), 휘문(徽文) 등 많은 공립학교와 사립학교가 차례로 맹휴를 일으키고 있다.
요즈음 경향의 맹휴 통계로 실로 30여 학교의 다수를 보게 되어 전 조선의 교육계는 매우 순탄하지 않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 맹휴의 동기를 검토하면 그중에는 비록 학생의 처지라 하더라도 가히 참을 수 없는 만불획기(萬不獲己)한 최후 수단
으로 나온 것이라 인정할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이를 단순히한 학교의 맹휴사건으로 만들 수 없고 그 이면에는 피교육자 대 교육자의 윤리적 관계
를 약자 대 강자, 정복자 대 피정복자의 대립으로 간주하여 평온하게 의논하여 능히 해결할 문제인데도 반드시 항거와 대치의 태도를 취하는 일종의 계급적 반항 심리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고는 중세(衆勢)
□□하여 폭행, 난폭한 행동 등 미리 작정한 ‘프로그램’을 □연(□演)하는 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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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하여 마침내 경찰의 간섭을 받고 사법의 출동을 보게 되어 현재 □□의 재앙에 신음하는 자가 한둘에 그치지 아니하니, 이는 한갓 교육계의 불상사일 뿐 아니라 실로 조선 현재의 사회적 중대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랄 만한 것은 학생의 교문(敎門)에 대한 반항적 운동을 인문(人文) 발전의 한 단계로 잘못 믿고 과도기에 있는 자연적 현상의 일로 간주하여 무조건으로 학생 측에 가담하여 학교와 당국을 공격하며, 중세(衆勢)에 아첨함으로써 저급한 인기를 넓혀 자기가 속한 무리의 사회적 지위를 지지하고자 하는 염치없는 집단이 공공연히 존재함이다. 그들의 주장은 전 조선 30여 학교의 맹휴에 대하여 일률로 맹휴생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그 죄가 학교에 있다 하여 퇴학, 정학의 처분을 학교 측의 횡포라 하고 폭동에 대한 경찰의 간섭과 사법의 출동을 일□법□(一□法□) 남용으로 단정하여 훼언반어(毁言反語)로 선동적 태도를 취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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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학교와 당국의 처치에 결함이 없음을 시인하고자 아니한다.
그뿐 아니라 맹휴사건을 형평운동(衡平運動)과 소작쟁의 등과 같은 일종의 계급적 반항운동으로 보는 얕은 생각을 절대 배척하고자 한다.
하물며 그 사건의 원인이 일부 학생 등의 분별없는 행동에서 나왔다 할지라도 학교 당국은 아이들을 가르쳐 이끄는 지위에 있어 가급적 너그러운 처치를 취하기를 바라 마지않는 바이다. 그러나 학생 등의 태도가 이미 난폭한 행동으로 나와 학교 당국에 실질적 손해를 준 이상 경찰이 간섭하고 사법이 출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학교 스스로 학생 측의 요구에 무리함을 느끼고 그 잘못을 인식하고 아무런 반성이 없을 때는 퇴학, 정학(停學)의 단호한 수단을 취함도 또한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상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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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학교 측의 죄와 허물을 적발하고 맹휴를 일으켰다고 반드시 학교 측의 죄와 허물을 시인할 수 없으며, 학교 측에서 학생 등의 요구를 거절하였다고 반드시 학생의 요구에 무리가 있다고 단언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학생 측에서 죄와 허물로 인정하지 아니할 것도 있을 것이요, 학교 측에서 거절하는 학생 등의 요구조건에도 제3자의 입장에서 공정히
보아 상당한 요구로 인정할 수 있는 것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자신이 훈육(熏育)하는 청년 자제(子弟)에게 반역적 행동을 취하게 함은 학교 당국에 절대적 책임이 있어야 할 것이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교문(敎門)에 독화살(毒矢)을 이루며(成) 은사(恩師)를 향해
모욕 구타 등 난폭한 행동을 하는 자를 절대로 배척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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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학교맹휴 사건은 먼저 그 표면에 나타난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지 않은 행위를 배척할 것이요, 그 이면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는 진상을 자세하게 조사하여 공평한 입장에서 냉정하게 비판하는 신중한 태도를 취하여야 할 것이다.
이에 한 가정의 통솔자로 가족에 대한 죄와 허물이 있다 하여 형제, 처자를 부추겨 피로 이름을 적은 문서를 제시하고
그 아버지의 비행을 적발하여 □욕 구타를 감행한다 하면, 이러해도 그 아버지의 죄를 시인함으로써자식의 윤리를 저버리는 난폭한 행동에 동정할 용기가 있겠는가.
만일 그렇다 하면 이는 무군무사무부(無君無師無父)의 세상이라.
그곳에서 윤리도덕을 논하기 어려운 여지가 있을 것이랴. 우리는 맹휴사건의 중심문제의 인물로 교육자로서 해서는
안 될 언동을 거리낌 없이 행하여 학교일치(學校一致)의 배척을 받고도 오히려 지위에 □□하는 뻔뻔스럽고 부끄러움이 없는 무리를 때때로 보았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의 분수(分義)가 서로 다르니 이러한 이유로써 학생의 난폭한 행동을
긍정할 수는 없다.
◇
교육자 대 피교육자 간에 윤리적 관계를 알지 못하여 분규를 일으킬진대 교육의 위엄과 권위가 어디에 있으며 자제를
훈육하는 본래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에 이르러 우리는 맹휴에 대한 일부 세간의 망령된 단정적 비판보다 오히려 문제 당면의 책임의 일부를 져야 할 학부형들이 자제의 난폭한 행동을 따르는 태도를 취하는 것에 대해 많은 불쾌를 느끼는 바라. 자제의 훈육에 대한 학교 당국의 결함을 인정할 때는 학부형 스스로 궐기하여 학교당국에 적당한 교섭을 행하여 해결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
만일 자제 등이 최후의 난폭한 행동을 할 때까지 학부형 측은 전혀 몰랐다 하면 이는 한갓 학교 대 학생 간에 생각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각 가정의 자제 간에도 생각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요, 더 나아가 자제 등이 맹휴하기까지에 이른 경로를 듣고도 이를 학교에 국한된 문제라 하여 수수방관하였다 하면 그 부형이야말로 자제에게 대하여 아무런 성의가 없는 자다. 우리는 오히려 요즈음 빈발하는 맹휴에 대하여 그 당면의 책임을 학부형에게 묻고자 한다.
<이상 (하)>
<출전 : 論爼에 오른 學校盟休(상·하), '每日申報', 1927년 11월 22~23일>
13. 고마다(兒玉) 정무총감을 맞이함(사설)
1.
조선 정무총감(政務總監)으로 친임(親任)된 고마다 히데오(兒玉秀雄) 백작은 어제 2일로써 도임(到任)하게 되었다.
조선은 백작의 감당(甘棠)의 땅이다.
우리가 백작을 정무정감으로 맞이하여 사모의 정이 오늘에 다시 절절함을 비(費)하게 되며, 또 백작으로서도 반드시
만감이 교차하는 바 없지 아니하지 못할 것이다.
백작은 명문가 맏아들로 1900년에 최고 학부를 나오자 통감부 서기관으로 조선에 부임한 이래 내무과장, 법무과장,
회계과장, 비서과장 등을 역임한 후 1912년에는 총무국장의 요직(要職)으로 승진하여 전후 12년간 조선 통치에 공헌한바 실로 막대하였다.
산하(山河)의 어느 곳에 백작의 족적을 남기지 아니하였으며, 서민의 어떤 자가 백작의 은혜를 환(歡)치 아니하였으랴. 그 후 백작은 내직(內職)으로 옮겨 내각서기관장(內閣書記官長), 상훈국총재(賞勳局總裁)의 요직을 거친 후 다시 관동청장관(關東廳長官)의 중임을 맡게 되어 변주(邊州)의 시설을 완비하며 이웃 나라의 우의(友誼)를 긴밀히 다짐에 그 비범한 수완과 심오한 식견을 더 많이 발휘하였다.
2.
조선 정무총감은 조선 통치에서 매우 중요한 지위이다. 실로 우리 조선 민중의 휴척(休戚)이 □재(□在)한 지위이다.
지금 경력이 그와 같으며 덕망이 그와 같으며 식견이 그와 같으면 또 우리와의 관계가 그와 같은 고마다 백작을 정무총감으로 맞이하게 됨은 어찌 우리를 위하여 □□할 바 아니며 조선을 위하여 □□할 바 아니라 할 것이랴.
고마다 정무총감은 완전한 백지주의(白紙主義)36)로써 조선에 임한다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조선은 백작의 간여에 의해 경시(經始)된 바요, 발전하기 시작한 바이다.
백작으로서 비록 조선을 수(雖)한 그간에 있었다 할지라도 어찌 꿈속에서나 조선을 잊은 바 있었을 것인가.
우리가 그동안 백작에 대해 생각한 것만큼 백작은 또한 우리에 대하여 생각함을 헤아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백지주의라 함은 다만 주도와 신중을 가하여 경륜을 행하려 한다 함에 다름 아니다.
전날 백작의 간여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조선은 오늘날 또 백작에 의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려 하는 바이다.
백작으로서 크게 한 바 없다 할 수 있으며, 우리가 크게 기대하는 바 없게 될 것이랴.
백작은 이미 동경을 출발하기 전에 “조선의 일초일목(一草一木)이 대부분 타자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한다.”고
말하였다.
대재(大哉)라, 이 한마디여! 백작의 생각은 이 한마디로써 설명되었다 할 바요, 또 백작에 대한 우리의 기대도 이 한마디에 불과한 바이다.
3.
조선은 오늘날 초창기로부터 결실기로 바뀌려는 만큼 실로 일이 많은데다 까닭도 많은 바이다.
이때에 그 경시(經始)에 간여한 고마다 백작, 식견□망(識見□望)이 출중한 고마다 총감을 맞이하게 된 우리는 그 얼마나 행복하다 할 것이냐.
백작은 경시에 간여한 만큼 각 방면의 장점과 단점, 이점과 폐단을 가장 명백히 자세하게 알게 되며 또 우리와 인연이
깊은 만큼 우리를 생각하는 열□(熱□)은 가장 □렬히 작용할 것이다.
이후 조선의 개발, 우리의 행복은 과연 몰라보게 놀랄 만큼의 진보한 경지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36)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고 형편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주의.
계속되는 가뭄에 의해 □구목□(□□目□)하던 조선 산하는 백작이 부임하자 매우 세찬 반가운 비로 소생의 기쁨이 넘쳐나게 되었다.
각 방면에 걸쳐 □□함이 많던 우리가 장차 새로운 총감의 보살핌에 의하여 행복과 기쁨을 누릴 좋은 징조라고 할 것이 아닌가.
□히 변변치 못한 말로 고마다 정무총감 환영사를 대신한다.
<출전 : 兒玉政務總監을 迎함, '每日申報', 1929년 7월 3일>
14. 사이토 총독을 맞이함(사설)
◇
사이토 총독은 재작년 ‘제네바’에서 개최한 해군제한회의에 출석하여 유럽 중앙에서 국제관계와 열강의 영토문제를
자세히 살펴보고 근년 추밀고문관(樞密顧問官)에 취임하여 8년 동안이나 자기가 통치하던 조선을 제3자의 지위에서
측면으로 관여하다가 또다시 어명을 받아 조선으로 부임하였다.
회고하건대 과거 8년간도 그리 단시일이 아닌 만큼 조선의 산천초목까지 모두 노(老) 총독의 사랑을 입어 잘 다스린
공적이 뚜렷하고 인풍(仁風)을 널리 떨쳤었다. 당시 통치의 제일 목표가 되었던 치안유지, 문화진흥, 경제발전은 차례
차례 기초를 쌓아 올려 바야흐로 크게 이루려 할 때 그 방도로는 민의창달(民意暢達), 상유철저(上喩徹底)를 도모하여 실로 관민(官民) 간의 일치로 자자하던 것은 지령(至令)에도 기억이 또한 새롭게 한 바가 있다.
사사(斯士)의 □서(□庶)로 하여금 가뭄으로 인한 재앙이 있어도 홍수가 있어도 사이토 총독을 불러 구고존(救苦尊)같이 존경하고 믿던 것이 이유 없는 것이 아니며 사이토 총독 또한 나아가나 물러가나 근심하는 꿈속의 넋은 반도의 전에
살던 땅을 □할 수 없음을 □답(踏)히 추□(推□)할 수 있으나 그것은 동경에서 출발할 때에 조천자(祖踐者)에 대하여
“아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한 것을 보아도 그 굳은 뜻의 편린(片鱗)을 추측할 수 있다.
◇
중앙의 정변(政變)을 초월하여 개척에만 노력하여야 할 조선에 정변의 □위(謂)이 파급함을 우리는 항상 우려하지만
사실대로 정직히 고백한다면 적어도 10년간의 집정이 아니면 그 정치적 이상을 표현할 수 없으리라 한다.
원래 정치란 영원한 목표하에 있어 갑(甲)의 집권과 을(乙)의 시정이 어떠한 방해 작용을 일으킬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러한 엉성한 속된 이론에는 긍정을 할 수 없으니 이상(理想)이 전혀 다른 이상 그 정치 도(道)에 대하여 방해 작용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는 인격자를 골라 쓰는 것과 정치 도의 운전방식이 달라 이따금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행복을 도모
하는 데 도리어 광한(曠閑)하는 폐해가 없지 아니하며, 그것이 매우 일반적인 일이라 하여도 가한 바이다.
그러나 이제 사이토와 조선은 겨룰 필요가 없으니 과거에 잘 다스린 공적은 민중이 우러러 그리워하는 상태로써 증명
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조선을 아는 자도 사이토요, 조선을 살아나게 하는 자도 사이토이다. 사(士)는 지기(知己)를 위해 죽는 것이 동양인의 도덕이라 하면, 2천만 민중의 지기(知己)인 사이토(齋藤)를 위하여 협□(協□)하는 것이 또한 2천만 민중의 사이토를 아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면 지기(知己)와의 결합은 금석(金石)도 가히 □하리라 하거니 2천만의 지기를 가진 사이토의 정치는 평탄하고
넓은 길을 걷는 감이 있을 것이다.
◇
세간에서는 사이토가 총독으로 재임됨을 의외로 아는 자도 많았으나, 2천만 지기(知己)를 가진 사이토의 재임을 의외로 안 것이 참으로 의외이다.
그것은 과거에 쌓아 올린 시정의 완성을 기할 것을 □□에 넘치는 유고(諭告)로써 헤아려 살피거니와 세상은 날로 진보하고 문화수준은 늘 향상하는 것이 조선의 현상인즉 8년 전의 조선이 아닌 것과 같이 사이토도 8년 전의 사이토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때에 따라 사철이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니 8년 전의 조선 통치의 급무(急務)는 치안유지였지만 그 경계를 벗어난 오늘날에는 스스로 완급의 차가 깊게 생기게 될 것이 필연의 형세가 된다.
더욱이 강기능청(鋼紀能淸)에 주력할 것을 표명함은 과연 2천만 민중의 □□인 것을 바로 알 수 있으니 물도 고이면
썩는다는 것과 같이 인심의 갱신(更新)은 강기능청으로써 중점을 삼아야 할 것이며 ‘정(政)은 정야(正也)라’ 함이 정치를 행하는 자의 중요한 법칙이라 하면 정의 정치는 강기능청으로써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반도의 행복과 이익을 위하여 노□(老□)의 □노(□努)도 □치 아니하는 사이토 총독을 맞이함에 삼가 2천만 민중을 대신하여 그 지기의 만일을 □하는 바이다.
<출전 : 齋藤總督을 迎함, '每日申報', 1929년 9월 7일>
15. 학생 제자(諸子)를 위하여(사설)
1.
일시 안정되었던 학계는 또다시 동요상태를 나타내게 되었다. 이것이 슬퍼해야 할 현상이며, 기피할 현상이랴.
학계에 이처럼 기피할 현상이 발생함에 대해서는 물론 사회나 위정자로서도 큰 책임을 져야 할 것이어서, 일률적으로
학생들의 경솔한 행동만을 나무라기는 어려운 바다.
학생이 학생 자체의 장래를 자신의 힘으로 파□(破□)하는 행동인 만큼 학생 자체로서의 경솔한 행동은 논쟁하지 못할 사실이겠으며, 따라서 그에 대하여 반성과 각성이 필요한 자는 누구보다 학생이라 할 것이나, 학생 자체가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혹은 학생 자체가 이러한 행동을 하지 아니하지 못할 환경에 놓이게 되었음에 연유한 바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 자체로서는 자기의 일생을 희생하는 중대한 사건이다.
다만 환경이 이러해서 이러한 행동을 하지 아니하지 못하게 된다 함으로만 시간이 지날 수 있다 할 것인가?
2.
만물은 떠돈다. 모든 여러 모양은 순간순간 변하는 바이며, 또 그 유동(流動)은 상대적 관련에 의해 자연 투쟁을 면하지 못하게 되는 바이나, 그 투쟁은 반드시 합리적이며, 질서적이어야 할 것이다. 우승열패(優勝劣敗)의 갈림길이 요컨대
그 투쟁방법의 합리, 불합리 여하에 있는 것이며, 문명야만(文明野蠻)의 분야가 결국은 그 투쟁수단의 질서, 무질서의
여하로 구별되는 바 아닐 것일까? 학생으로서의 투쟁, 즉 발랄한 원기(元氣)와 치열한 희망에 근거한 용감한 행동은
물론 학생 자체의 향상과 발전을 도모하는 바일 터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 합리적이며 질서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이성을 잃은 원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경망에 불과하며, 질서를 어지럽히는 용감은 결국 난폭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요즈음 각지를 통한 학계동요(學界動搖) 사건은 과연 학생 자체로서 이성의 판단에 의하며, 질서의 수단에 의한 행동에서 나온 현상이라 할 수 있을까?
학생으로서의 희망은 반드시 학생으로서의 본분에 의한 희망이어야 할 것이요, 또 학생으로서의 행동은 반드시 학생으로서의 범주를 지키는 행동이어야 할 것이다. 계속 분수에 넘치는 요구를 주장하며, 분수를 모르는 행동을 감행하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며, 인심을 어수선하게 함은 다만 학생으로서의 망동에만 그칠 뿐이 아니라, 사회의 평화와 질서를 교란하는 큰 죄악이라 할 것이다.
3.
고금동서(古今東西)의 어느 사회에 불평이 없고 불만이 없었으며 없다 할 것이랴.
그러나 인류는 그 불평과 불만을 합리적으로 조절하고 완화함으로써 행복을 기도하며 발전을 달성하는 것이다.
학계를 소란케 하는 학생 제자의 행동이 비록 망동이라고 할지나, 학생 자체로서의 일생을 희생하게 되는 행동인 만큼 학생 자체에는 이러한 폭발을하지 않을 수 없는 불평과 불만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야 할 것이며, 또 그가 비록 전혀
외부의 선동사주(煽動使嗾)에 의한 바가 아니라 할지라도, 학생 자체 내에 이러한 부추김을 쉽게 감수하는 만큼 불평과 불만의 싹이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조절하며 완화하기 위하여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이 과연 그 방법과 수단 면에서 마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학생제자로서 불평과 불만이 있다 하면 이는 어디까지 학생 자체로서의 불평과 불만일 것이다.
자기의 불평과 불만을 제거하기 위하여 자기 전체를 희생한다 함은 너무 어리석은 것이 아니며 너무 미련한 것이 아니라 할 것인가.
또
만일 학생제자가 사회 전체의 불합리를 타파하기 위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저의(底意)에서 그와 같은 행동을 했다면 이는 사회일반을 모욕하는 것이다. 어찌 비판을 가할여지가 있다 할 것인가.
사회에 관한 사상은 마땅히 사회로서 처리할 것이다.
그를 수양 도중에 있는 학생으로서 간섭한다 하면 그만큼 그 사회를 불합리, 불건전으로 이끄는 바 아닐 것인가.
학생제자의 절실한 반성을 계속 요구하는 바이다.
<출전 : 學生諸子를 위하여, '每日申報', 1930년 1월 16일>
16. 우가키 총독을 맞이함(사설)
1.
우가키 총독은 이전 14일로써 조선에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우가키 총독의 숭고한 인격과 덕망은 모든 사람이 함께 우러러보는 바여서 지난번 그 어명을 받은 소식이 전해져 2천만 민중은 기뻐하며 축하를 금치 못하였고 또 이번에 동도(東都)를 출발할 때 성명서가 발표되어 반도 천지에는 이와 같은 광명이 비친 바가 있었다.
오늘날 친히 그 온화한 모습을 접하고 위엄 있는 태도를 대하여 우리의 환희는 얼마나 크며 우리의 기대는 얼마나 지대하였던가.
총독정치가 실행된 지 20여 년 이래 문화의 향상, 민력(民力)의 증진, 천연자원의 개발 등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을 만한 업적을 보였다.
그러나 문화가 향상됨에도 불구하고 도의일(道義日)로 시끄러우며, 민력이 증진됨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괴로움은 더욱 심해지고, 천연자원이 개발됨에도 불구하고 민간의 소비는 더욱 궁핍하다는 양상이 없는바 아니다.
이것은 어떠한 이유로 말미암은 것이며 어떠한 근거에서 비롯된 것인가.
2.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의 처지가 세계적으로 변화되는 사상의 경향, 세계적으로 동요된 경제의 여파에 차츰차츰 물들어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에 원인이 있고 그것에 연유한 바이다.
다행히 우가키 총독은 동도 출발 시의 성명서 중 “내외의 정세를 볼 때에 정신계에나 물질계에 흐리고 피폐한 징(徵)이 현저하여, 각 방면에 새롭게 막힌 일을 모두 잘 처리하고 다시 바로잡을 필요가 있으니 이에 힘써야 할 상태이다.
조선도 제국의 일부이고 또 세계의 일부로서 그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굳이 두루 살펴 알 필요가 없다.” 하여
명료히 이 점을 지적하였다.
이미 병든 곳임이 확실한 바이다.
그 병을 치료하지 못함을 □□지 의심스러워해야 할 것이랴.
우리가 우가키 총독이 어명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여 기뻐하며 축하를 금치 못하며 또 오늘날 그 위치를 보자 매우
기뻐뛰는 것은 아마 이러한 기대와 확신이 있음에 의한 것이리라.
과연 우가키 총독은 그 성명의 한 구절에 “모든 제도, 조직 등의 오늘이 있는 것은 수많은 변천을 거쳐 여러 해 연구
실시한 결정이므로 이를 고칠 때에는 반드시 인정과 도리를 다하고 이지(理智)의 연구할 바는 연구하되 이를 행함에
있어서는 일의 크고 작음, 어려움과 쉬움을 묻지 않고 단호히 발자취를 꼭대기에 남기는 의기(意氣)를 필요로 한다.”
하여 그 확고한 신념과 용감한 과단(果斷)을 명시하였다.
우리의 진로가 오늘로써 나타나고 우리의 복지가 오늘로써 시작되지 않는다 할 것인가.
3.
우가키 총독은 예전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던 때에 이미 족적(足跡)을 반도 각지에 남겼고 또 작년 사이토(齋藤) 총독부 행사(行使)할 때에 반년 정도 총독대리(總督代理)로 조선 통치의 중임(重任)을 맡았던 바이다.
반도 각종 실정은 이미 알만큼 아는 바일 것이며 따라서 통치에 관한 경륜과 포부는 이미 충분히 준비되고 정비된 바일 것이다.
어찌 우리의 계속되는 소문과 구차한 방책을 기다릴 바 있다 할 것이랴. 다만 한마디 하려하는 바는 우리 2천만 민중이 우가키 총독의 신임(新任)에 대하여 마치 큰 가뭄에 비가 올 징조를 기다림과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은 물론 우가키 총독의 숭고한 인격과 덕망을 앙모함에 의한 바라 할지나 한편으로는 너무나 현재의 환경에 □경(京)을 느끼고 현재의 처지에 불만을 품은 결과 물질과 정신 두 방면에 □□ 일□타개(一□打開)를 바라고 구하는 마음의 절절함에 의한 바가 많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들 민중의 희망과 기대는 다만 우가키 총독 동도 성명서의 구체화에 의해 빠짐없이 실현되는 바일 것이다.
우가키 총독의 통치 업적에 ‘왔다 보았다 다스렸다’를 바라게 될 것을 결코 응대를 위한 응대에만 의한 것이 아니라 할 자 있을 것인가.
<출전 : 宇垣總督을 迎함, '每日申報', 1931년 7월 15일>
17. 홍승구(洪承耈), 오는 총독 가는 총독(1~5)
- 노노정(勞勞亭)의 야인언(野人言)
육군 장로(長老)로서의 책임감
청천의 벽력이라는 수식어를 쓸지라도 과장이 지나쳐서 중국식의 감이 있겠지만, 아무리 헤아려 일본식으로 쓴다 해도 잠든 귀(耳)에 물(水)이 들어올 정도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지난 4일에 조선총독의 경질(更迭)을 전한 동경 전화일
것이다.
그러한 경질이 발표되던 전전날과 전날까지 우가키(宇垣) 총독은 병든 부인을 데리고 조선의 가루이자와(輕井澤)37)라는 관북(關北)의 부전고원(赴戰高原)38)에 피서하여 서늘함에 더운 여름날의 먼지를 씻어내면서 유유자적하였고, 이마이다(今井田) 정무총감은 평안남북도 시찰의 길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을밀대(乙密臺)39)와 부벽루(浮碧樓)40)에 들려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고 있었다.
37) 일본 혼슈(本州) 나가노현(長野縣)에 있는 휴양지로 국제적인 고원 피서지이다.
38)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남쪽 장진군(長津郡)에 있는 명승지.
39) 평양시 기림리(북한의 행정구역상 평양특별시 중구역 경동상)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누정.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합각지붕건물로 북한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누정이 을밀봉에 있어 을밀대라고 하지만,
사방이 탁 틔어 있다고 하여 ‘사허정(四虛亭)’이라고도 한다.
40) 평양특별시 중구역 금수산 동쪽 청류벽(淸流壁)에 있는 누각. 원래 이름은 영명루(永明樓)이며,
대인(大人)의 행함과 숨음이라. 원래 숨었다 나타나는 조화가 신룡(神龍)처럼 자유롭고 예사롭지 않아 낮은 안목으로
쉽게 보고 헤아릴 바가 아니라는 것은 3천 년 전에 주역(周易)을 지은 중국 성인(聖人)들이 예언한 것이지만, 어떻든지 예상을 뛰어넘는 당혹감은 당사자들 이외에 누구나 가졌을 것이다.
◇
조선식산은행 은행장 아리가 미쓰도요(有賀光豊) 옹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총독이 머지않아서 사임할 것을 그의 말과 얼굴빛에서 알아차린 바가 없지는 않았으나, 이처럼 빨리 실현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한다.
아리가 옹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지라 그가 언제 무슨 상황에서 우가키 씨의 미간에서 사임의 조짐을 알아챘는지 필자가 알 바가 아니요, 또 알려고 할 것도 없지만, 아리가 옹과 같이 우가키 장군의 말과 얼굴빛에서 마음에 생각한 일을 판단할 밝고 냉철한 두뇌 없는 필자도 4~5개월 전에 그 조짐을 발견한 것을 이 기회에 말하려 한다. 그것은 2·26사건41)이 반란부대의 귀순(歸順)으로 포화 유혈(砲火流血)의 끔찍한 변고가 없이 안정된 직후, 정확히 말하면 3월 2일의 일이다. 그날 발행된 '동경신문(東京新聞)'에는 일례로 경성전보를 실고 우가키 총독이 고이소(小磯) 군사령관의 방문을 받아
관저에서 장시간 회견 밀담한 것을 보도하여 세상의 주목을 끌었다.
그때 정국의 정세가 정세니만큼 그것을 보도하던 신문과 이에 대한 일반의 관측은 우가키 씨와 신정국을 아울러 연상하고 우가키, 고이소 두 거두의 옛날 관계로 미루어 무슨 공작을 하느니, 무슨 정보를 가져온 것이니 하여 여러 가지 짐작이 억행(臆行)하였다.
험악한 국면과 인재난에 아울러 우가키 씨와 같이 역량과 명성이 있는 정치적 지위세력으로 보아 이와 같은 짐작도 무리가 아니나, 필자의 소견으로는 이 회담은 총리대신이 되려는 공작이 아니요, 조선총독을 그만두려는 준비행동으로 바로 깨달았었다.
◇
우가키 대장은 물론 현역(現役)은 아니다. 그러나 우에하라(上原) 원수의 반대편 사람이 된 후 일본 육군에서는 가와이(河合操), 스즈키(鈴木莊六)의 두 대장과 더불어 거두 392년에 세운 영명사의 부속건물이었다. 12세기 초 예종(1106~22 재위)이 이곳에서 잔치를 연다음 이안(李顔)에게 명하여 이름을 다시 짓도록 했는데, 그는 거울같이 맑고 푸른 물이
감돌아 흐르는 청류벽 위에 둥실 떠 있는 듯한 누정이라는 뜻에서 ‘부벽루’라고 했다고 한다.
41) 1936년 2월 26일 일본 육군의 황도파 청년장교 1,483명이 일으킨 반란사건이다.
중의 거두로 세상의 이른바 3장로(長老)의 한 사람이요, 그 위세와 명망, 지위가 현역 7 대장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중에도 우가키 대장은 다이쇼(大正) 말기로부터 쇼와(昭和)초까지 육군의 대표적 수뇌 지위에 오래 있어 그대로 현역에 있으면, 물론 무토우(武藤)대장보다도 앞서서 원수부(元帥府)에 이름을 올렸을 사람이다.
그리고 보면 그보다 까마득한 후배이던 7대장이 육군 장로라는 위치로부터 그 책임을 깊이 깨닫고 예비편입을 스스로 청하는 때에 우가키 대장이 어찌 현역 아닌 것을 스스로 바라고 홀로 태연히 있으리오.
이와 같은 경우에는 권세와 영리에만 급급하여 세간의 도의(道義)를 모르는 쇠망한 세상의 정치가라면 모르되, 종래 그 출처진퇴(出處進退)에 대해 어느 입헌정치가에게도 양보하지 않을 명확하고 엄한 태도를 취하여 행동하던 우가키 대장으로, 또 그에게는 성격과 신념으로 보아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욕심과 소원, 즉 좋은 의미에서 명성을 얻으려는 욕심과 사업을 하고자 하는 의욕, 다시 말하면 나라를 위해 힘써 일하고자 하는 타오르는 의욕은 남달리 왕성한지 모르나, 오늘날의 지위에 처하여 나라를 위해 힘써 일하고자 하는 의욕 이외에 다른 욕심과 소원, 야심이야 어찌 있을 것이랴.
그러고 보면 2·26사건의 변보(變報)를 듣던 찰나에 그는 임의 육군 장로의 한 사람으로 스스로 책임을 지고 사퇴할 것을 결의하였고, 난정(亂政) 직후에 고이소(小磯) 장군과 만나 의견을 나눈 것은 지난날 막료(幕僚)인 장군에게 의중을 피력하여 이것을 고하는 동시에 숙군(肅軍)의 장래와 및 이후 군부 결속에 대하여 여러 가지 계고(戒告)가 있었던 것으로 믿
을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무인(武人)의 본래 성질은 충성과 정직에 있고 정치가의 의무는 냉철한 총명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가키 씨는 실로 이 두 가지 모두를 아울러 가진 사람이므로 군인의 장로로써 책임을 맡음에 망설이지 않는
동시에 정국의 괴이한 변고를 타서 □□하지 않을 것은 대개 상식으로 쉽게 판정할 것이 아니랴.
이에 우가키씨 사임의 내력은 스스로 밝혀지고 이번 경질이 갑작스러운 듯하나, 그 사실은 갑작스러움이 아닐 뿐 아니라, 히로타(廣田) 내각이 조선총독의 지위의 중대성과 및 후임 선택의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신중한 고려와 절차를 밟으려고 우가키 씨로 하여금 결의 표명 후에 오히려 오랫동안 부임지에 있게 한 것이오. 한편으로 특별의회에서의 추가
예산의 통과를 기다려 그 실시를 본 뒤에 시기를 보아 공식으로 밝히려는 우가키 씨의 책임감이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이마이다(今井田) 총감의 동시 경질(更迭)에 이르러서는 장황한 설명보다도 “피부조차 없으면 털이 어니서 나는가(皮之不在, 毛將焉存)”라는 8자 옛글을 인용하면 그만일 것이다.
<이상 (1)>
우가키 씨 일대(一代)의 득의장(得意塲)
정계의 화성이라는 고맙지 않은 별명은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씨가 죽은 뒤로 우가키 씨의 독점이 되고 말았었다.
우가키 씨에게 얼마나 야심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정치가로서 야심이 전혀 없다면 이것이 오히려 기괴한 일이로되)
하여튼 우가키 씨라면 유력자(惑星), 유력자라면 우가키 씨, 이리하여 유력자과 우가키 씨 사이에는 거의 뗄 수 없는
관계가 맺어져 있었다.
유력자의 다른 이름이 오늘날의 우가키 씨 존재를 크게 한 것은 사실이겠지마는 야심가의 지목이 또한 얼마나 우가키
씨의 진로에 고난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세상 사람의 기억은 너무도 새로웠다. 그를 인식하여 존경하고 사랑하는 자는
끌어서 날개로 삼으려하고 그를 인식하여 두려워하고 꺼리는 자는 겉으로만 존경하고 안으로는 물리쳐 될 수 있는 데까지 우리에 가두고 공경하지만 가까이 하지는 않으려 하였다. 그를 칭송하는자는 총재(總裁)와 총리(總理)의 우두머리로 받들려고 애쓰는 무리가 당계(黨界), 재계(財界)에 수없이 존재한 반면에 그의 정적(政敵)은 가지가지의 나쁜 선전을
퍼뜨렸다.
1927년 이래의 정국(政局) 역사를 엮어서 짓는 자가 있다 하면 그 안팎 어느 면에서든지 우가키의 이름을 뺄 수 없을
만큼 그는 정치계의 거물이요, 또 선악(善惡) 양면의 인기인(人氣者)이다.
◇
보라. 고(故)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대장이 내각을 조직하는 어명을 받은 뒤에 육군장관(陸相) 유임(留任)을 구하려고 한나절, 하룻밤을 허비하여, 간절히 청하던 것이며, 고(故)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가 그의 내각 사퇴를 고민하다가 기세가 꺾이고 힘이다 빠져 전례 없는 육군중장의 무임소대신(無任所大臣)을 만들어 미봉(彌縫)하던 것이 전자(前者)에 속한 것이라면, 와카쓰키(若槻) 내각이 한직으로 물러난 그를 다시 조선총독으로 기용한 것이라든지, 이누카이(犬養)
내각이 모든 각 지역 장관의 머리를 배추꼬리같이 자르면서도 우치다 코사이(內田康哉) 같은 장로를 향해 든 칼날이
그의 앞에 조용히 칼날을 거두고 감히 만용을 부리지 못하던 것은 후자의 증거가 된다.
그리고 만주사변 이래 소위 비상시국이 전개된 뒤부터 정변 때마다 추대파(推戴派)와 배격군(排擊群)이 도처에 어지럽게 싸워 왈가왈부 시끄럽게 떠들어 평안한 날이 없다가 소위 판야성명(板野聲明)과 및 해군부(海軍部) 내의 분쟁에 이르러서는 흥분이 극도에 달하였었다.
그로서는 운수 사나운 구설수에 세로다간(世路多艱)을 한탄하겠지마는 이것도 일종의 유명세로 생각한다면 도리어
저렴한 부류가 아닌가 한다. 오카야마(岡山) 가난한 마을의 5반보(反步) 소작 빈농의 집에 외로운 소리를 울린 ‘복고스께’의 시대를 돌아본다면 그의 입신양명이 7분의 지력(志力) 외에 3분의 운명과 은총에 빚진 것도 알아야 한다.
◇
1931년 4월에 하마구치(濱口) 내각의 총사직과 함께 그가 육군 장관의 관(冠)을 벗으매, 유력장 물러남을 화근으로
생각하는 와카쓰키(若槻) 수상은 꿈자리가 편하지 않은 것을 느꼈는지 재차 조선총독의 인수(印綬, 처음에는 代理)로써 범(虎)의 목을 붙잡아 매어 놓았다.
하마구치 전 총재는 병이 위중하고 와카쓰키 신총재는 전날 헌정회(憲政會)총재 때에 벌써 낙제점을 받아 신망이 희박하던 때라.
민정당(民政黨)의 어중이떠중이들이 우가키(宇垣) 씨에게 추파를 보내게 될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요, 와카쓰키 씨로서는 이에 존경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멀리하는 방법을 취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며, 더욱이 그때 민정당 내에서는
아다치(安達) 씨와 아울러 고(故) 이노우에 쥰노스케(井上準之助)씨가 모두 후기 총재의 지위를 노렸으므로 와카쓰키
씨보다는 이 방면의 부추김이 더욱 컸을지도 모른다.
여하간 우가키 씨는 이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한 차례 나라를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힘을 다한 몸이다.
어명이 내린다면 거절하고 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하며, 흔쾌히 승낙하고 인수하였다.
동경의 신문지는 일제히 ‘야심가의 축예행(蓄銳行)’이니, 혹은 ‘와카쓰키 씨의 범을 잡는 방법’이니 하여 마치 조선을
우가키 씨를 가두는 동물원, 맹수우리나 그렇지 않으면 고행승(苦行僧)의 수도장으로 여기고, 소봉로가(蘇峰老家)까지가 중원박호수수(中原博虎收手) 소향남회적시(笑向南回摘柿)로 작별의 인사말을 하여 우가키 씨에게 야심을 그만 탐하고 조선에 가서 감이나 따먹으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참새가 어찌 기러기의 뜻을 알랴. 그는 구차한 사람들의 비평을 연기로 보고 예(例)의 유명한 “훌륭한 발자취를 남기련다”의 성명을 발표한 뒤에 깨끗하고 산뜻한 포부와 발랄(潑溂)42)한 타고난 기운을 가지고 현해(玄海)를 건너섰다.
필부(匹夫)로부터 대장, 대신에 오르기까지 우가키 씨의 일생에는 높은 벼슬, 영예로운 관직을 무수히 지냈겠지만 아마도 전에는 동궁어학문소(東宮御學問所)의 어용괘(御用掛)가 된 것과 후에는 조선총독이 된 것이 그에게 있어 영예의 절정이요, 유쾌한 마음의 고조(高潮)라 할 것이다.
무슨 까닭이냐고 하면, 왕세자를 인도하는 일에 참여한 것은 신하로서의 극선(極選)이요, 삼천리 산하에 궐외(闕外)의 책임을 받아 누구의 간섭 없이 자유의 수완을 두루는 것은 남아 일생의 통쾌한 일로 이름은 좋지만 반대로 어렵고 까다로운 구차한 총리대신에 비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2) 剌의 오기인 듯함.
더욱이 일본 현대의 조선 정치가를 통해 총리대신의 적임자는 세상에 사람이 없지 않으나, 조선총독의 합격자는 거의
없다 할 형편에서 우가키 씨 그 사람은 실로 하나밖에 없는 이상적 총독이 되기 때문이다.
<이상 (2)>
반도 산하에 인(印)치고 가는 거적(巨跡)
수년 전에 어느 일본어 잡지는 필자에게 ‘조선인으로서 보는 우가키 총독의 통치’에대한 글을 요청하였다.
처음에는 원고 쓸 것을 허락하였으나, 다시 생각한즉 통치를 받는 자의 입장에서 통치자를(그나마도 현재 그 지위에
있는) 비평한다는 것은 칭찬이든 비판이든 도무지 내키지 않으므로 결국 거절해 버렸다.
무엇이 내키지 않느냐 하면 비판을 쓰려한즉 고의로 결점을 찾아내고 흉을 보아 왜곡된 글을 쓴다면 모르겠으나, 공평
하게 생각하여 역대 총독 중에 우가키 씨 같은 이는 확실히 특출하게 뛰어난 이름난 총독으로 데라우치(寺內) 씨와 견줄 만한 중에 데라우치 씨도 눈여겨보지 못하고 실행하지 못한 방면을 능히 개척할 뿐 아니라 동일한 열정과 성의를 가졌다 해도 데라우치 씨의 독단적이고 자신이 옳다는 방식에 비하여 우가키 씨는 겸손하고 훌륭한 태도를 취하는 장점까지
있으므로 본의 아닌 왜곡된 글을 쓸 이유는 물론 없으려니와, 그렇다 하여 그에게 요구할 것 없는 초야(草野)의 벼슬
없는 선비로 청한 적 없는 칭송을 올리기도 내 성품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나쁘게 말하는 왜곡된 글이 공평하지 않다고 하면 눈앞의 칭송은 아첨과 공평하지 않음이 함께 오해를 부르기 쉬운 동시에 사자(士子)로서 매우 부끄럽기 때문이다.
◇
조선의 총독정치도 제1대 사이토(齋藤) 총독부시대의 후기, 즉 시모오카(下岡) 정무총감(政務總監)이 10년 시골에 파묻혀 있던 몸을 일으켜 관계(官界)에 부활하매 그 웅대한 포부 경륜이 노련한 재기와 용감한 실행력과 아울러 새로운 통치의 한 획을 긋는 시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병마에 걸려 겨우 마음에 품은 일부분도 다 실시하지 못하고 가엾게도 재능 있는 몸을 저 세상으로 옮겨 버렸다.
그 뒤의 야마나시(山梨) 시대와 및 제2대 사이토 시대의 4~5년간은 소위 조선 통치의 정체시대로 다만 베푼 (治積)에
특별히 기록할만한 것이 없었을 뿐 아니라 중앙정계의 당쟁 여파가 걷잡을 수없이 조선에 범람하여 정변 끝에는 반드시 총독, 총감의 지위 변동이 문제에 오르게 되고, 인심은 긴장하여 그날그날을 흐지부지하게 지내지 못하는데다가 재계불황(財界不況), 미가저락(米價低落) 등 모든 경제적 원인이 더욱 반도의 활기를 사라지게 하였다.
이때에 총독의 경질이 발생해 대리총독시대(代理總督時代)에 일찍이 일면(一面)의 매운맛을 보이던 우가키 씨가 이마이다 이하 막료를 이끌고 씩씩하고 늠름한 자태를 백악전당(白堊殿堂)에 나타냈다.
이때부터 우원정치의 신기원시대가 출현하여
지하자원의 개발
북선(北鮮) 개척
남면북양(南綿北羊) 정책43)
교통정비
농산어촌(農山漁村)의 진흥과 자력갱생운동
심전(心田)44) 개발
부인의 각성 촉진
초중등교육 확장
등등 실로 조선에 있어 이토, 데라우치의 통감, 총독시대로 따르지 못할 활기 있고 깨끗하고 산뜻하며, 충실한 시설시대를 본 것이다.
그 뒤의 5년여 우가키 총독은 실로 북마남선(北馬南船)45)의 문자 그대로 잠자고 먹는 것도 잊고 온 나라의 도시와 시골을 찾아다니며 관민을 격려하였다.
총독이 몸소 시설의 제1선에 서서 삼군(三軍)을 질타하기는 우가키 씨가 처음으로, 그 진지한 열의, 왕성한 활동력, 말한 것은 반드시 실행하는 기백과 성의는 아무리 그에게 악의를 가진 사람이라도 공정하게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
용맹스러운 장수 아래에는 힘이 약한 군졸이 없는 것이 이치이다. 이로부터 관계(官界)의 공기는 새로워지고 사기가
크게 떨쳐 게으름을 피우는 자가 없게 되었다.
그 위에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시국이 비상에 들면서부터 민심은 180도로 대전향이 되고 시설은 100%의 효적(効積)을 드러내어 오늘 빠르게 진보하는 조선을 출현하게 하였다.
43) 1930년대 일제가 자국의 공업원료로 이용하기 위해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목화재배를, 북쪽에서는 양 사육을 강요한 식민정책.
44) ‘마음의 밭’이란 뜻으로 ‘정신(精神)’을 비유(比喩)하는 말.
45) 중국의 남쪽은 강이 많아서 배를 이용하고 북쪽은 산과 사막이 많아서 말을 이용한다는 뜻으로, 늘 쉬지 않고 여기저기 여행을 하거나 돌아다님을 이르는 말.
그의 시설 중에서도 특히 조선 사람으로서 감사하며 기억하여 둘 것은 문맹퇴치와 삭발 장려일 것이다.
그리고 요사(搖祀)와 사교(邪敎)를 물리쳐 조선 민중을 미신 속에서 건져 구하려고 근본방침을 정한 것이요, 물질생활의 향상과 아울러 심전(心田) 개발이라는 정신 방면을 내버려 두지 않은 것이오.
정치가로서의 그의 웅대한 계획은 일본해를 비와코(琵琶湖)46)의 연장으로 본다는 소위 북진 방침에 따라 용의 한 조각 비닐, 표범의 얼룩점을 보인 것이다.
이와 같이 반도 산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고 이름을 널리 알린 오늘날에 2·26사건을 계기로 거취(去就)를 깨끗이
하여 과거 50년 군인생활의 총결산을 행하고, 대궐 아래에 해골을 빌어 제2차의 하야(下野)를 행한 것이다.
푸른 산은 본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데(靑山元不動)
흰구름만 저 혼자 오락가락 하더라(白雲自去來)
뜬 구름 안에서(身在浮雲中)
뜬 구름 위를 우러러 본다(仰觀浮雲上).
이것이 아마도 그의 현재 심경일 것이다.
구차한 비방과 칭찬이 장부(丈夫)인 그에게 무슨 신경 쓸 재료나 될 것이랴.
<이상 (3)>
동정(動靜) 우가키 씨의 장래
육군대장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는 아마 현대의 일본이 가진 중신급 인물 중에서 가장 일류의 지위에 있을 사람일 것이다.
그 강철 같은 체구와 의지며, 박력을 가진 면모와 기백, 그리고 박실(朴實)한 가운데 기략(機略)을 감추고 면밀한 두뇌에 경륜의 재능을 겸하여 어느 점으로 보든지 그 계급에서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인물로 단연 광채가 나는 인물이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동산(東山)의 사안석(謝安石)47)처럼 일부가 정국(政局) 요리를 그 뛰어난 솜씨로 발휘하기를 기다리는 반면 또 일부는 호□(虎□)같이 두려워하고, 뱀과 전갈처럼 끌리게 하여 저지하는 것처럼 배격하여 언제까지나 수
상(首相)의 만년 후보에 그치고 이른바 뱀장어의 냄새(鰻香)조차 아직 쏘며 보지 못하게 것이다.
46) 일본에서 가장 큰 호수.
47) 동진(東晋)의 재상(宰相). 환온(桓溫)의 사마(司馬)가 되어, 효무제(孝武帝) 때에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쳐들어오자, 총수(總帥)가 되어 이를 비수(淝水)에서 쳐부수었다.
그가 과연 동산의 안석인지의 여부를 내가 보장할 수 없는 동시에 그 호랑이가 아니요, 뱀도 아닌 것은 반론할 것도
없다.
그러나 하여튼 이 세상 사람의 정반대되는 평가와 및 상응하지 않는 비방과 칭찬에서 나오는 옹립파(擁立派)와 배격파(排擊派) 문으로 그의 곤혹도 심하였으며, 일본 국가가 받은 손실도 적지 않았다.
우가키가 없다고 해서 정계에 수상급 인물이 동난 것은 아니로되, 이미 이만한 확실한 인물이 있으면서도 쓰지 않고
언제든지 그 이하의 인물을 내세우고 둔한 말을 채찍질하여 빨리 달리라는 것은 매우 무리한 익살이 아닌가 한다.
인물 불저(拂底)를 탄식하는 한편에서 인물을 썩혀 버리는 것이 어찌 모순이 아니며, 경제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냐.
◇
우가키의 사직이 한번 발표되자, 정계는 갑작스레 긴장되고 특히 인물난에 걸려 초조증(焦操症)이 막바지에 이른 민정(民政), 정우(政友)의 2대 정당은 크게 동요하여 이후에 가키의 일거수일투족이 정계의 주목을 끌 뿐 아니라 그의 울고 웃음은 즉시 당인(黨人)의 희애(喜愛) 재료가 되리라 한다.
동도(東都)의 신문지는 당분간 이것으로 상당히 심하지 않은 경황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당계(黨界)와 재계(財界), 기타 각 방면의 우가키 옹립파가 아무리 책동을 개시한다 하여도 우가키 씨는 아무데도 움직이지 않고 얼마 동안 떠도는 몸으로 조용히 세상을 바라보는 상태를 지속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까지 월경(月經)이 막힌 노인이 아니요, 따라서 정국(政局)에 대하여 식욕이 전혀 동하지 않을 리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어느 한편으로는 재능을 발휘할 때를 지 못하여 헛되이 세월만 보내는 것에 대한 한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사나운 외모와는 반대로 세심하고 소심한 일면을 가졌고 저돌적 기백을 자제하는 냉철한 이지(理智)가 있으므로 자기의 출각(出脚)48)이 매우 적어도 임금과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고 갑자기 인심을 크게 흔들어 시국을 시끄럽게 하면 이런 타산을 잊어버려가면서 까지 남의 추념에 춤추고 노래 부를 사람도 아니오. 종래의 우가키 배격이 △△방면의 △△△가 그 진원지라는 생각이 있었으므로 숙군(肅軍)의 때에 이미 장로의 한 사람으로 현역 대장들과 함께
책임을 진 몸을 무엇 하러 이때에 시비 와중에 투입할 것이랴.
이후에 만일 그가 다시 일어서는 날이 있다 하면 진정한 여론이 하나가 되어 은혜와 유감을 모두 잊고 같은 마음으로
힘을 다해 시국의 어려움을 함께 하려는 기운이 양성된 때 일 것이오.
48) 벼슬자리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벼슬길에 나아감.
그렇지 않는 한 일부의 당인이나 관료를 위하여 구주로 희생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요컨대 지난 1914년에 고(故)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가 부활하던 시대같은 운명이 찾아오기 전에 그는 자의든
타의든 정국의 중심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
군인과 및 정치가로서의 우가키에게는 보는 자에 따라 비방과 칭찬이 다르지만 아무리 깎아 내린다 할지라도 그가 유능한 공인(公人)인 것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나 이의가 없을 것이요, 그 숭배자들로부터는 대부분 만점의 찬미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개인 우가키에 이르러서는 지(智), 정(情), 의(意)의 세 가지가 함께 원만하여 믿음과 의리 있는 사회의 신사,
인정미 많은 가정의 훌륭한 늙은이, 아랫사람의 사정에 대해 단(甘) 것도 알고 쓴(苦) 것도 아는 때(垢)를 벗은 사람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의 날카로움과 사이토 마코토의 원만함을 적당하고 고르게 갖춘 모양이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몹시 가난할 때에 고생을 함께 겪어 온 아내를 병으로 인한 고통 중에 위로하고 도와 애처가의 칭찬과 감탄을 받고, 러일전쟁 전후의 북한주차시대(北韓駐箚時代)에 서로 알게 된 관찰사, 군수 등의 당사자와 유족에게
정의를 베풀어 우정총독(友情總督)의 이름을 듣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총독 우가키로서 크게 칭찬하고 감탄할 것은 그가 그 인사행정을 주로 공평하게 하고 관직으로 자신의 문벌을
심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가키 시대의 반도 정계에는 종래와 같은 재래종(在來種) 또는 신래종(新來種) 운운하는 괴상한 소리가 들리지 않고 대소 관리가 안심하고 직무에 힘써 온 것이다.
이 일만으로도 우가키 정치는 인정정치라는 이름을 들음에 부족이 없을 것이다.
<이상 (4)>
신뢰할 신총독과 미나미(南)장군 소상(小像)
남산(南山) 아래의 녹천정(綠泉亭)49)은 이조 말기의 유재(儒宰) 김상현(金尚鉉, 經臺輔國)이 여생을 보낸 은둔처로
속된 세상 중에서 하나의 별세계를 자체적으로 이룬 곳이다.
49) 조선 초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터를 잡았던 곳으로 을사조약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히로부미가 통감으로 와 있으면서 새로 정자를 짓고 ‘녹천정(綠泉亭)’이라 하였다.
병오(丙午) 초봄에 통감기(統監旗)가 휘날리게 된 이래 세월이 흘러 이토(伊藤), 소네(曾彌), 데라우치(寺內), 하세가와(長谷川), 사이토(齋藤), 우가키(宇垣), 야마나시(山梨)와 및 제2대 사이토, 우가키를 통하여 무릇 주인공이 9번 바뀌었다.
이제 새로 온 미나미지로(南次郞) 총독을 맞이하면 때마침 제10대가 되는 셈이다.
그중에서 야마나시와 우가키 및 미나미의 3인을 제하면 나머지는 전부 고인이 되어 버렸다.
청산은 말이 없고 충조(鳥蟲)만 지저귀어 주인을 보내고 맞이한다. 이에 이르러 녹천(綠泉) 동산은 일개 ‘노노정(勞勞亭)’이 되고 말았다. 묻노니 노노녹천정(勞勞綠泉亭)의 감개는 아무튼 아마도 ‘이별할 때 산봉우리의 구름을 한가로이
본다(別時閑看岫雲靑)’의 춘무산인(春畝山人)이 남긴 글귀가 떠나가고 남아있는 두 사람의 회상을 대표하여 그린것
같다.
◇
우가키가 가고 미나미가 온다. 미나미 대장은 뒤를 따르기에 유명한 사람으로 조선군 사령관을 거쳐서 육군대신의 후임이 되었고, 이제는 관동군사령관과 주만대사(駐滿大使)로 만주 바람을 쐬다가 돌아온 지 몇 날이 못 되어 또 다시 조선총독의 후임이 되었다.
신구(新舊) 총독은 그 연령에서 4~5세의 틀림이 있는 만큼 군인으로서의 경력, 정치가로서의 위세와 명망, 명성과 공적이 모두 우형남제(宇兄南弟)의 느낌이 있는데, 다만 술을 마시는 분량과 담대함만은 형이 아우를 따르지 못하리라 한다. 그리고 미나미 장군은 육군부 내에서 훌륭한 전략가요, 또 중국에 정통한 대가로 주지사령관(駐支司令官)과 참모차장(參謀次長)의 경험이 이 사이의 사정을 대신 설명하는 것이며, 이 점에서도 우가키 씨는 저에게 하나의 계책을 넘겨줄
모양이다.
요컨대 우가키 씨는 더 정치가다운 것에 대해 미나미 씨는 더 군인다운 것이 큰 차이 없는 관측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두 사람의 비교론이요, 이것을 떠나서는 우가키 씨가 비범한 군인인 것과 마찬가지로 미나미 씨도
훌륭한 정치가의 한 사람인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바이다.
더욱이 미나미 장군은 비록 총독으로서는 새로운 학생의 한 사람이나, 일찍이 군사령관 시대에 조선에 오래 있어 발자취가 전 도에 미쳤고, 최근까지도 만주국에 머물러 조선인 문제에 관련하였으므로, 풍토(風土), 인정(人情)으로부터 국방과 산업 등 크고 작은 정세와 형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고 그의 정치적 수완, 역량도 이미 육상시대(陸相時代)와 주만대
사 시절에 시험을 치러 거뜬하게 합격한 사람으로, 우가키 씨의 후임으로 반도 통치를 담당할 사람을 노장군(老將軍)
가운데서 고른다면 이만한 적임자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장군이 올봄 제도사건(帝都事件)의 책임을 지고 현역을 물러난 뒤로 한가하게 가마쿠라(鎌倉)에 있으면서 책을 읽으며 날을 보내는 것 외에는 때때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죽고 병든 옛 부하의 위문에 몰두하는 것으로 장군의 욕심 없는 성격과 인정가(人情家)인 한 면을 알 것이며, 왕년에 만주에 새로 부임하여 취임 피로연에서 두 나라 문무(文武)에게, “일본인은 우월감을 버리라. 만주인은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을 없애라.
그리하여 넘치는 신뢰를 임금의 뜻을 받은 못난 지로(次郞)에게 주어 달라.”는 대연설을 행하여 모인 사람들을 감동케 하는 중에 특히 당시 총리이던 정효서(鄭孝胥) 노인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고 한다.
여기에 변동이 없는 한 장군의 조선 총독직에서도 물론 성공할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
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清徳) 씨가 우가키 씨를 따라 죽은 후 뒤이어 5·15사건50) 때의 경시총감(警視總監)으로,
최근까지 미나미 장군을 따라 관동국총장(關東局總長)으로 있던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緑一郎) 씨가 기용되었다.
미즈노 렌타로(水野), 시모오카 주지(下岡) 씨 같은 정무총감과 달라서 이름은 정무총감이라 하지만 실상은 사무총장
(事務總長)이나 비서관장(秘書官長)에 지나지 않고, 온전한 막료의 한 사람으로 총독의 마음에서 나오는 정책을 오직
충실하게 몸소 행하는 것이 오늘날의 정무총감이다.
따라서 우가키 씨의 그림자이던 이마이다 씨를 특히 드러낼 것이 없음과 마찬가지로 오노 씨에 대해서도 아무런 요구할 것이 없다.
더욱이 조선의 시설 경영은 우가키 시대에 이미 뿌리를 박아놨은즉, 후에 온 자들은 ‘약속을 지키고 받들어 어기지 않는다’라는 것이 노력은 적게 들이고 큰 성과를 얻는 빠른 길이 될 것이다.
끝으로 기억할 것은 노노정 위에 나고 드는 두 주인에게 간 자도 평안, 온 자도 평안하라고.
(7월 5일 밤 비 소리 듣는 빙교(氷僑) 서창(書窓)에서)
<이상 (5)>
<출전 : 洪承耈, 오는 總督 가는 總督(1~5), '每日申報', 1936년 8월 8일~12일>
50) 1932년 5월 15일 일본의 해군 청년장교 야마기시 히로시(山岸宏), 미카미 다쿠(三上卓), 구로이와 이사무(黑岩勇)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쿠데타 기도. 시중 혼란을 틈타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의 개혁안 실행을 꾀하고자 했다.
18. 홍승구, 육군기념일
육(陸) 제1군사령관 구로키 다메모토(黑木爲楨)가 압록강으로부터 진병하여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을 계속 점령하고 수□(岫□)에 이르는 사이에 오보□(吳保□)이 지휘하는 제2군이 금주(金州), 남산(南山)에서 북상하여 웅악성(熊岳城) 분수령(分水嶺)을 차례로 공격하여 함락하며, 제4군은 노즈 미치쓰라(野津道貫)를 우두머리 장수로 삼아 한 번에 석목성(析木城)을 깨뜨렸다. 그리하여 제1, 제2, 제4의 각 군이 세 길로 나란히 나아가 요양(遼陽)으로 향하였다.
1904년 9월 3일에 요양(遼陽)은 드디어 일본군에게 점령되고 10월 5일에는 사하대회전(沙河大會戰)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한때는 연영천리(連營千里)로 요동벌에 호거(虎踞)하고 있던 러시아의 100만 군사가 북으로 북으로 달아나면서도 □정(□定)의 퇴각이라는 기이한 말을 발하였으니 그들의 의도는 장차 봉천(奉天)에 머물러 전군을 집결하여 가지고 일(逸)로써 때를 기다려 한 번에 전승을 기대했던 것이다.
1905년 1월 2일에 노기 마레스께(乃木希典)의 제3군이 매우 어려운 조건에서 힘을 다해 싸워 저순견학(底順堅學)을
함락하매 이에 장차 북진하여 최우익(最右翼)이 되고, 카와무라 카게아키(川村景明)가 거느린 압록강 군(軍)으로 동서요응(東西遙應)하여 최좌익(最左翼)의 카아무라 군(軍)이 기병(奇兵)을 내어 적을 견제하는 사이에 노기 군(軍)이 봉천
뒤편으로 돌아 적의 귀로(歸路)를 끊었다. 3월 10일, 33년 전 3월 10 일에 큰 바람이 누런 먼지를 일으키고 조용한 살기가 높은 하늘을 가리어 대낮을 어둡게 하던 날 일본의 5로군(路軍)은 봉천성 총 공격에 광고(曠古)의 승전을 거두고
적은 전군이 달아나 장춘(長春) 이남에 다시 그림자를 보이지 못하였었다.
◇
3월 10일 황군(皇軍)이 봉천성(奉天城)을 점령하니라.
만주군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원수(元帥)는 진중일지(陣中日誌)에 이같이 기록하고 그 안에 ‘일장공성만고
(一裝功成萬枯)’의 옛 시 한 마디를 덧붙여 적어 이름난 장수의 감개(感慨) 깊은 도회(陶懷)를 보였다.
이달 「봉천성을 점령하니라」의 7~8자가 넘지 않는 간결한 문구 중에는 실로 아동천백재유사(亞東千百載有史) 이래
세상을 몹시 놀라게 한 큰 사실이 기록되었던 것이다.
신흥 일본이 국운을 걸어 대륙 제패의 용쟁호투(龍爭虎鬪)를 연출하던 활극(活劇)이 승리의 결산을 치른 날이요, 극동(極東)의 지도가 색을 고치며, 세계 정국의 정세가 굉장한 변화를 부르던 모든 기괄(機括)이 이로써 새로운 출발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래로 더욱이 청일전쟁 후의 삼국간섭으로부터 요동반도의 환부(還附)를 겪은 뒤의 문자 그대로 온갖 괴로움을 참고, 정성을 다해 온 일본의 정열과 씩씩한 기상이 합해 신과 사람이 함께 돕고 강적이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어찌 한갓 일본 육군의 기념일이 될 뿐이랴. 황색인종이 씨를 퍼뜨리고 역사가 멸망하지 않는 한 하늘과 땅이 오래되어 영원하고 닳지 않는 큰 기록이 실로 ‘봉천성 점령’의 이날로써 작성되었던 것이다.
◇
일러전쟁은 위로는 메이지대제(明治大帝)의 위엄과 아래로 일본 전 국민의 온갖 성충과 지능을 합하여 이긴 것이오.
밖으로 모든 동맹국들의 원조도 있던 것인 즉 어찌 누구에게 한하여 뛰어난 공로를 정하여 돌리랴마는, 적어도 일본
육군에서는 공성야전(攻城野戰)에 포화(砲火)를 무릅쓰던 장수와 병졸과 운첨(運添)□□의 모사(謀士) 이외에 두 사람의 특수임무에 종사하던 장군을 망각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은 고인이 된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대장으로 그가
중소좌(中少佐) 시대에 여러 해 러시아 수도에 파견되어 머물면서 저 나라 군대의 모든 내부 사정과 실력을 살피고 동첩(動輒) 러시아군의 크고 강함에 겁을 내어 개전(開戰)을 의심하고 주저하는 원로와 군부 수뇌부를 설득하여 러시아군이 비록 많으나 두려워할 것 없다는 옳은 판단을 제공하였던 것이오.
또한 사람은 고(故)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대장으로 개전과 함께 러시아 수도를 물러나 파촉(波燭)을 중심으로 어제는 영국의 수도에 몸을 드러내다가 내일은 지중해에 출몰하는 등 실로 전쟁으로 몹시 어려운 세상에서 뛰어난 책사(策士) 같은 신비한 재주를 부리면서 저들의 혁명 거두(巨頭)이며 기이한 승려, 요녀 등 모든 배우를 조종하여 후방의
교란 공작에 충분한 성공을 거둔 것이다. 필자는 두 장군이 살아 있을 때에 그 호탕하고 쾌활한 모습을 마주 대할 기회를 얻어 한두 차례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으므로 이날에 대해 더욱 감개가 깊은 것을 덧붙여 적는다.
<출전 : 洪承耈, 陸軍記念日, '每日申報', 1937년 3월 13일>
19. 국민적 자각의 현현(顯現)(사설)
1.
상호부조는 인류 생존의 기본 조건이다. 땅을 달리는 것이 짐승에 미치지 못하고, 하늘을 나는 것이 조류에 미치지 못하며 헤엄치는 것이 어류에 미치지 못한 것이 인류요, 또 추위와 더위에 대한 감내력(堪耐力)과 저항력이 다른 어떠한 생물보다도 취약한 인류가 능히 만물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리며, 만물의 영장으로 영화를 누리게 되는 것은 실로 이 상호부조의 미덕을 가지고 있음에 의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관념으로 다르게 나타나면, 충(忠), 효(孝), 제(悌), 우(友)요, 모양으로 나타나면 가정, 향당(鄕黨)51), 국가, 사회이다.
충, 효, 제, 우의 여러 덕이 개명(開明)되면 개명될수록 가정, 향당, 국가, 사회가 공고(鞏固)를 가하면 공고를 가할수록 인류 문화가 향상되고, 인류 복지가 증진되며, 충, 효, 제, 우의 여러 덕이 발전되면 발전될수록, 가정, 향당, 국가, 사회가 승리하면 승리할수록, 인류 문화가 퇴□(退□)되고, 인류 복지가 저해되는 까닭이 실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2.
가정이 없고, 국가가 없는 것만큼 슬픔과 설움이 크고 불행이 큰 자는 없다.
그리하여 이는 가정이 없고, 국가가 없으면 인류 생존 기본 조건이요, 또 인류 본연의 품성이며, 미덕인 상호부조정신
즉 충, 효, 제, 우의 여러 덕을 펼칠 기회가 없어 인류로서의 생존 의의와 생존 능력을 결여하게 됨에 따른 당연한 귀결일 것이며, 따라서 비록 가정이 있고, 국가가 있다 할지라도 충, 효, 제, 우의 어느 것을 변별(辨別)하지 못하고 또 이를 펼치지 아니하는 자는 사실 가정과 국가를 갖지 못한 자이어서 이보다 더 불행하고, 슬픔과 설움이 큰 자는 없을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우리 조선인의 대부분은 종래 국가에 대한 인식이 다소 뚜렷하지 않았었다.
물론 여기에는 피치(被置)된 경지가 □연케 하는 불가피한 점도 있었었다.
그러나 일본과 조선이 하나가 되어 신일본 제국을 형성한 지 이미 4반세기여에 달하는 바이다.
즉 우리가 일본 제국신민으로 교육을 받고, 충성을 다하기로 우리 스스로가 약속하고 결정한 지 이미 2반세기여에 달하는 바이며, 또 이 약속은 실로 황도정신 즉 하늘의 뜻(天理天道天律)에 순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망령된 고집을 풀고 의심을 도려낼 여지가 어디에 있다 할 것이냐.
51) 자신이 태어났거나 사는 시골 마을.
3.
만일 우리로서 여전히 망령된 고집에 사로잡히고 그릇된 생각에 포로 되어 국가에 대한 인식의 분명이 부족하다 한다면, □맹(□盟)과 기약을 어떻게 하며 또 임금과 나라가 없는 불행과 비애(悲哀)를 어떻게 할 바일 것이나, 혹은 □맹과 기약도 사정과 경우에 따라서는 파기를 허한다 하자. 국가를 갖지 못하고 또 국가가 있으나 이에 대한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위해 힘써 일하는 정성이 결여된 자는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인류로서의 생존 의의와 생존 능력을 결여한 즉 도리를 벗어난 사람이요, 또 결과 자멸을 피하지 못하게 될 바일 것이다.
이를 어떻게 한다 할 바일 것이냐. 이러AM로 종래 우리 조선인의 대부분이 국가에 대한 인식의 분명을 기하지 못하는 것은 다만 현재의 불행과 비애가 심한 것일 뿐 불□(不□)라 실로 장래를 위하여 너무 가여워 견딜 수 없는 바였었다.
그러나 다행히 최근 국민적 자각과 국가 관념은 급작스레 생기고 왈칵 일어나 충성을다하고 나라를 위해 힘써 일하는
아름다운 행실과 이야기를 여러 곳에서 보고 듣게 된 바이고, 더욱이 며칠 전 경성(京城) 부호(富豪) 4인이 익명으로
국방기금 각 1만 원을 헌납하였다는 미담과 같은 것은 실로 우리가 대서특서(大書特書)하기에 충분한 것이어서 이에
따라 우리는 비로소 국민으로서 긍지(矜持)한 의의 즉 인류 생활의 긍지와 의의가 있게 되는 바이며, 또 특수한 경우에 놓여 졌다는 모든 슬픔과 설움, 불행의 사라짐을 기대하게 되는 바이다.
<출전 : 國民的 自覺의 顯現(사설), '每日申報', 1937년 3월 12일>
20. 조선 통치의 5대 지침(사설)
취임 후 바쁘게 일하여 자리에 앉을 여유가 없을 만큼 성내(城內)를 돌아다니며 자세히 백성들의 사정과 형편을 살피고 정치상의 업적을 조사하여 2천만 민생의 복지 증진에 밤낮 힘쓰는 미나미(南) 총독은 더욱 우리의 영원한 번영과 번창을 기하고자 이번 도지사회의에 5대 지침을 명시하여서 우리가 나아가고 추구하고 따를 바를 말씀하였다.
1.
국체명징(國體明徵)
선만일여(鮮滿一如)
교학진작(敎學振作)
농공병진(農工竝進)
서정쇄신(庶政刷新)
실로 우리는 이 훈시를 접할 때에 어두운 밤에 등(燈)을 얻고 계속되는 장마에서 하늘과 해를 본 느낌이 간절하다.
국체명징은 쉽게 바꾸어 말하면 국체의 진수(眞髓)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더욱 밝게 나타내자는 것이어서 지금 새삼스럽게 이를 고조(高調)함은 언뜻 기이한 감이 없지 않은 바이다. 그러나 이것이 조선뿐만 아니라 최근 일본에서도 매우
떠들썩하게 되는 것은 몇 해 전부터 지금까지 사상계의 혼란함과 공연히 새로움을 추구하고 기이를 좋아하는 경솔하고 신중하지 않은 세상의 형편이 때때로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예나 지금이나 비할 데 없고 모든 나라에 비할 데 없는 국체에 대한 인식을 순화하고 결여하게 하는 유감이 있으며 또 국체 관념은 국가의 진전과 국민 생활의 근간이요, 주재자여서 이것의 명징철저(明徵徹底)를 기하면 기할수록 국가는 더욱 번창하고 국민은 더욱 번영을 가하게 되겠음에 그러한 바일 것이다.
2.
더욱이 조선에서는 황제의 덕에 몸과 마음을 갈고 닦게 된 지 얼마 안 된 만큼 아직도 국체에 대한 인식을 결여한 자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한합병’의 대정신과 대이상을 오해하고 잘못 해석하여 뛰어난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의 유민(遺民) 됨에 소지(所持)를 품고 국가의 진전과 번영을 저해하고 저주함으로써 할 일을 만드는 자까지 있는 사태이므로 국체관념의 명징철저는 실로 조선 통치의 기본 공작이요, 조선 민중의 매우 위급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미나미 총독은 취임 처음의 유고(諭告)에도 “통치 마지막 이상을 뚜렷하게 나타내는 길은 황도국가(皇道國家)의 본연성(本然性)을 인식함에 있다.”하며 큰소리로 꾸짖어 일반의 깊은 반성을 불러일으키고 나갈 방향을 명시하였었다.
황도는 실로 설명과 명칭을 뛰어넘는 것이어서 굳이 이것을 해설한다 하면 진(眞), 선(善), 미(美)의 극치요, 천지의
규율, 천지의 도리, 천지의 도(道), 천지의 법(法) 등 모두 전부의 본체여서 우주의 만물로 하여금 그 성질에 따르고 그
지위를 얻게 하며, 천지와 더불어 끝이 없고 무궁하며 무한하고 끝이 닿는 데가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
3.
설문(說文)52)에 의하면 “황(皇)이란 말은 뚜렷하게 길을 따라 달리는 것이니 성품을 따라 행하여 자연스럽게 도에 합치되는 것이다.
백성이 이름을 붙일 수 없어 마치 불을 보는 것과 같아 불을 밝히는 근본을 통찰할 수 없고 단지 그 빛나는 것만 본다”
53)라 하였으며, 또 소강절(邵康節)54)은 “도(道)로써 백성을 감화시키니 백성이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을 황도(皇道)라 한다.
덕(德)으로 백성을 가르치니 백성이 겸양하는 것을 제도(帝道)라 한다. 공(功)으로 백성을 권하니 백성이 다스려지는 것을 왕도(王道)라 한다.
힘으로 백성을 이끄니 백성이 다투는 것을 패도(覇道)라 한다”55)라 하였다.
이상을 종합하여 헤아려 뛰어난 지혜로 헤아리고 분별하는 능력으로 보면 대략 그 본체를 어렴풋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 국체가 모든 나라에 비할 데 없는 까닭은 실로 이 황도국가 됨에 있는 것이다.
우리로서 극히 이 본연성을 인식하여 이를 체험하여 알게 되고 드높임에는 그 덕이 천지와 합하고 그 행동이 천지와
합하며, 그 공적이 천지와 합하여 우주의 만물이 감히 그 뜻을 이루고 그 지위를 얻고 그 번성을 기하게 될 것이며,
또 이 황도국가의 본연성을 인식함에 이르러야 비로소 우리는 일한합병의 대정신과 대이상을 분명 이해하게 되는 바일 것이다.
<출전 : 朝鮮統治의 5代 指針, '每日申報', 1937년 4월 22일>
52) 후한의 허신(許愼)이 편찬한 중국의 사전.
53) 皇之為言, 煌煌然放道而趨, 率性而行, 自然有合於道, 民無得而名, 若観火焉, 不淵其新燎之本而但見其煌煌.
54) 중국 송나라 때의 유학자.
55) 以道化民, 民目然謂之皇道, 以徳教民, 民謙譲, 為之帝道, 以功勧民, 民治, 謂之王道, 以力率民,民争謂之覇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