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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강물은 흐른다"
[빌립보서 4장 11-13절]
사람들은 누구나 잘 되는 인생을 꿈꿉니다.
작은 가게를 열더라도 꿈이 있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며 살빠진 자신을 꿈꾸며
다이어트에 돌입하죠.
시험을 앞두고 합격의 순간을 그리며
행복한 꿈도 꿉니다.
결혼을 앞둔 청년들은
신혼의 달콤함을 기다리며
결혼 준비를 합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쉽게 지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꿈을 이루는 과정에
거대한 장애물을 만난다면 어떨까요?
대부분 눈앞에 있는 장벽을 보며
‘포기’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면 ‘포기’란 단어는
겨울철 김장할 때만 쓰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오늘 성경은 너무도 중요한
영적 원리를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올림픽과 관련된 뉴스를 보던 중에
‘서핑’ 기사를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서핑은 아직까진
대중적인 스포츠가 아닙니다.
그런데 서구권 나라는 그렇지 않나 봅니다.
특히 바다와 가까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서핑을 자주 즐긴다고 합니다.
이들은 거대한 파도에
작은 서핑 보드 하나로 맞섭니다.
영상을 보면 정말 장관입니다.
엄청나게 큰 파도 아래로
작은 보드에 올라탄 선수의 모습은
압권이죠.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파도를 만났을 때
저렇게 멋지게 넘어선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러분도 그러길 원하십니까?
오늘도 눈앞에 있는 파도를 넘어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도
수많은 파도들과 싸웠던 인물입니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의 인생은 예수 믿기 이전과 이후로
완전히 나뉩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금수저로 태어나,
학벌도 좋았고 하는 일도 잘 풀렸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난 후로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앞서 읽은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거대한 파도를 만난다면
어떻게 하실 것 같으신가요?
예수를 전하는 것 때문에
매를 맞거나 감옥에 간다면요?
단기 선교를 갔는데 가는 길에 배가 난파돼서
이상한 섬에 떠밀려 간다면 어떨까요?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해
이제까지 쌓아둔 모든 것을 잃게 된다면
어떠실 것 같아요?
저라면 하나님을 향해 원망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제 삶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은 저를 싫어하시는 거죠?’
성경 속 바울을 존경하기는 하지만,
바울처럼 사는 것은
부담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어떻게 매번 매맞고, 옥에 갇히고,
죽을 경험을 하며 살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볼 때
불행한 인생을 살았던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우리 함께 본문 11-12절을 읽겠습니다.
빌립보서 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의 인생은 수많은 파도의 연속이었지만,
그 가운데 배운 게 있답니다.
바로 ‘자족하기’입니다.
자족한다는 것은
‘스스로 만족함을 느낀다’는 말이죠.
풍요로운 상황 속에서는
자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어떤가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비천한 자리에 내려가서
배고픔을 겪으며 살았지만
자족했다고 말이죠.
여러분,
도대체 바울의 인생에
어떤 원리가 숨어 있길래
‘자족하기’를 배웠던 걸까요?
그게 바로 본문 13절입니다.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비천한 상황 속에서도 모든 게 가능했고,
풍요로움 속에서도
모든 걸 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나요?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능력주시는 자는 누구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죠.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가능합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through’라고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인생에 거대한 파도를 넘을 수 있었던 건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었기 때문이란 거죠.
거대한 파도가 우리를 삼킬 듯이 와도,
능력 주시는 주님의 손이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10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즉, 그의 기쁨의 이유는
‘주 안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찬양이 떠올랐습니다.
찬송가 370장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찬양하리
우리가 주 안에 있다면 우리에게 근심은
딴 나라 이야기가 됩니다.
십자가 밑에 나아가 우리의 짐을 푸십시오.
그러면 우리 입에서
‘할렐루야’가 절로 나올 것입니다.
아무리 험하고 먼 길을 걸어도
주님만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할리우드 배우 중에
덴젤 워싱턴(Denzel Washington)이란
분이 계십니다.
그는 아카데미상을 두 번이나 수상할 정도로
실력 있는 배우입니다.
그가 2015년 미국 뉴올리언스에 있는
달라드 대학교 졸업식에서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나에 대해 아는 모든 것,
내가 성취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선물입니다.
나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았고,
지금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고 있습니다.
나는 항상 실실하게 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무슨 일을 하든지
가장 먼저 하나님과 함께하십시오.”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던 건
‘주 안에서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덴젤 워싱턴도 실수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니 두려워 마십시오.
아무리 거대한 파도가 오더라도
뒤로 물러서지 마십시오.
우리에겐 능력 주시는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그분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거대한 파도를 넉넉히 넘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주 안에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에 있는 것이
그 비결입니다.
빌립보서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쁨이란 단어는 빌립보서에
16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만큼 사도 바울은 ‘기쁨’을 강조합니다.
사실 그는 기뻐하기 힘든 상황 가운데
놓여 있었습니다.
빌립보서를 쓰는 당시만 하더라도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캄캄한 방 한 가운데
그는 ‘기뻐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먹을 것도 적고,
제대로 쉴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왜요?
그는 지금 ‘주 안에’ 있었기 때문에
기뻤던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인생이 답답하고
힘들 때 있잖아요?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아
마음이 아플 때도 있어요.
원했던 일이 이뤄지지 않아서
속상할 때가 있어요.
바로 그때 기뻐하기로 선택하십시오.
이렇게 외치십시오.
“내 기쁨의 이유는
현재의 고난에 있지 않습니다!
내 기쁨의 이유는 하나님 한 분입니다!”
이렇게 기뻐하기로 결단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더 큰 기쁨을 누릴 줄
믿습니다.
ex) 유기성 목사님께서 쓰신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란 책에
이런 내용이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티벳에 사는 목동들은
여름에 양떼들을 키울 때
풀이 많은 목초지에만 풀어놓지 않는답니다.
풀이 많은 풀밭이 있어도 풀이 없는 곳,
절벽 같은 곳으로 데려가서
풀을 먹인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뭔지 궁금했서 물었더니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풀이 많은 곳에서
마냥 배부르게 먹이면서 키우면
겨울을 지낼 수 없습니다.
길고 추운 티벳의 겨울을 견디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여름에도 풀없는 절벽으로 양떼를 내몰아서
스스로 풀을 찾고 뜯는
강인함을 길러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겨울이 왔을 때도
죽지 않고 살아서
새로운 봄을 맞을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주님이 우리의 목자이시기에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상 우리의 인생은
부족함의 연속 아닙니까?
남들은 여름에
푸른 풀밭에서 뒹굴며 사는데,
나만 풀 없는 절벽에 놓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좋은 목자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험함 길,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를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진짜 좋은 목자는
여름에 다가올 겨울을 준비시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상 누구보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신 것 아닙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유기성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세상이 더 강하고 커 보이면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렸지만
인생의 말미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결국 세상을 의지했던 이스라엘은
훗날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정말 힘들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이사야 31:5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은혜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이와 더불어 바울은
빌립보서 4장 6-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보서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주님과 동행함을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게 ‘기도’입니다.
기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사역을 하시기 전에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셨고,
매일 새벽 미명에 기도로 하루를 여셨습니다.
다니엘도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자 굴속에서도
건짐을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아뢰는 것’입니다.
감사기도죠.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땐 기도의 내용보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그분께 능치 못함이 없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에서 기도가 출발해야 합니다.
기도의 초점이 하나님께 맞춰지면
응답의 여부와 관계없이
내 믿음이 자랍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불안했던 현실이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 속에 있는
작은 퍼즐 조각에 불과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떠나갑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습니다.
바로 그때,
'주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샘솟음 칩니다.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키웁니다.
감사의 기도는 우리 믿음을
제곱으로 키워줍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감사함으로 아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집채만한 파도가 와도
겁이 나질 않는 겁니다.
오히려 ‘능력 주시는 주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한다’는 믿음으로 행합니다.
잭 하일스 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그가 이런 일을 겪으셨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재정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지났을 때입니다.
월말까지 꼭 처리해야 할 청구서가 있었는데
54달러 17센트가 부족했습니다.
납부 마감일을 하루 앞두고 기도했답니다.
한참 기도하는데
마음에 평강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마침 우편물이 하나
도착해 있었습니다.
열어보니 메모 한 장 없이
54달러 21센트만 들어있는 게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꼭 필요한만큼의 돈을
주셨다는 생각에 기뻤습니다.
그런데 이내 ‘왜 4센트가 더 있었나?’란
질문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4센트는 우표값이었습니다.
그제서야 하나님께
이런 고백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은 정확한 분이십니다.
앞날에 있을 모든 문제도
다 책임져 주실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염려와 두려움을
하나님의 평강과 위로로 바꾸는
놀라운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믿음으로 충만해지길
축복합니다.
지난 주에 아이들과
한강 수영장을 다녀왔습니다.
먼 길을 오가느라 지루했는지
서로 퀴즈를 내고 맞추더라고요.
진우가 문제를 냈습니다.
“방으로 시작하고 깨비로 끝나.”
진서가 바로 말했습니다.
“방아깨비!”
또 다른 문제를 냈습니다.
“노랑으로 시작하고 나비야.”
“노랑나비”
진우는 신이 났는데
문제를 또 냈습니다.
“‘메’로 시작하고 ‘뚜기’로 끝나.”
진서가 말했습니다.
“음… 이건 나 몰라.”
한바탕 웃고 난 뒤에
이번엔 다른 퀴즈를 냈습니다.
“‘사슴벌레’에서 ‘벌레’를 빼면?”
“사슴!”
“치로 시작하고 아주 빨라.”
“치타!”
생각보다 둘째가 잘하길래 놀랐습니다.
“이거는 코로 시작하고
크기가 어마어마해.”
정답은 ‘코끼리’였습니다.
문제를 듣는 순간 답을 안다는 표정으로
진서가 외쳤습니다.
“코딱지!”
한강을 향해 가는 길이 즐거웠습니다.
흐르는 강물을 보며 행복했습니다.
모든 게 완벽했고 은혜였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흐르는 강처럼 인생도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감정이나 환경과
전혀 관계없이 말이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인생의 여정을
각자의 배를 타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감사의 ‘돛’을 올리고
기쁨으로 인생의 배를 띄운다면 어떨까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바울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감사의 돛은 하나님의 은혜의 순풍을 만나
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반면,
좌절과 근심과 염려의
‘닻’을 내린다면 어떨까요?
우린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오늘도 강물은 흐릅니다.
돛을 달 것인가?
닻을 내릴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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