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흘렀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5·16만큼 논쟁이 이어지는 사건을 찾긴 쉽지 않다. 누군 그걸 ‘구국의 결단’이라 칭송하고, 또 다른 쪽에선 ‘군부 독재의 씨앗을 뿌렸다’고 비난한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좋든 싫든 5·16은 우리 근현대사의 분수령이라는 것이다.
5·16은 수많은 역사적 대사건이 그렇듯 모호성과 이중성을 갖고 있다. 형식상 군사쿠데타였다는 걸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지만 그걸 통해 집권한 군부가 1960년대 산업화를 이끌었고, 그로 인해 오늘의 번영이 가능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부정적 형식이 긍정적 결과를 내포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정치학자 최장집은 “동기가 선하다고 결과까지 선한 건 아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결과가 형편없어도 동기가 순수했다면 비난하지 말아야 하는가. 반대로 형식은 잘못됐더라도 결과가 좋으면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어찌 보면 이상주의 대 현실주의 논쟁 같은 이런 질문은 5·16 평가 과정에서도 수시로 등장한다. 게다가 72년의 10월 유신까지 이어지면 논쟁은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한편에선 “5·16의 동기는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한 것이고 쿠데타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며 “그걸 기점으로 한국 사회가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됐으니 혁명”이라고 주장한다. 반대편에선 “5·16은 민주정부를 뒤엎는 군사쿠데타의 나쁜 선례를 남겼고, 운명적으로 10월 유신과 박정희의 종신 집권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비판한다. 무엇이 맞는 주장일까. 쉽게 답하기 어렵다.
그러나 피해 가는 게 능사는 아닐 것이다. 이미 반세기가 지났다. 차분한 마음과 냉철한 시각으로 5·16의 공과를 정면에서 마주할 때가 된 것이다. 박정희 전문가인 언론인 조갑제씨와 진보진영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연세대 김호기 교수와의 대담을 마련한 것도 그런 취지에서다. 앞으로 5·16에 대해 훨씬 다양한 연구와 토론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대담은 12일 오후 중앙일보사에서 김종혁 중앙SUNDAY 편집국장의 사회로 3시간 동안 진행됐다. 다음은 대담 전문.
▶사회(김종혁)=5·16을 바라보는 세 가지 입장이 있다. 첫째는 5·16은 정상적인 정치질서를 깨뜨린 용납할 수 없는 군사쿠데타라는 주장, 둘째는 대한민국 사회를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한 혁명이라는 것, 셋째는 형식은 쿠데타이지만 결과적으론 경제 성장과 번영의 토대를 만들었으니 정당하다는 것 등이다. 각각 어떤 입장인가.
▶조갑제=우리 민족사의 3대 사건이 있다. 신라가 3국을 통일해 최초의 민족국가가 된 것,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 그리고 5·16이다. 성격은 분명 쿠데타다. 하지만 결과는 혁명이다. 5·16을 통해 대한민국이 본질적으로 달라졌다. 박정희가 주도하고 기업인과 과학자가 따라와 산업화가 됐고, 그걸 통해 민주주의가 기능하게 된 것이다. 어느 나라건 근대화 혁명 과정에서 피를 많이 흘린다. 박정희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이런 변화를 가져왔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파괴자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건설자다.
▶김호기=사실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중요하다. 기본적으로는 쿠데타다. 4월 시민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동했는데 2공화국이 능력이 있었냐 없었냐, 당시 사회가 혼란했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군부가 헌정 질서를 중단시켰다는 점에서 그렇다. 혁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대혁명, 미국의 시민혁명처럼 혁명은 주체가 시민이어야 하고 사회구조적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5·16은 사회구조적 변화는 가져왔지만 주체가 군인이었다. 그러나 5·16을 통해 우리 사회가 변한 건 맞다. 45년 광복이 됐을 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산업화와 민주화였다. 5·16 쿠데타가 박정희 체제를 등장시켰고, 그 체제가 근대화의 한 축을 이루는 산업화를 성취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조갑제가 보는 5·16은…
정당성, 역사 잣대로 봐야…지난 60년은 영웅들 시대 제2의 박정희·이병철 필요
김호기가 보는 5·16은…
모든 과거 정당화 안 돼…군의 정치욕망 통로 역할 온당한 공과 평가해야
▶김호기=산업화를 이룬 게 맞지만 빛과 그늘이 있다. 60년대 보릿고개를 벗어나게 한 건 맞다. 70년대 중화학공업을 육성해 우리 경제가 이례적으로 세계 경제 속에서 자리 잡게 했다. 하지만 급속한 산업화 이면에는 농업 부문의 희생과 저임금에 시달린 노동자 계급이 있었다. 재벌 문제도 가져왔다.
▶조갑제=대기업을 만든 건 문제가 아니라 박정희의 최대 성과다. 대기업이 일자리도 늘렸고 세금도 내서 국가 재정이 튼튼해졌다. 박정희는 과거의 사농공상(士農工商)을 상공농사 순으로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업인과 과학자를 밀어줬다. 대기업을 만들어 한국을 일류국가 문턱까지 가게 했다. 희생이라고 하는데 맞지 않는다. 박 대통령 시절에는 부의 분배가 상대적으로 평등했다. 당시에 하위 40%의 소득성장률은 9.5%였다. 전체 평균 성장률은 9%다. 도시 빈민도 같이 잘살게 됐다. 기업과 부자 때문에 노동자·농민이 희생된 건 아니다.
▶김=인구 5000만 명 규모에서 한국 같은 경제 발전을 이루고 전자·조선 등에서 세계적 기업이 있는 건 이례적인 게 맞다. 박정희 시절의 중화학공업 육성이 기여했다. 하지만 길게 보면 대기업 우선 정책의 그늘도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균형발전으로 갔어야 한다. 일자리 문제에서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80~90% 정도다. 박정희 시절의 불균형 발전전략이 지금도 유지된다. 양극화다.
▶조=박정희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열심히 하는 사람을 밀었다. 새마을운동도 열심히 하려는 마을
을 밀어줬다. 박정희는 가난하게 자라 사치와 특권을 싫어했다. 대기업도 생리에는 안 맞지만 대기업을 키워야 중소기업·빈민이 잘산다고 봤다. 양극화라는 말에 거부감이 든다. 한국이 소득 배분에서 평등한 축에 든다는 건 학자들도 안다.
▶사회=박정희 집권기간은 18년이었고 그로부터 이미 32년이 지났다. 현재의 문제를 박정희가 책임져야 한다는 건 무리 아닌가.
▶김=물론 집권 이외 기간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61~79년이 한국 근대화에 가장 중요한 원형을 이룬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비스마르크가 독일에 미친 영향과 같다. 우리 사회의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에 지적하는 것이다.
▶조=올해가 건국 63년인데 박정희 18년, 이승만 12년, 모두 30년이다. 그 두 분이 오늘의 틀을 만들었다. 박정희가 만든 건 고속도로·항만·공단 등 다 눈에 보인다. 이승만이 만든 건 중요하지만 눈에 안 보인다. 농지 개혁으로 지주계급을 없앴고, 한·미 동맹으로 한국의 생명줄을 만들었다. 교육 확충으로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생겨났다. 그들에 의해 4·19가 일어났다. 박정희는 중산층을 많이 만들었는데 부마사태도 그들이 일으켰고 그런 시위가 김재규에게 영향을 줘 박정희는 피살됐다. 두 사람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였다. 박정희는 이승만의 레일 위에서 달린 기관차다. 이승만 없이 박정희는 없다. 전두환과 노태우 때인 80년대는 경제성장률 연평균 10.1%로 세계 1위였다. 경제를 개방하고 물가를 잡는 과정에서 박정희의 유산을 잘 지켰다. 그런 게 한국 민주화 형성의 물질적 토대를 만들었다.
▶김=민주주의는 절차적인 것과 실질적인 게 있다. 선거나 투표, 언론 자유, 정당정치 같은 게 절차고 사회 형평성, 양성평등이나 인권신장 같은 게 실질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부정했다. 박정희도 60년대는 선거를 하는 등 절차적 민주주의를 좀 지켰다. 그러나 70년대 유신체제는 별개다. 5·16과 10월 유신으로 두 번이나 헌정을 중단시켰다. 산업화에 공이 있다고 어디까지 용인해야 하나.
▶조=법적으로 보면 5·16과 10월 유신은 모두 쿠데타다. 그 정당성은 역사적 잣대로 봐야 한다. 5·16 당시 우리 민주주의는 열 살 정도였다. 영국은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이후 413년 만에야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를 했다. 영국에서 여자도 투표한 게 1928년이다. 프랑스는 45년이다. 미국에선 흑인이 65년 민권법이 통과되고 나서야 마음대로 투표했다. 한국은 48년부터 보통선거를 했다. 서양에서 수백 년 걸린 민주주의를 우리가 당장에 할 수 있었겠나. 그래도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하려 노력했다. 6·25전쟁 때도 언론이 정부를 마구 비판했다. 화폐개혁을 할 때도 국민 예금 동결을 안 했다. 링컨이 50년대 한국을 다스려도 이승만보다 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10월 유신은 박정희가 모진 맘 먹고 일생일대 결단을 한 거다. 중화학공업을 육성해 한국을 일으키려 한 거다. 국력을 조직화해 능률을 극대화하겠다는 거다. 오일쇼크 극복, 새마을운동, 중화학공업 발전 이런 걸 통해 중산층이 육성됐고 민주주의의 기틀이 됐다.
▶사회=모든 쿠데타는 나쁘다고 할 수 있나. 터키의 케말 퍄샤, 이집트의 나세르도 다 쿠데타 아니었나.
▶김=대상에 따라 다르다. 왕정에 대한 저항이라면 모르겠다. 하지만 5·16은 타도 대상이 민주주의체제였다. 10월 유신이 불가피한 면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당시 현실은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하기 시작하면 역사적 사실은 모두 정당화된다. 나는 10월 유신이 ‘개인의 권력욕망’이었다고 본다. 10월 유신이 없었으면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지 못했을까. 역사를 현실적인 입장에서 불가피론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사회=재야 인사인 장준하·함석헌씨가 사상계에 5·16을 지지하는 글을 썼던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5·16에 대해 국민이 저항하지 않았다면 민주주의 타도라고 할 수 있나.
▶김=민중적 저항이 바로 나오는 건 아니다. 5·16에 대한 국민적 평가는 63년 대통령선거에서 잘 반영됐다고 본다. 박정희가 가까스로 이겼다. 당시 도시에선 박정희보다 윤보선 표가 많았다.
▶조=5·16은 협조한 사람이 많았다.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은 알면서도 묵인했다. 장면 총리는 총성이 나자 군 통수권을 버리고 수도원으로 가 버렸다.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다’고 했고 진압군 동원을 거절했다. 미국은 혁명 반대 성명을 냈다가 곧 인정하는 쪽으로 갔다. 5·16 당시 전국에 통신사가 300개나 있었다. 사이비 기자가 판치고, 정부는 무능·부패하고, 사회질서는 무너지고, 좌익은 그걸 활용했다. 그런 상황이 제일 불안했던 게 군이다. 그래서 쿠데타를 했다. 5·16을 주도한 군 장교단은 청렴하고 똑똑하고 가난했다. 그들이 정권을 잡고 200일 개혁을 했는데 그때 외자 도입과 경제 개혁, 미·일 수교, 대외 개방 등 지금의 틀을 만들었다.
▶김=만일 5·16세력이 군정을 마치고 군에 복귀했다면 평가가 달라졌을 거다. 그런데 정치에 참여했다. 5·16을 시민적 관점에서 보자면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군인들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것이다.
▶조=63년 15만6000표 차이지만 박정희가 이겼다. 김종필 등이 출마한 총선도 공화당이 압승했다. 국민이 선거로 인정해 준 것 아니냐. 이들이 군으로 돌아가면 더 문제였다. 파키스탄처럼 군이 정권을 배후 조종하는 식으로 간다.
▶사회=혹시 군부가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다시 군으로 복귀한 사례가 역사상 있었나.
▶김=그래서 군부 쿠데타가 나쁘다는 것이다. 쿠데타에는 군인의 정치적 욕망이 있다고 본다.
▶조=정치적 열망이 아니라 국가 개조의 열망이었다. 박정희는 자기 비전을 성취하기 위한 ‘무장한 예언가’였다. 내가 박정희 시절 기자였기 때문에 부작용도 잘 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굵게 쓴다면 박정희는 이승만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축복이다. 5·16은 일류 국가의 기틀을 만든 혁명이다.
▶사회=그럼, 4·19는 무엇인가.
▶조=4·19는 5·16과 연결된다. 박정희가 혁명을 결심한 게 3·15 부정선거다. 그런데 정권을 잡고
보니까 먹고사는 문제가 들어왔다. 5·16이 4·19에서 표출된 희망 등을 일정 부분 채워 줬다고 본다.
▶김=자유와 민주를 열망하는 표출이 4·19였다. 반면 5·16은 주체가 군부고 목적은 자유나 민주가 아니라 사회 변화였다. 5·16이 쿠데타 정당화하려고 혁명 공약에서 4·19 정신을 이어받는다고 했지만 성격이 다르다. 60년 4월 19일에 시민혁명 나고 1년1개월밖에 안 됐다. 새 체제가 수립돼 통과의례적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4월 혁명과 제2공화국은 시민들이 쟁취한 것인데 좀 더 지켜봤어야 했다.
▶조=나도 장면을 동정한다. 그런데 2~3년을 기다릴 수 없었던 이유는 휴전선이다. 수백만 명이 죽은 전쟁이 얼마 전이었는데 군인들로선 사회 혼란이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장면은 쿠데타 나니 사라졌는데 그게 국군이 아니고 북한군이었다면 나라가 어떻게 됐겠나.
▶사회=박정희가 없었어도 한국 경제는 성장했을 거라는 주장이 있다. 역사에서 개인과 구조의 관계는 과연 뭘까.
▶김=60년대는 산업화가 가장 중요한 민족적 과제였다. 군정은 민족주의적 경제 발전을 추진했다. 농어촌 고리채 정리, 중소기업 자금 지원, 부정축재처리법 실시 등은 외연적 성장모델이라기보다는 내포적이고 민족적인 경제 발전이다. 쿠데타 중심 세력 대다수가 빈농 출신이란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다 64년에 개방체제로 전환한다. 당시 세계 경제 흐름과 여건을 볼 때 그건 박정희의 돋보이는 리더십이다. 역사가 구조냐 개인이냐에 대해선 절충적인 답을 할 수밖에 없다. 둘 다 중요한데 정치적 민주주의와는 별개로 산업화 전략은 박정희의 전략적 선택이 평가받을 부분이 많다.
▶조=박정희가 겉으론 딱딱하지만 속으로는 유연한 사람이다. 합리적인 제안은 선뜻 받아들인다. 많은 기업인을 부정 축재자로 구속했다가 이병철로부터 ‘기업인이 돈 버는 데 잡아넣으면 어떡하느냐’는 말을 듣고 맘을 바꿨다. 62년 1월 5일 경제기획원 김유택 원장이 5개년계획을 보고하는데 박정희가 우리나라 과학기술이 그 계획을 뒷받침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3개월 뒤 국가 과학기술 수립계획이 나온다. 이 모든 걸 박정희 개인에게 돌리는 건 우상숭배 같고, 그걸 조율한 군 장교단의 안목을 봐야 한다. 당시 장교가 6만 명인데 이 중 10%가 미국에서 교육받았다. 미국에 가면 선진기술도 배우고, 개혁의지를 갖고 돌아온다. 그들의 성공은 가난과 개혁의지와 미국으로 요약된다. 61년 우리 국민소득이 80달러인데 필리핀의 3분의 1이었다. 79년에 우리가 필리핀 소득의 다섯 배가 됐다. 20세기 후반 전 세계에서 쿠데타가 많았지만 박정희만큼 경제 발전을 시킨 나라가 있나.
▶김=60년대 여러 요소가 결합돼 경제 발전이 됐다. 수출입국, 개방체제로의 전환과 국가 주도다.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통해 독일의 비스마르크 시대와 일본의 메이지 시대에서 국가가 뭘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구조적 조건도 중요했다. 토지 개혁을 통해 전통적 지주계급이 쇠락했고 분단 상황도 산업화에 유리했다. 당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쇼윈도였다. 체제 경쟁을 하느라 원조·차관 등을 많이 제공했다. 또 높은 교육열을 바탕으로 한 양질의 노동력이 있었다. 세계 경제는 호황이었다. 여러 가지가 결합해 성공했다.
▶조=정확하다. 국가 주도의 수출정책과 이를 뒷받침하는 토지 개혁. 분단으로 인한 쇼윈도 효과와 교육열. 하나를 덧붙인다면 토지 개혁과 미국의 지원과 교육열 모두 이승만이 만든 것이라는 점이다. 이승만의 개혁이 없었으면 박정희의 성공도 없었다.
▶사회=해방 이후 남한과 북한은 결국 박정희와 김일성의 대결로 압축된다. 두 사람의 차이는 뭔가.
▶조=60년대 김일성은 군사 제일주의 노선으로 갔다. 62년 11월 쿠바 미사일 사건 때 소련의 흐루쇼프가 미국의 케네디에게 굴복하자 김일성은 겁이 나서 국방 예산을 많이 쓴다. 67~69년이 피크였다. 그래서 근질근질하니까 1·21사태도 일으키고 삼척에 무장공비를 보낸 거다. 박정희는 군사비 지출을 최소화하고 자원을 경제에 투입했다. 60년대 한국은 경제 제일노선, 북한은 국방 제일 노선이었는데 70년대는 한국의 군비 지출이 북한을 앞선다.
▶김=사회주의는 국가가 중심이 돼 처음엔 고도의 효율성을 보인다. 그런데 일정 단계를 지나면 국가를 넘어 민간 활력성이 있어야 한다. 사회주의는 그게 안 된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필요한데 독재고 권위주의 국가라 한계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북한을 포함해 많은 사회주의 국가가 좌절했다. 시장경제를 과감하게 받아들인 중국만 예외다.
▶조=북한의 김일성은 82세까지 살았고 김정일은 지금도 잘 산다. 장기집권의 배경은 공포와 가난이다. 한국은 자유와 부가 있으니까 이승만을 몰아냈고 박정희도 죽었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자기 성공의 희생자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자기 실패의 수혜자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다음 세대에 어떻게 알리느냐가 중요하다. 두 분 다 끝이 안 좋아 너무 부정적 이미지다.
▶사회=10월 유신은 종신집권 시나리오 아닌가. 산업화를 성공시켰어도 종신집권하면 그 성과를 다 까먹을 만큼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았을까. 민주주의에 대한 박정희의 생각은 뭔가.
▶조=박정희 스스로 권력을 놓고 내려오긴 힘들었을 것이다. 김일성의 불행은 장수고, 박정희의 행복은 그 죽음의 타이밍이다. 그가 죽은 뒤 40대 후반의 전두환이 나와 구조조정하고 과도기를 잘 관리했다. 6·29 선언도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이 했다. 전두환은 집권은 유혈로 했지만 물러날 때는 민주적으로 내려왔다.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그 나라 수준에 맞게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구가 수백년 걸려 만든 민주주의를 당장 적용하면 나라가 망하든 민주주의가 망하든 한다. 그러니 잠시 유보시키는 게 낫다고 본 게 박정희의 판단이었다.
▶김=박정희는 독특한 민주주의 개념을 썼다. 60년대는 민족적 민주주의, 70년대는 한국식 민주주의다. 민주주의가 나라별 특성이 있는 건 사실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민주주의는 다르다. 하지만 최소 요건이 있다. 표현의 자유, 선거와 투표의 자유, 인권이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이 세 영역에서 유신체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였다.
▶조=70년대에 언론 자유가 제약됐지만 완전히 없진 않았다. 대통령과 중앙정보부 등 몇몇 성역을 빼곤 비판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에서 언론, 사상의 자유 말고 중요한 게 사유재산권이다. 그건 잘 보장됐다. 자유가 제약된 게 사실이지만 독재라는 극단적 단어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 프리덤하우스는 72~73년, 75~76년에 한국을 부자유국가로 구분했다. 나머지는부분적 자유라고 정의했다. 그게 맞다고 본다.
▶김=정치 안정을 이유로 견제와 균형이 사라졌다. 긴급조치를 내려 마음대로 말 못하고, 듣지 못하고, 표현도 못했는데 민주주의가 가장 후퇴한 시기 아닌가.
▶조=바로 그 시기에 석유파동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중화학공업을 육성해 중산층을 만들고 그 이후 시기의 민주화와 경제적 풍요를 보장했다. 그런 모든 걸 보면서 평가해야 한다. 나는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지만 민주화세력을 낮게 보지 않는다. 양쪽 다 의미가 있다.
▶사회=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박정희는 동상도 기념관도 없다. 기념관을 지어 역사적 공과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줘야 하지 않나.
▶김=역사적 상처를 다스리기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두 사람에 대해선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87년 민주화 이후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산업화와 민주화에 대한 온당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빛나기만 한 건 아니지만 어둡기만한 시대도 아니었다.
▶조=우리 화폐가 5종인데 다 조선시대 사람이다. 광화문 세종대왕, 이순신 다 조선 왕조 공간이다. 대한민국과 조선왕조는 다른 나라다. 가장 강한 나라를 만든 사람 동상을 왜 아직도 안 만드는가. 광화문광장에 이승만 동상이 필요하다. 화폐 5종 중에 이승만 사진 하나 못 넣는가. 국민 상식에 호소하면 되는데 대통령도 의견 표현이 없다. 국사교과서들을 보니 전태일은 전부 사진까지 들어가 있는데 이병철·정주영은 언급도 없다. 그럼, 기업인은 뭐냐.
▶사회=5·16을 어떻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나.
▶조=5·16은 사실은 전두환 시기까지를 포함해야 한다. 민족사 2000년의 최고 황금기다. 기막힌 역전과 기적의 드라마다. 공(功)이 80점, 과(過)가 20점이다. 박정희와 김종필 이야기는 신라의 3국 통일 때 문무왕 김춘추와 김유신 이야기 같다. 지난 60년은 나관중의삼국지보다 더 재밌다. 얼마나 영웅이 많이 나왔나. 부정적인 걸 긍정적으로 보자는 게 아니다. 긍정적인 걸 긍정적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래야 후대에 21세기형 박정희, 21세기형 이병철이 나오고 한국을 통일을 넘어 일류국가로 발전시킨다.
▶김=5·16은 헌정을 부정했고 민주주의 관점에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10월 유신과 12·12 쿠데타 출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5·16과 박정희 체제에 대해 온당한 평가도 필요하다. 빛과 그늘을 다 보자. 빛은 경제 성장, 그늘은 10월 유신으로 상징되는 군부 권위주의다. 지금도 많은 국민이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한다. 그게 주는 메시지가 뭔가. 현재 우리 사회를 이끄는 정치 지도자들이 잘못해서 그런 거다.
▶조=인간 박정희는 매력적인 사람이다. 형은 좌익운동을 하다 우익에게 죽고 부인은 북한 공작원에게 죽었다. 본인은 62세에 부하에 의해 죽었다. 집권 18년간 많은 걸 이뤘다. 그는 부끄럼을 타는 초인이었다. 박정희 세대는 험한 세상을 살면서 다음 세대를 위해 희생했다. 이걸 알릴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5·16은 수많은 역사적 대사건이 그렇듯 모호성과 이중성을 갖고 있다. 형식상 군사쿠데타였다는 걸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지만 그걸 통해 집권한 군부가 1960년대 산업화를 이끌었고, 그로 인해 오늘의 번영이 가능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부정적 형식이 긍정적 결과를 내포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정치학자 최장집은 “동기가 선하다고 결과까지 선한 건 아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결과가 형편없어도 동기가 순수했다면 비난하지 말아야 하는가. 반대로 형식은 잘못됐더라도 결과가 좋으면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어찌 보면 이상주의 대 현실주의 논쟁 같은 이런 질문은 5·16 평가 과정에서도 수시로 등장한다. 게다가 72년의 10월 유신까지 이어지면 논쟁은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한편에선 “5·16의 동기는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한 것이고 쿠데타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며 “그걸 기점으로 한국 사회가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됐으니 혁명”이라고 주장한다. 반대편에선 “5·16은 민주정부를 뒤엎는 군사쿠데타의 나쁜 선례를 남겼고, 운명적으로 10월 유신과 박정희의 종신 집권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비판한다. 무엇이 맞는 주장일까. 쉽게 답하기 어렵다.
그러나 피해 가는 게 능사는 아닐 것이다. 이미 반세기가 지났다. 차분한 마음과 냉철한 시각으로 5·16의 공과를 정면에서 마주할 때가 된 것이다. 박정희 전문가인 언론인 조갑제씨와 진보진영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연세대 김호기 교수와의 대담을 마련한 것도 그런 취지에서다. 앞으로 5·16에 대해 훨씬 다양한 연구와 토론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대담은 12일 오후 중앙일보사에서 김종혁 중앙SUNDAY 편집국장의 사회로 3시간 동안 진행됐다. 다음은 대담 전문.
▶사회(김종혁)=5·16을 바라보는 세 가지 입장이 있다. 첫째는 5·16은 정상적인 정치질서를 깨뜨린 용납할 수 없는 군사쿠데타라는 주장, 둘째는 대한민국 사회를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한 혁명이라는 것, 셋째는 형식은 쿠데타이지만 결과적으론 경제 성장과 번영의 토대를 만들었으니 정당하다는 것 등이다. 각각 어떤 입장인가.
▶조갑제=우리 민족사의 3대 사건이 있다. 신라가 3국을 통일해 최초의 민족국가가 된 것,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 그리고 5·16이다. 성격은 분명 쿠데타다. 하지만 결과는 혁명이다. 5·16을 통해 대한민국이 본질적으로 달라졌다. 박정희가 주도하고 기업인과 과학자가 따라와 산업화가 됐고, 그걸 통해 민주주의가 기능하게 된 것이다. 어느 나라건 근대화 혁명 과정에서 피를 많이 흘린다. 박정희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이런 변화를 가져왔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파괴자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건설자다.
▶김호기=사실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중요하다. 기본적으로는 쿠데타다. 4월 시민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동했는데 2공화국이 능력이 있었냐 없었냐, 당시 사회가 혼란했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군부가 헌정 질서를 중단시켰다는 점에서 그렇다. 혁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대혁명, 미국의 시민혁명처럼 혁명은 주체가 시민이어야 하고 사회구조적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5·16은 사회구조적 변화는 가져왔지만 주체가 군인이었다. 그러나 5·16을 통해 우리 사회가 변한 건 맞다. 45년 광복이 됐을 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산업화와 민주화였다. 5·16 쿠데타가 박정희 체제를 등장시켰고, 그 체제가 근대화의 한 축을 이루는 산업화를 성취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조갑제가 보는 5·16은…
정당성, 역사 잣대로 봐야…지난 60년은 영웅들 시대 제2의 박정희·이병철 필요
김호기가 보는 5·16은…
모든 과거 정당화 안 돼…군의 정치욕망 통로 역할 온당한 공과 평가해야
근현대사의 분수령이 됐던 5·16이 50주년을 맞았다. 좌파냐 우파냐, 그 시대를 경험했느냐 아니냐에 따라 5·16에 대한 평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언론인 조갑제씨(왼쪽)와 연세대 김호기 교수가 5·16의 정당성 여부와 역사적 의미에 대해 대담했다. 정중하지만 격렬했다. 최정동 기자
▶사회=쿠데타란 행위를 덮을 만큼 산업화의 공이 컸다고 볼 수는 없나.▶김호기=산업화를 이룬 게 맞지만 빛과 그늘이 있다. 60년대 보릿고개를 벗어나게 한 건 맞다. 70년대 중화학공업을 육성해 우리 경제가 이례적으로 세계 경제 속에서 자리 잡게 했다. 하지만 급속한 산업화 이면에는 농업 부문의 희생과 저임금에 시달린 노동자 계급이 있었다. 재벌 문제도 가져왔다.
▶조갑제=대기업을 만든 건 문제가 아니라 박정희의 최대 성과다. 대기업이 일자리도 늘렸고 세금도 내서 국가 재정이 튼튼해졌다. 박정희는 과거의 사농공상(士農工商)을 상공농사 순으로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업인과 과학자를 밀어줬다. 대기업을 만들어 한국을 일류국가 문턱까지 가게 했다. 희생이라고 하는데 맞지 않는다. 박 대통령 시절에는 부의 분배가 상대적으로 평등했다. 당시에 하위 40%의 소득성장률은 9.5%였다. 전체 평균 성장률은 9%다. 도시 빈민도 같이 잘살게 됐다. 기업과 부자 때문에 노동자·농민이 희생된 건 아니다.
▶김=인구 5000만 명 규모에서 한국 같은 경제 발전을 이루고 전자·조선 등에서 세계적 기업이 있는 건 이례적인 게 맞다. 박정희 시절의 중화학공업 육성이 기여했다. 하지만 길게 보면 대기업 우선 정책의 그늘도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균형발전으로 갔어야 한다. 일자리 문제에서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80~90% 정도다. 박정희 시절의 불균형 발전전략이 지금도 유지된다. 양극화다.
▶조=박정희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열심히 하는 사람을 밀었다. 새마을운동도 열심히 하려는 마을
을 밀어줬다. 박정희는 가난하게 자라 사치와 특권을 싫어했다. 대기업도 생리에는 안 맞지만 대기업을 키워야 중소기업·빈민이 잘산다고 봤다. 양극화라는 말에 거부감이 든다. 한국이 소득 배분에서 평등한 축에 든다는 건 학자들도 안다.
▶사회=박정희 집권기간은 18년이었고 그로부터 이미 32년이 지났다. 현재의 문제를 박정희가 책임져야 한다는 건 무리 아닌가.
▶김=물론 집권 이외 기간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61~79년이 한국 근대화에 가장 중요한 원형을 이룬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비스마르크가 독일에 미친 영향과 같다. 우리 사회의 구조를 만들었기 때문에 지적하는 것이다.
▶조=올해가 건국 63년인데 박정희 18년, 이승만 12년, 모두 30년이다. 그 두 분이 오늘의 틀을 만들었다. 박정희가 만든 건 고속도로·항만·공단 등 다 눈에 보인다. 이승만이 만든 건 중요하지만 눈에 안 보인다. 농지 개혁으로 지주계급을 없앴고, 한·미 동맹으로 한국의 생명줄을 만들었다. 교육 확충으로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생겨났다. 그들에 의해 4·19가 일어났다. 박정희는 중산층을 많이 만들었는데 부마사태도 그들이 일으켰고 그런 시위가 김재규에게 영향을 줘 박정희는 피살됐다. 두 사람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였다. 박정희는 이승만의 레일 위에서 달린 기관차다. 이승만 없이 박정희는 없다. 전두환과 노태우 때인 80년대는 경제성장률 연평균 10.1%로 세계 1위였다. 경제를 개방하고 물가를 잡는 과정에서 박정희의 유산을 잘 지켰다. 그런 게 한국 민주화 형성의 물질적 토대를 만들었다.
▶김=민주주의는 절차적인 것과 실질적인 게 있다. 선거나 투표, 언론 자유, 정당정치 같은 게 절차고 사회 형평성, 양성평등이나 인권신장 같은 게 실질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부정했다. 박정희도 60년대는 선거를 하는 등 절차적 민주주의를 좀 지켰다. 그러나 70년대 유신체제는 별개다. 5·16과 10월 유신으로 두 번이나 헌정을 중단시켰다. 산업화에 공이 있다고 어디까지 용인해야 하나.
▶조=법적으로 보면 5·16과 10월 유신은 모두 쿠데타다. 그 정당성은 역사적 잣대로 봐야 한다. 5·16 당시 우리 민주주의는 열 살 정도였다. 영국은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이후 413년 만에야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를 했다. 영국에서 여자도 투표한 게 1928년이다. 프랑스는 45년이다. 미국에선 흑인이 65년 민권법이 통과되고 나서야 마음대로 투표했다. 한국은 48년부터 보통선거를 했다. 서양에서 수백 년 걸린 민주주의를 우리가 당장에 할 수 있었겠나. 그래도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하려 노력했다. 6·25전쟁 때도 언론이 정부를 마구 비판했다. 화폐개혁을 할 때도 국민 예금 동결을 안 했다. 링컨이 50년대 한국을 다스려도 이승만보다 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10월 유신은 박정희가 모진 맘 먹고 일생일대 결단을 한 거다. 중화학공업을 육성해 한국을 일으키려 한 거다. 국력을 조직화해 능률을 극대화하겠다는 거다. 오일쇼크 극복, 새마을운동, 중화학공업 발전 이런 걸 통해 중산층이 육성됐고 민주주의의 기틀이 됐다.
거사에 성공한 박정희 소장이 부하들과 함께 서울시청 앞에 서 있는 모습. 5·16의 상징이 된 사진이다. [중앙포토]
▶사회=모든 쿠데타는 나쁘다고 할 수 있나. 터키의 케말 퍄샤, 이집트의 나세르도 다 쿠데타 아니었나.
▶김=대상에 따라 다르다. 왕정에 대한 저항이라면 모르겠다. 하지만 5·16은 타도 대상이 민주주의체제였다. 10월 유신이 불가피한 면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당시 현실은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하기 시작하면 역사적 사실은 모두 정당화된다. 나는 10월 유신이 ‘개인의 권력욕망’이었다고 본다. 10월 유신이 없었으면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지 못했을까. 역사를 현실적인 입장에서 불가피론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사회=재야 인사인 장준하·함석헌씨가 사상계에 5·16을 지지하는 글을 썼던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5·16에 대해 국민이 저항하지 않았다면 민주주의 타도라고 할 수 있나.
▶김=민중적 저항이 바로 나오는 건 아니다. 5·16에 대한 국민적 평가는 63년 대통령선거에서 잘 반영됐다고 본다. 박정희가 가까스로 이겼다. 당시 도시에선 박정희보다 윤보선 표가 많았다.
▶조=5·16은 협조한 사람이 많았다.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은 알면서도 묵인했다. 장면 총리는 총성이 나자 군 통수권을 버리고 수도원으로 가 버렸다.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다’고 했고 진압군 동원을 거절했다. 미국은 혁명 반대 성명을 냈다가 곧 인정하는 쪽으로 갔다. 5·16 당시 전국에 통신사가 300개나 있었다. 사이비 기자가 판치고, 정부는 무능·부패하고, 사회질서는 무너지고, 좌익은 그걸 활용했다. 그런 상황이 제일 불안했던 게 군이다. 그래서 쿠데타를 했다. 5·16을 주도한 군 장교단은 청렴하고 똑똑하고 가난했다. 그들이 정권을 잡고 200일 개혁을 했는데 그때 외자 도입과 경제 개혁, 미·일 수교, 대외 개방 등 지금의 틀을 만들었다.
▶김=만일 5·16세력이 군정을 마치고 군에 복귀했다면 평가가 달라졌을 거다. 그런데 정치에 참여했다. 5·16을 시민적 관점에서 보자면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군인들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것이다.
▶조=63년 15만6000표 차이지만 박정희가 이겼다. 김종필 등이 출마한 총선도 공화당이 압승했다. 국민이 선거로 인정해 준 것 아니냐. 이들이 군으로 돌아가면 더 문제였다. 파키스탄처럼 군이 정권을 배후 조종하는 식으로 간다.
▶사회=혹시 군부가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다시 군으로 복귀한 사례가 역사상 있었나.
▶김=그래서 군부 쿠데타가 나쁘다는 것이다. 쿠데타에는 군인의 정치적 욕망이 있다고 본다.
▶조=정치적 열망이 아니라 국가 개조의 열망이었다. 박정희는 자기 비전을 성취하기 위한 ‘무장한 예언가’였다. 내가 박정희 시절 기자였기 때문에 부작용도 잘 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굵게 쓴다면 박정희는 이승만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축복이다. 5·16은 일류 국가의 기틀을 만든 혁명이다.
▶사회=그럼, 4·19는 무엇인가.
▶조=4·19는 5·16과 연결된다. 박정희가 혁명을 결심한 게 3·15 부정선거다. 그런데 정권을 잡고
보니까 먹고사는 문제가 들어왔다. 5·16이 4·19에서 표출된 희망 등을 일정 부분 채워 줬다고 본다.
▶김=자유와 민주를 열망하는 표출이 4·19였다. 반면 5·16은 주체가 군부고 목적은 자유나 민주가 아니라 사회 변화였다. 5·16이 쿠데타 정당화하려고 혁명 공약에서 4·19 정신을 이어받는다고 했지만 성격이 다르다. 60년 4월 19일에 시민혁명 나고 1년1개월밖에 안 됐다. 새 체제가 수립돼 통과의례적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4월 혁명과 제2공화국은 시민들이 쟁취한 것인데 좀 더 지켜봤어야 했다.
▶조=나도 장면을 동정한다. 그런데 2~3년을 기다릴 수 없었던 이유는 휴전선이다. 수백만 명이 죽은 전쟁이 얼마 전이었는데 군인들로선 사회 혼란이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장면은 쿠데타 나니 사라졌는데 그게 국군이 아니고 북한군이었다면 나라가 어떻게 됐겠나.
▶사회=박정희가 없었어도 한국 경제는 성장했을 거라는 주장이 있다. 역사에서 개인과 구조의 관계는 과연 뭘까.
▶김=60년대는 산업화가 가장 중요한 민족적 과제였다. 군정은 민족주의적 경제 발전을 추진했다. 농어촌 고리채 정리, 중소기업 자금 지원, 부정축재처리법 실시 등은 외연적 성장모델이라기보다는 내포적이고 민족적인 경제 발전이다. 쿠데타 중심 세력 대다수가 빈농 출신이란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다 64년에 개방체제로 전환한다. 당시 세계 경제 흐름과 여건을 볼 때 그건 박정희의 돋보이는 리더십이다. 역사가 구조냐 개인이냐에 대해선 절충적인 답을 할 수밖에 없다. 둘 다 중요한데 정치적 민주주의와는 별개로 산업화 전략은 박정희의 전략적 선택이 평가받을 부분이 많다.
▶조=박정희가 겉으론 딱딱하지만 속으로는 유연한 사람이다. 합리적인 제안은 선뜻 받아들인다. 많은 기업인을 부정 축재자로 구속했다가 이병철로부터 ‘기업인이 돈 버는 데 잡아넣으면 어떡하느냐’는 말을 듣고 맘을 바꿨다. 62년 1월 5일 경제기획원 김유택 원장이 5개년계획을 보고하는데 박정희가 우리나라 과학기술이 그 계획을 뒷받침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3개월 뒤 국가 과학기술 수립계획이 나온다. 이 모든 걸 박정희 개인에게 돌리는 건 우상숭배 같고, 그걸 조율한 군 장교단의 안목을 봐야 한다. 당시 장교가 6만 명인데 이 중 10%가 미국에서 교육받았다. 미국에 가면 선진기술도 배우고, 개혁의지를 갖고 돌아온다. 그들의 성공은 가난과 개혁의지와 미국으로 요약된다. 61년 우리 국민소득이 80달러인데 필리핀의 3분의 1이었다. 79년에 우리가 필리핀 소득의 다섯 배가 됐다. 20세기 후반 전 세계에서 쿠데타가 많았지만 박정희만큼 경제 발전을 시킨 나라가 있나.
▶김=60년대 여러 요소가 결합돼 경제 발전이 됐다. 수출입국, 개방체제로의 전환과 국가 주도다.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통해 독일의 비스마르크 시대와 일본의 메이지 시대에서 국가가 뭘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구조적 조건도 중요했다. 토지 개혁을 통해 전통적 지주계급이 쇠락했고 분단 상황도 산업화에 유리했다. 당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쇼윈도였다. 체제 경쟁을 하느라 원조·차관 등을 많이 제공했다. 또 높은 교육열을 바탕으로 한 양질의 노동력이 있었다. 세계 경제는 호황이었다. 여러 가지가 결합해 성공했다.
▶조=정확하다. 국가 주도의 수출정책과 이를 뒷받침하는 토지 개혁. 분단으로 인한 쇼윈도 효과와 교육열. 하나를 덧붙인다면 토지 개혁과 미국의 지원과 교육열 모두 이승만이 만든 것이라는 점이다. 이승만의 개혁이 없었으면 박정희의 성공도 없었다.
▶사회=해방 이후 남한과 북한은 결국 박정희와 김일성의 대결로 압축된다. 두 사람의 차이는 뭔가.
▶조=60년대 김일성은 군사 제일주의 노선으로 갔다. 62년 11월 쿠바 미사일 사건 때 소련의 흐루쇼프가 미국의 케네디에게 굴복하자 김일성은 겁이 나서 국방 예산을 많이 쓴다. 67~69년이 피크였다. 그래서 근질근질하니까 1·21사태도 일으키고 삼척에 무장공비를 보낸 거다. 박정희는 군사비 지출을 최소화하고 자원을 경제에 투입했다. 60년대 한국은 경제 제일노선, 북한은 국방 제일 노선이었는데 70년대는 한국의 군비 지출이 북한을 앞선다.
▶김=사회주의는 국가가 중심이 돼 처음엔 고도의 효율성을 보인다. 그런데 일정 단계를 지나면 국가를 넘어 민간 활력성이 있어야 한다. 사회주의는 그게 안 된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필요한데 독재고 권위주의 국가라 한계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북한을 포함해 많은 사회주의 국가가 좌절했다. 시장경제를 과감하게 받아들인 중국만 예외다.
▶조=북한의 김일성은 82세까지 살았고 김정일은 지금도 잘 산다. 장기집권의 배경은 공포와 가난이다. 한국은 자유와 부가 있으니까 이승만을 몰아냈고 박정희도 죽었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자기 성공의 희생자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자기 실패의 수혜자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다음 세대에 어떻게 알리느냐가 중요하다. 두 분 다 끝이 안 좋아 너무 부정적 이미지다.
▶사회=10월 유신은 종신집권 시나리오 아닌가. 산업화를 성공시켰어도 종신집권하면 그 성과를 다 까먹을 만큼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았을까. 민주주의에 대한 박정희의 생각은 뭔가.
▶조=박정희 스스로 권력을 놓고 내려오긴 힘들었을 것이다. 김일성의 불행은 장수고, 박정희의 행복은 그 죽음의 타이밍이다. 그가 죽은 뒤 40대 후반의 전두환이 나와 구조조정하고 과도기를 잘 관리했다. 6·29 선언도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이 했다. 전두환은 집권은 유혈로 했지만 물러날 때는 민주적으로 내려왔다.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그 나라 수준에 맞게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구가 수백년 걸려 만든 민주주의를 당장 적용하면 나라가 망하든 민주주의가 망하든 한다. 그러니 잠시 유보시키는 게 낫다고 본 게 박정희의 판단이었다.
▶김=박정희는 독특한 민주주의 개념을 썼다. 60년대는 민족적 민주주의, 70년대는 한국식 민주주의다. 민주주의가 나라별 특성이 있는 건 사실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민주주의는 다르다. 하지만 최소 요건이 있다. 표현의 자유, 선거와 투표의 자유, 인권이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이 세 영역에서 유신체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였다.
▶조=70년대에 언론 자유가 제약됐지만 완전히 없진 않았다. 대통령과 중앙정보부 등 몇몇 성역을 빼곤 비판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에서 언론, 사상의 자유 말고 중요한 게 사유재산권이다. 그건 잘 보장됐다. 자유가 제약된 게 사실이지만 독재라는 극단적 단어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 프리덤하우스는 72~73년, 75~76년에 한국을 부자유국가로 구분했다. 나머지는부분적 자유라고 정의했다. 그게 맞다고 본다.
▶김=정치 안정을 이유로 견제와 균형이 사라졌다. 긴급조치를 내려 마음대로 말 못하고, 듣지 못하고, 표현도 못했는데 민주주의가 가장 후퇴한 시기 아닌가.
▶조=바로 그 시기에 석유파동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중화학공업을 육성해 중산층을 만들고 그 이후 시기의 민주화와 경제적 풍요를 보장했다. 그런 모든 걸 보면서 평가해야 한다. 나는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지만 민주화세력을 낮게 보지 않는다. 양쪽 다 의미가 있다.
▶사회=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박정희는 동상도 기념관도 없다. 기념관을 지어 역사적 공과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줘야 하지 않나.
▶김=역사적 상처를 다스리기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두 사람에 대해선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87년 민주화 이후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산업화와 민주화에 대한 온당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빛나기만 한 건 아니지만 어둡기만한 시대도 아니었다.
▶조=우리 화폐가 5종인데 다 조선시대 사람이다. 광화문 세종대왕, 이순신 다 조선 왕조 공간이다. 대한민국과 조선왕조는 다른 나라다. 가장 강한 나라를 만든 사람 동상을 왜 아직도 안 만드는가. 광화문광장에 이승만 동상이 필요하다. 화폐 5종 중에 이승만 사진 하나 못 넣는가. 국민 상식에 호소하면 되는데 대통령도 의견 표현이 없다. 국사교과서들을 보니 전태일은 전부 사진까지 들어가 있는데 이병철·정주영은 언급도 없다. 그럼, 기업인은 뭐냐.
▶사회=5·16을 어떻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나.
▶조=5·16은 사실은 전두환 시기까지를 포함해야 한다. 민족사 2000년의 최고 황금기다. 기막힌 역전과 기적의 드라마다. 공(功)이 80점, 과(過)가 20점이다. 박정희와 김종필 이야기는 신라의 3국 통일 때 문무왕 김춘추와 김유신 이야기 같다. 지난 60년은 나관중의
▶김=5·16은 헌정을 부정했고 민주주의 관점에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10월 유신과 12·12 쿠데타 출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5·16과 박정희 체제에 대해 온당한 평가도 필요하다. 빛과 그늘을 다 보자. 빛은 경제 성장, 그늘은 10월 유신으로 상징되는 군부 권위주의다. 지금도 많은 국민이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한다. 그게 주는 메시지가 뭔가. 현재 우리 사회를 이끄는 정치 지도자들이 잘못해서 그런 거다.
▶조=인간 박정희는 매력적인 사람이다. 형은 좌익운동을 하다 우익에게 죽고 부인은 북한 공작원에게 죽었다. 본인은 62세에 부하에 의해 죽었다. 집권 18년간 많은 걸 이뤘다. 그는 부끄럼을 타는 초인이었다. 박정희 세대는 험한 세상을 살면서 다음 세대를 위해 희생했다. 이걸 알릴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첫댓글 무형문화님 감사 님의 열정 2012그날의 승리를 위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이 쿠테타였다면 아마 북한의 김일성과 같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는 논쟁은 그분에 대한 질투였을 것이다. 지금은 문민정부를 민주주의의 시초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들의 만행은 민주주의라는 아주쉽고 방종적인 결과의 집착인 것이다.나는 다시한번 반문한다.그분이 독재자라면 지금의 남쪽은 김일성이라고! 문의 고집은 나라를 팔아먹는 소인배의 고집이었으며,역사의 결과였던 것이다.결국 그분은 민주주의의 기초를 완성하신 분이다.아무 미련없는 그분의 희생을 소외시키지 말기를 바란다.핍박받아 그분의 진실이 밝혀져도 그들은 어턱하든지 자신의 욕심을 드러내고 있다.그것이 방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