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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이사 1,10.16-20
복 음 : 마태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01년 6월 14일부터 쓰기 시작했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묵상 글,
2021년 3월 2일인 오늘까지 이 묵상 글을 계속 쓰고 있을 줄은 정말로 상상도 못 했습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기껏해야 3년, 조금 더 시간을 더하면 6년 정도
꾸준히 써도 대단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벌써 만 2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글 쓰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글의 소재가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재가 생기면 무조건 메모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곳저곳에 메모를 붙여놓고서 글을 쓸 때 사용하고 쓰레기통으로 메모를 찢어서 버립니다.
미리 써 놓은 글 역시 인터넷에 묵상 글로 올라간 뒤에는
파쇄하거나 역시 쓰레기통으로 들어갑니다(참고로 저는 묵상 글을 먼저 펜으로 종이에 적습니다).
이런 생활을 20년 동안 한 것입니다.
그렇게 끈기 있는 저도 아닌 데 오랜 시간을 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니,
버리는 재미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썼던 글을 버리는 것, 내용을 사용한 뒤에 메모를 찢어서 버릴 때의 기분이 좋습니다.
기억을 통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줄어드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버릴 수 있었기 때문에, 20년 동안 쓸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힘들다고 하는 것을 버리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버려야 가벼워질 수 있는데,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어렵고 힘든 삶의 무게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버리지 못하는 사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 역시 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후계자로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면 그 자리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자신의 권위로 말하는 것을 실행하고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한다는 것을 보이려고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일 뿐입니다.
윗자리, 높은 자리만 좋아하고, 인사받고 존경받기만을 원합니다.
모세의 자리는 하느님의 권위를 누리는 곳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남들보다 윗자리에 오르려는 권위를 차마 놓을 수 없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 권위는 하느님의 것인데도 놓지 못하고 있으니 주님께서 화가 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타락한 하느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권위는 모두 버리고, 자신을 깨끗하게 씻어 하느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권위는 우리 스스로가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 ‘스승’으로 대우받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곧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둘째> “그들이 하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곧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셋째> “그들은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
곧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가 참된 스승인가?
<첫째> 그는 가르치되, 언행불일치하는 이가 아니며, 남에게 짐 지우지 않는 이입니다.
곧 언행일치, 실천궁행하는 이, 곧 말씀을 성취하는 이요,
타인에게 짐을 지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타인의 짐마저 짊어지는 이입니다.
<둘째> 그는 일하되, 표리부동과 위선이 없는 이입니다.
곧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아닌 자신을 보낸 분을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이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의 아버지께 일을 바치는 이입니다.
<셋째> 그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되 자만과 허영이 없는 이입니다.
곧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이요, 섬김을 받으려하기보다 섬기는 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 것일까를 물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지만, 스승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인생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니 그들에게 머리 굽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혹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지가 들추어지면 감사하기보다 상처를 받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스승이 있는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인가?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이제 다시 ‘자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스승’으로 대우받고자 하였는데,
나는 지금 누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섬김의 종이신 예수님의 자리인가?
그리고 섬김을 배우는 제자의 자리인가?
아니면 섬김을 받고자 하며, 가르치며 스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가톨릭평화신문에 ‘미카엘의 순례일기’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지난 2월 7일에는 ‘아이스크림과 노사제의 투박한 고백’이 있었습니다.
서품 42년을 기념하면서 동창 신부님들이 성지순례를 다녀왔다고 합니다.
작은 섬에 성모승천 성당과 종탑이 있었다고 합니다.
종에 매달린 줄을 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종탑이었습니다.
종탑에서 기다리던 신부님이 친구 신부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소원은 평생 가난하게 살아온, 겸손하게 살아온 동창 신부에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것이었습니다.
70이 넘은 노 사제들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바라는 것을 행하는 것이 소원이라면
하느님께서는 잘 들어 주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마태 7,12)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성지순례’를 다닐 기회가 있었습니다.
처음 갔던 때는 1995년입니다.
교구의 배려로 동창신부들과 이집트, 이스라엘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부끄럽지만 성지순례의 의미를 제대로 몰랐습니다.
마치 여행객처럼 순례를 하였습니다.
기도하고, 묵상하기보다는 신부님들과 친교를 나누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복음화 학교의 지도신부를 하면서 교우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갔습니다.
교우들은 미리 성서를 읽었고, 기도하였습니다.
성지순례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가려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길을 할 때입니다. 서로가 십자가를 지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넘어지심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배반했던 모습을 떠올리고 울었습니다.
5처와 6처를 묵상하면서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고자 다짐했습니다.
베로니카 성녀처럼 주님 얼굴에 흐르는 땀과 피를 닦아드리고자 다짐했습니다.
성지순례는 순례자로 갔다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 특히 성직자들이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의 말은 들으십시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본 받지 마십시오.
그들은 말은 하면서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색내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짐을 다른 이에게 맡기기 때문입니다.
사제복이 특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첫 번째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생각합니다.
감옥에서도 교우들을 생각하며 위로하였습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어머니를 생각하며 친구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편지를 읽으면서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꺼이 목숨을 바쳐 순교하였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참된 목자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여러분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라는 말을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세상의 나이로는 26살 밖에 되지 않았고, 사제생활은 1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한국의 ‘수선탁덕(首先鐸德)’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늘 부족한 제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비록 나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비록 나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걸어온 길을 돌아봅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 33)
한상우 바오로 신부
여기저기서
봄꽃소식이 전달된다.
자연의 실행은
대자연의 섭리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중한 것을
실행하는
삶의 기쁨이다.
서로의 아픔과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는
실천의 기쁨이다.
실행하지 않으면
기쁨도 없다.
실행이 은총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는
실행이시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고
십자가를 지신다.
가장
중요한 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실행의 탄생이다.
언제나 시작은
올바른 실행에서
첫걸음을 내딛는다.
우리 삶의 기본은
믿는 것을
아는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삶이다.
그래서 믿음은
하느님 말씀을
실행하는
말씀의 실천이다.
공동체를
살게 하는 것은
실행이다.
공동체와 실행(實行)은
몸과 피의 관계이다.
이 은총의 사순시기는
우리의 실천이
되살아나는
은총의 시기이다.
은총과 실천의
관계처럼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의 십자가로
더욱 절절해진다.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내맡기는
실행이 필요한 때이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마음을 드러내는
사랑의 실천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실천이
사랑의 복음이다.
실천으로 단련되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관계는
삶으로 전하는
실천이다.
대인관계, 무대 공포증을 없애는 방법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의 위선에 대해 예수님께서 질책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다고는 하지만 실상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나를 잘 보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하며 늘 두려워합니다.
어떤 스님의 즉문즉설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너무 어려워하고 많이 긴장하는 것이 고민입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기 바쁘고 늘 정신이 없고 잔뜩 긴장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너무 말이 없고 대하기 불편하고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이 너무 속상한데도 사람들 앞에서는 제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대 공포증’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인관계로 확대되면 대인관계 공포증이 됩니다.
이 마음의 근저에는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저도 이런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강의할 때 여전히 긴장될 때가 있고 권위 있는 사람을 만날 때도 여전히 긴장합니다.
하지만 이전보다는 매우 좋아졌습니다.
대인관계, 무대 공포증을 극복하려면 2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첫 단계는 ‘깨달음’입니다.
우선 우리 대부분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이 있을 것이란 착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삽니다.
심지어 부모까지도 자녀를 위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녀를 이용하며 삽니다.
“너 왜 이렇게 공부를 못하니?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어?”
자기 영광을 위해 자녀를 이용할 때 나오는 전형적인 말입니다.
부모도 자녀보다 자기 자신을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겠습니까? 나를 사랑하는 애인은 안 그럴까요?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 에릭은 7살 때부터 클라리넷을 시작해
캐나다 콩쿠르에서 3번이나 우승한 천재입니다.
대학에 가야 할 나이가 되자 에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들이 모이는
미국 콜번 스쿨에 대학 입학 원서를 냈습니다.
특별히 세계적 클라리넷 연주자 예후다 길라드 교수에게서 배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합격 통지서가 오지 않아
캐나다의 하버드라 불리는 맥길 대학교에 입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학교를 마치고 다시 콜번 대학에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길라디 교수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네는 2년 전에 합격하고도 나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또 입학하려는 것인가?”
이에 의문을 느낀 에릭은 이메일 복원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실제로 입학 허가 이메일이 와 있었습니다.
길라드 교수의 지도뿐 아니라,
수업료, 기숙사비, 생활비, 학비 전액 지원을 하겠다는 약속까지 들어있었습니다.
하지만 합격 메일은 삭제되어 있었고 입학 거절 메일까지 보내져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알고 보니 이 모든 일을 꾸몄던 범인은 당시 여자친구였던 제니퍼 리였던 것입니다.
에릭은 당시 여자친구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며
이메일 비밀번호 등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입학 통지 메일을 처음 본 것은 제니퍼였고
그 메일을 지우고 몰래 입학 거절 메일까지 보냈던 것입니다.
그녀는 애인이 자신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에릭은 교육 기회 상실, 그동안의 잠재적 수입 손실 등을 들어
제니퍼를 고소했고 법원은 한화 약 3억 원의 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랑이나 부부관계, 가족 관계, 친구 관계 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이기적이라는 사실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 준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완전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신앙인이라도 반은 하느님 사랑, 반은 이기적인 사랑이 섞입니다.
어떤 존경받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세상 영예는 아무 소용없음을 알려주기 위해 강론 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런 영광을 받는 것은 평생 노력해 온 결과입니다.
그런데 제가 단 세 마디로 평생 쌓아 올린 영광이
지푸라기보다 못하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신자들에게 욕을 한마디 했습니다.
신자들은 신부님을 좋아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뭐 저런 신부가 있나?’라고 하며 수군거렸습니다.
욕을 한 번 더 하자 자리를 뜨는 신자들이 생겼습니다.
세 번째 찰진 욕을 하자 신자들도 신부님에게 삿대질하였습니다. 신부님은 말했습니다.
“평생 쌓은 영광도 단 세 마디에 무너집니다. 이것을 위해 평생 긴장해야 하겠습니까?”
두 번째 단계는 단순합니다.
첫 번째가 세례와 같은 것이라면 두 번째는 견진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한 번에 변할 수 없으므로 자꾸 해 보는 것입니다.
제가 사제가 되어 강론을 처음 시작할 때, 역시 떨렸습니다.
그러나 강론 시작 전에 속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되뇌었을 때
마음이 편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너무도 강렬하여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래서 긴장할 때마다 이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하지만 다음번도 떨렸습니다.
하고 또 하다 보니 나중엔 강론하는 게 전혀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두렵다면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주 해 보십시오.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세 번째 단계는 성체와 같은 것인데,
첫 번째와 두 번째에 끊임없이 에너지를 주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입는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매일 기도하며 나를 봉헌하지 않으면 나는 점점 커집니다.
하지만 기도를 통해 나를 봉헌하면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이 세 단계는 매일 계속되어야 하고 그러면 점점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들을 좋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것 또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좋아한 것입니다.
남에게 영광을 주면서도 결국 그것이 자신을 들어 높이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예전에 모았던 우표나 나뭇잎은 지금 다 어디 있습니까?
당시엔 목숨보다 소중한 것일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자신을 위하는 마음 안에는 하느님을 위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부류의 사람을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마태 23,33)라고 부르십니다.
자녀의 본성은 부모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의 본성은 자기 영광을 위해 살게 만드는 것이고,
하느님 자녀의 본성은 아버지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둘은 양립될 수 없습니다. 어둠과 빛이 어떻게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예레미야에게 예언을 하라고 보내시며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예레 1,17)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