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여, 왜 세상에 저를 내시고, 또 제갈공명을 내셨습니까?"
삼국지연의에서 주유가 제갈량에게 농락당한 끝에 죽을 때 했다는 한탄.
죽을 때 저런 비슷한 한탄을 했을법한 인물을 우리 역사에서 찾아본다면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떡실신당한 백제 아신왕이 아닐까 싶다.
백제의 국운이 정점에 이르던 시기 왕실의 적장자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부왕이 죽는 바람에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이어지는 숙적 고구려의 파상공세
이 절대절명의 시기, 절치부심. 고구려에게 무기력하게 밀리는 숙부를 제거하고 왕위를 되찾은 후,
그야말로 와신상담하며 모든 것을 쏟아부어 고구려 광개토왕과 대결.
그가 대고구려전을 위해 강행한 전시체제의 가혹한 수탈로 인해 백제는 기근과 인민의 이탈이 발생하는 등 바닥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아신왕은 연전연패. '노객'의 치욕과 영토의 상실, 그 패배와 굴욕속에서 그 또한 젊은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서론이 너무 길었고...
어쨌든 그런, 고구려와의 대결에 모든 것을 올인했던 아신왕이 죽은 후
해씨세력에 의해 왜에서 귀국하여 즉위한 전지왕과 그 뒤의 구이신왕 - 비유왕에 이르기까지
서기연대로는 대략 5세기 전반기에 해당하는 근 50년의 기간동안
놀랍게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에는
고구려-백제간에 단 한건의 전쟁기사도 전하지 않는다.
한편 광개토왕릉비문에는 광개토왕의 치세를 평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17세손(世孫)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였다. (王의) 은택(恩澤)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威武)는 사해(四海)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말하자면, 광개토왕대에 이르러 고구려 사방의 적이 모두 평정되어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족한' 평화로운 태평성대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단지 왕을 기리는 공덕비의 미사여구에 불과할까?
하지만 실제로 삼국사기를 비롯한 다른 역사기록은 이러한 비문내용에 부합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의 치세 동안, 고구려는 거의 외침을 받지 않았다. 삼국사기에서 80년에 가까운 그의 긴 치세가 거의 '조공' 기사로만 채워진 것은 그것이 그만큼 평화로운 시기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광개토왕이 등장하기 이전에, 적의 침략에 도성이 함락되어 천도하기를 두 번이나 하였고, 또 왕이 적의 침략을 막다 전사하기도 했던 고구려의 역사였음을 생각하면, 이는 너무나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라가 그처럼 평화롭고 넉넉했음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광개토왕의 조부인, 고국원왕을 죽인 원수의 나라
비문에서 '백잔'이라는 멸칭으로 불렀고 비문의 전쟁기사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 '악의 축'인 백제와의 전쟁도 없었다는 것이다.
원수와, '악의 축'과 싸우지 않았다.
무엇을 의미할까?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건이 안 좋아서 싸울 수가 없거나,
아니면 싸울 필요가 없거나.
그런데 분명히 전자는 아닌 듯 하다.
그 시기 고구려는 어느 때보다 윤택했고 힘이 남아 돌았다.
그랬기에 당시의 최강대국 북위와의 갈등도 불사하면서 요서에서 일어난 북연멸망 사건에 개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비문에서 백제를 가리켜 '舊是屬民' 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터무니없는 관념이 아니라면, 실상 비문을 세운 당시의 관점을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악의 축 '백잔'이 위대하신 태왕의 감화를 받아 순순히 복종하는 '속민'이 되었다면,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이어지던 여-제간의 평화 시대가 끝난 것은
백제 개로왕의 즉위년부터이다.
재위 말기에 신라와의 동맹을 추진했던, 백제의 비유왕이 '흑룡'의 출현과 함께 죽고, 이어 개로왕이 즉위한 바로 그 해에, 고구려는 50년의 기나긴 평화를 깨고 백제를 침공한다.
그리고 곧이어 백제는 청목령 등지로 진출하며 북침을 개시하면서, 북위와 물길 등과 연결하여 고구려를 포위하는 외교전략을 구사한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여-제간 대결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결국 한성함락이라는 사실상 백제의 멸망이나 마찬가지인 사태로 결말지어졌다.
대려결전의 화신 아신왕의 죽음과
이어지는 50년의 평화
그리고 개로왕의 즉위를 기점한 전쟁의 재개
이것이 기록을 통해 재구성되는 5세기 전반의 흐름이다.
'평양천도와 고구려의 남진' 이라는 단순한 명제로 점철되어 있는 5세기 전반.
그 구체적인 역사상은, '고구려의 남진과 나제동맹의 대응'이라는 통설적인 관념과는 많이 달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첫댓글 그...그렇다면 당시 신라는...? 분명 고구려군 주둔 이후 서서히 드러난 불편한 갈등이 자라고 있을 타이밍이 이 당시였을텐데 말이죠... 그럼 제라동맹이라는 건 어떤 관점에서 봐야 할까요....
신라는 내물왕대 왜군에 의한 금성함락과 광개토왕의 남정 이후 고구려에 복속되었고, 실성왕 대에는 고구려가 왕위분쟁에까지 개입할 정도였지요. 그것에 약간의 변화가 시작되는게 눌지왕 대... '수탉을 죽여라' 사건이지요. '나제동맹'도 그때고. 그 시기가 백제로 보면 비유왕 말기입니다.^^
양국의 묘한 이해관계라 봐야 하나요... 두 나라 다 각자의 비슷하다면 비슷하고 다르다면 다른 의미로 고구려의 ' 정복 관념 ' 에 대한 불씨가 자라고 있었던 셈이 되는군요~ 이 시기의 백제 - 신라 역시 성왕 때 북진시의 연합의 그 성질과 뭔가 오버랩되됩니다... 사실 말씀하신 전의 내물이사금 때 금성을 함락한 왜군 역시 백제와 관련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시각으로 따져보면 뭔가 ㅎㄷㄷㄷ 한데 (저 역시 그렇게 보구요) 그런 불편한 관계를 넘어설 정도의 이해타산이 맞았을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되려나요; ㅋ 뭐 가정을 통한 추론이겠지만
아!!.업무중 잠시 짬을 내어 작성하다보니 본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다물정신님의 지적처럼 쌩뚱맞은 광개토태왕 이전의 시기를 설명하였는데 본문과 전혀 부합치 않아 자삭하였습니다..百濟 牟大王님의 '고구려의 남진과 나제동맹의 대응'이라는 통설적인 관념과는 많이 달랐던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의문은 어쩌면 보다 면밀한 연구검토가 필요한게 아닌가?하는 관점으로 매우 공감이 되는 내용입니다.
이 시기에 있어서 한국사는 고구려 중심의 연구가 대세입니다. 고구려의 남진에 대한 백제의 국가적인 대응차원에서의 연구가 있을뿐입니다. 아마도 대세적인 차원에서 고구려의 남진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금 더 미시적으로 이 시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로왕이 472년 북위에 보낸 국서에는풍씨가 망한뒤 고구려의 능멸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고 병화가 이어진지 30년 재물도 다하고 힘도 고갈되어 백제가 약해져 .... 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이것은 삼국사기 기록의 누락으로 보아야지 50 년간 전쟁없이 평화로운 소강상태가 이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보입니다
개로왕의 즉위기간이 대략 20여년입니다. 북위에 보낸 국서에 언급한 '병화의 30년'이란 개로왕의 재위기간을 가리킨다고 봐도 큰 무리는 없다고 봅니다. 그렇게 보는게 사료에 가장 잘 부합되고요.
모대왕님의 의견은 대세가 그렇다는 것으로 이해를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비유왕 중반이후에 다시 고구려와의 일전을 준비하는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하지만 전쟁이 있었다고는 누구도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시 백제로서는 고구려와의 전쟁이 생존과 관련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지왕 즉위년에서 개로왕 즉위년까지 전쟁기록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신왕 대 8차례정도의 전쟁에 비추어보았을 때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기존의 광개토왕~장수왕 시기로 점철된 남진이라는 대세적인 연구성과가 있지만 세부적인 이해를 달리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강상태는 태왕비문 영락17년 백제정벌 인 407년으로 부터 440년 까지 약 30년간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소강상태가 백제가 고구려의 속민이 되고 태왕의 노객이 되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427년 평양천도와 435 -438 년의 북연접수와 북연 유민 흡수등 고구려 국내 문제 때문에 보류되었다고 보는편이 타당할것같습니다 그리고 백제개로왕 21년기에는 비유왕의 능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가매장되었다고 한기록이 보이므로 이것은 비유왕 때부터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비유왕(427- 455)능조차 만들수 없었던 급박한 백제실정을 보여주는것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비문의 영락 17년조는 후연과의 전쟁으로 봄이 타당하며, 소강상태는 440년까지가 아니라 455년까지입니다. 고구려가 평양천도를 할 수 있었던 이유 자체가 이미 백제가 평정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편이 타당하지 아직도 긴장이 지속되는데 백제국경 코앞에다 수도를 옮겼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비유왕 말기에 고구려의 압력 내지 공격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비유왕의 반고구려성 정책과 흑룡출현) 역시 속단할 증거는 없으며, 비유왕이 가매장됐던건 백제 내부의 혼란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도림설화에 보이는 부왕의 능묘운운하는 기사는 475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규정하여 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개로왕 즉위이후 앞뒤에 있었던 일들을 도림설화에 축적하여 기록하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사의 경우 개로왕 즉위초의 상황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본문 뉘앙스로 보자면 흑룡이 아무래도 개로왕이 되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당시 주전파였던 개로왕의 측근 지지세력도 많았다는 걸 뜻하겠군요... 흠, 과연 그 내부엔 무엇이 작용했을지.... (6~7세기 백제의 실세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지방귀족들이 상당히 보수적이고 반전쪽으로 기울었다는 걸 보면; 역시 의자왕대와 많이 닮아있는 느낌입니다.)
흑룡을 학계 일반에서는 개로왕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는 개로왕보다는 당시 '왕비족'으로 표현될만큼 강성한 세력인 해씨세력의 정변으로 보는 것은 어떨까합니다. 오히려 개로왕은 비유왕의 적자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왕대 나제동맹으로 불리워지는 신라와의 교린기사와 더불어 말년에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염두해둔 행동을 보이는데요 450년에 송에 풍야부를 파견하여 '요노'를 수입하는데 요노는 분명 전쟁무기입니다.
또한 말년인 455년초에는 한산에 전렵을 하는데 전지왕 즉위이후 50년만의 전렵입니다. 특히 한산은 이전기사에 살펴보면 대고구려전의 전진기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비유왕 말년에 대외정책의 변화로 인한 내부세력간의 갈등을 염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로왕은 이러한 정변의 과정에서 정권을 장악한 세력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위 후 해씨가 보이지 않는 점, 대고구려 강경정권이라는 점, 선왕의 장사를 후하게 지낸점 등은 오히려 비유왕이 개로왕에 의해 희생되었다기 보다는 그 밖의 세력 또는 인물에 의해 사망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이지만 아마 침류왕-아신왕-전지왕-구이신왕계열로 이어지는 근초고왕계열의 부여씨가 비유왕이 즉위하면서 모조리 숙청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구이신왕은 도대체가 한 게 없는 왕입니다. 게다가 비유왕도 정상적으로 죽지 않은게 확실합니다. 어쩌면 흑룡의 존재가 근초고왕의 적손을 지지하던 세력일지도 모른다고 봅니다. 아니면 다물정신님의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여담입니다만 백제사에서 흑룡이 두번출현합니다.^^;; 비유왕 사망과 문주왕대 왕제 곤지가 사망할때입니다. 여기서 후자인 곤지는 당시 병관좌평이던 해구와의 대결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대세적인 의견입니다. 흑색은 변고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방위관념으로 북쪽에 해당합니다. 흑색이라는 것은 북부소속인 해씨세력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비유왕의 사망에도 해씨세력이 개입하였고 그것이 흑룡으로 표현되지 않았을까요?ㅎㅎ 여담이니 혹시 여러 선생님들 공부하시는데 인용하시지 마세요~
저도 한성함락을 고구려 천하관에서의 이탈에 대한 응징 성격을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절대로 백제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백제는 근초고왕 대와 같은 백제 중심의 세계로의 복귀를 원하였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