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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Christ, the Searcher of Men's Hearts
그리스도,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
By David Wilkerson
Christ loves his church. He gave his life for it, and said the gates of hell won’t prevail against it. Jesus himself is the foundation stone of this church. And Scripture tells us his glory and wisdom dwell in it. At Pentecost, he sent his Holy Spirit to establish the church. And he has gifted it with anointed servants — pastors, teachers, apostles, prophets and evangelists — for the purpose of building it up.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교회를 위해 그분의 생명을 주셨고, 지옥의 문이 교회를 대적하여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광과 지혜에 대해 말합니다. 오순절에, 그분께서는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그의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기름부음 받은 종들을- 목사, 교사,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 주셨습니다.
It’s clear the Lord desires to bless his church. So, why does Revelation 2 present such a fearsome picture of Christ, when he appears to his people? John writes that Jesus comes to the church with flaming eyes and a thundering voice:
주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축복하시기 원하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계시록2장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나타나실 때에는 왜 그렇게 두려운 모습으로 나타내는 것입니까? 요한은 예수님께서 불타는 눈과 천둥 같은 목소리로 교회에 오신다고 쓰고 있습니다.
“In the midst of the seven candlesticks one like unto the Son of man… His head and his hairs were white like wool, as white as snow: and his eyes were as a flame of fire; and his feet like unto fine brass, as if they burned in a furnace; and his voice as the sound of many waters. And he had in his right hand seven stars: and out of his mouth went a sharp two-edged sword” (Revelation
그 일곱 촛대 사이로 인자 같은 이가 있는데 … 그의 머리와 머리털은 눈처럼 희어서 양모처럼 하얗고, 그의 눈은 불꽃 같더라. 그의 발은 용광로에 달군 듯한 빛나는 놋 같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도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가졌고 또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가진 칼이 나오며, 용모는 해가 그 맹렬한 기세로 비치는 것 같더라. (요한계시록1:13~16)
Now, Revelation is the summation of God’s Word. It describes the end of all things. And here is the first image of Christ we see in this book. Why does Jesus appear so foreboding here? And why does he speak so piercingly to his church? John writes that Christ’s words are as sharp as swords, cutting down to the marrow. Remember, this was the apostle who leaned his head on Jesus’ bosom. But now he finds himself on his face: “When I saw him, I fell at his feet as dead” (
이제, 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의 집대성한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들의 종말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 책에서 우리가 보는 그리스도의 첫 번째 이미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왜 그리 두렵게 나타나시는 걸까요? 그리고 그분은 왜 교회를 향하여 날카롭게 말씀하시는 걸까요? 요한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칼과 같이 날카로워 골수를 쪼갠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사도는 예수님의 가슴에 그의 머리를 기대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엎드려져 있는 그 자신을 발견합니다. “내가 그를 보자 죽은 것처럼 그의 발 앞에 엎드려지니”(1:17)
The Lord himself explains his awesome appearance: “All the churches shall know that I am he which searcheth the reins and hearts: and I will give unto every one of you according to your works” (
예수님 자신께서 그분의 두려운 모습에 관해 설명하십니다. “모든 교회들은 내가 사람들의 속과 마음을 살피는 자임을 알게 되리라. 또 내가 너희의 행위에 따라 너희 각자에게 주겠노라.”(2:23) 사실 그리스도는 그분의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그분께서 교회를 살피러 오신 이유입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사랑으로 바로잡고 정결케 하기 위하여 오십니다.
First of all, Jesus tells John not to be afraid. “He laid his right hand upon me, saying unto me, Fear not; I am the first and the last” (1:17). Then Christ says, in essence, “I want everyone in my church to know I’ve come to search their inner man. And I do it with eyes of fire and a thunder that shakes the soul. I won’t mince words — what I have to say will both pierce and heal. But I won’t allow any child of mine to continue in apathy or blindness. My eyes and mouth will pierce through every facade.”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게 오른손을 얹고 나에게 말씀하시니라.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요”(1:17).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내 교회의 모두가 내가 그들의 속 사람을 살피기 위하여 왔다는 것을 알기 원한다. 그리고 나는 이를 불 같은 눈과 영혼을 흔드는 천둥으로 행한다. 나는 완곡하게 말하지 않겠다. 내가 말해야 하는 것은 꿰뚫기도 하면서 치유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자녀 중 누구라도 냉담과 무지 가운데 계속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나의 눈과 입이 모든 허울을 꿰뚫을 것이다.”
Christ saw something in his church. And he instructed John to write down his words and send them to the seven “angels” of the churches. This refers to his ministers, calling them the stars in his hands (see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교회에서 무엇인가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요한에게 그분의 말씀을 받아 적어 교회의 일곱 천사들에게 보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는 그분의 사역자를 의미하며 그들을 그분의 손에 있는 별들로 부르기도 합니다. (1:16을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 종들을 사랑한다. 내가 그들을 부르고 기름 부었다. 그리고 이제 너는 그들에게 나의 말을 전해야 한다.”
As a pastor myself, I have to wonder: what must it have been like to open such a letter from John? “Unto the pastor of the church in
목사인 나 자신으로써, 저는 궁금했습니다. 요한으로부터 그러한 편지를 받아 열게 되는 것은 과연 어땠을까? “뉴욕 교회의 목사에게: 주님께서 당신의 회중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일곱 사역자들이 느꼈을 것을 상상해 봅시다.
Take, for example, the pastor at
예를 들어, 에베소의 목사는 요한의 편지를 읽으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로 기뻐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에베소인들이 열심히 일한 것과 인내와 근신을 칭찬하십니다. 그들은 악을 미워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어섭니다. 또 그들은 내내 선한 행실을 멈춘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이 목사는 그가 읽는 것에 놀랍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와~ 주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구나, 이것은 칭찬의 편지로군.”
But as he reads on, he comes upon piercing words: “Nevertheless I have somewhat against thee, because thou hast left thy first love” (2:4). Jesus warns the pastor, “Remember therefore from whence thou art fallen, and repent, and do the first works; or else I will come unto thee quickly, and will remove thy candlestick” (2:5).
그러나 그는 계속 읽어가며, 꿰뚫는 말씀에 다가갑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다소 있나니 이는 네가 너의 첫 사랑을 저버린 것 때문이라”(2:4). 예수님께서는 그 목사에게 경고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회개하며, 너는 처음 일들을 행하라. 만일 그렇지 않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너에게 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2:5)
The Ephesian pastor must have been aghast at this. He thinks, “Repent? Or he’ll remove our witness? What shocking words. How could this be? We’re covenant believers. We’re justified by faith. We’ve been charitable, loving, caring. Now we’re supposed to go back and be as we were at the beginning? What does that mean? How can this be Jesus speaking? How could I ever read this letter to my congregation?”
그 예베소의 목사는 여기서 깜짝 놀랐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회개? 아니면 우리의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충격적인 말씀이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우리는 언약의 신자들인데, 우리는 믿음으로 의로워 졌는데. 우리는 관대하고, 사랑하며, 돌보았는데. 이제 우리는 돌아가서 처음처럼 되어야 한다고? 이게 무슨 뜻일까? 어떻게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일 수 있을까? 내가 이 편지를 어떻게 우리 회중들에게 이 편지를 읽을 수 있을까?”
Keep in mind, these words are directed to a godly congregation. So, this had to be a deeply serious matter in the Lord’s eyes. Why else would he speak so searchingly to such a shining example of a church? He’s telling the pastor, “Your first love for me isn’t what it once was. You’ve neglected communion with me. Now, repent.” Jesus makes it clear: it all has to do with his presence. Yes, the Ephesians had labored diligently in doing good works. But they were no longer intimate with the Lord.
기억하십시오. 이 말씀들은 거룩한 회중들에게 지시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주님의 눈에 깊이 심각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째서 그분께서는 그토록 훌륭한 교회의 본보기에 그렇게도 엄중하게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분께서는 그 목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나를 향한 첫 사랑은 예전과 같지 않다. 너희는 나와의 교제를 소홀히 하였다. 이제 회개하라.”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하십니다. 그 모든 것은 그분의 임재와 관련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베소인들은 선한 일에 성실히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주님과 친밀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In the next chapter, Christ sums up his message to all seven pastors and their congregations. And his words are telling: “Behold, I stand at the door and knock: if any man hear my voice, and open the door, I will come in to him, and will sup with him, and he with me” (3:20). Too often, Christians don’t open up the doors of their hearts to Jesus. When he knocks, they’re not even home. Instead, there’s a sign on the door, saying, “Dear Lord, I’m off to minister at the hospital, then later at the jail. See you in church.”
다음 절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곱 교회의 목사들과 회중들을 향한 메시지를 요약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며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3:20) 너무나도 자주,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마음의 문을 예수님께 열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두드리실 때, 심지어 그들은 집에 없기까지 합니다. 대신 그 문 위에 이런 표시가 있습니다. “주님, 저는 병원의 사역으로 부재중이오며 다음은 감옥사역입니다. 교회에서 뵈어요.”
So many churches today are doing so many good, charitable things in Christ’s name. They have programs for almost every human need. And the congregation lives clean, upright lives, careful to avoid sin. But something has changed about them. At one time, these believers were devoted to their communion with Jesus. They wouldn’t go a single day without spending time alone with him. But now things are different. All they give him is a quick greeting on their way to some work. How serious is this to Jesus?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많은 자선적인 착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필요를 위한 대부분의 모든 프로그램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중은 깨끗하고 바른 삶을 살며 죄를 피하기 위해 조심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무엇인가 바뀌었습니다. 한때, 이 신자들은 예수님과의 교제에 헌신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분과 단 둘만의 시간을 보내지 않고는 단 하루도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이 그분께 드리는 것은 그들이 어떤 일을 하러 갈 때 짧게 드리는 인사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얼마나 심각하겠습니까?
Christ takes our communion
so seriously, he’ll remove the one
element that reaches lost
souls: his presence.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의 교제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영혼을 잃는 데 이르게 되는 한 가지 요소를 제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분의 임재 말입니다.
Jesus is warning us, “Something has been lost in my church. It’s my awesome presence. You have to get back to the secret closet, back to supping with me. Otherwise, I’ll remove my presence from you. All your good works — your preaching, evangelism and giving — must flow out of our time together. It has to come from my table.”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나의 교회는 무엇인가 잃어버렸다. 바로 나의 놀라운 임재 말이다. 너희는 다시 비밀한 골방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와 다시 식탁을 나누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서 나의 임재를 거두어 가겠다. 너의 모든 선행은- 너의 설교, 전도, 구제- 우리의 시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나의 테이블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다.”
The church at
에베소교회는 한때 소유했던 그 무언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은 그들 한 가운데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임재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임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그들의 사역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때, 그들은 서로서로 사랑하고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서로서로를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선행을 하기 위한 수고에도 비참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섬기는 데에 너무나도 바쁜 나머지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닌 그들의 행위가 초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분의 강력한 임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Now Jesus warned them: “If you don’t make changes — if you don’t return to your hunger for me — I’m going to take away your testimony. You’ll no longer have any authority when you do your good works. They’ll all be for naught.”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변화하지 않으면- 너희가 나를 향한 갈급함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너희의 증거를 없애겠다. 너희가 선행을 할 때에 더 이상의 어떠한 권위도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헛된 것이 될 것이다.”
I see a parallel in the world today. Some of the hardest people I’ve known are those who’ve worked for welfare departments and social agencies. This is especially true of those who worked in mental wards or with abused children. These people were sincere, dedicated workers. But it was just too painful for them to face the suffering they witnessed daily. Over time, some have hardened themselves.
저는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봅니다. 내가 알았던 어떤 열심의 사람들은 복지부나 사회단체에서 일하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정신병동이나 학대어린이에 관하여 일하는 사람들도 그러합니다. 이 사람들은 성실하고 헌신된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매일 목격하는 것을 직면하는 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이들은 스스로 마음을 무감각하게 해버렸습니다.
The same thing can happen to Christians. Ministers and lay servants alike see so much pain and sin in the people they minister to, they can grow hard. That’s just what Jesus was saying to this pastor at
동일한 일이 그리스도인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목사나 전임 사역자들도 그들이 사역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고통과 죄를 보면서 무감각해 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에베소의 목사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한때 서로서로에게 너무나도 친절했다. 너희는 사람들을 향한 그러한 사랑이 있었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러나 지금 너희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너희는 그들과 함께 앉아있으면서도 그들의 울부짖음에 대해 너희 자신을 무감각하게 하였다. 너희는 생명 없이 습관적으로 사역하고 있다. 나는 너희로부터 나의 임재를 제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I’ve been in churches where the Lord has removed his presence for a season. There’s a deadness and dryness that’s almost tangible. Everyone can sense it. God is speaking to that church, saying, “I’ll let things go cold for a while. I want to bring you out of your lethargy. I want you to know what it’s like without my presence.” It’s absolutely horrible when a church reaches this point. There’s no conviction of the Holy Ghost, nothing to move the congregation, nothing to touch the young people.
저는 잠시 동안 주님께서 그분의 임재를 거두어 가신 교회에 있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두움과 메마름이 거의 만져질 정도였습니다. 모두 그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 하고 계십니다. “나는 잠시 모든 것이 냉담해지게 하 것이다. 나는 너희를 권태에서 건져내기 원한다. 나는 너희가 나의 임재가 없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기 원한다.” 교회가 이러한 지점에 도달하는 것은 전적으로 참담한 일입니다. 성령님의 죄를 깨닫게 하심도 없고, 회중을 감동시키는 것도 없고, 젊은이들을 감동시키는 것도 없습니다.
Another serious side effect takes place. That is, spiritually hungry people won’t stay where Jesus’ presence isn’t evident. They’re desperate to know his nearness. And when they don’t experience it, they go somewhere else to find it. I receive many letters with the same complaint: “I can’t find a church that’s alive with the Lord’s presence.”
또 다른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이 예수님의 임재가 뚜렷하지 않은 곳에서는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몹시도 그분의 친밀함을 알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경험하지 못할 때, 다른 곳으로 그것을 찾으러 갑니다. 저는 그런 불평이 담긴 많은 편지들을 받습니다. “저는 주님의 임재가 살아계신 교회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I’ve witnessed the tragic backsliding of many Christians who’ve felt this way. They never do find a church. So they end up sitting at home and watching preachers on TV. They never get any meat in their spiritual diet. Everything they dine on is lightness. Over time, a coldness sets in. Soon they’ve abandoned church altogether. They neglect the assembly of the brethren, which Hebrews warns against (see Hebrews
저는 이렇게 느꼈던 많은 그리스도인의 비극적인 퇴보를 목격해 왔습니다. 그들은 절대 교회를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집에 앉아 TV로 설교를 보는 것으로 끝냅니다. 그들은 영적 식사로 어떠한 고기도 얻지 못합니다. 그들이 먹는 것들은 가벼운 것들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 냉담함이 들어섭니다. 곧 그들은 교회를 완전히 포기합니다. 그들은 지체들의 모임을 무시하는데,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경고합니다(히브리서10:25를 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임재에 완전히 무관심하게 됩니다.
I tell you, God won’t hear any excuses from such people. Jesus can be anyone’s all in all, if you continue your personal communion with him. It doesn’t matter what the condition of your church is; you’re to be diligent in giving him precious time. You need to drink deeply of his presence if you want his Word to come alive to you.
여러분께 말씀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변명도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분과 개인적 교제를 계속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라도 모든 것이 되어주십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어떠한 상태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분께 귀중한 시간을 성실히 드려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사시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그분의 임재로부터 깊이 마셔야 합니다.
In light of Revelation 1-3, every believer must ask himself: “Have my good works — my Bible studies and my service — robbed me of time with Jesus? Do I still hunger for him as I once did? Or have I lost something?”
계시록1-3장을 비추어볼 때, 모든 신자는 스스로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나의 선행- 나의 성경공부와 내 섬김-이 예수님과의 시간을 빼앗았는가? 나는 여전히 한 때 그랬던 것처럼 그분을 갈망하고 있는가? 아니면 뭔가 잃어버렸나?”
Christ searches his people’s hearts
in every age, with a concern for
spiritual blindness.
그리스도께서는 영적 어두움을 염려하시며
모든 시대의 그의 백성들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The churches Jesus addresses in Revelation 2-3 were seven literal congregations in
계시록2-3장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교회들은 글자 그대로 아시아의 일곱 회중이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 교회가 교회역사의 7지역을 대표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단순히 여기 이 메시지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님께서는 모든 시대의 그분의 백성들의 마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그의 교회에 퍼지는 어떠한 영적 어두움에 관해서도 우려하시는 것입니다.
The Lord had a controversy with five of the seven churches in this passage. I want to focus on just three:
주님께는 이 절의 일곱 교회 중 다섯 교회에 거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세 개의 교회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에베소, 두아디라, 그리고 라오디게아.
We’ve already seen that the problem at
우리는 이미 에베소의 문제가 그리스도와의 친밀감 부족이었음을 봤습니다. 두아디라의 문제는 달랐습니다. 그것은 꿰임의 악마적인 사역자들과의 관련이었습니다. 그 목사가 이 말씀을 읽었을 때의 반응을 생각해 보십시오. “두아티라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빛나는 놋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일들을 말씀하시느니라. ”(계시록2:18) 예수님께서는 이 교회를 거룩한 분노의 타오르는 눈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Yet the letter continues with a commendation: “I know thy works, and charity, and service, and faith, and thy patience, and thy works; and the last to be more than the first” (
그러나 이 편지는 칭찬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네 행위와 사랑과 봉사와 믿음과 네 인내와 네 행위를 아노니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2:19) 다시 한번,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의 행위를 안다. 너의 사랑, 믿음, 섬김, 인내, 이들은 너희가 시작했을 때보다 더 훌륭하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안다.” 그분께서는 그분과의 친밀함을 잃었다고 그들을 꾸짖지는 않으십니다.
But then we read these piercing words: “Notwithstanding I have a few things against thee, because thou sufferest that woman Jezebel, which calleth herself a prophetess, to teach and to seduce my servants to commit fornication, and to eat things sacrificed unto idols” (2:20).
그러나 그 다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꿰뚫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이는 네가 자칭 여선지자 이사벨이란 여자를 용납함으로 그녀가 내 종들을 가르치고 유혹하여 행음하게 하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하기 때문이라.”(
Who, exactly, is the Jezebel mentioned here? Jesus is speaking of false shepherds. He’s reproving the pastor in Thyatira for tolerating covetous ministers who seduce his people: “You allow lust-filled ministers to speak freely from your pulpit. They come in as angels of light, and they use wicked deceptions to seduce my people.”
여기서 언급된 이세벨은 정확히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거짓 목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두아디라의 목사에게 그분의 백성을 꿰는 탐욕스러운 사역자들을 허용한 것에 대해 책망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육욕으로 가득 찬 사역자들이 너희 강단에서 마음껏 이야기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들은 빛의 천사와 같이 와서는 내 백성을 꿰기 위하여 사악한 속임수들을 쓴다.”
The Jezebel reference here indicates more than just ministers who are covetous. These false shepherds actually invent schemes to carry out and fulfill their lusts. Simply put, the name Jezebel is a byword for all that’s evil and detestable in the eyes of the Lord.
여기의 이세벨의 언급은 단지 탐욕스러운 사역자 그 이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거짓목자들은 실제로 그들의 육욕을 실행하고 이루기 위한 음모를 짜냅니다. 단순히 말해, 이세벨이라는 이름은 주님의 눈에 악하고 가증한 모든 자들의 전형인 것입니다.
What a perplexing picture we’re given. Here are a people who love the Lord, devoted men and women of God. They’ve persevered, they’ve given faithfully, and they love Jesus. How could these believers be attracted to false prophets? How could they ever be seduced by wicked ministers whom God despises?
이 얼마나 우리에게 주어진 혼란스러운 상황입니까? 여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헌신된 하나님의 남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내하고, 신실하며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어떻게 이러한 신자들이 거짓선지자들에게 현혹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께서 멸시하는 사악한 사역자들에게 꿰임 당할 수 있었을까요?
This may shock you, but I see this very thing happening all across this land. Wolves who are out to fleece the flock now speak in churches once known for their holiness message. When the pastor is asked why he permits this, he admits, “These preachers draw a crowd. People are coming to church.” Yet he’s allowing false prophets to serve the food of Satan himself: a self-centered gospel of covetousness.
여러분은 충격 받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이 나라의 방방곳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무리를 속여 강탈하려는 여우들이 한때 거룩한 메시지로 알려졌던 교회들 안에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 목사에게 왜 이를 허용했는지를 물어보면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설교자들은 회중을 끌어요. 사람들이 교회로 오지요.” 그러나 그는 사탄 그 자신의 먹이를 대접하기 위하여 거짓선지자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탐욕의 복음 말입니다.
Do you note an inconsistency here? Jesus calls the pastor at Thyatira a man of love and goodness. Yet this same man tolerates ministers of abominable sin, shepherds who excite people’s flesh and cater to their lusts. They bring in wicked concepts that cause a false sense of revival. And they lead the people into demonic seductions.
여기의 모순을 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두라디아의 목사를 사랑과 경건함의 사람이라 칭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사람이 언어도단의 죄, 곧 사람들의 육신을 선동하고 그들의 육욕거리를 제공하는 목자들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흥에 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이 사악한 발상을 들여왔고 사람들을 악마적 유혹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Deep in this pastor’s heart, he knows their gospel isn’t pure. But he doesn’t want to stop the crowds from coming. And now Christ is telling him, “You tolerate these wolves’ seductions. And you’re blind to what it’s doing to your people. They’re slipping away to these preachers’ meetings. And they’re being led down to destruction. They’ve begun fornicating and eating food sacrified to idols. But you refuse to warn them. I’ve called you to be a shepherd over my sheep, but you’re not protecting them. Why do you tolerate this evil? Why won’t you raise your voice?”
목사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는 그들의 복음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무리들이 몰려오는 것이 멈추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여우들의 유혹을 관용한다. 그리고 너는 그것이 너희 백성들에게 하는 짓에 대해 무지하다. 그들은 이 설교자들의 집회에 빠져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파탄으로 이끌리고 있다. 그들은 간음하며 우상의 제물들을 먹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너는 그들에게 경고하기를 거절하였다. 나는 내 양들에 대해 목자로 너를 불렀다. 그러나 너는 그들을 보호하고 있지 않다. 왜 너는 이와 같은 악을 관용하는 것이냐? 왜 너는 네 목소리를 높이지 않느냐?”
One of the first obligations any pastor has is to keep the pulpit pure. He can’t allow someone to stand in it and deliver a false word. That may sound like a control issue to you, but it’s what God demands. You see, Christ isn’t talking about sexual fornication here. He’s speaking of an evil yoke, a sensual fellowship, a giving of oneself to the power of a false ministry. And Jesus’ warning is clear: “You’re dining on an excitement that’s of flesh. It’s a lust-pleasing gospel. And your spiritual life is at stake.”
목사들의 첫째 의무 중 하나는 강단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자가 거기 서서 거짓된 말을 전하도록 허락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억제적인 문제처럼 들릴지도 모르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아시겠지만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성적인 간음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악한 속박, 육욕적인 교제, 즉 거짓 사역자의 힘에 자신을 맡기는 것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경고는 확실합니다. “너희는 육신을 자극하는 것을 먹고 있다. 그것은 육욕을 만족시키는 복음이다. 그리고 너희의 영적 생명은 위기에 처해있다.”
Remember, these aren’t backslidden believers Jesus is addressing. He’s talking to loving Christians who’d give you anything they have. But they’re attracted to a gospel of flesh. They pay heed to a subtle voice that whispers, “You have to hear this man speak.”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자들은 배교하는 신자들이 아닙니다. 그는 그들이 가진 무엇이라도 여러분에게 내줄법한 사랑스러운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육의 복음에 유혹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속삭이는 교활한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너는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해”
All through the gospels, Jesus warns of false shepherds who come seeking to devour and deceiving many. Yet I’m shocked by the lack of discernment in multitudes who abide their false gospels. Has this happened to you? Does your soul feed on some TV gospel that’s actually demonic? Do you drink in a message from prosperity preachers who appeal to your lusts and take the last dimes of the elderly?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들을 멸망시키고 속이러 오는 거짓목자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그 거짓 복음을 받는 다수의 분별력 없음에 충격을 받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여러분에게도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의 영이 사실은 악마적인 어떤 TV복음을 먹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육욕에 호소하며 노인의 마지막 동전마저 취하는 그런 부유한 설교자들로부터의 메시지를 들이키고 있습니까?
You may think, “What harm is there in watching them? It can’t hurt me to hear what they say. Besides, it all feels like it’s from the Lord.” No! If you abide wicked shepherds, then you’re in bed with demons. You’re committing fornication with evil.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들을 보는 게 무슨 해악이람? 그들이 말하는 걸 듣는 게 나를 해할 리가 없어. 게다가, 그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 것 같은걸?” 아니오! 만일 여러분이 사악한 목자와 함께 한다면 여러분은 악마와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악과 함께 음행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Don’t misunderstand: I’m not talking about every TV evangelist. But discerning Christians know the difference. Jesus speaks of such well-grounded saints, who see through the motives of flesh-driven preachers: “(They) have not known the depths of Satan” (Revelation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모든 TV복음 설교자들에 관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별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차이를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육에 이끌리는 설교자들의 동기를 간파하는 잘 다져진 성도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탄의 깊은 것들을 알지 못하는 많은 자”(계시록2:24) 그리스도께서는 이 돈을 붙잡는 사역자들에 관해 둘러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지옥의 바로 깊은 곳까지 영혼을 끌어 내린다.” 그렇습니다. 이 사역자들은 그리스도를 설교하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설교하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설교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악마의 교리로 얼룩진 복음인 것입니다.
The Lord says of such evil shepherds, “I gave (Jezebel) space to repent of her fornication; and she repented not” (
주님께서는 그러한 악한 목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녀에게 자기의 음행을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그녀가 회개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분은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이 거짓 선지자와 복음전도자들을 인내해 왔다. 나는 그들에게 거듭 경고를 주었다. 그들은 그들의 사악함에서 돌아설 충분한 시간을 받아 왔지만 그들은 거절하였다.”
Then the Lord issues this warning to every righteous minister of his Word: “Behold, I will cast her into a bed, and them that commit adultery with her into great tribulation, except they repent of their deeds. And I will kill her children with death” (
그리고 주님은 그분의 말씀에 모든 바른 사역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보라, 내가 그녀를 침상에 던질 것이며, 그녀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자기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대환란에 던지리라. 또 내가 그녀의 자녀들을 사망으로 죽이리라. 그러면 모든 교회들은 내가 사람들의 속과 마음을 살피는 자임을 알게 되리라. 또 내가 너희의 행위에 따라 너희 각자에게 주겠노라. ”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단지 거짓 선지자들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듣고 지지하는 모든 자들을 포함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고약한 병든 상태와 영적 죽음으로 끝날 것입니다.
Ezekiel says such believers commit “fornications on every one that passed by” (Ezekiel
에스겔은 그러한 신자들이 저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지나가는 모든 자들에게 네 음행을 쏟았으니”. 다른 말로 “너희는 온갖 이런 거짓 사역자들을 쫓아 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너희를 이용하였다. 그들은 너희를 팔아먹으며 너희에게 상처와 영적 죽음을 남겼다.”
Finally, Jesus admonishes those who’ve faithfully stood against Jezebel ministers: “That which ye have already hold fast till I come” (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이세벨의 사역자들에게 대항하여 신실하게 섰던 자들을 칭찬하십니다. “”(2:25)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진리의 분별을 배웠구나, 너희는 온갖 교리의 바람과 물결에 의해 왜곡되지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붙들 고 있는 것을 지키라. 속지 않게 하여라. 그것이 내가 부탁하는 전부이다. 나는 내가 돌아 올 때까지 너희에게 아무런 짐도 지우지 않겠다” (2:24를 보십시오)
I wouldn’t want to be the
Laodicean pastor who opens
his letter from Jesus.
저는 예수님으로부터의 편지를 여는
라오게디아의 목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Jesus doesn’t give a single commendation to the church at
예수님께서는 라오게디아의 교회에 한마디의 칭찬도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에 이 목사는 다음을 읽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그처럼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내 입에서 토해 내겠노라.” 이 얼마나 주님의 무서운 말씀입니까?
My question is, how can an entire church fall into the same dangerous condition? How can everyone be so spiritually blinded that all of them become lukewarm? There’s no mention of a holy remnant in this body. Christ describes them all as “wretched, and miserable, and poor, and blind, and naked” (
저의 의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전 교회가 똑같이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을까? 어떻게 모두가 영적으로 눈멀어서 그들 모두가 미지근하게 되었을까? 이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서 거룩한 남은 자에 관한 언급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모두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3:17) 것으로 묘사하십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비참하고 가련하며 헐벗었으면서도 그걸 모를 수 있단 말입니까?
It happened because these people were blinded by a horrible lie. The Laodiceans were very materialistic, wealthy and prospering. (This could mean increasing in numbers and influence, as well as in money.) And they were totally satisfied with themselves.
그것은 이 사람들이 지독한 거짓에 의해 눈멀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라오게디아 사람들은 매우 물질적이었고 부유하며 번영하였습니다. (이는 금전적으로 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나 영향력적으로 증대하였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자신만으로도 전적으로 만족하였습니다.
To non-discerning Christians, this church was thriving. People loved it and were attracted to it. But when Christ searched it out, he was appalled by what he saw. These Laodiceans were blinded by a lie. And that lie was, “I’m okay. I’m where I ought to be spiritually. I haven’t changed. I’m still the same, dedicated Christian. I’m a righteous, on-fire believer.” Jesus says they declared of themselves, “I am rich, and increased with goods, and have need of nothing” (
분별력 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교회는 번창한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교회를 좋아하고 거기에 끌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를 살피셨을 때, 그분께서는 그 보신 것으로 인해 질겁하셨습니다. 이 라오게디아 사람들은 거짓에 의해 속았습니다. 그 거짓은 “나는 괜찮아, 나는 내가 영적으로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거야, 나는 변하지 않았어, 나는 여전히 동일하게 헌신된 그리스도인이야. 나는 의롭고, 뜨거운 신자야.” 예수님께서는 그들 스스로 이렇게 단언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자이며, 부요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To me, this congregation represents the capitalistic frenzy of the modern American church. Our nation is a capitalistic society, meaning simply, “ever-increasing growth.” And the business world has a motto: “Grow or die.” Everything always has to be bigger. So you have to possess the drive to make things the biggest and the best.
저에게 이 회중은 현대 미국교회의 자본주의적 열광을 상징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단지 계속 증가하는 성장을 뜻하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그리고 비즈니스 세계에는 이런 모토가 있습니다. “성장 아니면 죽음” 항상 모든 것은 커져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모든 것이 가장 커지고 최고가 되도록 하기 위한 동인을 가져야 합니다.
That’s fine for businesses. But this mentality has infiltrated the church.
그거야 비즈니스를 위해서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이 교회에도 침투되었습니다. 미국은 자본주의적 기독교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목표는 영적 성장이 아니라 재정과 자산 그리고 수적인 확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역자들은 이러한 열광에 사로잡혔습니다.
Jesus’ judgment of the Laodiceans applies to many churches today: “You don’t realize what has happened to you. Your blindness has caused you to grow lukewarm. And you don’t even see it. You still think you’re hot for me.”
예수님의 라오게디아인들에 대한 심판은 오늘날의 많은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너는 네게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지. 너희의 눈먼 것이 너희를 미지근해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도 못하지. 너희는 여전히 너희가 나에게 뜨겁다고 생각한다”
In
에베소에서 교회의 죄는 예수님과의 친밀감을 상실한 것이었습니다. 두아디라에서는 분별의 상실이었고, 영적인 간음이었습니다. 이제 라오게디아에서 우리는 그 모든 죄보다 심각한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의 상실입니다.
It all ends up in nakedness. Jesus charged the Laodiceans with their naked condition: “The shame of thy nakedness (does) not appear” (
그것은 모두 벌거벗음으로 귀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벌거벗은 상태에 관해 라오게디아인들을 책망하십니다. “너의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않게 하며”(3:18) 여기서 벌거벗은이라는 말의 희랍어는 ‘자원이 고갈된’ 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 곧 그들의 필요에 그분을 의지하는 자들을 위해 그의 자원을 준비해두십니다. 그분의 자원이란 무엇입니까? 그것들은 진정한 영적 부요 입니다. 그분의 힘, 그분의 기적적인 사역의 권능, 그분의 초월적 인도하심, 그분의 명백한 임재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스스로를 의지하는 교회에 이렇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에게서 나의 모든 자원을 치웠다. 그러나 너희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구나. 너희는 완전히 피폐해졌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상태를 깨닫지 못한다.”
Picture a congregation that sits comfortably through a one-hour worship service. These Christians hear a short sermon on how to cope with life’s stresses. Then they’re quickly out the door. They don’t sense any need to be broken or contrite before Jesus. They don’t feel the need to be stirred or convicted by a piercing message. There’s no cry of, “Lord, melt me, break me. You alone can fulfill my hunger.”
한 시간짜리 찬양예배 내내 편안하게 앉아있는 회중을 그려보십시오. 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인생의 스트레스를 다루는지에 관한 짧은 설교를 듣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재빨리 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깨어지거나 뉘우쳐야 할 어떠한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꿰뚫는 말씀으로 죄를 깨닫거나 괴로워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주님, 나를 녹여주소서, 나를 깨뜨려 주소서, 오직 당신만이 나의 갈급함을 채우실 수 있습니다.” 이런 울부짖음이 없는 것입니다.
Where is the zeal they had before? These believers were once eager to get to church, to pore over God’s Word, to lay their hearts bare before the Spirit’s searchlight. But now they think they’ve outgrown all that. So they’ve restricted their Christianity to Sunday mornings. Yet it’s a religion of lukewarmness.
그들이 전에 가졌던 열정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이 신자들은 한때 하나님의 말씀에 열중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영적인 탐조등 아래 내려놓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교회에 가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그 모든 것에서 자라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일요일 아침으로 제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미지근한 종교인 것입니다.
Jesus so loved this Laodicean pastor and his congregation, he let them know he was bringing drastic measures. He told them he would create a need in them for his resources: “As many as I love, I rebuke and chasten: be zealous therefore, and repent” (
예수님께서는 이 라오게디아의 목사와 그의 회중을 너무 사랑하셔서 그분이 과감한 조치를 취하시겠다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그분의 자원을 필요로 하도록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마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 그분의 사랑의 손이 그들을 단련시키기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들 안에 그분의 권능과 도움을 구해야 할 필요를 만들어내심으로써 그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Beloved, Christ is speaking to us with the same words today. He’s telling us, just as he told the Laodiceans: “This is all about supping with me. It’s about answering the door when I knock. And I’m calling out to you now, to come and commune. I have everything you need. And whatever quality time you spend with me gives you purchasing power. That’s how you obtain my resources. Your fellowship with me gives you what you need to continue in ministry. It all has to come from our time together.”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도 동일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라오게디아 교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와 함께 식사를 드는 것에 관한 모든 것이다. 그것은 내가 문을 두드릴 때 응답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와서 교제하자고 너희를 불러내고 있다. 나는 너희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너희가 나와 함께 보내는 그 어떠한 시간이라도 너희에게 그 자원들을 살수 있는 능력을 준다. 바로 그것이 너희가 나의 자원을 얻는 방법이다. 나와 함께하는 너희의 교제는 너희가 사역을 계속 하는데 필요한 것을 준다. 그 모든 것은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에서 나와야만 하는 것이다.
This is how Christ’s church will maintain its testimony in these last days. Amen!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마지막 날에 교회의 간증을 내세울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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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주님의 몸된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있는데 곧 주님의 임재하심이라고 하시는군요.정말 그 말씀에 아멘 입니다.귀한 메시지 감사드리며...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