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13,13-25
13 바오로 일행은 파포스에서 배를 타고 팜필리아의 페르게로 가고,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14 그들은 페르게에서 더 나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
15 율법과 예언서 봉독이 끝나자 회당장들이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형제들이여, 백성을 격려할 말씀이 있으면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자 바오로가 일어나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선택하시고,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살이할 때에 그들을 큰 백성으로 키워 주셨으며, 권능의 팔로 그들을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18 그리고 약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의 소행을 참아 주시고,
19 가나안 땅에서 일곱 민족을 멸하시어 그 땅을 그들의 상속 재산으로 주셨는데,
20 그때까지 약 사백오십 년이 걸렸습니다.
그 뒤에 사무엘 예언자 때까지 판관들을 세워 주시고,
21 그다음에 그들이 임금을 요구하자, 하느님께서는 벤야민 지파 사람으로서 키스의 아들인 사울을 그들에게 사십 년 동안 임금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22 그러고 나서 그를 물리치시고 그들에게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3,16-20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17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8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19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예수님께서는 최후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다음, 말씀하셨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6-17)
분명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체가 높은 주인이 지체가 낮은 종을 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는 이가 복된 것이 아니라, ‘이것을 알고 실천하는 이’가 복되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섬김의 도’는 ‘실행하는 이’만이 배울 수 있는 ‘도’(깨달음의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가르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배우는 방법도 가르쳐주셨고, ‘사랑하라’고 ‘용서하라’고 가르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방법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방법은 유일한 단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것은 섬기면서 섬김을 배우고, 사랑하면서 사랑을 배우고, 용서하면서 용서를 배우는, 곧 ‘실천을 통해’ 배우는 방법입니다.
마치 수영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수영을 배울 수 없고, 자전거를 타지 않고서는 결코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실천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원천은 무엇인가?
아니 어디로부터 나오는 힘이어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그것은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달아 알고 그것에 전적으로 승복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종’이라는 사실, 다름 아닌 주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 알고, 그것에 대한 전폭적인 승복에 달려 있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파견받은 자’로서의 사명 실천에 달려있는 일입니다.
곧 ‘주인의 뜻’을 깊이 깨달아 알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행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고 하십니다.
선을 알되 행하지 않으면 선이 실현되지 않듯, 실행되지 않은 섬김은 섬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관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마태 20,28; 마르 10,45)
이토록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실행하라’고 하십니다.
서로에게 “종이 되어라” 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을 “종들의 종”이라고 칭하신 그레고리오 교종은 참으로 본연의 자리를 갈파하신 분이십니다.
이 말은 ‘종들 중의 으뜸’, ‘종들의 대빵’이라는 말이 아니라, ‘종들을 섬기는 종의 종’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주님의 섬김을 받은 이들이요, 이미 섬김의 “몫”을 받은 이들입니다.
결국 진정 섬김을 받은 자만이 진정 섬기게 됩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먼저 섬기는 이가 섬김을 받고, 먼저 존경하는 이가 존경을 받게 됩니다.
분명 그럴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20)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7)
<오늘의 말·샘 기도>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7)
주님!
저희가 서로 발을 씻어주게 하소서.
서로에게 종이 되게 하소서.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게 하소서.
선을 알되 행하지 않으면 선이 아니 듯, 아는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실천하여 진정 알게 됨이 저의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구원과 은총을 보는 눈>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그저 같이 사는 한 인간으로만 받아들입니까?
어떻게 인연이 되어 동반자가 된 사람으로 받아들입니까?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신 더 특별한 사람 곧 예언자로 받아들입니까?
그저 같이 사는 한 인간 정도라면 어쩌면 소와 닭처럼 무심할 것이고, 동반자라면 이 세상 사는 동안 서로의 삶을 의미 있게 할 짝이 될 것이고, 예언자로 받아들인다면 서로를 통해 구원이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격려를 청하는 사람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하신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아주 장황하게 들려줍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으며 얼마나 많은 예언자를 보내셨는지를 얘기한 다음, 마침내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셨음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는 구원의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는 비구원의 역사가 훨씬 더 많고, 우리의 역사 안에도 구원보다 비구원의 역사가 더 많습니다.
이 비구원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수없이 많은 예언자를 우리 구원을 위해 보내셨고, 결정적으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지만, 그들을 예언자와 구세주로 맞아들이는 데 우리가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의 역사가 내 구원의 역사가 되려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그저 한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로 내게 보내신 사람임을 알아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는 마치 성사가 사효적이지만 성사의 효력을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효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도 그렇고 성사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은총도 그런데, 그것은 마치 햇빛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신다고.
그러나 그늘에 있는 사람, 아니 골방에 처박혀 있는 사람에게는 햇빛이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햇빛이 싫은 사람, 그가 악한 사람이고 그는 은총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비가 좋고 그래서 비를 맞는 사람, 그가 선한 사람이고 그는 은총의 비를 맞을 것입니다.
은총이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인데, 그런데 빛이 빛일 뿐 은총이 아니고 비가 비일 뿐 은총이 아닐 수도 있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한 인간일 뿐 구원이 아니고, 이웃도 귀찮은 자일 뿐 은총이 아닐 수 있으며,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나의 눈은 구원을 알아보고 나는 은총을 받는 존재인지.
나는 시메온처럼 지금 노래할 수 있는지.
지금이 아니면 죽기 전에라도 그럴 수 있는지.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아는 대로 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나도 몰라’ 일 때가 있습니다.
일찍이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15) 하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알면 욕심을 부리지 않고 겸손하게 됩니다.
자신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든 일을 감당할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인정한다면 세상이 여유로울 것입니다.
자신을 아는 데 있어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숨, 곧 영을 받은 사람, 하느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걸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그 자녀로 살아가고 있으며 아울러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몫이 있는데 그것을 얼마나 충실히 수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신분과 위치에 따라 다양한 몫이 있는데, 성직자나 수도자로서,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와 남편, 자녀로서의 몫이 다르고 스승과 제자로서의 위치도 다릅니다.
기관의 장이나 구성원이 해야 할 일이 꼭 같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자기 위치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는 대로 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작품으로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자기 주제를 파악하고 분수를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행복은 실천을 통해서 오는 것이지,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오지 않습니다.
주님을 빌미 삼아 나를 내 세우지 말 것이며, 오로지 주님의 그릇으로써 만족하라,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그것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믿음을 표현하고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자기 위치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개중에는 자기 분수를 모르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내가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고 하셨습니다.
모두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걸립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예수님은 유다의 회심을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회심을 여전히 바라십니다.
지금 열심히 사는 사람은 더 열심히 하고 아직도 부족한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인간의 연약함을 탓하고 맙니다.
'이 정도면 됐지! 뭐 얼마나 더 어떻게 하란 말이야!' 라는 속마음을 들켜서 부끄럽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는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유다가 은돈 서른 닢에 스승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끔찍한 죄입니다.
하지만 더 끔찍한 죄는, 그가 ‘내 죄가 너무 크다. 나는 저주받았다’라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죄가 아무리 커도,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는 언제나 그 죄를 덮어 줍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무한하여 어떤 죄도 감싸줍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1세)
우리는 완고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를 뽑아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느님 앞에 나의 믿음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모든 시련과 고통, 예기치 않은 일 등 모두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부족함을 은총의 기회로 삼고 하느님 앞에 당당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더욱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을 헤아려 지금 할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알면 아는 만큼 실천할 일입니다.
실천하면 행복합니다.
분수에 맞으면 세상이 여유롭고 기쁨도 충만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과 각별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그분의 종일 뿐입니다>
만왕의 왕이요, 세상 만물의 창조주요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피조물이요 종인 제자들 앞에서 허리를 굽히시고, 그들의 냄새 나는 발을 씻어주신 세족례 사건은 당대 사람들, 특히 유다 고위층 인사들에게는 엄청난 스캔들이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세족(洗足)은 종이나 노예들이나 하는 일이지, 왕이나 고관대작들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앞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사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목이 아프도록 외치셨습니다.
너희는 부디 작고 진실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제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본받지 마라.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마지막 순간까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한과 야고보 사도는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높은 자리에 앉아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본 다른 제자들도 다들 거기서 거기였습니다.
아무리 외치고 부르짖어도 귀를 막아버린 제자들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비장의 카드 한 장을 쓰셨는데, 그것이 곧 세족례였습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족례를 통해서 쓸데없는 교만함과 우월감, 자만심으로 가득 찬 유다 고위층 인사들, 그리고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제자들을 향해 일종의 극약처방이요 충격요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족례를 거행하고 나서 하신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요한 복음 13장 16절)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발 씻김을 받았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님보다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극진한 봉사와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의 신분이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과 선택, 각별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그분의 종이요, 도구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사제가 되고, 수도자가 되고, 주교가 되고, 추기경이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의 신원은 항상 그대로입니다.
주님의 작고 미천한 종일 뿐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6-17)
이 말씀은 바로 앞에 있는 다음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요한 13,13-15)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 주신 그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보다 앞에서 가거나 위에 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생활이 신앙생활입니다.
인간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비판하거나 수정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런 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너희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복된 사람이 될 것이다.”, 즉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해야 너희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강조하시는 것은 당신이 본을 보여 주신 그대로 제자들도 낮춤과 섬김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낮춤과 섬김은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만일에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낮춤이 없다면 그것은 좋아하는 감정일 뿐이고, 섬김이 없다면 그것은 소유욕일 뿐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없는데도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비겁함이고 비굴함일 뿐입니다.
신앙생활은 자유인으로서, 스스로 낮추고 섬기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 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3,18-19)
이 말씀은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말씀은 앞에서 말씀하신 ‘행복(구원, 복)’이 사도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배반자 유다는 제외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스스로 떨어져 나간 배반자 유다를 제외하고 다른 사도들은 모두 하느님 나라의 복을 받아 누릴 것이라고, 즉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나는 배반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로 해석되는데, 이 말씀도 반대로 생각하면, 다른 사도들이 끝까지 충실하게 살게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배반자 유다에 관한 일은 사실 영원한 수수께끼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지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했다고 해서 유다 자신의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일이 일어나기 전”은 “배반자가 배반을 하기 전”이고, 또 “일이 일어날 때”는 “배반자가 배반을 할 때”입니다.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배반자의 배반을 미리 예고하시는 것은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제자들이 믿게 하기 위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모르고 당하는 일도 아니고, 힘이 없거나 약해서 당하는 일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인간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한 속죄 제물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요한 13,20)
이 말씀은 사도들의 권한과 권위를 보장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도단 안에서 배반자가 생겼다는 사실, 그리고 예수님 수난 때에 그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난 일, 또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일, 그런 일들 때문에 사도단 전체의 위신이 크게 추락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들이 생긴다고 해도 당신이 사도들을 뽑으신 일과, 그들에게 권한과 권능을 주신 일에는 변함이 없다고 확인해 주십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라는 말씀은 당신이 사도들에게 주신 권한과 권능과 권위는 변함이 없다는 보증입니다.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십자가 수난을 당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일부 종파에서는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일 때문에 사도 자격을 잃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고, 베드로 사도의 사도 직무는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보장하신 직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행동을 예고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루카 22,31-32)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가 금방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것도 예고하셨고, 돌아올 그에게 교회 전체를 다스리는 직분을 미리 맡기셨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 개방, 섬김, 환대>
5월 성모성월이 시작되면서 계속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들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의 생명과 신록의 빛이 파스카의 기쁨중에 살게 합니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수도원 곳곳을 샛노란 야생화 들꽃인 애기똥풀꽃들이 수놓고 있습니다.
25년 전 1998년 5월에도 그러했고 마침 그당시 써놓고 애송했던 '검정 고무신'이란 동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때도 수도원 초창기 때처럼 늘 검정고무신을 신고 지냈습니다.
“볼품없는
검정 고무신
애기똥풀꽃밭에
다녀오더니
꽃신이 되었다
하늘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수놓은
꽃신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별 떠오른
하늘이 되었다”
- 1998.5.7.
주님을 만날 때 변화된, 정화되고 성화된 모습을 상징하는 '검정고무신'이란 시입니다.
요즘 끊임없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주님의 평화를 찾아 많은 이들이 수도원을 방문합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주님의 집인 아름다운 요셉 수도원인지요!
수도원의 자랑은 1987년 3월 19일 개원후로 늘 활짝 열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기 수도원 성전처럼 개원 후 36년 동안 하루 24시간 늘 열려있는 곳은 국내는 물론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명실공히 세상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영혼들의 쉼터이자 오아시스 같은 주님의 집, 평화의 집, 기도의 집, 환대의 집인 여기 ‘베네딕도회 성 요셉 수도원’입니다.
요셉 수도원의 영성을 셋으로 요약한다면 “개방, 섬김, 환대”일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개방하고 서로 섬기고 환대하십시오.
개방, 섬김, 환대는 주님을 만나기 위한 세 필수 요소이자 참영성의 잣대도 됩니다.
물론 앞에 사랑을 붙여야 합니다.
사랑의 개방, 사랑의 섬김, 사랑의 환대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주제이기도 합니다.
어제의 아름답게 빛났던 추억을 잊지 못합니다.
노래하는 영혼의 아름다움은 늘 감동하게 합니다.
오랜만에 수도원을 찾아 면담성사를 받은 자매의 일화입니다.
집무실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늘 명심하는 요소 역시 개방, 섬김, 환대입니다.
바로 이런 정신으로 면담성사차 찾아 오는 이들을 맞이하고 어제 자매님은 음성이 고와 보속으로 성가 244장 성모의 성월을 4절까지, 또 스승의 은혜를 3절까지 전부 부르도록 했습니다.
정말 감동했습니다.
알고보니 오랫동안 찬양 봉사를 해온 자매였고, 너무 고맙고 감동하여 사죄경과 강복후 안아 드리며 주님의 축복을 받으라는 덕담과 더불어 “참 정성껏 성실히 사셨습니다”라며 격려하며 결정적 덕담을 드렸습니다.
“자매님 5월 성모성월은 걱정 안해도 됩니다.
'성모의 성월' 성가를 통해 성모님을 찬양했고, '스승의 은혜' 노래를 통해 스승이신 예수님을 찬양했기 때문에 성모님과 예수님께서 자매님을 각별히 돌봐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서로 개방하고 섬기고 환대하십시오.
서로 개방하고 섬기고 환대할 때 주님을 만납니다.
인류 역사는 오직 단 한 분 예수님으로 수렴되며, 최종적으로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실 결정적인 분은 오직 단 한 분 예수님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이 개방과 섬김, 환대의 모범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바오로의 감동적인 연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이스라엘 역사를 렉시오 디비나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어가 되어 행한 위업의 나열입니다.
마지막 절정이자 마감이신 예수님으로 대단원의 막은 내립니다.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바오로는 물론 우리가 평생 보고 배울 스승이자 주님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개방과 섬김, 그리고 환대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첫째, 개방하십시오.
예수님은 “나는 문이다”라고 천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벽이 없는 진리와 생명, 구원의 문자체, 개방 자체이신 분입니다.
지난 성소주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교황님의 강론 끝부분도 개방에 대한 감동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문들을 열어라(Be open doors)!”라는 주재하에 주교들, 사제들, 교회내의 모든 목자들, 바로 하느님 은총의 기획자들인 이들에게 끊임없이 문을 열라고 촉구했습니다.
이들뿐 아니라 평신도들, 교리교사들, 사목일꾼들, 정치지도자들, 사회지도자들에게 문들을 열 것은 촉구했습니다.
“문들을 여십시오!
열고 포용하십시오.
그래서 헝가리가 형제애를 꽃필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것이 평화의 길입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은 자신을 활짝 열고 우리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며 당신을 따르게 하시고 한없이 온유한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제가 최고의 강론가를 뽑는다면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고 김수환 추기경님일 것입니다.
두분의 강론은 늘 보편적이자 구체적이고, 쉽고 단순하고 깊으며, 힘있고 감동적이며 착한 목자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둘째, 섬기십시오.
예수님 역시 섬김의 모범이요 그 결정적 절정의 장면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사건일 것입니다.
바로 발을 씻어 주신 일은 사랑의 겸손, 사랑의 섬김으로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어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섬김의 삶에 최선을 다하라 말씀하십니다.
참행복도 섬김의 삶에 있다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셋째, 환대하십시오.
성 베네딕도 역시 주님을 환대하듯 찾아 오는 이들을 환대하라 하십니다.
정주와 직결되는 환대영성입니다.
환대를 통한 선교가 베네딕도회 정주 수도승들의 선교 사명입니다.
참으로 이웃을 사랑으로 환대하는 것이 예수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라고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진짜 땅에 깊이 뿌리 내린 건강한 신비주의자는, 영성가는 이렇게 이웃을 예수님처럼, 하느님처럼 사랑으로 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서 사랑의 개방, 사랑의 섬김, 사랑의 환대를 실천하십시오.
바로 이때 개방과 섬김, 환대의 주님을 만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자신을 활짝 열고 우리를 섬기시고 환대하심으로 우리에게 개방과 섬김, 환대에 대해 가르치시고 깨우치십니다.
주님을 닮을수록 개방과 섬김, 환대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제 좌우명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중 한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자성어 중에 ‘일석삼조(一石三鳥)’라는 말이 있습니다.
돌 하나로 3마리의 새를 잡는다는 뜻입니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다고도 합니다.
지금은 인터넷 게임에 자리를 내어 주었지만 국민놀이였던 ‘고스톱’에서도 ‘일타삼피’라는 말도 있습니다.
주님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제게도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 일이 생겼습니다.
창고가 오래되어서 수리를 해야 했습니다.
비가 오면 누수가 있어서 창고에 있는 물건이 젖기도 했습니다.
알아보니 적지 않은 금액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 창고를 깨끗하게 수리해 준 형제님이 비용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대신에 창고의 일부를 사용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형제님은 신문사 사무실에 오더니 형광등을 모두 엘이디 등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사무실이 밝아졌습니다.
형제님 덕분에 창고도 깨끗해졌고, 사무실도 밝아졌고, 든든한 이웃도 생겼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천사를 보내주셨습니다.
부제님이 본당 신부님에게 “부활 축하드립니다.”라고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당 신부님이 “왜 나에게 부활 축하합니다.”라고 하느냐고 되물었다고 합니다.
부제님은 순간 당황해서 제대로 답변을 못했다고 합니다.
본당 신부님이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도 아니지 않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제님은 더 당황해서 “그러네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학교에 돌아온 부제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왜 축하하는지 생각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느님의 아들은 죽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라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부활을 축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은 축하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두려워서 숨어있던 제자들은 이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죽더라도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축하할 일입니다.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된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죽더라도 다시 부활 할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것은 우리들 또한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였던 ‘바오로’를 회개시켜서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처음에 공동체는 바오로를 경계하였습니다.
바오로가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오로의 진심을 보았던 교회는 이제 바오로를 사도로 인정하였습니다.
바오로가 교회로 들어오면서 교회는 더욱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해박한 성경의 지식과 심오한 그리스의 철학으로 교회의 신학적인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교리는 바오로 사도가 정립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서간을 통해서 공동체에 용기를 주었습니다.
공동체가 하느님과 멀어질 때는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은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 할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하였습니다.
그 무엇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선교하였습니다.
매를 맞기도 하였고,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풍랑에 배가 난파되어서 죽을 뻔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선교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역사를 ‘기승전결’의 과정을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설명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이집트에서 고통 중에 있는 백성을 모세를 통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에서의 생활은 낡은 관습과 관행을 정화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왕에게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백성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 중에 이스라엘을 이끌 메시아가 오셨는데 그분은 예수님이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던 세례자 요한이 증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나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바로로 사도의 이야기를 읽으면 구원의 역사가 이해됩니다.
예수님께서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바오로 사도처럼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선교에 대한 열정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으로 ‘부활 축하합니다.’라고 인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 신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새로운 소임지를 받아서 부임했는데 계속해서 불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런 곳에서 사목할 사람이 아니라며 이곳에 온 것이 너무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편하고 쉬운 곳, 또 화려함을 가져다주는 곳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모욕과 박해를 당하고, 힘들고 어려움이 가득한 곳이라도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사명을 기억하며 기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니, 결국 주님 말씀을 따르지 않겠다는 말이 아닙니까?
이 신부만 억울함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요?
복잡한 세상에서 억울한 일은 늘 계속됩니다.
가족 안에서, 친구들과의 관계 안에서, 직장이나 교회 안에서 억울한 일은 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억울함에만 갇혀 있으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과 함께하는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누군가로부터 무례한 대우나 괴롭힘, 냉소 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가 바로 주님과 함께 할 때이고, 자신이 한층 더 성숙할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계속해서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잠 못 이루고, 피폐한 삶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원하실까요?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찾으면 주님을 보지 못하고 불평불만만 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그때 제자들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발을 씻어 주실 수 있는가?’
특히 이는 종이 주인에게 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행동 강령을 제시해주신 것입니다.
권력 지향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솔선하여 사랑을 실천하고 자기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억울하다며 불평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계명을 따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주님과 진정으로 하나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억울한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은 그만큼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신 주님이시기에 주님과 함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늘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