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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天下爲公(천하위공)
[字解] 天(하늘 천) 下(아래 하) 爲(할 위) 公(공변될 공)
[意義] 온 세상이 일반 국민(國民)들의 것이라는 뜻이다. 즉 모든 사람이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는 국가를 모든 사람들이 빠짐 없이 참가해서 만든다는 의미이다.
[出典] 예기(禮記) 제9 예운(禮運).
[解義] 공자가 노(魯)나라 사제(사祭)에 빈(賓)으로 참석하였다. 공자는 제사를 마치고 성문(城門)의 누대(樓臺)에서 쉬고 있다가 길게 탄식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때 옆에 있던 제자 자유(子遊)가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탄식하시는지요?" "옛날 큰 도가 행하여진 일이나 하(夏)나라, 은(殷)나라, 주(周)나라 삼대의 현인(賢人)들을 때를 만나 도를 행하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들에 대해서는 기록이 있다. 그들의 기록에 따르면 큰 도가 행하여진 세상에는 천하가 만인(萬人)의 것이었으며, 때에 사람들은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골라 관직에 나아가게 하였으며, 서로 신뢰를 다지고 화목함을 누렸다[大道之行也, 天下爲公, 選賢與能, 講信佾睦]한다. .... "
*사제(사祭): 12월에 만신(萬神)을 합하여 드리는 제사. *사(납향 사) 祭(제사 제) 賓(손 빈) 講(익힐 강) 信(믿을 신) 佾(춤 일) 睦(화목할 목)
[English] -The whole world is one community.[천하위공(天下爲公)] -To serve the interests of the vast majority. [다수의 이익(利益)을 위해 봉사(奉仕)하다] -To serve the people. [백성들을 섬기다]
출처:풀어쓴 중국고전.
[參考] 한국사회의 私와 公 - 송 복 / 연세대 교수. 사회학 1 회사에서 일하는 미국 사람과 한국 사람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는 사람이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그 차이를 노동자에 한정해서 보면, 미국은 한 노동자가 무단으로 결근했을 때, 그리고 그것을 감독이 모르고 지나갈 때, 미국 노동자들은 예외 없이 감독 있는 데서 그 노동자의 이름을 불러 그 노동자가 결근했음을 감독이 눈치채도록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반대로 한국 노동자들은 감독이 김모 씨가 무단으로 결근하지 않았나 의심해서 “김OO 어디 갔어”하고 물으면 옆의 동료가 “아 화장실에 갔습니다”라고 대답하고, 그러고도 오지 않아 감독이 또 한번 찾으면 “손님이 와서 잠시 나갔습니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끝내 나타나지 않아 결국 감독이 알게 되면 “집에 급한 일이 생겨 할 수 없이 결근하게 됐습니다”라고 마치 자기 일처럼 결근한 동료를 변명해 준다는 것이다.
이런 한국 사람들의 입장에서 미국 노동자들을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돼먹지 못한 사람’으로 생각될 수 있다. 미국 노동자들은 무단 결근한 동료를 어떻게 하든 드러내려고 한다. 반면 한국 노동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 동료를 감추어주려 한다. 미국 노동자들은 무단 결근한 사람이 친구든 친동생이든 감독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 생각하고, 한국 노동자들은 친구, 친동생은 물론 설혹 잘 모르는 남이라 할지라도 숨겨 주는 것이 결코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미국 노동자들은 결근한 사람을 알게 하는 것이 회사를 위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한국 노동자들은 그쯤이야 감추어 줘도 회사에 손해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 노동자들은 동료에게는 매정하지만 회사를 먼저 생각하고, 우리 노동자들은 회사에게는 미안하지만 동료를 먼저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 노동자는 그만큼 公的이고, 한국 노동자는 그만큼 私的이라 할 수 있다. 일본 노동자에 대해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 司馬遼太郞[시바 료타로]가 쓴 글을 보면 우리와 역시 현격한 차이가 있다. 회사에 입사하는 순간 ‘公을 느낀다’가 한마디로 일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일본 회사의 종업원들은 사장이라는 자연인에(그 회사가 아무리 작은 사기업이라 해도) 고용되어 있다는 생각을 거의 갖지 않고, 하나의 法人에 참가하고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수입에 대한 불만이 적거나 근무 만족도가 우리에 비해 대단히 높은 것도 아니다. 日本經濟新聞이 한 10년 전쯤 미국과 비교해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일본 106개 주요기업 과장들의 수입 불만도는 미국의 2배가 넘는 33%에 이르고, 반면 근무 만족도는 미국의 반밖에 안 되는 41%에 지나지 않는다. 정확치는 않다 해도 우리 주요기업에 속하는 과장들을 조사하면 미상불 일본의 그것보다 높을 것이다.
이러한 公의식에서 보면, 우리는 사장이 누가 되고 부장 과장이 누가 되느냐에 일차적 관심을 쏟고 있다. 우리 회사 종업원들도 ‘우리 회사’라는 의식을 갖고는 있지만 거의 예외 없이 누가 사장이며 누가 부장이고 과장인가 하는 자연인과 결합해서 갖고 있다. 회사를 자연인과 분리해서 ‘제도institution’로 생각하는 ‘제도의식’이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회사가 ‘제도’로서 탈바꿈된 ‘법인’이 아니라 자연인 그 자체인 ‘私人’이 되어 있다. ‘황제경영’에 대한 논란도 회사가 ‘법인’이 아니라 ‘사인’이 되어 있다는 한 표현이고, ‘지배구조’에 대한 시비도 회사가 제도로서의 ‘법인’이 아니라 자연인으로서의 ‘사인’이 되어 있다는 명명백백한 증거다. 2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는 왜 公의식이 이렇게 박약한가이다. 公이란 私에 대비되는 개념이고 의식이다. 公의 字典的 의미는 여러 사람에 관계되고 여러 사람을 위하는 국가나 사회의 일이다. 그에 반대되는 私는 자기 한 몸의 일이고 자기 한 집안의 일이다. 따라서 私는 개인적인 욕심과 개인적인 이익만을 꾀하는 일로 생각되기 십상이고, 반대로 公은 개인의 욕망과 이익을 초월하고 때에 따라서는 그러한 개인의 희생 위에 서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적으로 私는 숨김이 많고 자기들끼리 비밀로 하는 일로 모두 생각케 하는 반면, 公은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투명하고 누구에게든 차등 없이 베푼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어쨌든 公은 좋은 것이고 모두에게 바람직한 것이다. 반대로 私는 좋지 않은 것이고 자기 외의 모든 사람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그 좋고 바람직한 것이, 좋지 않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약화되어 있을까.
이는 현대 중국의 國父라고 하는 孫文의 캐치프레이즈와 연관해서 볼 수 있다. 孫文의 캐치프레이즈는 ‘天下爲公(천하위공)’이다. 이 말은 ‘禮記(예기)’의 大同思想(대동사상)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로, 모든 사람이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는 국가를 모든 사람들이 빠짐없이 참가해서 만든다는 뜻이다. 孫文은 이 말을 가는 데마다 부르짖고 평생을 부르짖었다. 그렇게 반복해서 절규하다시피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틀림없이 중국인들이 너무 公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데서 나왔을 것이다. 사실 중국에 있어 公의식은 科擧(과거)에 합격한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있었을 뿐 일반 국민들은 갖고 있지 않았다.
중국 역사를 보면 오늘날 국가라 할 수 있는 王朝(왕조)는 한결같이 백성의 적에 지나지 못했다. 堯(요) 임금 때 온 백성들이 즐겨 불렀다는 擊壤歌(격양가)라는 노래는 우리 임금이 도대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임금이 누구인지 모르는 통치의 상태’가 가장 태평한 시대의 가장 행복한 나라라는 의미다. 이 노래가 수천 년 중국인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렸다면 그만큼 왕조는 그 ‘노래 구실’을 못한 것이다. 그만큼 일반 백성들에게 왕조는 착취하는 존재이고, 해를 끼치는 존재이다. 따라서 그 해를 막기 위해서 일반백성들은 私的으로 결속하지 않을 수 없고, 私의 강력한 연대정신을 불가피하게 갖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孫文이 ‘천하위공’의 사상으로 아무리 타파하려 해도 그의 생전에 결코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3 우리라고 다름이 있을까. 조선왕조 5백년 내내 왕조가 일반백성에게 베푼 것이 무엇일까. 세금으로 빼앗아 가고 형벌로 위협한 것 외에 일반백성들이 그 왕조로부터 그 어떤 시혜를 받았을까. 입만 열면 先公後私(선공후사: 公的인 것을 먼저 하고 私的인 것은 뒤로 미룬다)니 先難後獲(선난후획: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대가는 뒤에 생각한다)을 말하고, 심지어는 滅私奉公(멸사봉공: 私를 죽이고 公을 받든다)을 부르짖으면서 실제로 백성의 위에 앉은 사람들은 어떠했는가. 국가권력을 私有化하고 국가재산을 私物化하고 일반백성의 섬김만을 받으려 한 것 외에 그들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백성의 눈에 비친 그들의 존재이유는 어떤 것이었겠는가. 왜 임금이 있으며 왜 벼슬아치들이 있는가. 국가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일반백성이 생각하는 임금이며 벼슬아치는 모두 ‘욕망의 덩어리’며 공포의 대상이며 학정의 괴물일 수밖에 없다. 그들의 의식 속에 혹은 그들의 이미지 속에 그 외에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국가라고 하는 公을 일반 백성들은 느낄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公이 없는데 하물며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公의식을 가질 수 있겠는가.
거기에 비하면 일본이나 서구는 우리와 너무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들 역사가 기록한 대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테네라든지 스파르타와 같은 도시 자체에 이미 公을 느끼고 있었고, 일본의 明治人[메이지인]들은 국가에 강렬한 公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서구의 근대사는 일반 국민이나 지배층이나 다같이 公의식의 확대사라 할 수 있다. 특히 지배층이 얼마나 투명하게 公務를 수행하고 얼마나 公平하게 공무를 수행하는가를 밝히고 펴나간 역사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지배층들도 一汁三菜(일즙삼채)를 생활화해 왔다. 한 끼니가 국 한 그릇에 나물 3개가 고작이라는 것이다. 물론 도꾸가와 시대의 지배층들이며 메이지 시대의 지배층들이다. 일본의 기업인들이나 정치인 고위관료들을 보면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다. 조선조 때 李栗谷(이율곡) 선생이 올린 상소문에 의하면 높은 벼슬아치 한 끼 식사가 가난한 일반 백성 한 달 식사에 해당하고, 그들의 옷 한 벌 값이 가난한 백성 평생의 옷값보다 더 비쌌다고 하고 있다.
지금이라고 달라진 것이 있는가. 끊임없이 지탄하는 대로 고위 정치인은 政黨을 사물화하고 국가대사를 밀실에서 결정하지 않는가. 公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투명성이 없고, 또한 公에서 가장 핵심으로 하는 바름[正大]이 없다. 고위 관료는 다른가. 가장 公正해야 할 검찰은 어떠하며 사법부는 또 어떠한가. 언론에서 늘 보도되는 대로 자기들 ‘밥그릇 챙기기’에 얼마나 여념이 없는가.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말대로 일반 국민은 私益으로 살아간다. 사익을 높이려는 그 利己心이 국가를 번영케 한다. 그러나 공무를 수행하는 정치인이나 관료는 公益이 생명이다. 공익을 높이려는 그 利他心이 국가를 부강케 한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되어 있다. 일반 국민은 그래도 최소한의 공익의식이라도 갖고 있다. 그에 반해 윗층은 그나마 그 최소한의 의식조차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대표적 예가 ‘낙하산 인사’며 소위 말하는 ‘장관’이라는 자리다. ‘낙하산 인사’의 주요 기준은 ‘공익을 위해’ 얼마나 일을 잘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권력자인 내가 ‘봐주고 챙겨주어야 할 사람’인가다. 늘상 요구하는 대로 公的인 ‘능력본위’의 인사가 아니라 私的인 ‘충성본위’의 인사다. 가장 公的인 것을 가장 私的인 것으로 바꾼 예로 이보다 더한 극치가 있을까. 그 극치는 ‘장관’의 자리라고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누구든 장관이 되면 먼저 그 ‘개인의 영광’이며 ‘영달’로 생각한다.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축하전화를 하는 친지 친우도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공무수행의 어려움은 생각지 않고 오로지 지위 상승만 생각하는 것이다. 국가를 위해서 그리고 공익을 위해서 얼마나 그 역할이 중차대한가는 생각지 않고 출세했다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 가(대개는 1년 미만) 소모품이 되어 사라지고 또 다른 지위 추구자며 개인 영달 추종자가 들어선다. 그리고 또 날아간다. 그것이 우리의 그 수수많은 장관들의 個人史다.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들―그들이 公의식에 철저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영원히 公은 없다. 오로지 私만이 천하를 횡행할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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