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며느리의 서열
“봄볕은 며느리를 쬐이고 가을볕은 딸을 쬐인다.”는 속담이 있다.
봄볕은 따사로워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봄볕에 그을리면 보던 님도 몰라본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피부가 잘 탄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봄볕에는 며느리를 내놓고 가을볕에는 딸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죽 먹은 설거지는 딸 시키고 비빔 그릇 설거지는 며느리 시킨다”는 속담도 있다. 이 속담들은 모두 며느리보다는 딸을 더 위하고 사랑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시부모 입장에서 보면 딸과 며느리.
당사자들 입장에서 보면 시누이와 올케.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이 있듯 대가족으로 살던 예전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관계다. 그런 두 사람은 가족 안에서의 서열은 누가 더 위일까? 지금 시대에야 전혀 쓸모없는 질문이겠지만, 위아래의 분별이 중요했던 예전에는 때로 이런 질문에 답해야 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때는 1647년, 인조 25년이었다. 인조의 딸인 효명옹주(孝明翁主)가 나이 11세에 혼례(婚禮)를 행하였다. 효명옹주는 인조가 40대 초반 때부터 가까이했던 귀인 조씨(貴人 趙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고명딸로, 아버지인 인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며, 어머니인 조귀인(趙貴人) 역시 두 아들인 숭선군과 낙선군보다 옹주를 훨씬 편애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정2품 소의(昭儀)였던 조귀인이 “인조로부터 비할 데 없는 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옹주와 부마(駙馬)의 의복과 기물이 모두 극히 풍족하고 사치스러웠다”고 기록하였다.
효명옹주의 혼인이 있은 3일 후에 왕실 여성들이 참석하여 새신부의 혼인을 축하하는 잔치가 열리게 되었다. 종실의 부녀들이 모두 참여하는 이 잔치에는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부인 오씨(吳氏)도 참여하였는데, 오씨가 자리 배치를 두고 이의를 제기했다. “나의 자급(資級)이 비록 옹주보다 낮다 하지만, 적(嫡)ㆍ서(庶)의 차례로 앉아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효명옹주보다 윗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왕족, 종친의 딸과 아내, 그리고 문무관의 아내로서 남편의 직품에 따라 봉작을 받은 여인들을 가리키는 외명부(外命婦)에 따르면 왕의 딸인 공주나 옹주는 무품(無品)이다. 내명부에서 왕비가 무품이듯 품계를 초월한 지위라는 의미다. 반면 왕이 정부인에게서 난 아들인 대군의 부인을 가리키는 부부인(府夫人)은 정1품이었다. 그러니까 인평대군(麟坪大君)의 부인 오씨는 서열로 보면 효명옹주보다 서열이 낮았고, 아랫자리에 앉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씨가 이의를 제기했던 것은, 서출(庶出)에 대한 적출(嫡出)의 자부심에 기반한 것이었다. 오씨의 남편인 인평대군은 인조의 정실부인인 인렬왕후 한씨의 아들이었기에 적출이었다. 반면 효명옹주는 당시 인조의 사랑을 받는 조귀인의 딸이기는 했지만, 조귀인의 신분이 후궁이었기에 적출에게 주어지는 공주의 봉작을 받지 못하고 서출에게 주어지는 옹주가 되었다. 사실 민간의 경우라면 효명옹주는 홍길동처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신세이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종모법에 따라 노비가 될 수도 있는 처지였지만, 유독 왕실에 한해서는 적(嫡)ㆍ서(庶)의 차별이 엄격하지 않았기에 왕의 딸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두 사람의 나이 차도 있었다. 오씨의 남편인 인평대군이 효명옹주보다 15살이 많았으니까, 부인이 남편보다 나이가 많은 경우가 흔했던 당시로서 오씨는 효명옹주보다 최소 15살 이상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이래저래 오씨는 평소에 효명옹주가 안중에도 없었을 터인데 상좌를 내주고 그 아랫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윗자리를 놓고 버티는 사이에 그 소식이 인조의 귀에 들어갔고, 인조는 효명옹주를 윗자리에 앉게 했다. 이 일을 기록했던 효종의 부마 정재륜은 이 일 이후로 두 사람 간의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공주가 여섯, 옹주가 하나 있었는데, 이들의 혼인 때에 효종은 오씨로 하여금 자신의 딸들보다 윗자리에 앉게 하였다. 이는 효명옹주 때의 일을 교훈으로 삼아 행한 일이지만, 궁중의 법도 보다는 민가의 예절을 따른 것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궁중의 법도에 의하면 품계에 따라야 하는 것이고, 민가의 예절에는 적(嫡)ㆍ서(庶)의 구분과 나이에 따른 위아래가 있었던 것이다.
[출처] 딸과 며느리의 서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