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에서 섬강교를 건너면 여주시 강천면 강천리 자산 등산로 입구에 도착한다. 횡성 태기산에서 흘러온 섬강과 태백 검룡소에서 흘러온 남한강이 만나 여주로 흘러가는 여강 물줄기를 따라가는 둘레길 여강길 2코스 중 일부 구간인 자산 등산로 입구에서 해돋이 숲길까지 걸었다.
풀숲에서 만난 생명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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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강길 2코스 자산 등산로 입구 뱀조심 안내판 |
비가 그친 오후 자산 입구에 차를 세우고 출발했다. 자산 입구 나무에 '뱀 조심' 안내판이 걸려있다. 안내판을 보는 순간 멈칫했다. 풀숲 무성한 강변을 따라가는 길이니 뱀이 나올 만도 했다. 강둑에서 뛰며 놀다 스르륵 발 앞으로 지나가던 뱀에 소스라치게 놀랐던 어린 시절 기억들이 떠올랐다. 뱀이 무서워 여강길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주차된 차로 되돌아와 스틱을 챙겨 둘레길로 들어섰다.
주말 동안 한여름 장마처럼 사정없이 쏟아진 비로 강물은 흙빛이었고 강가 둘레길을 금방이라도 삼킬 듯 넘실거렸다. 돌무더기 자갈밭을 지나 풀숲 사이로 흔적만 남아 있는 길을 따라 걷는데 풀숲 여기저기서 갖가지 여린 생명체들이 움직인다. 물잠자리나 거미처럼 익숙한 생명체도 있지만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것들이 더 많다. 풀숲을 헤치며 강변길을 걸어가는 인간이 자신들의 존재를 알아주건 말건 아랑곳없이 움직인다. 그들도 살아 숨 쉬는 생명체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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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숲 우거진 여강길 갖가지 생명체들을 만날 수 있는 길 |
사람들의 애환 서린 물길 중심지
섬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일부 구간은 불어난 물에 잠겨 자산 바위 절벽에서 굴러떨어진 돌무더기 사이를 기우뚱거리며 걸어가야 했다. 다행히 물에 잠긴 구간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지나갈 수 있었다. 물에 잠긴 구간을 지나니 섬강과 남한강의 합류 지점이다.
섬강과 남한강 물줄기에 밀려온 자갈이 넓게 펼쳐져 있다. 고려시대 개경으로 세곡을 운반하기 위해 조운선이 드나들 수 있는 전국의 해안이나 강가에 60여 개의 포구를 설치했는데 그중 하나가 은섬포였다. 은섬포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조세 운반을 위해 설치된 나루였으니 두물머리 일대 흥원창 부근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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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강 남한강 합류 지점 사진 왼쪽은 횡성 태기산에서 발원한 섬강, 위쪽은 태백산 검룡소에서 발원해서 영월, 충주를 거처 흘러온 남한강, 두 강이 합류해서 오른쪽으로 흘러가는데 이 강을 여강이라고 한다 |
물길이 중심이 되던 시절, 은섬포는 서울과 강원도를 연결하는 수상 교통의 중심지였다. 한창 세곡을 거두어들일 때는 세곡을 실은 우마차가 줄지어 들어올 정도로 혼잡했다고 하니, 사람 모이는 곳에 시장이 들어서고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번창했다.
세곡과 함께 서울과 강원도를 오가는 사람들도 은섬포를 거쳐 갔다. 세곡 운반이 한창일 때는 배삯도 급등해서 백성들이 배를 이용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세곡 운반의 명목으로 흥원창 주변 백성들에게는 포구 사용료를 강제로 거두어 들었다. 경기도 양주에 살았던 정약용이 남긴 시에 당시 상황을 고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흥원포에 있는 옛 창고 건물은
가로지른 서까래 일자로 연했어라
봄철 조운을 이미 다 마쳤는데도
또 호탄전을 강요하여 받아내누나
- 정약용, 강행절구(江行絶句)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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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수머리 부근 암벽 암벽 등반 동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암벽 등반 코스 |
몇 해 전부터 암벽 등반에 꽂혀 북한산을 오가며 연수를 받은 후배는 두물머리 강가에서 자산을 보고 암벽 등반하기 좋은 곳이라며 휴대폰을 검색해보더니 암벽 등반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며 웃었다. 섬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지점 자갈 펼쳐진 강변에서 올려다보면 가파른 바위 절벽이 정상까지 치솟아 있다. 그래서 암벽 등반 동호인들에게 알음알음 알려진 곳이라고 한다.
암벽 빛깔이 자색이라 자산이라 불렀다는데 산 정상에는 임경업 장군이 무예를 수련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자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부론면 손곡리에는 임경업 장군 추모비가 있다.
처절하고 생생한 야생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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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강길 2코스 길 인공과 자연이 어우러진 길 |
자산을 지나다 보면 섬강과 남한강이 합류해서 흘러가는 여강 물줄기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바위 절벽 타고 올라온 하얀 찔레꽃, 물속에 반쯤 잠겨 죽은 듯 엎드려 있지만 여기저기서 새잎 돋아나는 나무, 다닥다닥 오디 열매를 매단 오래된 뽕나무, 벼랑 따라 줄지어 선 나무 사이로 흘러가는 강물. 사람의 손길이 드문 여강길에는 자연이 빚어낸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사람이 만든 가파른 계단조차도 그림 같은 풍경과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야생이라고 한다. 야생에서 생명체들은 온갖 모습으로 살아간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야생의 모습을 잠시잠깐 지나치다 바라보면 그림 같은 풍경처럼 느껴지고, 신비로운 생명의 세상처럼 보이지만 그 모습이 야생의 전부가 아니다.
여강길 걷는 도중 수꿩의 사체가 눈에 들어왔다. 포식자에 의해 사냥당해 살점이 모두 뜯기고 앙상한 뼈만 남은 끔찍한 모습이었다. 상하지 않은 사체의 상태로 미루어 포식자가 꿩을 사냥한 시기는 얼마 되지 않았을 거라 추정된다.
꿩의 포식자로 어떤 동물이 있는지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니 깜깜한 어둠 속에서 잠에 떨어진 꿩을 사냥하는 삵의 모습이 담긴 EBS 다큐 프라임 동영상이 있었다. 간밤 이곳에서도 다큐 프라임 영상처럼 삵이 꿩을 사냥했던 것일까? 생존을 위해 먹고 먹히는 야생의 적나라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이 야생이다.
마을을 거쳐 해돋이 산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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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에 잠긴 나무 물에 잠겨 죽은 듯 보이지만 새로 돋아나는 나뭇잎을 볼 수 있다. |
오디 다닥다닥 열린 뽕나무 줄지어 선 곳을 지나니 넓은 개활지에 감자, 옥수수, 고구마 등을 심은 밭이 있고, 밭이 끝나는 지점 군데군데 집이 보였다. 인적 드문 강변을 벗어나 인적 확연한 마을로 접어드니 야생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불안함이 가셨다. 예초기로 정리한 밭둑이나 마을 길에서 뱀이나 사냥당한 수꿩의 사체를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인적 확연한 마을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다시 숲길이 나타난다. 해돋이 산길이다. 생생한 야생이 느껴졌던 자산 줄기와는 달리 오래된 숲과 잘 정비된 둘레길이 어우러져 정든 고향 산골길에 들어선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비 갠 오후에 출발해 해돋이의 장관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만 접는다면 '걷다가 쉬다가'를 되풀이하며 오래오래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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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돋이 산길 여주시 강천면 해돋이 산길, 잘 정비된 산길 따라 걷다 보면 고향처럼 포근한 느낌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