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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13,26-33
그 무렵 바오로가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에 가 회당에서 말하였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27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안식일마다 봉독되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28 그들은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목도 찾아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29 그리하여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그렇게 다 이행한 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모셨습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 뒤에 그분께서는 당신과 함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이들에게 여러 날 동안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32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33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4,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을 떠나시기 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유언 말씀입니다.
유언이란 남는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가장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은 앞 장면에서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고 묻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요한 14,1-2)
이는 당신이 가시는 곳이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말해주며, 동시에 그곳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는 것을 통해 당신이 그곳으로부터 왔다는 것도 밝혀줍니다.
그리고 당신은 본 바를 말하니, 아버지를 믿고 또한 당신을 믿으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믿는 이가 그 거처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리 거처할 곳이 많아도 가서 거주하지 않으면, 그 집은 나의 거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알아듣지 못한 토마스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요한 14,5)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사실 당신께서 “길”이라는 이 말씀은 엄청난 발언이요, 혁명적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길”의 표상은 본디 이집트 탈출의 상징이요, 해방의 길을 표상했으며, 점차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영원한 보상을 위해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율법”에 적용에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길”의 의미가 ‘율법’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또 당신이 “진리”라 함은 “진리”(áληθεια)의 원어의 뜻이 ‘감추어진 보물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성부를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만난 사람은 곧 진리를 발견하고, 성부를 만난 사람이 됩니다.
또한 당신이 “생명”이라 함은 당신은 단순히 구원에 인도하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체가 구원의 원천인 생명이심을 말해줍니다.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요한 6,35)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미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줍니다.
곧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알지 못함은 믿지 않는 까닭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참된 앎의 길입니다.
그저 안다고 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 그것을 믿을 때라야 그 앎을 진정 알게 됩니다.
참된 앎은 진리를 머리로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고서 온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
(요한 14,1)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발길에 밟히며 아래에서 저를 이끄셨듯이,
저도 형제들 아래에서 그들이 밟고 가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제 주장에 밀려 옳고도 져주셨듯이,
저도 형제들에게 져줌으로 진리의 빚을 밝히게 하소서!
씹히고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도 형제들 안에서 부서지고 씹혀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이제 더 이상은 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아버지께로 가는 길>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살다 보니 느닷없이 ‘길’과 ‘진리’와 ‘생명’ 중에서 주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주님이시기를 나는 주님께 바라고 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길이신 주님?
진리의 주님?
생명의 주님?
진리의 주님과 생명의 주님 그 어느 것도 아니어서는 안 되지만 그래도 저는 주님께서 길이신 주님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길이시라는 것 안에 주님은 진리의 길이시라는 뜻이 같이 들어 있고, 진리의 길이시기에 생명의 길이시라는 뜻도 함께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얘기들을 다 해야 하지만 오늘은 길이신 주님에만 집중하여 보겠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길이시라는 것이 만일 부산 가는 길이라면 탐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부산 가는 길은 예수님 아니어도 알려줄 사람 많고 요즘은 내비게이션이 더 잘 알려주니 말입니다.
길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성취의 길이 있고, 만남의 길이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일하러 가는 길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성취의 길을 가기보다 만남의 길이요 사랑의 길을 가고 싶은데, 그것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가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아버지께로 가시는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버지를 사랑하기만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랑의 길을 따라가면 됩니다.
그리고 저도 다른 사람들에게 길이 되고 싶습니다.
적어도 남이 가는 길의 훼방꾼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께 가는 길은 당연히 못되고, 다만 프란치스코에게 인도하는 길이고는 싶습니다.
그렇게 제가 누군가를 프란치스코에게 인도하면 프란치스코는 그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할 것입니다.
클라라는 유언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길이 되어 주셨고, 그분을 참으로 사랑하고 본받은 이셨던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께서 말과 모범으로 이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남자들은 살면서 세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답니다.
첫째는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하고 둘째는 부인의 말을 잘 들어야 하며, 셋째는 내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오는 여성의 목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와 둘째 못지않게 셋째가 중요한데 그것은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잘 안내해 주고, 모르는 길도 큰 어려움 없이 안전하게 도착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때로는 엉뚱한 곳으로 안내해 당황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길의 안내자 역할에 내비게이션은 분명히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 여정을 살아가면서 때로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물을 때가 있습니다.
최선의 삶을 사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도 있고 때로는 목적도 방향도 없이 방황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에 안주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주 하느님 품 안에 쉬기까지 늘 불안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될 천상에 목적지를 두고 어떠한 처지, 상황이라도 감당하며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확실한 내비게이션, 안내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당신을 ‘문’(요한10,9).이라고도 하셨는데, 예수님 자신이 종점이 아니라 종점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 다다르는 수단이십니다.
아버지와 만남을 이루는 방법은 예수님을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중개자이십니다.
아버지를 가장 잘 알고 계시니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분명하고 확실한 내비게이션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전하는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요한 18,37),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8,3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셔서 아버지 안에 살고, 아버지께서도 예수님 안에 사십니다.
그래서 누군가 예수님을 알면 아버지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입니다.
그리고 생명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10,10)고 말씀하셨고,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완전한 방법으로 드러내고 세상에 구원을 알립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갖고 계셨기에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데 길이 되셨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14,1)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하시며 당신이 떠난다고 해서 마음 흔들리지 말라는 당부를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보증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 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음의 산란함 속에 살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나 가정에서도 믿음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인간적인 이득을 따지게 되고 계산하면서 결국은 주님의 뜻과는 먼 삶을 살아가면서 방황하게 됩니다.
주님을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내 삶을 주님의 삶으로 바꾸지 않는 한 그분은 그저 좋은 분으로 머물 뿐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께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고 매사에 내 뜻을 내려놓으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실천하며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잠언 16,9)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가는 길은 단 두 개: 진리 아니면 거짓, 생명 아니면 죽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길입니다.
생명으로 가는 길일 수도 있고 죽음으로 가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이고 진리이시니 우리는 죽음이고 거짓으로 가는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도 생명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삶을 반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존 존스(Jon Jones)는 1987년 7월 19일 뉴욕주 로체스터에서 태어난 미국의 격투기 선수로, 혼합 격투기(MMA)에서 가장 독특하고 뛰어난 경력을 가진 선수 중 하나입니다.
전문가들은 그를 MMA 역사상 최고의 라이트 헤비급 선수 중 한 명으로 간주하고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매우 많습니다.
존스는 2008년에 MMA 데뷔했고, 2011년 3월 19일,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에 도전해 23세의 나이에 역대 최연소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또한 존스는 라이트 헤비급에서 최장기간 챔피언을 지키면서 8차례의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는 것을 너무 싫어하여 손가락으로 상대의 눈을 찌르는 등의 여러 반칙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어렸을 때는 TV나 인터넷도 하지 않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챔피언이 되고서부터 천천히 그 안에서 악마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경기 하기 일주일 전에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고 퇴폐 생활을 합니다.
그래야 만약 경기에 졌을 때도 핑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한 사고와 범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2012년 5월 벤틀리를 전봇대에 충돌시키며 음주운전에 대한 첫 번째 기소를 받습니다.
2015년 존스는 약물 테스트에서 코카인 양성 반응이 나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잠시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을 박탈 당합니다.
다시는 술과 약물을 하지 않겠다는 말은 2016년 도핑 검사를 통해 또 1년 동안 경기 금지 징계를 받으며 거짓말로 드러났습니다.
2017년도 마찬가지로 약물이 검출되어 다시 헤비급 타이틀을 잃게 되었고 15개월의 경기 금지 징계를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술집 종업원을 성추행하고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의 안에 수많은 악마가 들어있다고.
존 존스는 어렸을 때부터 신앙 교육을 철저히 받아 하느님을 알고 자기 가슴에 성경 말씀을 써 놓고도 그를 본받으면 지옥으로 가는 길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물론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 길이 천국의 길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있어도 이웃을 위해 자신을 죽이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지 않으면 지옥으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이런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의 연속이고 거짓말의 연속이며,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게 매번 지고 마는 패배자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이 삶으로부터 구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존 존스와는 반대로 현재는 헤비급 3위인 파블로비치라는 러시아 선수가 있는데 현재 존 존스를 꺾을 수 있는 유일한 선수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그는 경기 시작 전과 후에 항상 성호를 그을 정도로 침착하고 존 존스와는 반대로 점점 더 모범생이 되어가는 인물입니다.
어렸을 때는 성격이 조급하고 화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군대에서 종교를 접하고 세례를 받고 나서는 신앙의 힘으로 격투기를 합니다.
또한 바쁜 와중에서도 주일에는 항상 성당에서 미사를 드립니다.
‘자신을 감당하지 못한 악마의 재능’이란 별명이 붙은 존 존스와 그와는 반대로 주님의 이름으로 먼저 자신과 싸워 이기려는 파블로비치의 경기가 성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쨌건 격투기라는 잔인한 싸움의 세계에서도 두 상반된 길을 가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은 또한 누군가의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이기는 십자가의 길이 아니면 죽음과 지옥의 길일 뿐임을 아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어린이들에게는 세상 온천지가 호기심 천국입니다>
언젠가 홀로 피정 오신 형제님을 위해서 제 주특기인 해물 라면을 끓여드린 적이 있습니다.
김치도 내오고 햇반까지 데워드리니, 큰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제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하신다는 생각.
오직 딱 한 사람, 나만을 위해 손수 빵을, 그것도 영원한 생명의 빵을 마련하시는 우리의 하느님이라는 생각.
오늘은 보기만 봐도 사랑스러운 어린이날입니다.
돌아보니 저도 어린이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베이비붐 시대여서 아이들로 넘쳐났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많다 보니 학교가 다 수용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전 반 오후반으로 나눠서 수업을 할 정도였습니다.
5학년 때 제 번호가 100번일 정도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아이들이 워낙 많다 보니, 한 아이 한 아이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많이 부족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선생님들께서는 담당하던 아이들이 워낙 많다 보니 한 학년이 다 끝나갈 때까지도 반 아이들 이름을 다 외우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명 한명을 극진히 사랑하시고 존중하시며, 우리와 1대 1로 만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니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서 어린이들은 참으로 혹독한 취급을 당했습니다.
당시 워낙 유아사망률이 높다 보니, 일단 성인이 되어야만 정상적인 한 인간 존재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숫자를 헤아릴 때 어린이들은 제외되기 일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행하셨을 때, 복음 사가들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빵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5천명.
사람들은 어린이들을 볼 때, 동등한 인격체, 자유의지를 지닌 한 인간 존재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께서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축복과 안수를 청합니다.
그런 어른들의 모습에 사도들의 심기가 조금 불편해졌습니다.
안 그래도 집요하게 밀려드는 환자들로 인해, 상습 피로에 시달리던 스승님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휴식이 필요한 스승님이셨기에, 개념도 없는 아이들의 모습에 짜증이 났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 생각에, 스승님께서는 보다 위대하고 중요한 일을 행하셔야 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개념 없는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일은 아무런 가치와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제자들의 생각과 180도 달랐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을 크게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오 복음 19장 14절)
여기서 말씀하신 어린이들은 대여섯 살 어린이들도 해당되겠지만, 더 폭넓게 적용됩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 단순하고 소박한 이들, 스스로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잘 알기에,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전적으로 맡겨드리는 이들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 어린이들,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신앙인들의 모범이요 이정표로 선언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많이 배웠다고 자부하는 바리사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의 능력과 공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의 모든 삶을 내맡기는 사람, 그분의 크신 자비에 매일 의탁하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선물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진정한 어린이들에게는 세상 온천지가 호기심 천국입니다.
매사를 설레는 마음으로 흥미진진하게 바라봅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상만사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수용합니다.
나이를 점점 들어갈수록 더 노력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어린이로 태어나서, 오랜 세월 어른으로 살았으니, 이제 다시 어린이로 되돌아갈 순간입니다.
어린이들이 지닌 삶의 특징은 나약함이요 미성숙이지만, 동시에 기쁨이요 희망, 천진난만함이요 신뢰심입니다.
어린이들은 오늘 내 처지가 아무리 암담하더라도 큰 실망에 빠지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하고 감사합니다.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으며 일상 안에서의 작은 기쁨을 찾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라는 말씀은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상황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그냥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것인가? 예수님께 걸었던 희망과 기대가(루카 24,21) 모두 물거품이 되는가?” 라는 생각 때문에 두려워했습니다.
그 두려움은 믿음과 희망을 모두 잃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데, 아직 부활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믿음과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시려고 당신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라는 말씀은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루카 20,38)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죽음이라는 것’에게 자기 자녀들을 빼앗기는 무기력한 신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런 신이 아닙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하느님은 죽음을 지배하시는 분이고, 당신의 자녀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하느님에게서 무엇을 빼앗을 수 없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런 분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당신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죽음이라는 것’에게 빼앗길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과정’이고, ‘새로운 시작’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같은 믿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라는 말씀은 “죽음은 끝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관문일 뿐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많다.’ 라는 말 때문에 이 말씀이 ‘좁은 문’에 관한 말씀과 모순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좁은 문’에 관한 말씀은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는 자격에 관한 말씀이고, ‘거처할 곳이 많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집’에 들어간 뒤의 상황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에 두 말씀은 모순이 아닙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이라는 말씀도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죽음은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봉헌이고 희생이며,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 승천, 재림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곳까지 가는 길도 알아야 한다.”로 해석됩니다.
당시에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고(루카 24,19-21), 부활 신앙은 아직 없었습니다.
토마스 사도 혼자서만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과 사도들이 전부 다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고, 전부 다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여기서 토마스 사도의 질문은 당시의 신자들과 사도들의 혼란스러운 심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
우리 인생의 ‘목적지’는 ‘아버지의 집’이고, 그곳까지 가는 길은 ‘예수님’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이라는 말씀은 예수님 외에는 메시아가 없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께 갈 수 없다.”는 “구원받지 못한다.”입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사도 4,12)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길 말고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교는 지금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고, 일부 사이비 종교나 이단 종파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을 메시아로 떠받들면서 구원이 아닌 멸망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들이 미신을 통해서 얻는 일시적인 위안은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만이 유일한 복음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유일한 ‘구원의 진리’ 라는 뜻입니다.
세속 사람들 가운데에는 과학 이론들만 진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들이 말하는 과학은 피조물인 인간의 학문일 뿐이지 구원을 가져다주는 진리는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참 생명’입니다.
세속의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들이 참 생명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만이 유일하게 참 생명이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예닮의 여정 - 늘 영원한 청춘(靑春)>
오늘은 어린이날입니다.
파스카 신록의 계절, 5월에 잘 어울리는 어린이날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은 예외없이 하느님의 영원한 어린이들입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마음 깊이에는 동심이 살아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삶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요, 영혼은 늘 영원한 청춘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문득 70년대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지금은 전설이자 신화가 된 문익환 목사님도 생각납니다.
그의 호는 “늦봄”이었고 그의 부인 박용길 장로는 “봄길”이었습니다.
청춘이란 말마디 뜻을 인터넷 사전에서 찾아봤습니다.
“새싹이 돋는 봄철이라는 뜻으로, 스무살 안팎의 젊은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을 일컫는 말”이라는 뜻도 경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열정적으로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이들은 영원한 어린이들이요 영원한 청춘입니다.
전번 스승의 날을 훨씬 앞두고 찾았던 46년전 초등학교 6학년 제자들 셋이 찾아와 2절까지 열창해 줬던 동요 중 하나가 어린이날 노래입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우리가 자라면 나라의 일꾼, 손잡고 나가자 서로 정답게,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남녀노소할 것 없이 어린이날 노래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코로나 이전 5월 소규모 단체피정 때마다 함께 불렀을 때 열창하던 60-70대 형제자매들의 모습도 눈에 선합니다.
그러니 푸르른 오월은 매일이 어린이날이자 하느님의 어린이들인 믿는 이들에게도 매일이 어린이날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 소개드리고 싶은 내용입니다.
나이 30대 중반부터 60대 중반되기까지 무려 30년 동안 매해 5월 어버이날 전후로 화분을 한결같이 사들고 왔던 자매님이 어제는 갑작스럽게 오느라 화분을 못 갖고 왔다 하기에 드린 덕담입니다.
이런 방문은 궁극적으로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자매님 자체가 살아 있는 아름다운 화분입니다.
자매님 방문 자체가 참 좋은 주님의 선물입니다.”
사실 좋은 분들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습니다.
요즘 우리 요셉 수도공동체가 회춘(回春)하여 봄을 맞이한 듯 아연 푸르른 희망과 기쁨, 빛이 가득한 역동적 분위기로 변했습니다.
신록의 숲같은 수도공동체 같고 우렁한 성무일도 소리도 신록으로 빛납니다.
젊은 수도형제들이 늘어났고 잠시 머물고 있는 도반과도 같은 여러분의 젊은 형제들 덕분입니다.
흡사 신록의 5월 공동체 분위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젊은 청원자 형제에게 준 덕담도 생각납니다.
“형제님은 믿음의 사관 생도 같네요.”
‘믿음의 사관학교’가 우리 요셉 수도공동체입니다.
어제는 외출했다 귀원했을 때 반가이 인사하는 젊은 수도형제가 흡사 소년처럼 보였습니다.
요즘 한창 배밭의 풀을 베노라 ‘풀과의 전쟁’에 여념이 없는 젊은 도반입니다.
잡초하니 생각나는 교황님의 말씀도 잊지 못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건강에 대해 물었을 때 화두같은 답변입니다.
“잡초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Weeds never die)”
완벽한 건강은 없고 잡초같은 웬만한 병들을 잘 관리하며 살면 된다는 뜻이겠습니다.
지난 번 헝가리 방문중 마지막날 성소주일에 했던 “문”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강론에서 어제에 이어 또 하나 인용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처럼 늘 활짝 열린 문으로 살 때 영원한 청춘의 삶이겠습니다.
교황님의 시각은 전 지구적, 글로볼적입니다.
세상 모든 그늘진 이들을 망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교회의 초원으로 인도하는 문이자 세상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나는 외로운 이들, 가난한 이들, 외국인들, 이민자들에 닫혀있는 문들의 현실에 개탄한다.
심지어 교회 공동체들까지 타인들에게, 세상에, 비정상적인 이들에, 하느님의 용서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닫혀 있는 문들 같다.
그러니 이 문들을 열자.
노력하자.
우리의 말, 우리의 행위,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처럼 결코 누구의 얼굴에도 결코 닫히지 않은 문이 되도록 하자.
어느 누구나 들어와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는 문이 되도록 하자.”
두려움이나 불안이 문을 닫게 합니다.
나는 문이라 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문을 열고 영원한 청춘으로 살게 합니다.
오늘 복음 서두에서 강조하는바 역시 믿음입니다.
믿음만이 두려움과 불안으로 닫힌 문을 열게 합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이어 주님은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며 거듭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그들의 믿음을 북돋아 주십니다.
그러나 결정적 말씀은 토마스에게 주신 답변입니다.
이런 답변을 이끌어 낸 토마스가 참 고맙습니다.
“나는 문이다.”에 이어 다음 예수님께서 천명하신 자기 신원에 대한 계시 말씀이 우리를 고무하고 격동케 하며 용기를 줍니다.
요한복음의 신학을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얼마나 복된 예닮의 여정인지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선언하신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비로소 아버지를 향한 길을 잃지 않고 진리 추구의 삶, 생명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니 말그대로 영원한 청춘의 삶의 실현이겠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신 주님이 없는 세상은 내적으로 참 무지하고 공허하고 덧없는 지옥과 같은 암흑暗黑의 세상일 것입니다.
다시 한번 고백하는 주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고백입니다.
아무리 반복해도 늘 새롭고 좋은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의 모두이옵니다.
저희의 사랑, 저희의 생명, 저희의 진리, 저희의 문, 저희의 길, 저희의 빛,
저희의 기쁨, 저희의 평화, 저희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바로 이런 예닮의 여정에 한결같이 충실한 영원한 청춘의 모범이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한분 자신있게 추가한다면 프란치스코 교황님이겠습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열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위대한 영원한 청년, 바오로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유다인들을 대상한 설교를 들어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된 삶을 사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우리 믿는 이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2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나 깊이 시편을 그리스도화하여 읽고 묵상하며 렉시오 디비나했는지 깨닫습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바로 오늘 화답송 후렴으로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바로 오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원한 청춘으로 다시 태어나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복음 내용의 바로 전 대목(요한복음 1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수난과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신 후,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십니다.
또 충성을 장담하는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하리라고 예고하신 뒤에 바로 오늘의 대목으로 이어지지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1)
이미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의 심정이 어떨지 헤아리고 계십니다.
계속되는 유다인들의 배척과 공격도 힘겨웠지만, 설상가상으로 방금 스승님이 보여주신 행위는 마치 유언과도 같습니다.
당신 스스로 수난과 죽음을 받아안고 계시지만 제자들로서는 이 모든 것들이 그저 비유나 상징이기를 바라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설마 설마 하면서도 마음이 갈라지고 어지러워지는 건 피할 수 없었겠지요.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요한 14,1)
사실 지금 제자들에게 필요한 건 믿음입니다.
한없이 추락해 곤두박질 친 밑바닥에서, 발끝조차 디딜 곳 없는 벼랑 끝에서, 희미한 빛 한 줄기 찾을 길 없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죽음밖에 남은 게 없는 듯한 무기력 한가운데서, 다시 힘을 쥐어짜서 생명과 진리를 부여잡게 만들 수 있는 실체는 믿음뿐이니까요.
삶의 질곡을 헤쳐오면서 깨지고 부서지고 갈기갈기 찢겨질망정 죽음같은 절망에 몸을 내맡기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킨 우리를 오늘 여기까지 오게 한 건, 돌아보면 믿음이었습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요한 14,3)
제자들에게 앞으로 이어질 일들을 찬찬히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자상함에 머무릅니다.
근데 예수님 참 바쁘시지요?
가서 자리를 마련하시고, 다시 오셔서 데려 가시고, 같이 계시겠다고 하시네요.
이미 세상에 오신 처음 움직임까지 치면 예수님의 동선이 아래위로 엄청나게 크고 게다가 반복적입니다.
그 반복을 조망하다 보면 아버지에게서 세상으로, 세상에서 다시 아버지께로, 또 세상으로, 또 아버지께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하나의 길이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그 길 자체이십니다.
하강과 상승, 또 하강과 상승...
그런데 단순히 아래위를 몇 차례 오가시는 것이 아니라, 비움과 영광, 고통과 위로, 죽음과 부활...
참으로 극적이고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계시지요.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사도 13,26)
오늘 독서 내용은 사도 바오로의 안티오키아 회당 설교 중 일부인데, 예수님의 강생, 즉 하강에서 시작해 상승과 하강, 또 상승의 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고 하십니다.
"곳"이라는 표현 때문에 자칫 하늘 나라를 공간적으로만 상상할 수도 있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 존재, 하느님 현존, 하느님 주권, 하느님의 영광,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심장... 등 그분 앞에 서면 미물에 불과한 우리가 예수님 덕분에 (감히) 깃들여 머무를 수 있는 거대하고 영원하며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모르는 하느님의 품이 아닐까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
그런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품,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길이고 방향이고 동행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셨던 대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밟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갑니다.
올라가는 길일 수도 있고 내려가는 길일 수도 있지만 상관 없습니다.
목적지가 하느님이시니까요.
살다보면 오르막길도 만나고 내리막길도 만납니다.
마냥 올라갈 수도 없고, 마냥 내려만 가지도 않습니다.
선택할 수 없는 외길도, 고민스러운 갈림길도, 심지어 막다른 길도 마주치게 되는 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순리입니다.
올라갈 때 목에 힘이 덜 들어간 만큼 내려가는 길이 유연할 것이고, 올라갈 때 어깨가 너무 치솟지 않았다면 내려갈 때 가벼울 겁니다.
우리가 걷거나 서 있는 모든 길이 예수님이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향해, 그분 품을 향해 그 안에 깃든 희로애락 생로병사를 짊어지고 묵묵히 뚜벅뚜벅 나아가는 중입니다.
목적지가 분명한 우리는 행복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앞으로 닥쳐올 수난과 고통, 죽음 앞에서 이 말씀을 하고 싶으신 듯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벗님의 마음상태가 어떠세요?
뭔가 불안하고 걱정스러우세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답답하기도 한가요?
괜히 나이탓인지 우울해지고 삶의 의미도 재미도 별로 느끼지 못하시나요?
괜히 화가 나고 짜증스럽기도 하나요?
조급한 마음이 일고 미래가 암울하게 느껴지나요?
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내 마음이 이렇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그럴 때 방법은 딱 한 가지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쓸데없는 걱정말고 그냥 부족한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되면 부정적으로 기울었던 내 마음이 희망적이고 긍정적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래야 내 맘이 밝아지고 나는 걸어가는 복음이 될 것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부활사건과 부활신앙’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부활사건은 역사적으로,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사건은 증인이 있습니다.
성경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의 첫 증인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여성의 증언은 별로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당당하게 부활의 증인으로 여성을 이야기합니다.
부활사건이 있었다는 공동체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사건으로 제자들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두려워서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선장이 없는 배는 거친바다를 건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삶이 변하였습니다.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변하였습니다.
절망은 희망으로 변하였습니다.
고통도, 박해도, 죽음도 전혀 겁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실천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 마귀를 쫓아내는 것, 병자들을 고쳐 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변화된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현대의 과학적인 기준으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시에는 현대와 같은 과학기술과 도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증언과 변화된 제자들의 삶이 부활사건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활사건에 대한 규명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활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토마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그렇습니다.
부활은 사건으로 규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사 중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신앙의 신비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선포해야 할 우리의 신앙입니다.
부활신앙의 핵심은 3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변화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사도는 담대하게 변했습니다.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로 변했습니다.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인까지 품어주는 사랑,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 수난과 고통을 감수하는 사랑, 조건 없는 사랑,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세 번째는 희망입니다.
캄캄한 지하무덤에서 신앙을 지켜왔던 것은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자 우리에서 당당하게 기도 할 수 있었던 것도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삶, 사랑이 없는 삶, 희망이 없는 삶은 부활신앙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서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빛나는 것,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이 진리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보여주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 온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사람은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하면서 행동은 다른 길을 찾고, 다른 진리를 찾아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은 우리 인생의 내비게이션입니다.
우리의 삶의 이정표입니다.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 행동, 기도를 자신들의 삶으로 증거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였고, 기도했으며, 서로 격려하였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런 사도들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기도하고, 늘 감사드리며,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10억 원을 가질 수 있다면 죄를 짓고 1년 동안 감옥에 가도 괜찮은가?’
이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졌고 조금 놀라운 응답 결과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감옥에 가지 않겠다고 답변할 것 같은데, 고등학생 56%, 중학생 39%가 “돈을 받는다면 감옥에 가도 괜찮다.”라고 답변한 것입니다.
그런데 “감옥에 가지 않겠다.”라고 대답한 아이들의 답변 이유도 ‘전과자가 되면 직업을 갖기 힘들다.’, ‘전과기록을 남기기 싫어서.’, ‘신상에 남으니까.’ 등 소위 스펙 관리를 걱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도 있었습니다.
“빨간 줄 그어지면 아무것도 못하는데, 10억 원 가지고는 강남 건물도 못 사요.”
미래의 꿈나무라고 하는 아이들이 ‘돈’에 매여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있어서 부자되는 것이 성공이고, 부자가 되어야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부자는 행복한 사람일까요?
청소년 행복지수가 OECD 국가 중 최하위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돈 자체는 수단일 뿐인데, 돈이 목적인 삶을 살고 있기에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 역시 그 책임에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 부모는 아이가 아르바이트한다고 하면, “쓸데없는 것 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늘 돈 걱정에 빠져 있습니다.
아이들은 돈의 소중함을 알 기회가 없었고, 돈 걱정하는 어른을 보면서 그냥 많이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돈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돈 자체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더 큰 가치를 가르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돈 많이 벌라고 한 번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더 소중한 가치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돈 역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수단일 뿐입니다.
자선, 희생 등의 사랑 실천을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런데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분명히 후회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최후 만찬 후 제자들과의 담소 시간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몇 시간 안 남은 죽음 앞에서 얼마나 침통하셨을까요?
그런 중에서도 제자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죽음 후 실망에 잠길 제자들이 또 악의 세력과 싸워야 할 것을 내다보시며 격려와 안심시킬 약속을 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요한 14,1.2)
이렇게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뿐이고, 이 믿음으로 그들은 행복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늘 맨 뒷자리로 밀려날 때가 많습니다.
과연 무엇이 중요할까요?
무엇이 행복으로 이끌어 줄까요?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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