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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서북능선에서 달궁으로...(구인월 ~ 바래봉 ~ 세걸산 ~ 고리봉 ~ 정령치~ 달궁마을)
13호 태풍 링링의 위세는 대단했습니다.
그나마 수증기를 많이 품고 오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듯 싶을 정도니....
이로 인한 피해가 크지 않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산꾼들의 머리는 참으로 이상한 방향으로만 돌아갑니다.
불청객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도 그 이면에 "바람이 티끌들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난 다음의 지리는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그러면 아주 청명한 그리고 깨끗한 하늘을 보게 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태풍이 대만 우측에서 북상을 하고 있을 때인 9. 4.부터 그런 생각만 합니다.
그러니 9. 6. 토요일 링링 때문에 지리 도장골 산행이 연기된 데 대해서 조금 있었던 불만도 쉽게 없어집니다.
링링은 토요일 남한 지역을 빠져나가니 일요일 지리산은 말끔한 터!
그렇다면 지리산 어디?
오랜만에 서북능선을 타고 가다 좀 밋밋한 감을 버리고 달궁유적지를 탐사해?
지도를 보니 정령치 휴게소 우측 화장실 뒤로 돌아나가 도랑모랭이골즉 언양좌골로 내려오다 두 군데 합수부를 지나서 우틀하여 매막봉 능선이나 골을 따라 오르면 될 것 같습니다.
산꾼들의 생각은 다 그게 그거 같습니다.
즉 이럴 즈음 메시지가 날아옵니다.
"형님 내일 뭐하세요?"
한창 산맛이 들은 푸우 동생의 글입니다.
"글쎄 비 안 오는 걸 봐서 관악산이나 갔다올까?"
마음에도 없는 멘트 하나 날립니다.
"지리산 안 가세요?"
실망한 빛이 역력합니다.
"갈까? 그래 어디 가고 싶은데?"
이때 동시패션으로 날아드는 메시지.
"현오, 안 내려와. 비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부는데......."
지리산 신선이고자 하는 고남 님이십니다.
"그래. 가자. 23시 50분 버스로 인월 가서 거기서 도시락 먹고 네가 가고 싶다는 서북능선 타고 가다가 달궁으로 내려오자."
사실 일요일은 억울하지만 날씨가 오락가락할 것 같아 그냥 집에서 일이나 하려고 했는데....
그래서 저녁에 반주로 오징어 데침을 안주로 소주 한 잔 까지 했는데....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바빠집니다.
편한 곳이니 갈아 입을 옷만 챙깁니다.
노모께서 잠드신 걸 확인하고 집을 나섭니다.
마침 전철역 빵가게에서 빵을 싸게 파는 시간이군요.
빵 두 개를 사서 챙기고는 남부터미널로 갑니다.
지도 #1
태풍의 여파인가요?
평소면 북적일 남부터미널이 오늘은 한산하기만 합니다.
승객이라고는 저와 푸우님 등 달랑 두 명만 태운 버스는 논스톱으로 인월까지 갈 거라고 하시는군요.
함양에서 다음 운행을 해야 하므로 손님이 없으면 빈 버스라도 가야하는 형편이라고 하니....
문자 메시지 하나 보내고 잠을 청합니다.
눈을 뜨니 02:30
버스는 막 고속도로를 벗어나 함양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함양에서 뒤따라오는 동서울 발 버스로 갈아타고는 인월에서 하차하여 고남님과 조우합니다.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먹고 물 하나씩 챙기고는 장비를 챙깁니다.
03:47
스틱이 말을 안 듣는구요.
오래 썼습니다.
7년을 넘게 썼으니....
고마운 스틱.
그 시간 인월 풍경.
03:51
구인월교를 건너면서,
람천을 봅니다.
인월은 예로부터 역이 설치되어 있던 곳일 정도로 교통의 요지였다. 인월의 둘레길 안내센터에 들러 지도 하나를 얻고는 구인월교로 람천을 건넌다.
람천은 주촌천이 발달하여 형성된 물줄기이다. 변화무쌍하게 변화하는 물줄기는 그만큼 지리산의 골이 많고 또 깊다는 반증이겠다. 우측으로 덕두산1151.5m이 보이고 그 아래 민박마을이 달오름 즉 월평마을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91쪽
월평마을로 들어섭니다.
곧 舊인월이라는 마을을 이름입니다.
인월이라는 이름은 이성계와 같이 한다고는 합니다만....
너른 임도를 따라 가다보면 간벌과 벌목 작업 현장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럴 즈음 좌측으로 드디어 인월면소재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운봉을 지나 인월로 들어선다. 인월引月이라는 지명은 1380년 태조 이성계가 아지발도와 싸울 때 날이 어두워지자 달月을 끌어들여引 밝힌 다음 그 기운으로 승전하였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역시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리는 것이 그보다 약 440여 년 전인 940년 그러니까 고려 태조 때 교통의 요지인 이곳에 역驛을 설치하면서 남원부 운봉현 인월역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이성계가 달을 끌어 전쟁에 이용했다는 설"은 역시 그저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를 인용한 것으로 믿을 바 못 된다. 한편 지금의 인월면은 1998년까지만 해도 남원군 동면 인월리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다.
- 졸저 전게서 85쪽
03:59
이곳 월평마을에서 잠깐 우측으로 조금만 들어가 보자. 100여 m 정도 길을 따라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이 舊인월이다. 마을 입구에는 구인월마을회관이자 경로당이 깨끗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이른바 ‘지태교智太敎의 신당神堂’이라 불리는 곳인데 제4부에서 자세히 본다.
- 졸저 전게서 89쪽
인월에서 구인월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인월교를 건너야 한다. 월평리가 인월리로 이름을 바꾸는 바람에 이제는 월평마을이 월평리의 흔적만 말해줄 따름이다. 그 인월리의 구인월마을회관이 이 코스의 시작이다. 그러니 ‘지태교智太敎의 신당神堂’인 구인월마을회관을 지나면 재실齋室을 지나 이정표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정표는 덕두산을 가리키고 있고 덕두산과 구인월마을(월평마을)은 3.4km의 거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졸저 전게서 473쪽
여기서 덕두산으로 오르는 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재실을 지나 바로 좌틀하여 오리지널 능선을 타는 방법,
또 하나는 그저 임도를 따라 직진하여 오르다 좌틀하여 이 출입구로 오르는 방법,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좌틀하지 않고 직진하여 개울을 건너 밭 옆으로 직진하여 이정목이 있는 곳에서 이들 루트와 합류하는 방법 등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제일 용이하기는 마지막 방법일 것입니다.
우리는 두 번 째 루트로 능선에 진입하기로 합니다.
04:07
그렇게 본격적으로 지리의 품안으로 들어갑니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이름 지리산.
"콩닥콩닥...."
그 느낌을 가슴에 담고 발을 내딛습니다.
아직 링링으로 인한 입산통제가 풀리지 않았나요?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아마 공단에서는 직원들이 등로 사정을 다 파악한 다음에야 해제 여부를 판단할 것입니다.
그분들을 대신하여 서북능선 구간은 우리가 그 역할을 맡기로 자청합니다.
그 작업의 시작은 우선 '거미줄 제거' 작업입니다.
비가 그치자마자 녀석들은 무지막지하게 새집을 짓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계속 스틱을 휘저으며 고도를 높여야 하니 그만큼 에너지 소모가 더 심합니다.
04:30
힘겹게 614.4봉에 오릅니다.
올초 2월에 고남님과 걸으며 걸어두었던 제 표지띠가 저희를 맞이해 주는군요.
04:43
이정목도 나오기 시작하고....
지적도근점도 보고...
도근점은 삼각점 보조 시설물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05:07
829.1봉으로 오르고....
고도를 많이 높였습니다.
05:46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이 이정목을 보면 덕두산도 이제 코앞입니다.
좌틀하여 조금 더 올라가면,
05:54
덕두산입니다.
지리산에 속한 봉우리임에도 어엿하게 '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봉우리입니다.
그럼에도 공단에서는 덕두봉이라는 이름을 고수하고 있으니....
인월산이라고도 불리는 덕두산에 오르기 바로 전 흥부골자연휴양림(2.5km)으로 갈리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이 지리산둘레길 제2구간에서 만났던 그 휴양림이다. 그러고는 300m를 더 진행하면 덕두산1151.5m에 오를 수 있다. 조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덕두산에서 2등급 삼각점(운봉22)도 확인한다. 이 덕두산이 지리산에서 갖는 위상은 어떨까? 필자는 별 특이할 것도 없는 이 덕두산에 ‘봉峰’이 아닌 ‘산山’이라는 명찰을 달아준 이유를 지리서부능선의 첫 봉우리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지리산의 시작인 곳이라는 얘기다. 백두대간이 아닌 지리산만 놓고 볼 때 덕두산이 서부의 관문을 지키고 있는 봉우리인 만큼 ‘산속의 산’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본 것이다. 이 덕두산을 오름으로써 이제 지리의 빗장을 열고 그 넉넉한 어머니의 품으로 들어가게 된다.
- 졸저 전게서 474쪽
여기서 2등급삼각점(운봉22)을 확인하고....
지리산의 지형상 바로 코앞 산내와 마천 너머 천왕봉 등 지리 주릉과 동부능선 일부가 보이고....
그리고 그 좌측으로 동쪽에서 붉은 기운이 올아옵니다.
구름이 강이 되어 우측 와불산에서 흘러내리는 능선이 좌측 법화산에서 흘러내리는 곳과 만나는 곳.
저 부근이 임천이 엄천이 되는 옛 엄천사가 있던 동강마을 부근이겠죠.
법화산 우측으로 오늘의 태양이 떠오릅니다.
늘 이럴 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의 말이 생각나죠.
"After All Tomorrow Is Anther Day"
덕두산에서 작은 봉우리 세 개 정도를 넘으면(1.4km) 지리서부의 중심 바래봉1186.2m으로 오를 수 있다. 바래봉은 운봉읍, 인월면, 산내면 등 세 개의 읍·면이 만나는 이른바 삼면봉이다. 이 능선에서 인월면과 산내면의 면계인 왼쪽 능선을 따르면 964봉을 지나 둘레길 제3구간이 지나는 배너미재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다.
사방으로 조망이 트인 이 바래봉에서는 반야봉은 물론 천왕봉까지 조망할 수 있으며 앞으로 진행할 세걸산과 만복대 라인을 감상할 수 있다. 그 우측으로는 구룡폭포에서 넘어오는 둘레길 1구간은 물론 고리봉에서 흘러내리는 백두대간이 수정봉을 지나 고남산에서 백운산으로 흐르는 모습은 물론 성산과 황산 등 운봉의 모든 산들을 다 감상할 수 있다는 게 이 바래봉의 자랑이다.
- 졸저 전게서 474쪽
지도 #2
푸우님이 담아주셨습니다.
06:34
아!
근데 이게 뭡니까!
바다.
구름의 바다.
그래서 雲海입니다.
구름이 거대한 물결이 되어 철~썩, 철~썩 소리를 내며 이 봉우리 저 봉우리에 부딪칩니다.
투구봉에서 삼봉산으로 이어지는 임천지맥과 그 우측의 백운산과 금대봉을 잇는 등구재 사이로 물길은 넘쳐 흘러 마천면을 뒤덮고는 동강마을을 뚫고 휴천면으로 들어서고 있는 모습입니다.
좌측의 볼록 솟은 봉우리가 팔량재를 넘은 오봉산.
그 뒤로 수도산과 가야산이 있는 황강지맥.
중앙 멀리 황매산.
그리고 그 우측으로 정수산과 그 앞의 왕산과 필봉산.
앞은 산내면과 운봉읍의 면계가 되는 1016.1봉 라인.
그 좌측 뒤가 백운산 ~ 금대봉 라인.
그 뒤가 독녀암(함양독바위) ~ 와불산 ~ 새봉 라인....
그 우측으로 영랑대와 소년대까지 보이고,
앞의 북부능선의 삼정산 뒤로 지리의 주릉 천왕봉을 중심으로 연봉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줍니다.
북부능선과 그 우측으로 삼각고지와 명선봉 그리고 뾰족한 토끼봉을 봅니다.
북부능선의 벌바위가 살짝 보이니 와운카페 얘기도 한 번 해보고....
그러고는 그 우측의 반야봉과 노고단을 보게 되고...
반야봉을 보니 얼마 전 내려온 심마니능선도 봅니다.
종석대는 나무에 가렸고....
이제서야 정상석을 봅니다.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이죠.
이 바래봉은 멀리서 봤을 때 '바리', '바리떼' 즉 스님들이 사용하는 밥그릇 같이 생긴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발鉢은 사실 우리의 옛말 'ㅂ.ㄺ' 즉 '밝음, 광명, 신, 하늘 , 태양'등을 지칭하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이 'ㅂ,ㄺ'은 한자가 들어오고 시간이 흐르고 그 말을 사용하는 지방에 따라 박朴, 백白, 배培, 발鉢, 불不 등으로바뀌게 됩니다.
우리나라 지명에 발산鉢山이라는 지명이 많은 것도 이런 취지와 무관치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변형된 'ㅂ,ㄺ'란 지명이 바래도 되고 발리도 되고 이곳과 같이 바래도 된 것입니다.
그만큼 이 '바래봉'은 예전 백제나 가야 그리고 신라인들이 숭모하던 봉이었음은 쉽게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리서북능선.
중앙에 뾰족하게 서 있는 고리봉과 그 우측의 만복대.
그리고 그 우측으로 서시지맥이 흐르고 있습니다.
아!
그런데 그 서시지맥의 견두산 뒤 구름 위로 무등산이 떠 있군요.
서시지맥에서 갈라진 능선이 우측으로 흘러내려 만나는 곳.
그렇죠.
구룡폭포가 있는 곳이죠.
저 구룡폭포는 백두대간과 이 지방의 지형사를 연구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자료입니다.
즉 예전 백두대간길은 지금과 같이 고리봉 ~ 고기리 ~ 가재마을로 진행하는 길이 아니고 저 구룡폭포로 진행하는 능선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지도를 보니 구룡치 부근에서 지선支線 하나가 우측으로 빠져나가는 게 보인다. 구룡폭포 지선이다. 사실 보는 이에 따라 1구간의 하이라이트는 오히려 구룡폭포로 볼 수도 있다. 구룡폭포는 정규 둘레길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명승지로서 갖는 무게 때문에 이렇게 순환코스를 따로 만들어 놓았다. 이 책에서는 이런 구간을 지선支線이라 부른다.
백두대간은 생물生物이다
문제는 이 구룡폭포가 가지고 있는 지위의 문제이다. 구룡폭포로 내려가는 원천천은 물줄기가 좁고 상당히 빠르다. 관련하여 좀 어렵긴 하지만 피할 수 없는 문제이고 산줄기 특히 백두대간과 관련된 문제이니 짚고 넘어가자. 예전 그러니까 적어도 신생대 제4기 정도 그러니까 2~3백만 년 전에는 백두대간이 지금의 고남산~여원치~수정봉에서 노치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이백면과 주천면의 면계를 따라 진행하다가 728.8봉에서 덕치리 방향으로 꺾여 지금의 구룡폭포를 넘어 906.2봉~1109.3봉을 지나 잠시 서시지맥 길을 따라 만복대로 가는 루트였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신생대 제4기 이후 우리나라의 지형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다음 이 부근에서 두부침식頭腐浸蝕으로 인해 하천쟁탈stream piracy이 일어났다.
<사진 6〉 하천 쟁탈로 바뀐 백두대간길
살펴보면 운봉고원의 지질은 대부분 중생대 대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원의 남쪽과 북쪽에는 지리산 변성암 복합체가 분포하고 있다. 운봉고원은 해발고도 450~550m 범위의 분지상 고원이다. 남동쪽의 산지에서 주촌천周村川이 발원하여 람천濫川에 합류한 다음 북류 및 동류하여 엄천강을 지나 남강에 유입되어 결국 낙동강에 흘러든다. 한편 백두대간 너머인 운봉 고원 최남단의 고기리에서는 원천천이 발원하여 좁고 깊은 협곡을 형성하며 서쪽으로 흘러 요천에 유입되어 결국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운봉 고원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주촌천의 유역은 침식 작용이 활발하지 않지만 경사가 매우 급한 원천천 유역은 하천의 침식작용이 상대적으로 활발할 것이다. 그러니 원천천은 좁고 깊은 협곡을 이루며 상류 쪽으로 골짜기를 더 확대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천천과 주촌천의 경계를 이루는 고기리, 덕치리와 주촌리 일대에서는 원천천이 주촌천 유역에 침입하여 그 유역을 원천천의 유역으로 취하는 하천 쟁탈(stream piracy)이 진행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인 것이다. 그러니 위 지형도의 #60 도로 중 백두대간이 지나는 ‘가’~‘나‘ 구간의 좌측은 하천쟁탈의 흔적으로 지금은 주천면 땅이지만 예전에는 운봉땅이었을 것이고, 그 하천인 '舊 주촌천' 즉 무능하천은 물이 흘러 그 물은 북동진하여 람천에 합류되어 남강→낙동강으로 가는 물줄기였을 것이다. 곧 낙동강의 최상류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또한 원천천은 지금의 고기리가 아닌 덕치리와 호경리의 경계에서 그저 호경리로 흘러 요천에 합류하여 섬진강으로 흐르는 물줄기였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럴 경우 고리봉~고기3거리~노치마을~759.2봉의 라인은 백두대간이 아닌 것이 된다. 반면 만복대~1109.3봉~906.2봉~728.8봉~ 759.2봉(일명 덕운봉)라인이 원백두대간 라인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지금의 운봉고원의 백두대간 라인은 곡중분수계谷中分水界divide in valley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현재 운봉 고원의 남서쪽에 치우쳐 위치한 백두대간의 분수계가 수만 또는 수십만 년 후에는 고원의 중앙부로 이동될 가능성이 높다.
백두대간을 걷는 이들이여! 고리봉에서 내려와 고기삼거리~노치마을의 60번 도로를 따라 걷는 약2km 구간을 그냥 걸을 일이 아니다. 도로 왼편은 섬진강 최상류 지류인 원천천 유역으로, 원천천이 두부침식으로 분수계를 넘으면서 과거 낙동강 최상류 구간을 쟁탈한 곳이라는 사실과 도로 오른편은 여전히 낙동강 유역이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자. 그러면서 원천천은 급경사의 사면을 따라 활발하게 두부침식을 하면서 분수계를 넘고 하천쟁탈을 하였기에, 완만하게 이어지는 낙동강 최상류 구간보다는 침식력이 탁월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도로를 경계로 농경지 바닥의 고도는 왼편이 오른편에 비해 10cm가량 더 낮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자. 그래야 백두대간이 더 재미있을 것 아니겠는가! 이는 둘레꾼들도 마찬가지이다.
- 졸저 전게서 53쪽
고리봉에서 내려온 대간길은 이 비산비야 같은 운봉고원을 맥이 끊길 듯이 진행하여 저 앞의 수정봉으로 올라 다시 고도를 회복하는 듯 싶지만 이 운봉고원이 해발 500m 정도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런 기우는 없어집니다.
고남 님이 한 마디 덧붙입니다.
"예전 모내기 할 때 보면 운봉은 남원에 비해 한 달 더 빨리 모내기를 했습니다."
운봉읍.
중앙 푹 파인 백두대간 길 여원재 뒤로 남원의 진산 교룡산이 보입니다.
역사적으로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는 교룡산.
여원재에서 넘어오는 길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길'임을 인식합니다.
대간길을 따라 방아산성을 지나 그 우측으로 고남산을 봅니다.
고남 님이 고남이라는 닉을 갖게한 저 고남산.
오늘따라 그 위용이 무척이나 돋보입니다.
그 고남산 뒤로 요천지맥의 천황산과 개동산 그리고 우측의 팔공산까지.....
마치 눈이 온 듯도 싶고....
숨이 막혀옵니다.
그런데 성산533.5m 앞에서 24번 도로를 따라 얕은 안개가 뻗어 있고.....
권포리와 매요리 쪽으로도.....
이런 멋진 풍광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우측의 팔공산은 그저 구름 위에 떠 있는 섬이 되었고....
우측 백운산 뒤로 덕유산도 뚜렷하고....
가야 할 서북능선 라인.
서북능선 길 중앙 세걸산 뒤로 종석대가 보이고....
그리고 만복대와 고리봉.
반야.
그 앞으로 심마니 능선 우측으로는 도계道界능선.
그리고 그 뒤가 백두대간.
중앙 토끼봉,
좌측의 명선북릉과 심마니능선 사이가 뱀사골.
북부능선과 그 뒤 주릉인 백두대간.
하늘은.....
푸른 하늘은....
잿빛과 붉은 빛 그리고 흰 구름이 푸른 하늘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럴 때 한 컷의 사진.
추억을 남길 만한가요?
이제 그만 가시죠?
데크를 내려서려 하는데.....
구름이 서서히 운봉을 뒤덮기 시작하는데.....
좌측으로 이상한 빛이 보입니다.
이런 경우도 있군요.
무지개입니다.
셋이서 어린 아이들 같이 환호룰 하며....
저는 잽싸게 음악 모드로 들어갑니다.
Rainbow의 'Catch the rainbow'를 틀고....
눈으로는 풍광을, 귀로는 그와 딱 떨어지는 음악을 감상합니다.
아!
운무 속에서 무지개라....
When evening falls
저녁이 질때쯤
She'll run to me
그녀는 내게
달려올거예요
Like whispered dreams
속삭이는 꿈과 같이
Your eyes can't see
당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요
Soft and warm
부드럽고 따뜻하게
She'll touch my
face
그녀는 나의 얼굴을 어루만질 거예요
A bed of straw Against the lace
레이스로 장식된 침대가
아닌
짚으로 만든 침대에서
We believed we'd catch the rainbow
우리는 무지개를 잡을 수
있다고 믿었죠
Ride the wind to the sun
태양까지 바람을 타고
Sail away on ships of
wonder
상상의 배를 타고 항해해요
But life's not a wheel
With chains made of
steel
그러나 삶은 쇠사슬로 얽힌 수레는 아니죠
So bless me come the dawn
그래서 새벽이 찾아온 것을
감사해요
Come the dawn
새벽이 옵니다
Come the dawn
새벽이 옵니다
Come the
dawn
새벽이 옵니다
Come the dawn
새벽이 옵니다
30분 가까이 머물던 바래봉을 떠납니다.
예전에 그 가파르던 언덕은 이제 나무 데크로 다 바뀌었고....
흉측했던 나무 뿌리와 벗겨진 황토흙은 이제 안 봐도 되는군요.
조망대를 지나,
07:10
철쭉밭을 지나 여기서 물을 보충하고....
멋진 임도를 걷습니다.
07:15
용산삼거리에서 좌틀합니다.
이 초소가 있던 자리에 예전에는 시멘트 브록으로 지어진 관리사가 있었습니다.
양들의 천국이었던 운봉목장
그 멋진 풍경을 보면서 내려오면 온통 철쭉나무이다. 봄의 바래봉은 철쭉을 보러온 상춘객들로 몸살을 앓을 정도이다. 예전에 이곳에 국립종축장의 운봉목장이 있었다. 그러니까 1969년 박정희 대통령 집권시절에 면양사업의 일환으로 바래봉, 팔랑재 부근에 목장을 만들어 1972년부터 1976년까지 5년 간 호주에서 면양 2,717두를 들여와 사육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나무란 나무, 풀이란 풀들은 다 뽑아내고 새롭게 목초지를 조성하게 되었다. 이때 독성이 있어 철쭉은 건들지 않는 면양의 특성 때문에 철쭉만은 남겨두게 되었다. 역시나 먹성 좋은 면양들은 다른 나무와 풀은 다 먹으면서도 철쭉만은 건드리지 않아 오히려 지금 이렇게 철쭉만 더 번성하게 된 것이다. 양떼들이 놀던 구간은 바래봉~부운치였다. 그러니 그 구간은 목초지 철망이 처져있었고 지금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년 365일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바래봉 샘터를 지나 예전 양떼 감시사가 있던 자리는 초소가 자리하고 있고 그 우측으로 차량이 드나들던 넓은 임도가 있는 바래봉 삼거리를 지난다. 여기서 우회전하여 임도를 따르면 용산주차장으로 내려가 운봉읍으로 나가 둘레길 1구간의 종점이자 2구간의 시점인 운봉초교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직진을 하여 성삼재를 향해 걷는다. 이 지리서부능선 중 목장자리였던 바래봉 ~ 부운치의 4km능선은 그야말로 철쭉천국이다. 지리산 철쭉하면 세석철쭉인데 그 이름을 무색하게 할 정도다. 다 저 면양 덕분이다.
- 졸저 전게서 475쪽
온통 철쭉 뿐입니다.
나무 계단 좌측으로 팔랑마을 하산 이정표가 세워져있다. 예전의 등로를 나무 데크로 유도하여 우회하게끔 새로운 등로를 만들어 놓았는데 양쪽으로 억새풀이 키를 자랑한다. 가을이면 이 억새가 꾼들을 부를 것 같다.
- 졸저 전게서 476쪽
훼손이 심했던 이 길도 이제는 나무 데크만 따라 진행하면 됩니다.
거미줄의 저항은 여기서 또 시작됩니다.
운해는 여전히 스쳐 지나가고....
팔랑마을.
좌측 산내에서 마천으로 가는 60번 도로는 여전히 구름에 덮혀 있고....
지나온 바래봉.
그 뒤로 푸른 하늘.
구름은 양떼 구름입니까?
진행 방향으로도 여전한 푸르름....
다만 이런 기분을 깨는 녀석.
거미입니다.
얼굴과 머리는 완전히 감춘 채 팔은 계속 휘저으면서 녀석들을 제거합니다만 양이 워낙 많군요.
배가 고프니 잠깐 가지고 온 빵이나 김밥을 먹고....
15분정도 쉬었다 다시 길을 갑니다.
지겨운 거미줄....
08:16
산덕임도로 내려가는 길을 지나면 우측 백두대간 뒤로 멀리 요천지맥의 천황산이 보인다. 1121.9봉에서 3등급삼각점(운봉307)을 확인하고 '부운치'라는 이정목이 있는 곳을 지나는데 이 이정목의 지명은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지명 위치와 상위하긴 하지만 이곳으로도 부운리로 내려갈 수 있다. 정작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상의 ‘부운치’에는 공단 이정목은 설치되어 있지 않지만 몇 장의 표지띠가 부운리 마을로 내려가는 길임을 알려주고 있다.
- 졸저 전게서 476쪽
"그런데 아무래도 오늘 등로 사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분명히 공단직원들과 조우를 할 텐데 분명 우리가 들어온 곳을 물을 테고...그냥 사실대로 이야기 하면 될 것이다"라는 취지의 얘기를 나눕니다.
08:26
뒤를 돌아 바래봉과 조금 전 아침을 먹은 장소를 봅니다.
그러고는 헬기장으로 조성된 1121.9봉에 오릅니다.
풀속에 숨은 3등급삼각점(운봉307)을 찾아내고....
운봉 고원 건너 대간 길에 있는 수정봉.
08:33
부운치를 지납니다.
부운치를 지나 작은 봉우리에 올라서자마자 반대방향에서 오는 두 분을 만납니다.
똑같은 생각을 가진 산꾼.
이분들은 성삼재에서 출발하였다고 합니다.
"입산 금지가 해제된 다음에 산행을 하시라."고 서로 장난스런 충고(?)를 점잖게 나눕니다.
지도 #3
08:59
1142.6봉을 지나고,
이 일대에 오늘 새벽에 훑고간 멧선생의 흔적입니다.
등로를 따라 녀석들이 쟁기질을 하고 지나갔습니다.
여러 마리의 소행입니다.
09:06
부운마을.
금방 구름으로 뒤덮이는군요.
영원봉과 좌측 삼정산.
그 뒤로 중봉과 천왕봉.
좌측 삼각고지와 우측 명선봉.
그리고 그 우측의 뱀사골과 화개재.
새걸산을 가리고.....
09:27
그리고 새동치입니다.
전북학생수련원으로 빠지는 길이니 탈출로로 용이하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등로 상태가 너무 좋다. 편안하게 진행하면 이내 세동치이다. 우회전하면 전북학생교육원으로 내려가 수철리로 진행하게 된다. 그러고는 행정리 정도에서 지리산 둘레길 제1구간과 만나게 된다. 이 세동치에서 직진을 하여 조금 치고 올라가면 서부능선의 중심에 있는 세걸산1220m이다. 이곳에서의 조망도 바래봉 못지않다. 오히려 만복대에서 종석대와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라인은 가까이 온 만큼 이곳이 바래봉을 압도한다.
- 졸저 전게서 477쪽
09:42
그러고는 세걸산으로 오릅니다.
중앙 좌측으로 고리봉이 보이고....
종석대와 만복대는 완전히 가렸군요.
여기서 보는 조망도 일품인데 좀 아쉽군요.
하지만 오늘 바래봉에서 실컷 보았으니 그나마 아쉬운 마음은 좀 덜합니다.
만복대가 살짝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덮는군요.
10:06
1212.1봉을 지나는데....
아니나 다를까 공단직원과 조우를 합니다.
인사를 나누고....
"아직 해제가 안 됐습니까?"
3일 째 입산통제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 직원의 손에는 전지가위와 부채 하나가 들려 있습니다.
전지가위는 바람에 쓰러진 나뭇가지들을 치우는 용도로 그리고 부채는 바람을 내는 용도와 거미즐 퇴치용일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저희가 지나온 바로는 그런대로 몇 개의 나뭇가지만 넘어갔을 뿐 크게 진행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저희는 정령치 정도에서 하산할 생각입니다. 통제 확인하지 못하고 올라와 죄송합니다."
어서 내려가라는 얘기를 듣고 헤어집니다.
그러면서 "거미즐 다 치우면서 왔으니 불편함은 그만큼 덜으실 것 같습니다. 수고하십시오."
10:18
정령치 2.8km라....
1시간이면 되겠군요.
근데 이제부터는 하루살이 같은 날파리의 공습이 시작됩니다.
눈으로 들어오고 코로.....
갑자기 며칠 전 한 잔하다가 벌어진 콧물 해프닝이 생각이 나고....
10:37
1266.5봉을 지나고.....
반야봉으로 이어지는 지리 주릉.
진행 방향.
광산골.
심마니능선으로 향하면서 좌우로 갈리는 모습도 확연하고....
11:21
그렇게 고리봉으로 오르지만 저 하루살이 떼에 쫓겨 도망을 치듯 현장을 빠져나갑니다.
그래도 삼각점(운봉28)은 확인해야죠.
세상에...
인간이 하루살이에 쫓겨 도망오다니.....
그런데 이 서북능선에는 고리봉이 두 개가 있습니다.
이 고리봉1305.4m과 묘봉치 지나 당동삼거리 가는 길에 있는 고리봉1248.0m 등이 그것입니다.
어떤 게 진짜 고리봉인가?
정상석이 있는 고리봉1248m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작은 고리봉’이다. 멀리서 보면 이 고리봉은 만복대와 노고단 혹은 반야봉에 눌려 좀 왜소하게 보이긴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까 본 백두대간이 갈리는 2등급 삼각점이 있었던 1305.4m의 고리봉과 구분하여 이 봉우리를 작은고리봉이라고도 부른다. 합당할까?
고리봉 얘기가 나왔으니 이참에 아예 정리하고 지나가자. 예전 국립공원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이 '작은 고리봉'이 두리봉으로 실려 있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우리 고어古語에서는 고리봉의 고高와 두리봉의 두頭 모두 높은 정상의 봉우리를 뜻하는 공통점이 있어 이에 착안하여 두 봉우리를 구분하기 위하여 그리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백두대간이 알려지면서 고리봉이 산행 이정의 중심이 되고 두리봉이 인구의 회자에서 밀려짐에 따라 그 둘을 구분하고자 '큰'자와 '작은'자를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고어를 놓고 보자면 높을高 보다는 머리頭가 더 높고 '대장'의 의미로 자주 채택되었음은 백두산을 통하여 이미 증명이 되었던 터, 그렇다면 오히려 ‘작은고리봉=고리봉’, ‘큰 고리봉=두리봉’이라 칭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한편 예전 서부능선의 고리봉에서 가지를 쳐 고기리로 떨어지던 탈출로가 이제는 거꾸로 백두대간에서 갈라지는 갈림봉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이 고리봉에 삼각점 그것도 2등급 삼각점(운봉 25)이 박혀 있어 그 중요도는 익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쨌든 지리산의 한 축을 담당했던 서부(북)능선의 중심이 만복대보다 오히려 고리봉 즉 큰고리봉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작은고리봉은 달궁과 관련하여 황장군이 지키던 황령치가 지금의 묘봉치로 추정되는 만큼 이참에 이 작은고리봉을 아예 묘봉妙峰으로 부르는 건 어떨까?
-졸저 전게서 485쪽 이하
남원시 주천면과 산내면을 잇는 737번 도로.
11:33
이정목을 지나면,
호젓한 길을 지나,
정령치입니다.
11:38
오늘은 관광객도 그리 많지 않군요.
매점으로 내려가 캔맥주 세 통을 사서는 일행을 기다립니다.
이때 마침 대간팀들이 버스에서 내려 준비가 한창입니다.
이 시간에 도착했으면 가재마을 까지 가나요?
20분 정도 쉬었다가 자리를 뜹니다.
그래도 인증샷 한 번 날리고....
우리가 내려갈 언양좌골.
반야봉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12:18
이리로 내려갑니다.
저수조 뒤로 돌아나가,
무턱대고 물길을 찾습니다.
물길을 따라 골은 만들어질 것이고 그 옆으로 길은 만들어져 있을 겁니다.
고리봉을 내려오면서 덕동마을로 하산하는 이정목을 만나고는 이내 새롭게 단장한 동물이동통로와 휴게소가 있는 정령치이다. 휴게소의 화장실 뒤로 가면 언양골을 타고 남원시 산내면 덕동리의 달궁마을로 내려갈 수 있다. 달궁은 861번 도로를 이용할 수도 있다.
달궁 가는 길
산내면 대정리에서 노고단 정령치로 향하는 861번 도로를 따라 오르다가 뱀사골 입구인 반선을 조금 지나면 우측으로 달궁 마을이 나오는데 이곳 주차장 바로 아래에 궁터 흔적이 남아있다. 지금은 초라하게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 이곳이 예전 마한의 왕이 쫓겨 와 만든 도성의 흔적이라는 취지의 글만 쓸쓸하게 적혀 있다.
이 달궁 마을 앞을 흐르는 만수천은 노고단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물줄기로 람천을 만나 임천 ~ 엄천이 되어 남강 쪽으로 흘러갈 것이다. 한편 우리 민족의 불행한 근대사를 다룬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보면 달궁에서 열리는 '10월 혁명 기념 씨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하대치 부대가 피아골을 떠나 달궁으로 향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 달궁에 남부군의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라는 설명도 나온다. 물론 소설 속 하대치의 속내는 멀리서나마 그의 마음 속 영웅 이현상을 보기 위함이었겠지만 어쨌든 깊은 골짜기 안에서도 달궁은 남부군 사령부가 들어앉을만한 비교적 커다란 장소로 묘사된다.
그런 달궁이 2천 년 전으로 올라가면 처음 지리산이 열린 날이 된다. 즉 2천 년 전 인간이 처음 지리산 달궁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신비를 간직한 마한의 피란 도성 달궁의 역사는 그때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궁전을 ‘달의 궁전’이라 불렀다. 지리산에 사람이 들어와 최초로 인문적 환경을 꽃피웠다고 전해지는 ‘달의 궁전’은 그 이름만 들어도 신비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지리산의 깊고 좁은 골짜기에 2천 년 전 신비스런 궁전이 들어섰다는 사실, 이는 지리산 ‘개산開山의 역사’를 의미한다. 즉 그로부터 지리산은 ‘자연의 산’에서 ‘사람의 산’이 된 것이다.
천연요새로 에워싸인 달의 궁전은 온조왕의 백제 세력과 변한과 진한에 쫓긴 마한 효왕이 지리산으로 들어와 도성을 쌓으면서부터 시작된 피란도성이었다. ‘달의 궁전’에 관한 기록은 서산대사의 사기寺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황령암黃嶺庵’에 대해 기록한 청허당집淸虛堂集이 그것이다.
<사진 16> 서산대사 존영.
황령黃嶺과 정령鄭嶺
“동해에 한 산이 있으니 이름은 지리산이라 하고, 그 산의 북쪽 기슭에 한 봉우리가 있으니 이름은 반야봉이라 하며 그 봉우리 좌우에 두 재岾가 있으니, 이름은 황령(黃嶺)과 정령(鄭嶺)이라 한다. 옛날 한나라 소제昭帝 3년(BC78)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에 쫓기어 지리산에 와서 도성을 쌓을 때 黃·鄭 두 장수에게 일을 맡겨 감독케 했다. 도성이 완공된 후 도성을 에워싼 고개 이름을 두 장수의 성姓을 따서 각각 황령, 정령으로 불렀다. 도성은 그로부터 72년을 보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기록을 근거로 당시 마한의 상황을 유추해보면 지리산 인근을 근거지로 했던 마한이 북쪽으로는 백제 세력, 남동으로는 진한과 변한의 세력에 쫓겨 도성을 오늘날의 달궁으로 옮겨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고 이곳에서 72년이란 세월동안 장기 항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달궁의 도성을 중심으로 천혜의 요새인 황령과 정령을 전초기지로 삼았음도 엿볼 수 있다. 이곳은 사실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 고리봉, 바래봉 등의 고산준령으로 에워싸여 있어 지정학적으로는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로 조금도 손색이 없다.
- 졸저 전게서 477쪽 이하
12:31
그렇죠.
우측은 언양좌골을 만들어 가며 물길이 작은 그것들을 받아들여 세력을 키웁니다.
그럴수록 희미하게 사람이 지나간 흔적을 찾을 수 있고.....
이렇게 물줄기는 만들어집니다.
이 무명천은 세력을 키우면서 폭포도 만들고 소沼도 파면서 노고단에서 내려오는 물인 만수천을 만나 그에 합류되어 람천을 만나러 갈 것입니다.
장불재님.
안녕하시죠.
저도 그 옆에 한 장 달고 내려갑니다.
지금은 요 정도의 낙폭을 가진 소규모의 애기 폭포이지만 조금만 더 내려가면 ,
이 정도로 규모를 키웠다가,
아래로 내려갈 수록 그 크기는 더 카질 것입니다.
공단에서 매어놓은 표지띠.
이곳이 정규 탐방로라는 말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어쨌든 이제 등로는 확실하게 나오고.....
정말 멋진 언양좌골.
물소리가 무척이나 시끄럽습니다.
하지만 이런 물소리는 소음이 아니라 귀를 맑게 해주는 것이니....
그러니 오늘 같은 날은 너무 빠르게 갈 게 아니라 조금은 이런 분위기를 즐기면서 가는 것도 지리와 함께 하는 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렇게 물줄기를 즐기면서 내려갑니다.
언양좌골은 한 번 물줄기를 건너야 하는데 조심스럽게 건넙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건넙니다.
상하의 모두 땀과 물에 젖었고....
가끔 담가보는 물맛에 피로는 싹 가십니다.
집채보다 훨씬 큰 바위.
푸우님이 완전히 개미같이 보이는군요.
정말 더운 여름의 어느 날.
이런 곳에서 한 이틀 정도 머무르다 가는 것도 아주 좋은 피서의 한 방법같군요.
13:23
그런 생각을 가질 즈음 아주 너른 터가 나옵니다.
이 정도면 아주 큰 마을이 조성되었을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었을 것이니....
아까 바래봉에서 대원들과 나누었던 말.
"야영하는 사람들 이제는 충분히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난들 아까 그 바래봉에서나 지금 이런 곳에서 며칠 아니 단 하룻밤만이라도 머물고 싶지 않을손가!"
13:33
사실 오늘의 주목적은 달궁유적지를 방문하여 그곳에 있는 달궁성과 황령암지 등을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남 님이 새벽에 먹은 컵밥에 체했는지 산행 내내 불편해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틀하여 위의 곳을 탐사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자 "나는 먼저 내려가 있을 테니 다녀오슈."라고 하는군요.
그럴 순 없죠.
그곳은 다음에 다시 와서 휘젓고 가면 될 것이니 혼자 내려가게 할 수는 없어 함께 내려갑니다.
그러니 아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안타까을 건 없습니다.
이곳 고사리 밭이니 뭐니 하는 것도 예전에 다 마을이 있던 현장.
...............
맑은 물....
만수천 건너 광산골.
정규 등로였다는 흔적.
나무문 흔적.
13:58
팬션을 나와,
좌틀하여 달궁마을회관을 빠져나옵니다.
861번 도로를 만납니다.
우측으로 오르면 성삼재를 지나 천은사로 가는 도로입니다.
사실은 1960년대 후반. 누군가가 필요성을 제기했을 것이다. 하동에서 함양을 가려하면 너무나 길고도 먼 길을 돌아가야 할 것이니 반야봉과 천왕봉의 중간을 가르는 도로의 필요성은 능히 짐작이 간다. 여기에 한라산 종단 도로를 개통한 토목업자들의 부추김도 한몫 했을 것이다. 물론 핑계거리도 있었다. 멀리는 1948년 10월의 여순사건을 거론했을 것이고 가까이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빨치산 잔당 토벌을 1963년에야 끝낼 수밖에 없었던 작전상의 어려움도 한 요인으로 제기됐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이 도로의 개설 목적을 알게 되면 좀 아이로니컬해진다. 나아가 이 도로와 천은사~성삼재~달궁을 잇는 지금의 861번 도로가 같은 시기에 같은 목적으로 개설된 것이라고 하니 더더욱 그렇다. 즉 이들 도로가 착공된 때가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이 끝나 당국이 '완전 평정'을 공표한 1955년으로부터 무려 13년이 지난 1968년의 일이다. 당시 연동골에 소규모의 무장공비가 출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단다. 신흥에서 화개재를 향해 6㎞를 거슬러 오른 연동마을에 약초꾼을 가장한 이들이 나타나 보리 15말 등을 사려고 했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주민의 신고로 무장공비의 존재가 처음 포착이 됐던 것이다. 그들의 출현이 지리산 척추를 파헤치는 군사작전도로 공사를 하게 만들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아주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결국 그렇게 시작한 공사가 1972년 10월에 마쳤으니 그 구간이 신흥 ~ 마천 즉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의 신흥마을과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를 잇는 도로가 된 것이다. 이른바 ‘벽소령 종단도로‘이다. 당시로는 실로 엄청난 대역사大役事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개통만 시켜놓고 이용하지를 않아 대성리 방향의 삼정마을 ~ 벽소령 구간은 차는 고사하고 사람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비록 지도에는 도로표시가 되어 있지만 그 기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됐다.
- 졸저 전게서 438쪽
슈퍼에서 간단하게 캔맥주 한 통씩을 비우면서 택시를 기다립니다.
인월에서 고남님 차를 찾아 이백면에 있는 고남 님 집으로 이동하여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고남 님이 차려주는 문어숙회로 뒤풀이를 합니다.
밥까지 얻어 먹고....
그러고는 남원역으로 이동.
예약해 놓은 17:31분 ktx 열차로 귀가합니다.
19:16
광명역에 내려 마을버스로 집에 들어오니 노모께서 반갑게 맞아주시는군요.
오늘 하루를 되돌아 보니 모든 게 꿈결같군요.
조마조마하며 산행을 시작했건만 일출과 함께 펼쳐진 지리의 장관을 보면서 그저 아무 말도 못하고 탄성도 속으로만 냈던 그 시간.
자연의 신비라기 보다는 지리만이 주는 혜택이라 생각했습니다.
다음 주는 어디인가요?
추석 전에 한탕 하긴 해야겠는데 수요일 또 비 예보이니....
첫댓글 지리산 운해가 장관입니다. 그렇고 보면 지리태극도 만만한 길이 아니네요.
지리산파 ㅎ 존 산행하셨네요~~
지리산은 가본지 넘 오래되서
외국 산행기 보는 느낌입니다
홀산에서 갈 때 한번 따라가봐야지요.
좀 젊을 때 구례 진주로 다니며
지리산 다니던 추억만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