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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우리 마음에 깊은 구조를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팔식 8 가지 의식의 세계입니다. 오늘 우리는 유식론이라는 심오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세상을 만들어 내며 결국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를 함께 탐구해 보겠습니다. 어느 날 한 수행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저는 매일 명상을 하고 경전을 읽지만 여전히 번뇌가 일어납니다. 분노도 생기고 집착도 생기고 어리석은 생각도 떠오릅니다. 도대체 이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스승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대가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 그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이네. 하지만 그대는 지금 마음의 표면만 보고 있을 뿐 깊은 바다 밑을 보* 못하고 있네. 그 깊은 곳에 모든 답이 있다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유식로는 바로 이 마음의 깊은 구조를 밝히는 가르침입니다. 유식 오직 식만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 보이는 세계 들리는 소리 느껴지는 감정 떠오르는 생각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밖에 객관적인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의식이 변화하고 전환되면서. 세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십전변이라고 합니다. 의식이 변화하여 세상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은 어떤 구조로 되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8 가지 층이로 나누어 설명하셨습니다. 첫째부터 다섯째까지는 전우식 즉 5 가지 감각 의식입니다. 눈으로 보는 안식 귀로 듣는 이식, 코로 냄새 맡는 비식, 혀로 맛보는 설식, 몸으로 촉감을 느끼는 신식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는 동안 끊임없이 작동하는 이 5 가지 의식은 외부 세계와 직접 접촉하며 색깔과 형태 소리 향기 맛 촉감을 경험하게 합니다. 여섯째는 의식입니다. 의식은 전오식이 받아들인 정보를 종합하고 판단하며 생각하고 분별하는 작용을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인식하고 좋다 나쁘다 판단하고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모든 정신 활동이 바로 이 의식의 작용입니다. 의식은 많지 왕처럼. 전호식이 가져온 정보를 받아 결정을 내립니다. 하지만 의식 역시 표면의 마음일 뿐입니다. 일곱 째는 말라식입니다. 말라식은 자아 의식 즉 나라는 생각의 뿌리입니다. 우리가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것을 가졌다. 나는 이것을 원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자 집착이 바로 말라식에서 나옵니다. 말라식은 끊임없이 나를 확인하고 나를 지키려 하며 나와 남을 구분합니다. 이 말라식의 작용이 바로 모든 건의의 근원입니다. 탐욕도 분노도 질투도 교만도 모두 나라는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8째는 아내 야식입니다. 아래 야식은 장식 즉 저장하는 의식이라는 뜻입니다. 아래 야식은 마음에 가장 깊은 곳에 있으며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것 행한 모든 것 생각한 모든 것이 종자로 저장되어 있는 창고와 같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전생부터 지금까지 쌓인 무수한 업의 종자들이 아래야식 속에 잠들어 있습니다. 배신밀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법은 오직 식일 뿐이니 능히 아는 자도 식이요. 알려지는 대상도 식이며 이 모든 것이 다만 마음의 변화일 뿐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이 결국 의식의 작용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세상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 마음이 세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한 제자가 현장 스님께 물었습니다. 스님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이상과 강 해와 달도 모두 마음이 만든 것입니까? 현장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네. 그대가 산을 본다고 할 때 그 산은 그대 눈에 망막에 맺힌 빛의 패턴일 뿐이네. 그 빛의 패턴을 의식이 해석하여 산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이네. 다른 중생은 같은 장소를 다르게 볼 수 있네. 물고기에게 물은 집이지만 아기에게 물은 불덩이로 보이고 천신에게 물은 유리바닥으로 보인다네. 같은 대상이 의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네. 이것이 바로 유식론의 핵심입니다. 세상은 우리밖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의식이 변화하고 전환되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의식의 변화는 어떻게 일어납니까? 바로 아래 야식에 저장된 종자가 현행하기 때문입니다. 종자 현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래 야식 속에 잠들어 있던 종자가 조건을 만나면 싹을 틔워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길을 걷다가 어떻게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불편한 감정이 일어납니다. 왜 그럴까요? 과거에 비슷한 얼굴이나 말투를 가진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았던 경험이 아래야식에 종자로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종자가 지금 이 사람을 만나는 조건을 만나 현행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눈앞의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이 투영된 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훈습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아래야식의 훈습되어 종자가 되고 그 종자는 다시 현행하여 새로운 경험을 만들고 그 경험은 또다시 훈습되어 종자가 됩니다. 마치 끝없이 돌아가는 수레바퀴와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윤회의 메커니즘입니다. 업을 짓고 업의 종자가 저장되고 종자가 현행하여 과보를 받고 다시 업을 짓는 순환입니다. 원효 스님은 대승기신론서에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일체 중생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지만 무명의 바람에 흔들려 파도가 일어나듯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아래 야식은 본래 청정한 바다와 같지만 무명이라는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어나듯 번내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파도가 잦아들면 다시 고요한 바다가 드러나듯 무명이 사라지면 본래의 청정한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문명의 바람을 잠재울 수 있습니까? 첫 번째 단계는 마음의 작용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잊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화가 난다면 아 지금 내 안에서 분노라는 감정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욕망한다면 지금 욕망이라는 마음이 작용하고 있구나 하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관찰하면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내가 화를 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화라는 감정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볼 뿐입니다. 내가 욕망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욕망이라는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볼 뿐입니다. 고정된 나라는 주체가 없고 단지 의식의 흐름만이 있을 뿐입니다. 무착 보살은 석대승론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냉이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이 모두 의식의 변화일 뿐이니 이 둘이 본래 하나임을 알면 능소치공 작 주체와 객체가 모두 공함을 깨닫게 된다고. 내가 세상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보는 나도 의식이고 보이는 세상도 의식입니다. 둘은 본래 하나의 의식 작용일 뿐입니다. 옛날 한선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어리석은 자는 손가락을 보고 지혜로운 자는 달을 본다고 하지. 그렇다면 손가락도 보지 않고 발도 보지 않는 자는 누구인가. 제자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대답했습니다. 손가락과 다리 본래 다르지 않은 자입니다. 선승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네. 보낸 자와 보이는 것이 본래 하나임을 아는 자네. 우리가 팔식을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마음의 구조를 아는 지식을 쌓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서 그 작동 방식을 바꾸기 위함입니다. 의식이 변화하면 세상이 변화합니다. 의식이 전환되면 번뇌가 지혜로 바뀝니다. 이것이 바로 전식 특지. 의식을 전환하여 지혜를 얻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불행이 환경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 때문에 이 상황 때문에 운이 나빠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USIM로는 가르칩니다. 불행의 원인은 밖에 있지 않고 내 마음속 아래 야식에 저장된 번뇌의 종자에 있다고 그 종자를 정화하지 않는 한 환경을 바꾸어도 같은 불행이 반복됩니다. 반대로 마음속 종자를 정화하면 같은 환경에서도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려운 상황이 수행의 기회로 보이고 미운 사람이 자비를 배울 수 있는 스승으로 보입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 의식이 변화했기 때문에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성철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는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지만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사는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처음에는 보이는 대로 받아들입니다. 산의 산으로 물을 물로 봅니다. 하지만 수행이 깊어지면 산도 물도 모두 내 마음이 만들어낸 것임을 알게 됩니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닙니다. 마침내 완전히 깨달으면 다시 사는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하지만 이때의 산과 물은 처음의 산과 물과 다릅니다. 집착 없이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산과 물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수행은 바로 이 과정입니다. 먼저 마음의 작용을 알아차리고 그다음 그 작용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탐구하고 마침내 그 뿌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전호식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관찰하고 의식이 판단하고 분별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말라식이 나라고 집착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아래야식 속 종자를 정화하는 것입니다. 티베트의 한스님은 제자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네. 먼지가 쌓이면 사물이 제대로 비치지 않지만 먼지를 닦아내면 다시 맑게 비추네. 하지만 진정한 수행자는 거울에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하네. 한 번 닦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깨어서 마음을 살펴야 하네. 이것이 바로 유식론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입니다. 마음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매 순간 마음을 관찰하고 정화하는 실천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앉아서 명상할 때만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순간에 내 마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화가 날 때 욕심이 날 때 어리석은 생각이 떠오를 때 그것을 잇는 그대로 보고 그 뿌리를 탐구하고 그것을 놓아버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용수 보살은 중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연으로 생긴 것은 공하고 공한 것은 가명일 뿐이며 이것이 중돌하고 우리 마음도 인연으로 생긴 것입니다. 과거의 업과 현재의 조건이 만나 지금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정된 실체가 아니므로 공하고 공하기 때문에 변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아무리 깊은 번뇌도 고정된 것이 아니므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마음을 관찰해 보십시오.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까? 어떤 감정이 느껴집니까? 그것을 판단하지 말고 좋다 나쁘다 평가하지 말고 단지 있는 그대로 지켜보십시오. 그렇게 지켜보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팔식의 작용을 관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호식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의식이 그것을 인식하고 말라식이 나라고 생각하고 아래야식에서 과거의 종자가 올라오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관찰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놀라운 통찰이 일어납니다. 생각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은 그저 지나가는 구름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감정이 나를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은 그저 일어났다. 사라지는 파도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라고 집착했던 것도 사실은 의식의 흐름일 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법장 스님은 화엄경을 강의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의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고 한 생각 속에 삼천 세계가 있다고 우리 마음 하나하나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번뇌의 종자도 들어 있지만 깨달음의 종자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어떤 종자를 키울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매 순간 깨어서 선한 종자를 심고 악한 종자를 정화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오늘 우리는 팔식의 구조를 배웠습니다. 전호식 의식 말라식 아래야식이라는 여덟 겹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진정한 배움은 이 지식을 삶에 적용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의 마음을 관찰해 보십시오. 눈으로 무언가를 볼 때 아 지금 안식이 작용하고 있구나. 무언가를 판단할 때 지금 의식이 분별하고 있구나. 나라고 생각할 때 지금 말라식이 집착하고 있구나.
익숙한 패턴이 반복될 때 아래 야식의 종자가 현행하고 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의 의식은 이미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합니까? 왜 매번 다짐하면서도 똑같은 패턴에 빠집니까?
화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화를 내고
집착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집착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또다시 후회할 일을 저지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의지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 아래 야식과 말라식이라는 두 층에 숨어 있는 뿌리 때문입니다.
표면의 마음을 아무리 다스려도 깊은 곳에 뿌리를 보* 못하면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오늘 우리는 그 뿌리를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냉각영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래 야식
깊고 미세하여 모든 종자가 폭류처럼 흘러갑니다. 덤부들에게는. 이것을 설하지 않으니
보여줍니다. 자아라고 집착할까 두려워서입니다.
이 말씀은 아래 야식이 얼마나 깊고 미묘한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작용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아래야식입니다. 안 수행자가. 깊은 산 속에서 10년을 수행했습니다.
명상도 깊어지고. 경전도 많이 읽고 이제는 어느 정도 깨달음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에 내려와 마을에 갔습니다.
시장 거리를 지나가는 데 갑자기 누군가 어깨를 세계.
부딪혔습니다. 그 순간 10년 수행이 물거품이 되듯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수행자는 자신에게 놀라며 생각했습니다. 10년을. 수행했는데 왜 아직도 이런 분노가 일어나는가?
그날 밤 스승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스승님 저는. 분명 화를 내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화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스승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그대가 산에서 수행한 것은 의식의 표면을 다스린 것이네.
하지만 깊은 곳 아래 야뢰야식에는 여전히 분노의 종자가 남아 있네.
그 종자가 조건을 만나 순식간에 현행한 것이네.
표면에 물결을 잠재울 수는 있지만 바다 깊은 곳에 해류를 바꾸는 것은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네. 진정한 수행은바로 이 깊은 종자를 정화하는 것이네. 아래 야식은우리 마음에 가장 깊은 저장소입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무수한 전생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 행한 모든 것 모든 것 생각한 모든 것이 종자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선한 행위를 하면 선한 종자가 심어지고 악한 행위를 하면 악한 종자가 심어집니다. 자비로운 생각을 하면 자비의 종자가 심어지고 분노하면 분노의 종자가 심어집니다. 이 종자들은 사라지지 않고 조건을 만나면 언제든지 싹을 틔워 현실이 됩니다. 새친 보살은 유식 30 송에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이숙이라는 것은 선악의 업이 익어서 과보를 낳는 것이니 아래 야식이 바로 이숙식이라고.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모든 것은 과거의 심은 종자가 익어서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 느끼는 행복도 고통도 만나는 사람도 겪는 상황도 모두 과거업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미래의 종자를 심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혼습과 현행의 순환입니다. 아래 야식의 종자가 현행하여 경험이 되고 그 경험이 다시 아래 야식을 훈습하여 새로운 종자를 만들고 그 종자가 또다시 현행합니다. 마치 씨앗이 싹을 틔워 나무가 되고 나무가 다시 씨앗을 만들어 떨어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순환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 바로 유뇌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경험이 아래 야식에 깊은 상처의 종자로 저장됩니다. 자라서 누군가를 만나도 그 종자가 현행하여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먼저 거리를 두고 마음을 닦고 방어적으로 행동합니다. 상대방은 그런 태도에 실망하여 떠나갑니다. 결국 사랑받지 못한다는 경험이 반복되고. 그 경험은 다시 아래 야식을 훈습하여 상처의 종자를 더욱 깊게 만듭니다. 이렇게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이것이 바로 업의 메커니즘입니다. 업은 단순히 과거의 행위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입니다. 과거의 업이 현재를 만들고 현재의 업이 미래를 만듭니다. 하지만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선택으로 새로운 종자를 SIM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과거의 나쁜 종자가 현행하더라도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다른 종자를 SIM을 수 있습니다. 티베트의 아티샤 존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독을 먹으면 고통스럽지만 독을 약으로 바꿀 수도 있다고 번뇌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번뇌가 일어날 때 그것에 휩쓸리면 더 깊은 번뇌의 종자를 심게 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고 지혜롭게 대응하면 오히려 깨달음의 기회가 된다고 했습니다. 화가 날 때 그 화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관찰하고 그 뿌리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래 야식과 함께 작용하는 말라식은 무엇입니까? 말라식은 자 의식 즉 나라는 생각의 뿌리입니다. 말라식은 끊임없이 아래 야식을 자아로 착각하고 집착합니다. 아래 야식은 단지 종자들이 저장된 창고일 뿐인데 말라식은 그것을 나라고 여깁니다. 이것을 아직 자아에 대한 집착이라고 합니다. 원효 스님은 대승기신론서에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분명히 근본 문명과 지말 문명이 있으니 근본 문명은 아래 야식을 일으키고 지말 무명은 말라식의 집착을 일으킨다고. 우리가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보* 못하는 근본 원인은 무명 때문이고 그 무명이 아래야식이라는 저장 의식을 만들고 다시 말라식이라는 자아 집착을 만들어 냅니다. 말라식은 잠들 때도 깨어 있을 때도 명상할 때도 끊임없이 작동합니다. 의식이 사라진 깊은 잠에서도 말라식은 계속 나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 내가 오늘도 이어져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말라식은 마치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니며 모든 경험에 나라는 색깔을 입힙니다. 안 선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잠들기 전에 너와 깨어난 후에 너는 같은 자인가. 다른 자인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같은 사람입니다. 선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깊은 잠에서 꿈도 꾸지 않고 아무 의식도 없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는가. 제자가 말문이 막혔습니다. 선순위 말했습니다. 바로 그때도 말라식은 작동하고 있었네. 그대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네. 말라식에는 네 가지 번뇌가 항상 함께합니다. 첫째는 악연 나라는 견해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런 성격이다. 나는 이런 능력을 가졌다는 고정된 자아상을 만듭니다. 둘째는 아예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보호하고 나를 아끼고 나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셋째는 아마 나에 대한 교만입니다. 나는 남보다 낫다. 나는 특별하다는 생각입니다. 넷째는 아침 나에 대한 어리석음입니다. 나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근본적인 문명입니다. 이 네 가지 번뇌가 모든 다른 번뇌의 뿌리가 됩니다. 나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나의 것을 원하는 탐욕이 생깁니다. 나를 방해하는 것에 대해 분노가 생깁니다. 나와 남을 구분하기 때문에 질투와 경쟁심이 생깁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칩니다. 도신 스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일체 번뇌의 뿌리는 나라는 생각이니 나라는 생각을 끊으면 모든 번내가 사라진다고. 하지만 어떻게 나라는 생각을 끊을 수 있습니까? 억지로 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또 다른 집착일 뿐입니다. 진정한 방법은 나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몸입니까? 하지만 몸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어릴 때 몸과 지금의 몸은 완전히 다릅니다. 세포는 매일 죽고 새로 생깁니다. 그렇다면 어느 몸이 진짜 나입니까? 내 생각입니까? 하지만 생각도 끊임없이 변합니다. 어릴 때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은 완전히 다릅니다. 어제의 생각과 오늘의 생각도 다릅니다.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은 계속 바뀝니다. 그렇다면 어느 생각에 진짜 나입니까? 네 감정입니다. 하지만 감정도 시시각각 변합니다. 기쁨이 슬픔이 되고 사랑이 미움이 되고 평온이 불안이 됩니다. 네 기억입니까? 하지만 기억도 불완전하고 왜곡됩니다. 같은 사건을 다르게 기억하기도 하고 없었던 일을 기억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나입니까? 해능 스님은 육조 단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끼겠는가? 우리가 나라고 집착하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반지온 즉 몸과 감수 생각 의지 의식이라는 5 가지 요소가 임시로 모여 있을 뿐입니다. 이 5 가지가 모이면 나라고 부르고 흩어지면 나는 사라집니다. 마치 파도가 일어나면 파도라고 부르지만 파도가 사라지면 다시 바다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파도는 바다와 별개의 실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집착을 놓을 수 있습니까? 첫째 무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내 몸도 변하고 내 생각도 변하고. 내 감정도 변하고 내 상황도 변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깊이 관찰하면 변하는 것을 나라고 집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둘째 무화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고정된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조건들이 모여 일이 일어날 뿐입니다. 내가 생각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생각이 일어날 뿐입니다. 내가 화낸다고 하지만 사실은 화라는 감정이 일어날 뿐입니다. 주체가 없고 단지 현상의 흐름만 있을 뿐입니다. 용수 보살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업을 짓는 자도 없고 업에 과보를 받는 자도 없으며 단지 운이 이어질 뿐이라고.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업을 짓는 것이 아니라 조건들이 모여 업이 일어나고 그 업의 종자가 다시 조건을 만나 과보가 나타날 뿐입니다. 그 사이에 나라는 실체는 없습니다. 한 노스님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강물이 흐르고 있네. 어제 강물과 오늘의 강물은 같은가? 다른가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다릅니다. 물은 계속 흘러가니까요. 노스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전히 한강이라고 부르는가? 제자가 깨달았습니다. 강이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계속 흐르는 물의 흐름에 붙인 이름일 뿐입니다. 노스님이 미소 지었습니다. 그런 날 나라는 것도 마찬가지네. 오은이라는 흐름에 붙인 이름일 뿐이네. 아래 야식과 말라식을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고통받는지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지 왜 자유롭지 못한지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고통에 뿌리는 밖에 있지 않고 내 마음 깊은 곳의 종자와 집착에 있습니다. 그 뿌리를 보지 않고서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뿌리를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래 야식은 너무 깊고 미묘해서 의식적으로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말라식은 너무 근본적이어서 그것을 관찰하는 주체조차 말라식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점진적인 수행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게요를 지켜 나쁜 종자를 심지 않는 것입니다.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욕설하지 않고 음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업을 짓지 않으면 악한 종자가 아래 야식에 저장되지 않습니다. 둘째 선업을 지어 좋은 종자를 심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고 보시를 하고 지혜를 공부하고 선정을 닦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읍을 지으면 선한 종자가 아래 야식에 저장됩니다. 셋째 마음을 관찰하여 종자가 현행하는 과정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명상을 통해 마음의 미세한 움직임을 관찰하고 어떤 종자가 어떤 조건에서 현행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종자가 현행하더라도 그것에 휩쓸리지 않고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넷째 무화를 깊이 통찰하여 말라식의 집착을 녹이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음을 깊이 깨달으면 말라식의 작용이 자연스럽게 약해집니다. 나를 지킬 필요가 없어지고 나의 것을 원할 필요가 없어지고 나와 남을 구분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진울 스님은 수심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돈우 점수 단번에 깨닫대 점차 닦아야 한다고 나라는 것이 없다는 진리는 단번에 깨달을 수 있지만 아래야식에 쌓인 무수한 습기를 정화하는 것은 오랜 수행이 필요합니다. 마치 거울의 본성은 본래 맞지만 오랜 세월 쌓인 먼지를 닦아내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수행은 바로 이 과정입니다.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아래 야식의 종자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랜 습관 깊은 상처 무의식적인 패턴들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깨달음의 빛으로 그것들을 비추면 점차 정화됩니다. 마치 어둠 속에 빛을 비추면 어둠이 사라지듯 지혜의 빛으로 무명을 비추면 무명이 사라집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아래야 시계는 무수한 종자가 저장되어 있습니다. 선한 종자도 있고 악한 종자도 있습니다. 번뇌 종자도 있고 지혜의 종자도 있습니다. 어떤 종자를 키울 것인가는 지금 이 순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화가 날 때 화를 키우면 분노의 종자가 강해지지만 화를 알아차리고 자비로 대응하면 자비의 종자가 강해집니다. 마조 스님은 제자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평상심이 돌아가고 특별한 경지를 추구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라고.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고. 일할 때는 일하고 쉴 때는 쉬라고 하지만 이것은 무심코 사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깨어서 알아차리며 사는 것입니다. 먹을 때 먹는 줄 알고 잘 때 자는 줄 알고 화낼 때 화내는 줄 알고 탐할 때 탐하는 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어 있으면 아래 야식의 종자가 현행하더라도 그것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말라식이 나라고 집착하더라도 그 집착을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림 그 자체가 이미 자유의 시작입니다. 깨어 있음 그 자체가 이미 해탈의 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마음의 구조를 배우고 번뇌의 뿌리를 탐구했습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았습니다. 어떻게 이 의식을 변화시킬 것인가 어떻게 번뇌로 가득한 의식을 지혜로운 의식으로 전환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전식 특지. 의식을 전환하여 지혜를 얻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성유식론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번내장과 소지장이 끊어지면 팔식이 전환되어 사지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전식 특지이니 의식의 변화가 곧 깨달음입니다. 안 수행자가 20년을 수행했습니다. 온갖 경전을 공부하고 수많은 스승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깨달음은 멀기만 느껴졌습니다. 어느 날 한 모스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스님 저는 팔식을 공부하고 유식론을 배우고 번뇌의 뿌리도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번뇌는 일어나고 의식은 변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의식이 전환됩니까? 노스님은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를 보기에 겨울 내내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던 나무가 봄이 되자 꽃을 피웠네. 누가 꽃을 피우라고 가르쳤는가. 나무는 단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했을 뿐이네. 의식의 전환도 마찬가지네. 억지로 바꾸려 하지 말고 조건을 갖추면 자연스럽게 전환되네. 전식 특지는 팔식이 사지로 전환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지란 네 가지 지혜입니다. 첫째 대원경지는 아래 야식이 전환된 지혜입니다. 큰 원경처럼 모든 것을 잊는 그대로 비추는 지혜입니다. 둘째 평등 성지는 말라식이 전환된 지혜입니다. 나와 남의 구분이 사라지고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보는 지혜입니다. 셋째 묘관 찰지는 의식이 전환된 지혜입니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미묘한 관찰의 지혜입니다. 넷째 성소작지는 전호식이 전환된 지혜입니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성취하는 지혜입니다. 이 네 가지 지혜는 단계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