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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문장군 추모식 12일 오후 2시. 육군사관학교 군마대 (2197-5760)
평양의 부유한 상인 가정 출신으로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1937년 제50기로 졸업했으며, 기병장교로 임관하여 도쿄 주둔 근위부대인 제1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이후 만주를 거쳐서 1942년에는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엘리트 장교들이 배치되는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근무했고,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 패망할 때는 남방전선의 사이공에 있었다. 당시 계급은 소좌였다.
광복 후에도 베트남에 머무르다가 1947년 귀국했다. 처음에는 화물선에 물건을 싣고와 돈을 버는 등 무역업에 종사할 계획이었으나, 선후배들의 권유로 1948년 11월에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했다. 육군사관학교 특기생으로 들어와 곧바로 소령으로 임관했다가 한 달 뒤에는 중령으로 승진, 초대 기갑연대장에 올랐다.
1949년에 대령으로 진급하고 육군본부 정보국장에 부임하면서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하던 박정희와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일본육사 기수로는 이용문이 7기 선배이며 나이는 한살 위이다. 이용문은 활달하고 호방한 성품이었으며 시국관도 비슷하여 박정희의 존경을 받았다.
육군참모학교 부교장을 지낼 때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이용문은 개전 초기에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여 조선인민군의 점령 하에 있는 동안 지하에 숨어 지냈다. 1951년 6월 준장으로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이 되었고, 박정희를 차장으로 발탁했다. 전쟁 중 발생한 부산 정치 파동 때는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뒤에 일어난 5·16 군사정변과 유사한 군부 쿠데타를 계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제9사단 부사단장, 수도사단장을 거쳐 남부지구경비사령관을 지내던 중,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 작전을 지휘하다가 전라북도 남원군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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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각하께서존경하신분이죠 고인의순국을애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