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는 깊고 깊은 잠의 수렁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 나 결코 포근하고 안온한 잠은 아니었다. 그는 끝없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신애를 살려주게!" 남태인이 마지막 순간 외치던 소리가 귓전에서 사라 지지 않았고 그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모습도 그의 시야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당신을 경찰에 고발할 거예요!" 신애가 울부짖던 모습도 클로즈업되어 다가왔다. 그 녀가 비수를 품고 그에게로 한 발 한 발 다가서는 모 습도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침대머리에서 그 의 심장을 겨냥해서 비수를 높이 쳐든 모습도. 마동권이 승리를 구가하며 잔인하게 미소짓는 모습 도 오버랩되어 다가왔다. 그가 아파트 복도에서 절뚝 이며 내는 듯한 발소리가 끝없는 콘서트처럼 들려오기 도 했다. 모건은 그의 참다운 적은 마동권이라고 생각했다. 남태인은 마동권으로 해서 죽게 된 것이다. 그러니 마 동권을 장사지내는 것이 남태인의 영혼을 달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마동권을 불사조 같은 인물일까? 모건은, 마동권과의 대결을 필연적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피를 보리라! 깊은 잠의 늪속에서 허위적거리는 모건을 깨운 사람 은 그의 전처인 민하경이었다. 하경이 모건의 한강변의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께였다. 겨울의 다섯 시면, 게다가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저녁이면 거리는 어둠 속에 파묻히기 마련이다. 하경은 핸드백 속에서 모건의 아파트 열쇠를 끄집어 냈다. 여태껏 헤어진 남자의 아파트 열쇠를 갖고 있었다 니! 녹색의 철문은 금세 열렸다. 도어 체인도 걸려 있지 않았다. 집안에 사람이 없는 걸까? 그런데 인기척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어쩌면 조직의 암살자가 이토록 무방비상태인 걸까. 하긴 누구든지, 집의 문을 잠근다고 해서, 암살자의 총탄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하경은 모건의 초 연한 일면을 엿보는 심정이었다. 하경은 거실을 가로질러 침실의 도어 앞에 섰다. 그 리고 노크했다. 그녀로서는 5년 만의 노크였다. 지금으 로부터 5년 전에 하경은 모건과 이혼했던 것이다. 그 녀의 모두를 걸고 사랑했던 멀끔한 사내가 밀수조직의 하부요원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그 실망감과 상실 감은 대단했다. 어느 다국적기업의 해외상사원으로 알았었다. 그런 데 밀수조직의 지게꾼으로 일컬어지는 운반책이라니! 하경은 일말의 미련의 찌꺼기도 남기지 않고 그의 곁을 떠났었다. 모건의 어처구니없어 하는 모습을 뒤 로 하고. 세상에 아무려나 여자가 그렇게 훨훨 떨치고 떠날 수가 없었다. 혼신신고도 하고 자식도 있는 처지였다. 하경은 모건을 다시 찾으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 았다. 그를 굳이 미워하지는 않았다. 다만 무시하기에 족한 존재일 뿐이었다. 하경은 한동안 잠 속에 깊숙이 파묻혀 있는 모건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너무 피곤해 보였다. 아니 너무 왜소해 보였다. 그런데 악몽에라도 시달리는 걸까. 식은 땀을 흘리고 있는데다가 신음까지 하며 잠을 자고 있었다. 하경은 모건을 흔들어 깨웠다. "당신, 이거 어떻게 된 거요?" 모건은 눈을 뜨자 놀라움과 함께 반가움을 나타내 부였다. 그러나 이내 싸늘한 표정으로 탈바꿈하고 있 었다. "커피 드실래요?" 하경의 다섯해 만에 만난 옛 남자에 대한 첫마디로 서는 엉뚱했다. 그녀는 깊은 잠에서 깨어난 모건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따끈한 커피 한 잔이라고 생각했다. "커피? 좋지......" 이렇듯 말하면서 모건은 담배부터 찾아 입에 물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스레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윽고 커피를 서브한 사람은 하경이 아닌 모건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마주 앉아 있었다. 하경의 눈에 비친 모건은 무척 수척해 보였다. 충혈 된 눈, 바싹 마른 입술, 초췌한 얼굴. 그는 여전히 마 른 기침을 하면서도 담배를 피워물고 있었다. 모건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살인자의 총탄이 아니라 담배의 니코틴이리라. 모건이 본 바로는 하경은 밤무대에서 노래나 부르고 춤이나 추던 예전의 하경이 아니었다. 귀걸이도 목걸 이로 그리고 반지도 다이아몬드가 가득 박힌 보석의 여왕으로 불리는 붉게 타오르는 심홍색의 루비 일색이 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오만스럽게조차 느껴지는 그 녀의 당당한 모습과 어울렸다. 밍크의 롱코트도 그녀 와 어울렸다. 모건은 그를 잘못 찾아온 귀부인과 마주 앉아 있다 는 느낌이 간절했다. "어떻게 날 다 찾아온 거요?" 모건은 자칫 비아냥거리는 자신의 말투를 경계하며 물었다. 그러나 하경은 이내 뭐라 대꾸를 아니했다. 다만 "당신 요즈음 사귀는 여자가 있어요?" 하고 입술을 빼꼼히 내밀며 묻는 것이었다. "없다면 어떻게 하겠소?" 모건이 지체없이 물어왔다. "오늘밤, 나를 위해 자고 가기라고 하겠소?" 모건은 이죽거리듯 말했다. "전처와 함께 잠을 잔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지만 말야. 숫처녀 건드리기보다 더 어렵다고 하 더군." 모건은 심드렁하니 말했다. 그런데 하경의 대꾸가 뜻밖이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자고 가도 좋아요." 하경의 얼굴에 그 어떤 위험한 상황에 몰린 여자의 물러설 수 없는 절박한 표정이 어리고 있는 것을 모건 은 감지했다. 그녀는 지금이라도 웃을 벗으라면 벗을 듯한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오?" 모건은 그러나 5년 만에 갑자기 찾아온 옛 아내의 사연만이 궁금한 듯했다. "우린 지금 엄청난 위험에 직면해 있어요." 하경이 말했다. 그녀의 말 속에 담겨진 중대성과는 달리 그녀의 말씨는 조용했다. "그게 무슨 말이요?" 모건은 하경의 치밀하게 계산된 대사 속에 함축된 말의 뜻을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더구나 그는 하경의 '우리'라는 표현에 대뜸 불길함을 느꼈다. "우리가 위험에 처해 있다고 했어요." 하경은 되풀이했다. 그리고 모건이 알아듣기를 기다 렸다. "아니, 그럼 당신과 희수에게 무슨 일이라고 생긴 거요?" 모건은 하경에게라기보다 희수에게 무슨 변이 생긴 것으로 지레 짐작했다. 하경은 모건의 얼굴에 긴장을 잉태한 미묘한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모건의 그러한 반응에 그녀는 만족했다. "우린 법정에 설지도 몰라요." "뭐라구?" "우린 잘못하면 죽을는지도 몰라요." "그 무슨......" 하경은 근래의 그녀가 처한 사정을 설명했다. 간략하게 그러나 솔직하게, 그리고 한 마디도 보태 지도 빼지도 않고. 모건이 마침내 종합한 정보는 눈 앞의 여자가 엄청 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어지간한 일 인가, 남편의 목숨을 단축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독살 이라는 방법으로. 한때는 그의 아내라는 위치에 있었 던 여자가 말이다. "희수를 위해서예요. 나를 위해서가 아니예요." 세상에, 여자가 자식을 위해서 남편의 목숨을 앗은 것이다. 네로 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 황후가 그러 했던 것처럼. 모건은 한동안 말을 잃었다. 평생을 비정 의 세계에 살아온 그로서도 뭐라 입을 떼지 못하고 있 는 것이다. "그래,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거요?" 이윽고 헝클어진 표정을 수습하며 모건이 물었다. 그러나 하경은 침묵을 지켰다. 이미 결론이 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모건도 벌써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하경을 위해 서가 아니었다. 희수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야 했다. "그래, 그들이 누구요?" 잠시 후, 모건이 체념한 어조로 물었다. 하경은 그래 서 설지숙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으음." 모건은 그의 정부라고 할 여자의 이름을 듣자 다시 한번 신음소리를 토했다. 그러나 뭐라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는 하경이 전하는 놀라운 뉴스에 이제 어지 간히 면역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피의 설레임을 느낀 것은 하경이한테서 설지숙에 이어 마동림의 이름을 들었을 때였다. 바로 조직의 전설적인 말살자 마동권의 동생인 것이다. 이건 무슨 메시지인 걸까. 모건은 한순간 이번 일이 그 어떤 숙명적인 일로 여 겨졌다. "그래, 이 일을 내가 맡는다고 치고, 당신이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건 뭐요?" 얼마 후 모건은 물었다. "내가 당신한테 해줄 수 있는 것은 언제나 한 가지 뿐이에요. 당신 앞에서 옷을 벗는 일이에요." "......" "저를 원해요?" "......" "저를 지금도 원하느냐구요?" "돌아가!" 모건은 진저리를 치며 내뱉듯이 말했다. 하경은 그 러나 승리자와도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설지숙이 이끄는 세 명의 장례팀은 그날 밤에도, 그 다음날 밤에도 청평호반에 있었다. 그들이 제시한 요 구에 대한 민하경의 답변을 기다려야 할 처지였다. 더 구나 하경이한테서 그들이 기다리던 소식마저 다음날 저녁에 전해져온 것이다. 그때가 저녁 7시께였다. "지숙이, 나야!" 지숙이 수화기를 집어들었을 때 하경의 목소리는 퉁 명스럽기만 했다. "어머, 언니......" 지숙은 공연스레 수선을 떨었다. "지숙이, 넌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 "그건 그래요, 언니......" "오늘밤 돈을 갖고 가겠어. 지숙이, 네가 요구하는 대로 말야." 하경의 말투에는 여전히 사나운 기색이 감돌고 있었 다. "어머, 그렇게 빨리?" 지숙은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 불안해 했다. "왜? 그래선 안 돼?" "안 되긴......" "그럼 갈게, 기다리고 있어." "그럴께요. 근데 누가 오죠?" "내가 가겠어." "언니가?" "그래, 지숙이, 네 얼굴이 보고 싶어." "으음." 잠시 그들 사이를 오고간 것은 거친 호흡소리뿐이었 다. 그녀들은 상대방의 입장을 계산하는 듯한 모습이 었다. "언니, 이걸 알아야해." 이윽고 지숙이 입을 떼었다. "뭘?" "내가 이번 일을 자세히 메모해서 믿을 수 있는 사 람에게 전해 놓았다는 사실을 말예요." "알아." "만에 하나 우리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지체없이 사 직당국에 고발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두요." "알고 있대두. 네가 일전에 그렇게 말했었잖니." 그건 사실이었다. 지숙은 이번 일의 자초지종을 자세히 적어서 그녀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등기우편으로 보내놓고 있는 처지였다. 그녀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하경은 지숙의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할 처지였다. 그런데 문제는 지숙이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으 로 모건을 선정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사형집행영 장을 갖고 그녀의 사형을 집행할 사람에게 말이다. 지 숙은 모건과 하경과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 하경은 지숙과의 대화를 끝내자 김강민과 함께 그리 고 그녀의 노복격인 곽만길마저 대동하고 평창동 집을 떠났다. 그녀는 만일을 생각해서 1억원을 가방 속에 챙기기도 했다. 그들은 강민의 검은 콩코드에 몸을 실었다. 그들 모 두가 말이 없었다. 강민은 앞을 주시한 채 운전에 열 중했고 곽씨는 그 주름진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뒷좌석의 하경은 눈을 감고 시트에 깊숙이 파묻혀 있 었다. 그들보다 한 발 앞서 저녁 6시께에 모건은 그의 낡 은 피아트로 그의 강변 아파트를 떠나고 있었다. 그의 피아트는 어느새 색이 바래고 칠이 벗겨져 있 었는데, 그 성능만은 이름에 손색없이 여전히 우수했 다. 그날의 달력은 12월의 13일에 금요일을 가리켰다. 한 해가 역사 저편으로 사라지려는 시기였다. 모건은 러시아워에 집을 나선 것을 후회했다. 서울 의 모든 길은 퇴근차량의 행렬도 가득차 있었다. 모건 은 망우리 고개를 넘어 시내를 벗어나자, 후! 하고 한 숨을 내쉬었다. 경춘가도는 언제 달려도 스릴 만점의 드라이브 웨이 였다. 청평유원지로 접어들자 겨울의 호반을 달리는 차는 별로 없었다. 어둠이 호수를 감싸고 있었다. 호수는 아직 얼어 있지 않았다. 피아트의 헤드라이트는 호반의 아스팔트 길을 조사 (照射)했다. 낙엽이 차창을 때리며 흩어졌다. 겨울 바 람이 호반을 심란스럽게 휘젓고 있는 것이다. 모건이 호반의 별장에 도착한 것은 저녁 8시께였다. 별정은 언제나처럼 밤의 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숲 저편에 떠 있던 달이 오늘밤은 보이지 않았다. 모건은 전조등을 끄고 다가섰다. 그러자 숨 죽인 듯 자리하고 있던 별장의 전경이 하얗게 부각되어 다가왔 다. 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보였다. 집 앞에 세워놓은 앰블런스도 눈에 띄었다. 그러니 사람이 별장에 있는 것이다. 아마 설지숙과 마동림에 곽일우의 세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신상에 닥치고 있는 검은 손길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 고 있을 것이다. 모건은 한동안 정원의 풀장을 살폈고, 앰블런스의 안팎도 살폈다. 모건은 이윽고 별장의 문을 열고 성큼 집안에 들어 섰다. 후끈거리는 열기와 함께 술냄새가 풍겨왔다. 담 배 연기 저편에서 술자리를 차려놓고 웃고 떠드는 세 사람도 눈에 들어왔다. 빨간 다운파카 차림의 모건의 느닷없는 출현에 모두 가 놀라와 했다. 누구보다도 지숙이 당황해 했다. 아니 기겁해 했다. "아니, 당신이 여긴 어떻게?" 전혀 뜻밖의 출현이었다. 지숙이 기다리는 사람은 모건이 아니라 하경이었다. 모건이 요근래에 서울에 없는 것으로 지숙은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와는 소원해진 지 오래다. "오랜 만입니다." 두 남자도 어쩔 줄 몰라하며 모건 앞에 머리를 조아 렸다. 모건은 그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는 무표정,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그런 표정의 모건에게서 지숙은 불안을 느꼈다. 그런 점에선 마동림도 곽일우도 같았 다. 모건은 말없이 소파의 상좌에 자리잡고 있었다. 세 사람은 어느새 모건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재판관 앞에서 선고를 기다리는 피고인들처럼. "설명이 필요하군." 모건은 그의 수하 세 사람을 건네다 보며 입을 떼었 다. "누가 나한테 말을 해줄 수가 있지?" "내가 보낸 우편물은 받아보셨어요?" 지숙이 나서며 물었다. 그것만이 오늘의 사태를 이 해하는 열쇠이기나 하듯이. "받아보았소." 그렇다면 긴 설명이 필요치가 않다. 그러나 지숙은 그간의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건 당신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에요." 지숙은 그들의 일이 조직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일깨 우려 했다. 사사로운 일이라는 지적이다. "오늘밤 3억을 받기로 했어요." 지숙은 어딘가 뽐내는 어조로 말했다. "흐음, 대단하군." 모건은 시큰둥하니 말했다. "여보......" 지숙은 뭔가 설명하려 했다. "잠깐." 모건은 지숙을 가로막았다. "당신, 엄씨 일가가 우리 조직과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 "......" "우리의 가장 중요한 거래선이라는 사실도 말야." "......" "조직이 이 일을 알면 화를 낼 거라는 사정도 아는 지 모르겠군." "......" "내 생각으로는 어떤 형태로든지 당신들의 탈선을 처벌할 것으로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오?" 모건은 조용하게 그리고 메마르게 말했다. 한 가닥 감정의 찌꺼기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런데 조직의 처벌이란, 죽음을 뜻한다. 그러니 모 건의 말은 일종의 죽음의 선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지숙도 마동림도 곽일우도 낯빛을 잃었다. "한 가지만 묻겠소." 모건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는 잠시 방안 을 서성거렸다. 그는 담배를 피워 물고 있으면서 연방 잔기침을 했다. 그것이 그렇게 귀에 거스를 수가 없었 다. 곽일우는 모건을 덮치고 싶은 강한 충동에 한동안 시달렸다. 그는 그 어떤 위험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 었다. 그것도 절박한 위기의식이었다. 모건의 다운파카 의 호주머니 속에 권총이 숨겨져 있음을 그는 감지하 고 있었다. "엄사장의 시신을 풀장 속에 감춘 것은 틀림없소?" 모건은 지숙의 앞에 멈추어서며 물었다. "틀림없어요. 지금이라도 가보시면 알아요." "알겠소." 모건은 지숙의 그 착상만큼은 높이 살 만하다고 생 각했다. 내년 봄까지는 어느 누구도 엄대진의 시신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한 가지만 더 묻겠소." "......"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누구 또 있소?" "......" "나 말고도 이 사실을 알리는 우편물을 보낸 사람이 있느냐 말이요?" "그런 사람은 없어요. 당신 말고는......" "그 말을 믿어도 될까?"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알리는 것이 뭐 좋을게 있겠 어요?" "하긴......" "당신 말고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도 따로 없어 요." "알겠소." 지숙은 모건이 대충 이해했다고 생각했고, 그들에게 동조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치명적인 오산이었다. "여보, 우린 3억 원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 이 일은 아무도 몰라요. 우리말고는...... 정말이에요." "흐음." "3억이 아니라 30억이라도 손에 넣을 수 있다구요." 지숙은 마침내 그녀의 속셈을 드러냈다. 그녀는 결 코 한 번의 위협으로 끝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리고 그녀의 계산대로 30억 원이라도 끄집어 낼 수 있 을 것이었다. 지숙은 달콤한 미끼로 모건을 그녀의 편 에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모건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한 가지뿐이 었다. 눈 앞의 세 사람만 이 지상에서 없앤다면 이번 사건 의 모든 비밀이 땅 속에 파묻히게 된다는 사실 말이 다. 모건은 그리고 그 일을 진행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세 사람에게 모든 일을 그에게 일임하고 일단 손을 떼도록 지시했다. 조직이 그들을 처벌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위협을 곁들이면서. 모건은 지금이라도 하경이 조직의 암살자를 앞세워 달려올는지 모른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어때? 이 별장을 한시바삐 떠나는 것이......" "알겠어요." 지숙은 얼른 알아듣는 듯했다. 두 사내도 고개를 주 억거렸다. 그들은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호랑이굴에서 벗어 난 것만을 다행으로 여기는 모습으로. 그런데 지숙이 주춤했다. 그녀는 남고 싶어했다. 그녀는 불타는 시선으로 모 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지숙의 얼굴 위에 신애의 얼굴이 부옇게 겹쳐지며 떠오르고 있었다. 모건은 지숙을 떠나보내는데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 았다. 그의 내부에선 알지 못할 잔인한 만족감마저 감 돌고 있었다. 지숙은 이미 그에게 있어 불타는 사루비 아 같은 황홀한 여자는 아니었다. 얼마 후 지숙과 두 명의 사내는 그들의 앰블런스로 별장을 떠났다. 아니 이 지상에서 영원으로 떠난 것이 다. 그들은 호반을 끼고 얼마쯤 달리다가 절벽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호수 깊이 잠겨버린 것이다. 모건이 장치한 시한폭탄으로 해서다. 모건은 창가에서 폭음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밤하늘 에 높이 치솟는 불꽃 같은 섬광도 보았다. 그는 일순 그의 내부에서 솟구치는 광포한 희열을 맛보았다. 그는 그의 곁에 남으려고 마지막 눈길을 보내던 설 지숙의 죽음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는 다 만 마동림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했다. 바로 암살자 M으로 통하는 마동권의 아우를 그는 살해한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전설적인 암살자 마동 권에게 감히 도전한 것이었다. 마동권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을 안다면 강심장의 그도 팔딱팔딱 뛰리라. 그리고 절치 부심하리라. 그가 그의 동생을 살해한 모건의 피를 보지 안고 물 러설 리가 없다. 모건이야말로 불구대천의 원수인 것 이다. 마동권이 그에게로 올 것이다. 언제쯤 오게 될까? 오늘밤? 아니면 내일밤? 과연 누구한테 승산이 있을까? 모건은 저절로 피의 설레임을 느꼈다. 그는 담배를 피워 입에 들었다. 그리고 한껏 빨아들였다. 빈 속이어 서일까, 배가 싸늘하게 아파왔다 그리고 얼마간의 어 지럼증이 뒤따랐다. 그 사실에 모건은 만족했다. 그는 탁자 위의 맥주잔도 비웠다. 아마 체내에 니코틴을 확 신시키는데 크게 기여하리라.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김강민이 모는 검은 콩코드도 별장에 당도했 다. 호반으로 오는 길목에서 그들은 저 멀리 그들을 향 해 달려오는 두 줄기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보았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의 차창을 통해 폭음소리를 들 었고 하늘로 치솟는 섬광도 보았다. 두 줄기 헤드라이 트 불빛이 그들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진 것도 물론 이었다. "저게 뭐죠?" "글쎄요." 그들은 직감적으로 그들을 위협해 온 무리들이 자신 들의 무대에서 퇴장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들이 별장에 당도했을 때는 낡은 피아트 한 대만 이 눈에 띄었다. 오, 저것이 모건의 차인 것이다. 하경의 전 남편이라 는...... 강민은 어쩐지 심기가 불편했다. 하경은 가장 중요 한 고비에 이르러 그녀의 전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지 하고 있는 것이다. 강민은 하경의 그러한 결정에 심기가 사나워져 있었 던 것이다. 비록 살인이 그녀의 전 남편의 전매특허 같은 일이 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사내일까? 여자마저, 아내라는 이름이건, 정부라는 이름이건, 살 해할 수 있는 사내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집 안에 들어서는 밖의 추위와는 달리 후덥지근했 다. 벽난로에서는 장작개비가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그들이 예측한 대로 거실엔 빨간 다운파카 차림의 모건만이 있었다. 그는 홀로 술을 들고 있었다. 그는 일어나지도 않았고 경의를 표하지도 않았다. 강민이 본 바로는 모건은 뭐랄까, 섬세한 선을 드러 낸 마스크의 사나이였다. 강인해뵈는 억센 턱을 지닌 사나이로 연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살결도 크림색에 다가 눈썹은 진했고 입술은 붉다. 그 눈빛만은 잿빛에 가까웠다. 그러나 저 정갈해 뵈는 마스크 뒷편에 차가운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사이코의 앤소니 퍼킨스처럼 말 이다. "어떻게 됐어요?" 하경은 거실에 들어서자 묻고 있었다. "상황은 이제 끝났소." 모건은 덤덤하니 말했다. 그는 뽐내지도 않았으나 겸손해 하지도 않았다. "이제 남은 일은 술을 드는 일뿐이오. 당신들이 축 배라도 들 생각이 있다면 말이요." 모건은 그 자신의 손에 든 술잔을 높이 들어 보였 다. "좋아요, 축배를 들 일이 있으면 들어야지요. 하지만 그전에 몇 가지 묻고 싶어요." "뭘 말이오?" 모건은 한결 소파에 깊숙이 파묻히며 물었다. 언뜻 보아 거드름을 피우는 것 같기도 하고 만사가 예사스 럽다는 모습이기도 했다. 하경은 앉지도 못한 채 모건 앞에서 서성였고, 강민 과 곽만길씨는 벽난로 옆에 기대어섰다. "시신은 어떻게 됐어요?" 하경으로서는 그 중 궁금한 일이었다. 강민도 무엇 보다도 알고 싶은 상황이었다. 그것은 타는 듯한 목마 름과도 같은 욕구와 비슷했다. "그들이 깨끗하게 처분했더군." 모건은 대수롭지 않은 모습으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예요?" "알고보니 화장을 끝냈더군. 7번 화구에서 가짜 시 신을 화장할 때, 10번 화구에서 말이요. 잿가루만은 이 앞 호수에 뿌렸다는 군." 모건의 분명한 거짓말이었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이기도 했다. "어머, 그래요?" 하경은 기쁨을 얼굴에 나타냈다. 그녀는 쉽사리 모건의 말을 믿는 듯했다. 그것은 그 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이 크게 작용하고 있 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었다. 물론 일말의 의구심이 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애써 지워버리려는 듯 했다. 그런 점에서는 강민도 비슷했다. "그렇담, 천만다행이네." 하경은 크게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독살된 시신을 갖고 다니는 게 그들에게도 부담스 러웠나 보더군." "좋아요. 근데 지숙이가 하는 말이 이번 일을 메모 해서 누군가에게 맡겼다고 하던데......" "그건 나한테 맡겨두었다고 하지 않았소." "알아요. 그런데 그걸 당신 말고......" "나 말고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고 했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광고할 일이 아니라면서...... 그 말도 믿어도 될 거요." 어떻게 보면 지금의 상황은 모건이 지숙이한테 꼬치 꼬치 캐묻던 사실들을 하경이 모건한테 하나하나 묻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경이 단순히 걱정스러워서 묻고 있는 것만이 아니 라는 것을 고도로 민감한 신경의 소유자인 모건으로서 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막상 하경의 마음속 저 밑바닥에 잠자고 있는 흉계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 했다. "그럼, 그 우편물은 어떻게 했어요?" "내가 갖고 있소." 강민은 일순 모건이 미소지었다고 생각했다. "그걸 나한테 넘기세요." 하경의 어딘가 속삭이는 듯한 아니, 유혹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당신한테 넘길 것까지야 뭐 있소. 내가 태워 버리 면 그만이지." 모건의 얼마간 퉁명스런 목소리였다. 강민은 모건이 결코 그것을 태우지 않을 거라는 생 각이 들었다. 모건이 그 어떤 약점을 쥐고 있을 생각 이라면 그리고 그것으로 하경을 희롱할 요량이라면 넘 기지 않을 것이다. 지숙의 친필로 작성된 그 문서는 훌륭한 고발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민하경과 그녀 의 공모자들을 교수대에 세우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이었다. 강민은 일순 알지 못할 오한에 몸을 떨었다. "당신, 그걸 나한테 넘기도록 하세요!" 하경이 다시 말했다. 이번엔 얼마간의 서슬이 담겨 져 있었다. "날 못 믿나 보군." 모건이 미간을 모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을 지었다. "내 손으로 태워 버리고 싶어요." "고집스럽군." 모건은 시큰둥했다. 강민은 다시금 모건이 그것을 넘기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했다. 그러면서 그의 머리를 지배하는 것은 새 로운 화근을, 그것도 엄청난 화근을 자초했다는 생각 이었다. 그리고 그 화근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것도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좋아요." 하경은 일순 후퇴하는 듯했고, 모건은 그 사실에 만 족하는 듯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의 다운 파카를 벗어 구석진 곳에 놓은 행어에 거는 것이었다. 사실 집안은 너무 후덥지근했다. 더구나 곽씨가 벽난 로에 장작개비를 한 아름씩이나 더 지핀 탓으로 방안 은 열기로 가득했다. 모건은 다시금 그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그로서 는 첫 번째 실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 다. 그것은 그를 지킬 무기를 그의 몸에서 떼어 놓았 다는 사실이었다. 파카 호주머니 속에 챙겨놓은 그의 권총은 파카와 함께 그의 곁에서 떠나버린 것이다. 그는 어떻게 보면 하경을, 능히 남편마저 독살하는 눈 앞의 여인을 가볍게 평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 다. 그는 김강민과 곽만길 씨도 무시했다. 어차피 그들은 아마추어인 것이다. 그와는 대적할 수 없는...... 그러나 이것은 모건의 돌이킬 수 없는 두 번째 오산 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신한테 보상하고 싶어요." 하경은 말을 이었다. "보상? 그것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어떻게?" 모건은 히쭉 웃었다.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점차 즐겁기만 하다는 표정이었다. "당신한테 3억 원을 드리기로 하겠어요." "지숙이한테 주기로 했던 그 3억 말이요?" "오늘밤 우선 1억 원의 현금을 드리겠어요. 우리가 가방 속에 챙길 수 있었던 최대한의 현금이에요." "그럼 나머지 2억은?" "서류를 넘기세요. 그럼 드리겠어요." "고집스럽게 그 서류에 집착하는군." "어떻게 하시겠어요?" "내가 싫다고 하면?" "싫다구요?" 하경이 그 아름다운 미간을 잔뜩 모았다. 그녀의 아 름다운 입술에서도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내가 당신한테 바라는 것은 돈이 아니오." "그럼?" "돈이 아니라 당신이오." "뭐라구요?" "우리 다시 결합하도록 합시다." "싫어요. 그건 싫어요!" 하경은 외치듯이 말했다. 그녀는 넌덜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얼굴엔 강한 혐오의 빛마저 떠 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분노로 발전하기까지 하는 것 이었다. 그러나 이내 모멸과 연민이 어린 모습으로 바 뀌고 있었다. "당신은 지긋지긋해요.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요." 하경은 신랄했으며 야멸찼다. 그러나 모건은 다만 느물거렸다. "내가 그토록 싫소?" "그래요. 몇번 물어봐도 내 대답은 언제나 같아요. 당신은 싫어요!" 강민은 하경의 단호한 태도에 저으기 만족했다. 아 전인수격이라고 해도, 하경의 그에 대한 호감이랄까, 애정이랄까를 재확인하는 듯싶어 흐뭇하기만 했다. 그런데 모건의 앞으로의 태도가 문제였다. 필경 지 숙이 이 세상에 남긴 메모를 빌미삼아 끝내 그의 뜻 을, 민하경과 함께 그녀의 아주그룹을 손아귀에 넣으 려는 야욕을 채우려 할 것이다. 왕비와 함께 왕관을 말이다. 강민을 악마를 쫓는데 마왕의 힘을 빌렸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는 결코 그들을 구원해 줄 알라딘의 램프 의 노예는 아니었다. 모건은 여전히 빙글거렸다. 그의 얼굴엔 시종 칼자 루를 쥔 자의 우월의식이 넘실대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가 휘두르는 칼날 앞에 그들 모두가 깊은 상처를 입 을 것만 같았다. 모건을 제거해야 한다. 강민의 내부에서 냉정하고도 이지적인 경구가 경종 처럼 시끄럽게 울렸다. 모건을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이 이상 절박한 명제도 달리 없을 것이었다. "당신, 이걸 아세요?" 잠시 후 하경이 모건을 향해 입을 떼었다. 그녀는 지금은 길길이 뛰지도 않았고 신랄함도 가시 어 있었다. "뭘 말이요?" 모건은 탁자 위에 두 다리를 포개어 올려놓으면 묻 고 있었다. 그것은 일단 유사시에 도약할래야 도약할 수 없는 자세였다. "당신이 마동림도 살해했다는 사실을 말예요." "으음." 모건이 처음으로 무거운 신음소리를 토했다. 분명한 사실에 대한 확인에서 오는 새삼스러운 불안을 그도 되씹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보면 마동권에서 도전한 셈이에요. 알아요?" "알고 있소." "그래 승산은요?" "솔직하게 말하리다." "말씀하세요." "반 반이오. 그것도......" "후하게 봐서 말이요." "으음." 이번엔 하경이 신음소리를 토했다. 강민에게도 새로 운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건 불안이 아니었다. 공 포였다. 전율이었다. 강민이 이 시점에서 뼈아프게 깨닫고 있는 것은 마 동림을 살해함으로써 마동권을 적으로 돌렸다는 사실 이었다. 그리고 마동권을 적으로 돌려 생명을 보전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강민은 생각만해도 오싹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하면 전설적인 암살자 마동권의 속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그런 방법이 있을까? 그때 교활한 신호가 그의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 다. 그리고 그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것은 모건을 이 세상에서 없애면 된다는 메시지였 다. 그들 모두와 마동권을 잇는 중간 고리는 모건이었 다. 모건만을 단절하면 인연의 사슬은 단절되는 것이 다. 모건이 이겨만 준다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의 말 처럼 승산은 반 반이다. 그것도 후하게 봐서다. 그러니 모건의 실패의 확률이 높은 것이다. 잠시 강민의 시야에 마동권의 총탄 앞에 쓰러지는 모건의 모습이 부각되어 다가왔다. 마동권은 아마 모 건을 금세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엔 그의 양 무 릎부터 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건으로 하여금 바닥 을 기게 할 것이다. 살려달라고 애원도 하게 할 것이 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모건에게 그의 동생을 죽이도 록 청부한 사람들의 명단을 요구할 것이다. 모건이라고 해도 그 지경에 이르러서는 밝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민하경, 김강민, 곽만길 등등...... 모건을 겨냥했던 총구는 분명히 그들의 심장을 향해 서도 겨냥될 것이다. 그럼 우리가 살자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자면 우리와 연결된 인연의 사슬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모건의 제거라는 길밖엔 달리 방도가 없다. 모건은 그러나 그의 앞에 선 사람들의 미묘한 심리 적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전히 태평스런 모습이었다. 그러니 그의 오산은 한두 가지 가 아니었다. "암튼 당신이 승리하면 우린 무사하겠군요." 하경이 잠시 입술을 짓씹으며 생각에 잠기더니 물었 다. "그렇소." "당신이 실패하면......" "당신들도 무사하지 못할 거요." "우린 그럼 불확실한 확률에 매달려 있는 셈이군 요." "솔직히 말해서, 그렇소." "가장 확실한 확률에 매달리는 방법은 뭐가 없을까 요?" 하경의 면밀하게 계산을 끌낸 뒤의 발언이었다. 모 건은 비로소 하경의 계산된 발언의 진의를 이해한 듯 했다. 그런 탓인지 그는, "나를 제거하는 것이 여러모로 안전한 방법일 게요. 비밀을 아는 사람은 이젠 나뿐이니까. 당신들과의 관 계도 말이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진실을 말하 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신에게 사형을 언고하 고 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럼 당신만을 제거한다면 우린 안전하다는 얘기가 되겠네요. 마동권한테서두요." "그렇소" 모건은 대꾸하면서 히쭉 웃고 있었다. 그는 어쩐지 눈앞의 냉혹한 현실이 못 견디게 재미있다는 모습이었 다. 자신의 운명을 마치 타인의 운명처럼 희롱하는 모 습이기도 했다. "당신한테 다시 한번 부탁드리겠어요." "무엇을 말이오?" "지숙이 남긴 메모를 둘려주세요." "그 대답은 벌써 했다고 생각하는데......" "당신 생각을 바꿀 수는 없어요?" "분명히 말해서, 없소." "으음." "없다면 어떻게 하겠소?" "그렇다면 내가 당신한테 드릴 대답은 오직 하나뿐 이에요." "......" "난 이럴 생각은 결코 아니었어요." "......"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놀랍게도 하경은 그녀의 검은 트렌치코트에서 권총 을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베레타라는 이름의 이태리제 소형 자동권총을. 그것은 엄대진이 생전에 애지중지했 던 배레타 M20이었다. 유별나게 무기에 호기심을 지 녔던 엄대진이 홍콩의 조직에서 선물받았었다. 아마 그 자신을 제임스 본드와도 같은 위치에 놓고 즐겼을 것이었다. 제임스 본드도 한때 베레타 M20을 애용했기에 하는 말이다. 베레타 M20은 현재 판매되고 있는 포ㅋ권총으로서 는 가장 인기가 높은 제품으로 같은 종류의 부르우닝 의 성능을 능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경은 25ACP! 장탄수는 8+1발! 그 총구가 모건의 심장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하경이 마침내 무서운 결단을 내렸다고 할 수 있었 다. 강민의 이성이 그 절대적인 불가피성을 뼈아프게 깨닫고 있던 결론이었다. 그러면서도 행동에 옮길 가 망성이라고는 아예 없다고 체념했던 일이었다. 모건은 그러나 눈 앞의 광경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일순 멍청스럽 게 웃기까지 했다. 그러나 고도로 훈련된 그의 근육은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탁자 위에 걸쳐놓은 발을 내리고 있었다. 그 사이 0.1초가 흘렀다. 그가 두 손으로 소파의 손받이를 짚으며 몸을 고추세웠다. 다시금 0.1초가 흘렀다. 그는 하경을 향해 대시할 것인가. 아니면 권총이 들어 있는 옷이 걸려 있는 행어로 달려갈 것인가 하고 망설임을 보였다. 또다시 0.1초가 흘렀다. 그러나 하경이 모건의 심장에 방아쇠를 당기는 데에 0.3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경은 세 번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도 세 번 울렸 다. 사이렌서가 달려 있지 않은 베레타는 좁은 공간에 엄청난 폭음을 몰고왔다. 강민은 분명히 보았다. 모건이 허위적거리며 쓰러지 는 모습을, 강민은 눈 앞의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모건이 피범벅이 되어 마루바닥에 길게 쓰러져 있는 것이다. 그가 즐겨 입는, 눈보다 하얀 셔츠엔 아직도 피가 번지고 있었다. 그 광경은 너무나도 선연했다. 그 러나 강민의 눈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 것은 모건의 눈에 떠오르던 불신의 빛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독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