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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
날씨가 설설 끓는다.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사무총장이 말한 대로 “끓는 기후의 시대가 왔다”라는 게 온몸으로 느껴진다. 그가 이 폭염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기후가 위기라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지난 장마가 648.7mm의 물을 퍼붓는 새 47명이 생사를 달리했다. 폭우가 멈추자 이젠 폭염. 1385명의 온열질환자가 발생하고 그 중 18명이 사망했다(질병관리청, 2023.8.2. 기준). 한 달 남짓 만에 65명이 기후재난으로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여름은 앞으로 당신에게 남은 여름 중 가장 시원한 여름일 것이다”라는 소셜미디어에서의 예언은 섬뜩하다. 청년들만 미래를 불안해하는 건 아니다.
기후위기가 시대를 규정하는 의제가 되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의 주류 의제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다들 알고 있는 이유, 경제 때문이다. “기후위기를 해결하려다 경제를 다치지는 않을까”라는 우려가 기후위기 대응에 발목을 잡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기후위기 대응에 미적거린 것도, 윤석열 정부가 ‘기후문제는 나 몰라라“, 내팽개친 것도 나름 경제에 관한 철학(?)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를 외면하면 대중으로부터 배제된다
기후위기를 우리 사회의 주류 의제로 자리매김하려면 기후문제는 경제문제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기후위기 해결이 경제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방치된 기후위기가 경제를 죽인다는 사실을 밝혀내야 하고 지구를 살리는 길이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는 것도 보여줘야 한다. 경제를 희생하더라도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마지막 주장‘이 되어야 한다. 그건 기후와 경제 사이의 딜레마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다한 뒤에 할 수 있는 주장이다. 기후위기가 존재론적 질문이라지만 경제문제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기후위기가 천천히 죽는 문제라면 경제위기는 당장 죽는 문제다.
현실경제에 대한 외면은 기후운동이 소수파 운동에 머무는 주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기후운동에서는 탈성장론과 탈자본주의론과 같은 체제전환론이 지배 담론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추상적 차원에서 체제전환을 다룰 뿐 대중의 삶이 배어 있는 경제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기후위기는 현재진행형인데 그들의 시선은 미래에 가 있다. 그리하여 기후운동은 대중을 배제한다. 대중을 배제함으로써 대중으로부터 배제된다. 대중으로부터 배제된 기후운동이 정치권력의 지형을 바꾸지는 못한다. 기후운동은 아래로부터 배제되고 위로부터 거부된다.
지난 4월 10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후위기비상행동 등 환경단체 회원들이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계획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3.4.10. 연합뉴스 자료사진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기후운동의 전망에 상상력을 넓히는 것은 사실이다.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다. 다만 허공에서 허공을 붙잡으려 들 것이 아니라 지상에 내려와 대중의 삶과 경험에 가닿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후운동은 대중과 유리된 채 지적 우위를 누리는 엘리트 운동이 되거나 도덕적 카타르시스를 즐기는 자기만족적인 운동이 되기 쉽다. 그리하여 기후운동은 우리 사회에서 주변부 운동이 되고 만다.
기후재난이라는 실존적인 위험에 직면해서도 탈성장을 하지 않은 탓이라고, 탈자본주의가 해결책이니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석탄화력발전소의 폐쇄나 전기차 전환으로 삶의 터전을 잃는 노동자에게 “대의를 위해 참아라”라고 할 수는 없다. 당면한 과제에 당면할 때 담론은 현실성을 얻고 대중의 공감을 얻는다.
노동자도, 정의로운 전환도 외면하는 기후운동
변혁적인 체제전환을 주장하는 기후운동가의 시야에서는 노동자도 사라진다. 그들에게 노동자는 일자리에 갇혀 기후위기를 외면하거나 성장주의에 젖어 기후위기를 방관하는 집단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들은 ‘생산’하는 노동자만 볼 뿐 ‘소비’하는 대중들은 보지 않는다. 대중이 노동자와 노동자 가족으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도 외면한다.
기후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는 사회정의가 동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불평등의 해소가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핵심이라는 말에도 다들 동의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그친다. 기후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고용 불안에 맞닥뜨린 노동자, 생계 기반을 잃은 지역주민, 그리고 재난에 취약한 빈곤층의 이야기는 거대 서사 앞에서 소거되고 만다.
기후운동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느끼는 일 가운데 하나는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말을 듣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노동조합을 지배하는 담론은 정의로운 전환이다. 탄소중립 과정에서 취약계층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그 피해를 사회적으로 분담하는 것을 말한다. 탈성장과 정의로운 전환, 기후운동과 노동운동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며 서로 다른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기후위기가 시대적으로 절체절명의 과제라고 해서 노동자더러 일자리를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그들을 기후위기의 희생자로 만들지 않는 것이 사회정의고 그들을 기후위기 해결의 주체로 세우는 과정이 정의로운 전환이다. 노동수요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수요가 만들어내는 파생수요다. 그렇다면 기후위기를 해결하면서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안이 된다.
기후와 노동, ‘따로 또 같이’하는 연대로 가야
기후 운동에서 노동이 설 자리가 좁아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도 최근 기후와 노동을 연계하려는 움직임이 늘어나는 것은 고무적이다. 노동조합 안팎에서, 주로 연구단체에서 이뤄지지만 때로는 기후단체가 나서서 기후와 노동의 연대를 모색하기도 한다. 당연히 이러한 노력에는 기후와 경제, 그리고 일자리가 어떻게 동행할 수 있는지, 그 속에서 어떻게 노동자를 기후위기 해결의 주체로 세울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뒤따른다. ‘기후 따로’, ‘노동 따로’가 아니라 기후와 노동이 ‘따로 또 같이’하는 연대를 향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탈성장론이나 생태사회주의와 같은 체제전환론은 중장기적인 전망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고 그것이 당면 과제를 외면할 수 없다면 단기적으로는 그것이 어떤 전략과 결합하는지도 보여줘야 한다. 오늘의 문제를 방치하는 내일의 해법이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는 없다. 해법은 ‘그때그때 다르다”. 탈성장을 지향하더라도 과도기 전략으로 그린뉴딜 전략이나 녹색 일자리 전략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기후위기와 경제, 일자리 사이의 선순환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밝혀낼 수도 있는 탓이다. 탈자본주의 담론을 유지하더라도 당장은 ‘자본주의 고쳐쓰기’를 의제로 삼을 수도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내부 비판과 지속적인 개선이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경로가 되기도 한다.
현실은 구체적이다. 기후운동의 담론을 대중이 수용하지 않으면 권력의 지형은, 그리하여 기후정치는 바뀌지 않는다. 지금은 기후운동이 왜 우리 사회에서 소수파 운동에 머물고 있는지를 자문해야 할 때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그렇다.
기후운동, 자기만족적 엘리트 운동에 머물 것인가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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