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는 당당한 체격으로 눈앞의 제신들을 압도하며 느릿느릿 말했다. 이 폭군이 또 한 번 터질까, 조마조마하며 그저 머리를 조아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들 잘 알겠지만… 피에리데는 천치다.”
‘천치’라는 천박한 말마저 서슴지 않는 황제는 그 카리스마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 강인한 눈빛과 리더쉽은 검은 사막 어디쯤을 지배하는 아 머시기 하는 마왕과는 천지 차이였다. 천생 황제! 그가 황제가 아니었다면 무엇을 했으랴. 타고난 자였다.
“하지만 내 딸이다. 더구나 짐승이라도 낯선 자에게는 거부감을 느낄 텐데….”
갑자기 또 무슨 엉뚱한 소릴 꺼내려고 이럴까.
“하물며 황국 가장 내부에 있는 공주의 처소까지 침입자가 들어오는 동안 아무런 신호조차 없었다는 것은…. 내부에 공모자라도 있다는 소리인가! 짐의 목을 따러올 수도 있었단 말 아닌가!”
큰 소리로 다그친다. 제신들은 다시금 머리를 조아린다. 황제의 언성은 높아져만 갔다. 그저 권력과 무력으로 모든 이들을 압도하는 미련퉁이만 되어서는 황제도 못해 먹는다. 이제 사십 대 초반에 들어간 이 황제는 일흔 넘은 노인보다 더 능구렁이가 되어 있었다. 공주가 유괴당한 이 순간까지도 그 철저한 언변으로 내부 숙청을 단행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천고에 가장 위대하신 폐하. 그 범인은 스스로를 마왕이라고 밝혔습니다. 더구나 며칠 전, 제 4대 마왕인 태양왕 루가 권좌에서 물러났다고 합니다. 이는 혹, 마족의 도발이 아닐지요.”
최악의 상황은 벗어나야 한다. 어떻게든 이 황제의 분노를 밖으로 돌려야 자신들이 산다. 거의 울먹이는 듯한 재상들의 간언이었다.
“마법의 일족들의 새로운 왕에 대해서도 들리는 바가 있는가?”
“예, 최근에 귀화를 원한 마족이 궁중 마법사로 있습니다. 불러올까요?”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마족이라고 특별한 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보통 인간들보다 조금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특별히 마법이란 능력을 체계화하여 다루며, 종족의 구분이 외양이나 생식이 아닌 ‘마력’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 정도가 마족의 특성이다. 세간에 그려지는 악마와 같은 이미지는 인간의 관점에서는 ‘짐승’인 마족들이며 혹은 그들의 압도적인 마법력에 대한 환상이다.
때때로 마족들은 인간의 세상으로 넘어오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 왕궁에서는 궁중 마법사로서 융숭한 대접을 받곤 했다. 그리고 한 1년 전쯤, 태양왕 루가 물러나면서 마법사 하나가 들어왔다. 그는 곧 양옆에 벌벌 떠는 신하들을 두고 황제와 마주하게 되었다.
“천고에 가장 위대하신 폐하를 뵙습니다.”
이렇게 공손히 인사를 올리며 무릎을 꿇은 자는 그래도 제법 평범한 늙은이였다. 마족치고는 말이다. 분위기마저 인간 늙은이와 다를 바 없었다.
“5대 마왕에 대해 있는 대로, 아는 대로 읊어봐라.”
인사는 들은 척, 만 척하고 황제가 다그쳤다. 비록 민간에서 악마화, 신격화된 마족보다야 덜 하지만, 이런 마법사도 충분히 위협적임은 분명함에도 황제의 당당함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5대 마왕이라면, 암흑왕 아자젤을 말하시는 것입니까?”
암흑왕 아자젤. 그것이 최근에 권좌를 차지한 마왕이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 마족은 아리송한 표정을 짓더만, 이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주 유별난 마왕입니다. 소문이 무성한 마왕이기도 했고요.
심지어는 마력이 전혀 없다느니, 마력을 다룰 줄 모른다느니 하는 소문이 날 정도로 한심한 마왕이란 말이 있는가하면, 태양왕을 삼켜버렸다느니, 마계 5공작이나 마계 원수의 권능과 힘을 모두 합한 것보다 강하다는 소문이 날만큼 최강자의 면모도 있습니다.
의문의 마왕입니다.
나이는 인간으로서도 젊은 편인 스물 안팎인 걸로 압니다.
제가 알기로는 아직 잠정적인 마왕에 불과해서, 공식적으로 얼굴을 드러낸 적은 없다고 합니다. 다만 태양왕 루가 일찌감치 후계자를 점찍어 둔지라, 소문만은 무성했지요.”
황제의 언짢은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별반 득이 될 만한 껀수가 없는 것이리라. 황제는 한참을 침묵했다.
지긋한 나이에도 아직 야심을 접지 않은 이 황제가 음흉한 웃음을 애써 감추려는 듯, 입술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직한, 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일부러 한 자, 한 자 끊어가며 말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황궁은 짐의 상징이요, 공주 또한 짐의 수족이다. 당연히 구해야겠지. 황궁 호위대장과 제 3 황태자를 보낸다. 공들의 노고 또한 기대할 것이다.
내부의 적을 색출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있는지도 모르는 내부의 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간 몰래 키워온 사병이며, 군자금, 용병이라도 고용해서 내놓아야 한다.
‘빌어먹을.’
차마 내뱉지는 못했지만 그런 마음을 먹지 않은 자는 없었으리라. 황제는 여전히 딸을 잃은 걱정에 초조한, 그리고 남 몰래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대신들이 나갈 때까지 권좌에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머릿속은 이것저것으로 복잡했다.
첫댓글 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천치인가요? 좀 불쌍하군요...그래도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