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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행전의 말씀 6,1-7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제2독서
▥ 베드로 1서의 말씀 2,4-9
사랑하는 여러분,
4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5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
6 그래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선택된 값진 모퉁잇돌이다.
이 돌을 믿는 이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7 그러므로 믿는 여러분에게는 이 돌이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하는 그 돌이며,
8 또한 “차여 넘어지게 하는 돌과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은 정해진 대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그 돌에 차여 넘어집니다.
9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4,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인생행로’ 혹은 ‘인생여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여로’라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대단한 인기를 얻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생이 ‘나그네 길’임을 말해줍니다.
인생이 ‘나그네살이’라는 말은 우리가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길을 걷는 이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길을 걷고 있느냐?’ 곧 ‘참된 길을 걷고 있느냐?’입니다.
그래서 물어야 합니다.
내가 걷는 길은 참된 길인가?
또한 중요한 것은 '그 길을 어떤 마음으로 걷는가?' 입니다.
간혹 길을 걸어가다 보면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도(길)를 아십니까?” “참된 길을 아십니까?”
오늘 우리는 이 물음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주시고, 무엇이 참 된 삶인지를 깨우쳐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교회에서 일곱 부제를 뽑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가는 ‘믿음의 길’을 제시해주며, 제2독서에서는 믿고 주님께 나아가는 이들, 곧 그분의 소유가 되는 백성에 대해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사의 시작 부분입니다.
곧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유언 말씀입니다.
유언이란 남는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가장 귀중한 가르침이라는 하겠습니다.
이 귀중한 예수님의 유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요한 14,1)
그러니 먼저 물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과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자신이 참 하느님이심을 믿고서,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요한 14,1)고 하십니다.
장차 당신이 제자들 곁을 떠난다하여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곧 당신이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 그곳에 어떠한지, 그리고 그곳을 왜 가시는지를 밝히십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먼저 ‘아버지 집’에 가시어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시고,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세상이 ‘나그네살이’이지만 궁극에서 ‘이별이란 없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벅찬 유언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겠다.”
(요한 14,2-3)
여기서, “거처”(μονη)는 ‘미련해(정해진) 둔’, ‘예비된’이란 의미로, 요한묵시록에서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21,2)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그분과 함께 거처할 자리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거의 매일 ‘시노달리따스’에 대해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바로 이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분명 우리는 ‘길 위에 있는 교회’(ecclesia viatrix)입니다.
‘함께 걷는 길’의 ‘여정’을 갑니다.
믿음과 사랑과 희망으로 ‘함께 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알려주시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토마스와 필립보에게 예수님께서는 알려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았으면서도 보지 못함은 믿지 않는 까닭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요한 14,11)
그렇습니다.
참으로 믿음이 ‘도’입니다.
‘도’는 진리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믿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믿음의 길’이 ‘참된 길’ 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사실 당신께서 “길”이라는 이 말씀은 황당하고 당혹스러운 발언이요, 혁명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길”의 표상은 본디 이집트 탈출의 상징이요, 해방의 길을 표상했으며, 점차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영원한 보상을 위해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율법”에 적용에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길”의 의미가 ‘율법’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란 무엇이오.?”(요한 18,38)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론이나 이념, 혹은 진리에 대한 개념으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교리나 이념을 초원하는 진리를 증언하셨습니다.
곧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살아있는 인격적인 진리를 증언하셨습니다.
바로 당신 자신 스스로를 두고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증언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진리”(áληθεια)라 함은 원어의 뜻이 ‘감추어진 보물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성부를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며, “생명”이라 함은 당신은 단순히 구원에 인도하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체가 구원의 원천인 살아있는 생명이심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인격적인 진리를 증언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진리를 알고자 하면서도 막상 그 진리를 따르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아는 것은 우리의 지적 호기심과 만족과 허영심을 채워주지만, 그 진리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버리는 데는 믿음이 따릅니다.
그렇게 믿는 바를 따라 몸소 살 때라야 자유는 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알게 될 때가 아니라 그 진리를 믿음으로 따를 때 자유롭습니다.
곧 예수님의 인격을 받아들이고 지금 여기에 인격으로 살아계시는 진리이신 생명을 믿고 받아들여 함께 살아가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요한 14,12)
오늘 여러분이 하는 일에 그리스도의 권능이 이루어지도록 믿음으로 실행하는 일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1)
주님!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게 하소서.
당신을 믿고 아버지를 믿게 하소서,
알면서도 안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믿고 의탁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믿고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믿고 그 믿음 안에서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께로>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명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으로서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생명은 이 세상에 국한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되어 주시고 당신이 살아있는 진리라는 사실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시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차지하는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고 선언하셨습니다.
길은 말씀으로 안내되고, 진리는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말씀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생명은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품위를 지켜 살아가는 진리 안에서의 삶이 하늘과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수 없다’고 하신 말씀대로 아버지와의 만남을 이루는 방법은 예수님을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중개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종점이 아니라 종점에 이르는 경로, 길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직접 보내주신 구원의 길잡이이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걸으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까지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걸으신 헌신과 사랑, 희생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양보하고 배려하는 예수님의 길이 나의 길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여기서부터 이미 천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같은 분, 진리와 비슷한 분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고(요한 17,17),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요한 1,14)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무엇이오’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이론이나 이념으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살아있고 길이 아닌 진리는 이념에 더 가깝고 이론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살아있는 인격적인 진리를 드러내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나는 진리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토마시 할리크)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모든 것은 옳고 그릇됨이 없다는 것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말씀을 듣고, 믿고,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하면서 왜 따르지 않아요?
아마도 지금 다른 것이 더 매력적이고 마음을 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닌 거짓이라면 그것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반면 진리는 영원합니다.
진리는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깨우치는 진리이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진리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진리가 구원이요, 사랑임을 경험하게 되고 비로소 진리 안에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진리와 인간이 만났습니다.
진리를 산다는 것은,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하느님의 말씀, 약속, 하느님의 충실함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가 커감으로써 이런저런 불평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과부들의 배급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때 사도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하고 선언하고 공동체 안에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봉사자 일곱을 뽑았습니다.
사도들은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말씀과 기도’를 부여잡았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마음에 불평과 불만이 도사리고 있다면 진리의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소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말씀을 펴십시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계시하고 그 진리를 믿음으로써 받아들여 실현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만납니다.
요한복음 17,3절에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으로 바뀌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삶이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생명이십니다.
영생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지금 여기서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영생을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 하고 선언하셨고, 미사 안에서 생명의 빵이신 성체를 영적 양식으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체를 자주 모심으로써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지금 여기서 누리게 됨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날 시대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아니라 ‘돈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처럼 잘못 살고 있습니다.
물질을 모든 것에 앞세우는 현실입니다.
돈만이 행복을 가져다줄 것처럼 생각합니다.
돈이 되면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답게 살기를 포기합니다.
돈 때문에 가정이 파탄 나고,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가 단절되며, 형제간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이웃 간의 관계도 냉랭해집니다.
우리에게는 부모에 대한 효가 있었고, 형제간의 우애가 있었으며, 이웃 간에 정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생명보다 물질이 우선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부작용이 얼마나 큰 아픔을 주고 상처를 낳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잃어버린 생명과 평화와 화목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국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이 몸소 보여주신 삶을 살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실천하게 될 때 부모와 자녀, 형제간,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세상이 맑아집니다.
어렵고 힘에 겨울수록 진리의 말씀과 기도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겨 하느님을 소홀히 하는 일은 결코 없기를 바랍니다.
길을 걷다 보면 공사장이 많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보통 푯말이 붙게 됩니다.
“공사 중! 통행에 불편을 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 푯말 밑에 낙서가 적혀졌습니다.
뭐라고 쓰였을까요?
“잘 알면서 왜 그래.”
불편을 주는 것 알면서 왜 그러냐고요?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 여정은 모두 공사 중입니다.
잘 알지만 안 되는 것들을 고치는 중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는 아버지 집이고 그 길 위에 서 있습니다.
가는 길에서 방황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순례의 길을 걸어 마침내 그 공사가 마무리될 때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우뚝 서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면 은총이 됩니다.
자신의 지혜와 삶의 방법을 내려놓고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실천하게 되면 놀랍게도 주님은 우리의 힘이 되시고,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의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됩니다.”
(요한 14,12)
모쪼록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과 하나가 되어 마침내 아버지 집에 거처할 수 있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누가 가족끼리 좀 더 가까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느님이 가족들 사이에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 줄까요? 아니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실까요?”
최민순 신부님의 ‘오늘 나의 길에서’라는 글로 마감합니다.
“주여,
오늘의 나의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고갯길을 올라가도록 힘을 주소서.
내가 가는 길에 부딪히는 돌이 저절로 굴러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넘어지게 하는 돌을 오히려 발판으로 만들어 가게 하소서.
넓은 길, 평탄한 길 그런 길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좁고 험한 길이라도 주와 함께 가도록 더욱 깊은 믿음을 주소서”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버티는 삶과 준비하는 삶의 차이>
존 존스(Jon Jones)는 목사의 아들로 어렸을 때는 TV나 인터넷도 하지 않고 자라서 천부적인 재능으로 스물 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종합 격투기 챔피언이 됩니다.
그런데 챔피언이 되고서부터 천천히 자신 안에서 악마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경기하기 일주일 전에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고 퇴폐 생활을 합니다.
그래야 만약 경기에 졌을 때도 자기 실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는 핑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한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임신부의 팔을 부러뜨리고 도주한다던가, 아니면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등의 사고와 범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스스로 자기를 망가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찍 성공한 이들이 이같은 경우가 많습니다.
권투선수 타이슨도 그랬고, 영화배우 샤이아 라보프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트랜스포머의 주인공 샤이아 라보프는 조금 달랐습니다.
처음엔 부모의 이혼으로 부모를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국 자신만을 믿게 되었고 일찍 영화배우로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폭행과 시비로 경찰서를 들락거렸고 결국엔 삶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을 바꿔준 계기가 있는데 알코올 중독 치료사로부터 받은 테이프였습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새옹지마’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새옹지마는 지금의 고통도 지나가면 행복이 될 수 있고 지금의 행복도 지나면 고통이 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지금의 시간을 버틸 필요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자신의 폭력으로 여자가 짐을 싸고 있을 때 이전과는 다르게 친절하게 보내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앙을 받아들여 가톨릭 신자가 되고 비오 성인의 영화 주인공도 맡게 됩니다.
우울증을 소재로 한 단편영화 ‘커브’(Curve)는 위로 올라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밑으로 떨어질 수도 없는 절벽과 같은 상태에 놓인 한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서 버텨보려 안간힘을 쓰는 상황을 묘사했습니다.
사람은 나아질 때, 목표가 있을 때 삶의 희망이 생기고 지금의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버틴다’라는 말은 그야말로 절망이요, 지옥입니다.
삶의 의미가 버티는 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버틸 수 없습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이겨낼 수 있다.”라는 니체의 말을 자주 인용합니다.
수용소에서 버티려는 사람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의미를 찾는 사람은 살았습니다.
그 의미란 수용소 밖에서의 삶을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넬슨 만델라가 27년간의 수감 생활을 하고 나올 때가 72세였습니다.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젊은 사람 못지않은 건강함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팔순이 다 되어 남아공의 첫 유색 인종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의 저자 토니 로빈스가 넬슨 만델라에게 “어떻게 감옥에서 그 긴 세월을 견딜 수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만델라는 “난 견뎌냈던 적이 없다오. 준비하고 있었던 거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언젠가는 출소하여 더 큰 일을 하리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산란할 틈이 없었던 것입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우승을 이끈 메시는 우승 직전 “할머니, 오늘이 될 수도 있어요”라고 중얼거렸습니다.
메시는 할머니 덕분으로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고, 몇 번의 은퇴를 결심했었지만 결국 하늘에 계신 할머니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 정진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 마음이 산란하지 않도록 당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아버지께 가서 우리 자리를 마련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기에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만나러 가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견디며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구약의 야곱은 20년간 장인 라반 밑에서 노예처럼 일하다 도망하기까지 버텨낼 수 있었던 이유는 에사우를 만나기 위한 준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사우의 축복을 대신 가로채고 그에 합당하게 살지 못한다면 나중에 에사우를 볼 면목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20년 간 살며 노력해서 얻은 모든 것을 에사우에게 바치고 자신도 바칩니다.
그리고 에사우에게 인정받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요한 4,12 참조).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오늘따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이 제 폐부를 깊숙이 찌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 역시 이런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보고 아버지를 발견하는가?
내 얼굴에서 예수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확인하는가?
우리 공동체의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가?
저희 공동체를 바라보니, 때로 신앙의 신비를 발견하고 체험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구성원 한명 한명을 살펴보면 얼마나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때로 각기 다른 색상과 모습들을 한데 모아 놓고 종합해보니, 그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피정에 참석 중인 형제자매님들의 얼굴에 깃든 충만한 기쁨과 행복한 미소를 통해 그런 신앙의 신비를 체험합니다.
아직 피정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음 피정 예약을 미리 해놓으시는 분들을 보며, 그저 신비스러운 공동체가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입니다.
때로 한심하고 때로 웃기기까지 하는 우리 공동체이지만, 우리가 서로 너그럽게 대하고, 서로 지속적으로 용서하고, 서로 합심할 때, 우리 공동체는 세상 앞에 또 다른 그리스도로 설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이런 연유로 우리 공동체 형제들은 이렇게 마음을 모았습니다.
세파에 지친 교우들이 한 번만 왔다 가는 곳이 아니라 반드시 다시 오고 싶어 하는 공동체를 건설합시다!
고향 어머니 집 같은 공동체, 친정 오빠 집 같은 공동체!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는 한명 한명이 다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우리 모두는 또 다른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너무나 당연히 세상 사람들 앞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얼굴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 각자 개인적인 삶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진한 향기를 매일 풍겨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 말씀들은 현장에서 곧바로 받아 적은 것이 아니라, 몇 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사도들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는 말씀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도들은 자신들이 잘못한 일들이나 부족했던 모습들을 솔직하게 기록했는데,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가르침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정직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5월 7일의 복음 말씀은 표현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도들의 신앙고백이기도 하고 증언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에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이 ‘끝’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 부활 후에 우리는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믿게 되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었고,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데리고 가기 위한 일이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체험한 뒤에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읽어야 예수님 말씀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부활신앙 없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들입니다.
예수님 말씀들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도들의 모습은 부활 전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들이 우둔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믿으려는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끝’이 아니고, 그 너머에 하느님께서 미리 세워 놓으신 계획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세상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묵시 1,8)
우리 인생의 시작과 끝도 역시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인간에게는 그 권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지상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주 하느님의 권한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생애가 끝난 것으로 보일 텐데, 우리는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잠깐 동안의 일이었음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
(묵시 1,17-18)
예수님의 죽음은 ‘당한 일’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셨고,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주셨습니다.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암시하신 말씀이고, 또 제자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어야 하고, 내 뒤를 따라서 그 길을 걸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이 말씀은 “구원과 영생을 얻으려면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 라는 뜻인데, 거꾸로 생각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구원과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목적지가 ‘좋은 곳’이라는 것이 분명할 때, 그곳까지 가는 길이 좋은 길이라면, 즉 쉽고 편안한 길이라면 누구나 기꺼이 그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너무 어렵고 힘든 길이라면, 목적지가 ‘좋은 곳’이라는 것을 알고 또 믿는다고 해도 선뜻 그 길을 걸어가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어렵고 힘든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면?
박해 때에 순교자들은 목적지만 생각하면서 목숨을 걸었고, 배교자들은 당장 눈앞에 닥친 고난만 생각하면서 목적지를 포기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마태 13,20-21)
뿌리가 없다는 말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됩니다(마태 7,26).
그것은 신앙과 ‘삶’이(생활이) 하나가 되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는 것, 즉 믿는다고 생각만 하면서 믿는 대로 살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조금만 힘들어도 금방 꺾여버립니다.
반대로, 믿음과 삶이(신앙과 생활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잘 참고 견디면서, 죽어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갑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지상 순례 여정중인 - 이상적 천상 교회 가정 공동체>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요한 10,10ㄴ)
오늘은 제13회 생명 주일입니다.
한국교회는 해마다 성모성월, 생명 충만한 신록의 계절 5월 첫 주일을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죽음의 문화’를 일소하고 ‘생명의 문화’, '돌봄의 문화'를 증진시키기 위해 생명 주일을 제정했습니다.
곳곳에서 온갖 시련과 고통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위축되고 위협을 받고 있는지요!
한마디로 얼마나 약하고 위태한 사람들인지 깨닫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중에 살아가는 불쌍한 생명들이, 영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하여 수도원 십자로 중앙에 위치해 있는 예수님 부활상 앞을 새벽 산책시 지날 때 마다 병고중인 형제자매들을 떠올리며 기도도 바치고 매일 미사때 마다 간절한 소망들을 담아 생미사, 연미사를 봉헌하곤 합니다.
가톨릭 교회 공동체는 비단 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인류를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온 세상에 활짝 열려있는 가톨릭 교회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어제 미사중 떠올라 즉흥적으로 인용했던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하느님, 파스카의 천상 영약으로 온 세상을 치유하시니”
어제 본기도 앞부분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어제 화답송 후렴입니다.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온 세상을 기쁘게 하셨으니,”
부활 삼종기도 기도문중 감미로운 한 대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이십니다.
새삼 온 세상이 교회의 선교 대상이자 섬김의 대상임을, 참으로 세상의 빛이요 소금인 가톨릭 교회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요즘 노령화와 1인 가구의 증가와 더불어 사회적 이슈로 새롭게 부각되는 것이 “돌봄”이며, 또 하나가 “생활동반자법”입니다.
생명주일을 맞이하여 교회가 깊이 참작하여할 내용들입니다.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은 역대 최초로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을 발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취지를 밝힙니다.
“노인 가족, 친구 가족, 비혼, 사실혼까지, 이 모두가 우리 이웃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새로운 가족의 모습이다.
이제는 친밀함과 돌봄을 실천함으로써 이뤄지는 모든 가족을 국가가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
참으로 시의적절한 돌봄과 관련된 생활동반자법입니다.
노령화와 더불어 1인 가구의 증가로 인해 가난과 병으로 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이들에게 이젠 국가가 섬김과 돌봄의 큰 가정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젠 국가가 교회로부터 배워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며 가톨릭 교회는 참 좋은 공동체의 삶의 모범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지상 순례 여정중인 우리 가톨릭 교회가 살아야 할 이상적 천상 가정 공동체의 모습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바로 이런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는 아버지를 향한 순례 도상에 있는 진리의 공동체,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평생 공동체의 살아 있는 중심이신 예수님으로부터 평생 배워가야할 진리와 생명이요 돌봄과 섬김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 말씀도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요한14,1-3)
초월과 내재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 아버지의 집을 앞당겨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은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님을 닮아 길의 사람, 진리의 사람, 생명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을 뜻합니다.
어제 읽은 중세의 스페인의 신비가, 아빌라의 데레사 고백 기도시가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것 외에는 몸이 없으시며,
당신의 것 외에는 땅에 손과 발이 없으십니다.
당신의 눈은 그분이 이 세상을 긍휼히 바라보는 눈이요,
당신의 발은 그분이 선을 행하기 위해 걷는 발이요,
당신의 손은 그분이 온 세상을 축복하는 손입니다.
당신의 손, 당신의 발, 당신의 눈, 바로 당신은 그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는
지금 당신의 것 외에는 몸이 없으시며
당신의 것 외에는 땅에 손과 발이 없으십니다.
당신의 눈은 그분이 이 세상을 연민으로 바라보는 눈입니다.
그리스도는
지금 지상에 당신의 몸 외에는 몸이 없습니다.”
참 심오하고 신비로운 고백기도시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 하나하나가 또 하나의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랑하여 닮아갈 때 우리 각자 또 하나의 그리스도 예수님이 될 것입니다.
둘째, 사제적 예배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세례로 인해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사제로서의 그리스도는 영원한 성부께 기쁨으로 찬양과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제2독서 베드로 1서는 사제적 백성으로서 우리 신자들의 신원을 분명히 하며 용기와 힘을 줍니다.
다음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얼마나 고무적인지, 사기충천케 하는지 중요한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
(1베드 2,4-5)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여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1베드 2,9)
아, 이것이 우리의 독특하고 복되고 자랑스런 사제적 백성으로서의 신원입니다.
다음 바오로의 말씀도 이와 일치합니다.
바로 우리 모두 사제적 백성으로서 하느님께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할 본분을 새롭게 자각하게 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로마 12,1-2)
신망애(信望愛)의 정신 안에서 우리가 날마다 형제자매들에게 섬김의 의무를 다하는 것 또한 바로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제물의 삶인 것이며, 바로 산 제물로 바치는 우리의 삶이 참 좋은 예배공동체를 이뤄줍니다.
셋째, 조화와 균형의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바로 오늘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공동체가 그 모범입니다.
차별로 인한 분열 위기에 처한 교회 공동체에 열두 사도의 신속한 개입으로 조화와 균형의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어 주는 분별력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분명 성령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고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으니 교회공동체가 조화와 균형으로 평화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지상 순례 여정중, 이상적인 천상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여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 사제적 백성의 교회 공동체, 조화와 균형의 사랑의 교회 공동체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온 세상을 위한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교회 공동체 건설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한달이 훌쩍 지나 벌써 부활 제5주일을 맞이했네요.
오늘 독서와 복음에 반복해서 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새로움"(new)입니다.
새로운 노래(입당송), 새로운 교회 공동체 구성(제1독서 사도행전), 새 하늘과 새 땅(제2독서 요한묵시록), 새 계명(요한복음)...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하셨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의 실천으로 그리스도를 입은 '새' 인간이 되었음을 증거하면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을 기다리는 것이 성령강림대축일을 향해 가는 부활 제5주일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셨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요한 13,31)
인간에게 영광이라면 흔히 출세, 부귀영화, 입신양명 등을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라면 말이 달라집니다.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이미 다 가지고 누리고 계시니,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신"의 영광을 찾을 수 있을까요?
오히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켜 "영광"을 이야기하십니다.
인간적 고정관념으로는 어불성설처럼 느껴지지요.
그런데 이렇게 접근하면 어떨까 싶네요.
생명의 주인, 시간의 주인으로서 영원한 생명, 불사불멸을 누리는 "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아니 신이 굳이 접근할 필요가 없었던 "고통과 굴욕과 죽음"이라는 영역에까지 들어가신 예수님은, 빛이신 하느님 존재 뒷편의 그늘, 어둠의 절정에까지 침투하심으로써 신의 영역을 확장하신 것이고, 인간의 마지막 원수요 한계인 죽음을 몸소 겪고 부활을 통해 승리하심으로써 진정한 완전성을 쟁취하신 것이라고!
아드님의 온전한 순명은 인류를 위한 구원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하느님께 또한 영광을 드렸고, 하느님께서 죽으셨던 아드님을 친히 일으켜세우심으로써 죽음의 권세까지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나게 된 것이지요.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3,34)
그동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당신의 사랑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받으실 영광에 대해 이야기하신 것은 그저 자랑삼아 하신 말씀이 아니었음은 명백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드러내심으로써, 서로 사랑하라는, 그것도 당신이 사랑한 것처럼 목숨까지 바쳐 사랑하라는 이 새로운 계명을 이해시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태동 과정이 마치 교과서처럼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사도들은 이제 막 신앙의 길에 들어선 "제자들 마음에 힘을 북돋아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사도 14,22)합니다.
그들 모습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연스럽게 우러나고 있지요.
그러면서도 좋고 쉽고 편한 꽃길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사도 14,22)한다는 진실을 감추지 않습니다.
또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사도 14,23)합니다.
사랑의 계명에 중심을 둔 교회 공동체에 외적 조직과 제도까지 정비하는 모습이지요.
제2독서인 요한묵시록은 세상의 종말론적 완성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 신부인 교회와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사랑 가득한 혼인 잔치를 관상합니다.
감사하게도, 이제는 눈물도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전 것은 모두 사라져 더 이상 없다고 합니다.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기"(묵시 21,3)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거처."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말씀이지요.
과거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나와 광야를 떠돌 때 하느님께서 그들 한가운데서 천막을 옮겨다니며 현존하셨지요.
이후 성전 안 지성소에 머무르시다가, 육화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제로 사람들 사이에 함께 숨쉬고 울고 웃으며 사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실 때가 되자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니"(요한 13,33) 너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내 현존을 이어달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행전에 언급된 사도들의 활동이 이를 잘 반영하고 있고요.
오늘날, 하느님께서는 말씀과 예수님의 성체 성혈로 이 세상 안에서 당신의 현존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아울러 우리! 부족하기 짝이 없고 죄인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기꺼이 당신의 처소를 지으시고 누추한 곳에 머무르시면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주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이상적이고 완전한 하느님 나라인 "새 하늘 새 땅"이 멀게만 느껴지는 오늘의 현실을 살면서도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는 하느님의 힘찬 말씀에 희망을 가져 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고통과 죽음이라는 "이전 것들이" 사라졌음을 이미 체험한 인류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과 함께 완성될 천상 예루살렘의 도래는 기대 가능한 실재가 되었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의 할 일이란, 이 세상에서 주님 현존의 도구로서의 소명을 묵묵히 이어가는 것입니다.
드러나건 드러나지 않건, 성공을 통해서건 실패를 통해서건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 각자가 제2의 그리스도로 존재하는 겁니다.
그 조건, 비결은 우리게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여라"에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서로 사랑하면서 주님께 "새로운 노래"(입당송)를 부릅시다.
그 기적들을 일으키시는 분은 주님이시니까요.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국가든 사람 사는 곳에는 늘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열정적인 선교로 공동체가 성장하였습니다.
공동체가 성장하면서 교회에도 몇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읽었던 것처럼 ‘나눔’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과부, 어린이들이 나눔에서 소외되었습니다.
그러자 공동체에 불평과 불만이 생겼습니다.
사도들은 함께 기도하면서 신망이 깊고, 바른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음식 나눔을 맡겼습니다.
초대교회가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지면서 유대인들이 지녔던 율법 준수에 대한 문제도 생겼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율법을 모르기도 했고, 자신들의 전통과는 맞지 않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음식을 나누는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습니다.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모여 회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의 율법 규정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제 교회는 유대인들만의 교회가 아니라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회의를 교회는 ‘공의회’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문제 해결 방법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십자가를 남에게 떠넘기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비난하셨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저녁 미사가 있는데 오전에 요양원 미사를 부탁 받았습니다.
가겠다고는 했지만 마음으로 달갑지 않았습니다.
제게 즐거움을 주는 부탁이라면 기꺼이 했을 겁니다.
그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져라.”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기쁜 마음으로 요양원 미사를 하는 것이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가는 것만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욕심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 같지만 하느님과는 더욱 멀어지는 길입니다.
욕심 때문에 창고를 가득 채웠던 부자는 하느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별 지구가 병들어 가는 것은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구유’는 겸손의 상징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겸손의 상징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몸소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청하신 것도 겸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 받으면 윗자리에 앉지 말고 맨 아래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교만한 바리사이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받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첫 번째 ‘죄’는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아담의 교만함에서 왔습니다.
교만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큰 바람이 불면 쓰러지는 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아름드리 큰 나무들이 쓰러지곤 합니다.
작은 나무들은 큰 바람에도 쓰러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유혹이라는 바람이 불 때 가장 먼저 쓰러지는 것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순종’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했던 마리아의 순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으나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던 요셉의 순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순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픔을 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은 것을 택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은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이 뜻이 나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하느님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셨던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주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겸손과 순종은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주는 진리요, 생명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텔레비전을 보면 많은 예능 프로가 있습니다.
잘 보지는 않지만 어쩌다 한 번 보면 정말로 재미있습니다.
그렇다면 예능 촬영지에서 직접 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현장감까지 더해져서 큰 재미를 얻을 것으로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방송과 실제 촬영을 비교하면 방송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예전에 한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스님, 목사, 교무, 신부가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방송입니다.
출연 제의를 받고 이 방송을 다시 보기로 보니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그 재미를 기대하며 방송 출연을 승낙했습니다.
그리고 촬영을 모두 마친 뒤에 결심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방송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이지요.
1시간 방송 분량을 위해 자그마치 6시간 넘게 촬영하는 것입니다(그 뒤 촬영 제안이 오면 늘 촬영 시각을 묻게 됩니다).
막바지에는 지쳐서 가만히 있자, 담당 PD가 스케치북에 글을 적어서 번적 들었습니다.
그 글은 이러했습니다.
“신부님, 웃으세요. 그리고 말 좀 하세요.”
너무 힘들어서 표정이 굳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말할 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 몇 번의 제의가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하긴 방송은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당연히 재미있게 편집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너무 힘들더군요.
이 촬영 후 방송 출연하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입담뿐 아니라 체력이 좋아야 방송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과연 진실이라 할 수 있을까요?
보여주기 위한 것과 실제의 간격은 너무나 큽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단순히 보고 있는 것만을 보고 진실이라고 착각합니다.
그 너머에 있는 숨겨진 진실은 전혀 보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너머에 있는 영적인 진실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또 함께 하면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히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보려 합니다.
기쁨의 시간을 보낼 수 없습니다.
필립보 사도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지금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느님을 청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나 함께하시는 주님임을 굳게 믿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는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 2,9)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것을 넘어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더 큰 일,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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