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음력 7월 8일(올해는 양력 8월 25일). 420년 전(1592년) 그날의 남쪽 바다는 피로 물든 전쟁의 바다였다. 이순신 장군은 남해를 거쳐 서해 진출을 노리던 일본 수군의 주력부대를 한산도 앞바다에서 격파했다. 임진왜란의 판세를 결정적으로 뒤바꾼 한산도대첩이다. 이 전투로 바닷길을 통한 보급로가 끊긴 일본 육군은 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남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영의정과 도체찰사(전시 총사령관)를 지낸 서애(西厓) 유성룡이 임진왜란 전후 사정을 상세히 기록한 『징비록』에서 “모든 것이 이 한 번의 싸움에서 이긴 공로(皆此一戰之功)”라고 높이 평가한 이유다.
그날로부터 7주갑(육십갑자가 일곱 번째 돌아오는 해)을 맞은 한산도 앞바다는 평화로웠고, 물결도 잔잔했다. 전쟁의 참화는 긴 세월 파도에 실려 아득히 떠내려가고, 흰 갈매기 떼만 날개를 펄럭이며 먹이를 찾아 열심히 돌아다니는 모습이었다. 지난 18일 한산도가 속한 경남 통영시를 찾았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통영시 태평동의 향토역사관. 임진왜란 직후부터 구한말까지 약 300년 동안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역사의 현장이다. 김홍란 해설사가 반가운 얼굴로 맞아줬다. 그는 조선시대 통제영과 주변 지형을 그린 대형 옛 지도를 가리키며 “영·호남을 잇는 길목에 위치한 통영은 예부터 남해의 패권을 좌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에 따라 한산대첩의 승패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판도를 좌우하게 됐다”고 말했다.
통영 여객선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적지(사적 113호)가 있는 한산도 제승당으로 갔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대첩문·충무문을 지나 수루(戍樓)로 향했다. 수루의 계단을 오르니 커다란 현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나라의 운명을 근심하며 잠 못 들던 충무공의 탄식이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현재의 누각은 1976년 복원사업으로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수루를 내려와 제승당 건물로 갔다. 이순신 장군이 부하 장수들과 함께 군사작전을 상의하던 곳으로 역시 76년 복원됐다. 이곳에서 한산대첩도를 감상한 뒤 충무공 영정이 있는 충무사로 발길을 돌렸다. 영정 속 충무공의 냉정한 표정, 굳게 다문 입술에선 420년 전 한산도대첩이 있던 그날의 비장한 결의가 느껴졌다.
이날 오후 6시엔 통영시 망일동 이순신공원에서 통영 시민과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관람객 등 1만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산대첩 재연 행사가 열렸다. 한산대첩기념사업회 주최로 지난 14일부터 닷새간 진행된 ‘제51회 통영한산대첩축제’의 하이라이트였다. 먼저 조선 수군선처럼 꾸민 해양경찰 경비정들이 왜선을 유인하러 견내량으로 향했다. 견내량은 경남 통영시 용남면과 거제시 사등면을 잇는 거제대교의 아래쪽에 위치한 좁은 해협으로 ‘겨냇도’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잠시 후 유인작전에 걸려든 일본 수군 함대가 전력질주로 한산도 앞바다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숨어서 기다리던 조선 수군 함대가 학익진으로 포위해 공격을 벌였다. 거북선(모형)을 포함해 해경 경비정과 각종 어선 등 140척의 배는 함포 사격을 재연했다. 바다가 불꽃으로 물드는, 실감나는 장관이었다. 전투가 끝난 뒤에는 승리를 축하하는 해상 불꽃놀이가 펼쳐져 관람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행사를 총괄한 류태수 축제 집행위원장은 “임진왜란 당시 바람 앞에 등불 같았던 조선의 운명은 바로 여기 한산도 앞바다에서 결정됐다”며 “한산대첩이 없었다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스러운 역사가 1910년에서 300년 이상 앞당겨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아름다울 뿐인 이 바다가 선조들의 고결한 피와 땀이 어려 있는 역사의 바다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순신 장군이 남긴 『난중일기』에는 한산대첩에 대한 부분이 유실돼 전하지 않는다. 대신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견내량에서 왜병을 쳐부순 장계(見乃梁破倭兵狀)’란 보고서가 남아 있다. “8일 이른 아침 적선이 머물러 있는 곳을 향해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러 바라본즉, 큰 배 36척, 중간 배 24척, 작은 배 13척이 진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먼저 판옥선 5~6척으로 적의 선봉을 쫓아가 습격할 기세를 보이니 왜적들이 일제히 돛을 달고 쫓아왔습니다. 바다 가운데에 와선 학날개처럼 진을 치고 일제히 진격해 각종 총통을 쏴 2~3척을 깨뜨리니 왜적들이 기가 꺾여 도망갔습니다. 장수와 군사와 관원들이 승리의 기세를 타고 앞을 다투어 돌진하며 화살과 총알을 퍼부으니 그 형세가 바람과 우레 같아 적을 쳐죽이기를 일시에 거의 다 해버렸습니다.”
이날 전투에서 이순신은 왜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이끄는 적선 73척 가운데 59척을 격파했다. 조선 수군은 단 한 척도 피해를 보지 않은 완벽한 승리였다. 이틀 뒤 안골포(경남 창원시 진해구)에서도 적선 42척을 만나 크게 무찔렀다.
승리의 비결은 함포 사격이었다. 상대적으로 사정거리가 긴 함포를 가진 조선 수군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집중 사격을 가해 적선을 격침시키는 전술을 썼다. 반면에 일본 수군은 빠른 속도로 상대의 배에 접근한 뒤 배 위에 올라 백병전을 펼치는 등선육박(登船肉薄)이란 구식 전법을 고집했다. 권투로 치면 조선 수군은 아웃복서, 일본 수군은 인파이터였던 셈이다. 결과는 조선 수군의 연전연승. 고려 말 최무선 장군이 화약과 화포를 개발해 왜적선을 무찌른 이후 200년이 넘는 함포 사격의 노하우가 축적된 덕분이었다.
일본 수군의 연전연패 소식을 보고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어쩔 수 없이 “조선 수군을 만나면 싸우지 말고 무조건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길목을 막고 있는 한, 육군과 수군이 함께 치고 올라간다는 히데요시의 야심 찬 계획(수륙병진책)은 실현불가능한 공상이 되고 말았다.
『이순신, 승리의 리더십』의 저자인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은 “한산해전의 승리는 조선 수군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서 모두 이길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드웨어는 당시로선 첨단 무기체계와 함선을 갖춘 조선 수군의 우수한 전투력이고, 소프트웨어는 이순신이란 지휘관의 탁월한 리더십이라는 얘기다.
임 소장은 “이순신 리더십의 핵심은 ▶최고의 전략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전문성 ▶거북선·학익진 등을 창안한 혁신 마인드 ▶정의를 위해 사익을 버리는 가치관과 역사의식”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주요 정당이 당리당략에 얽매여 정쟁에 몰두한다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 기득권층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당파싸움을 벌였던 것과 다를 바 없다”며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당파를 초월해 진정으로 국가·국민·미래를 생각하는 리더십”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독도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고 있는 한·일 관계에 대해선 “일본은 신의가 없는 나라라는 이순신의 문제의식은 4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며 “이순신처럼 철저한 준비태세로 힘을 길러야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순신연구소에선 그동안 이순신 장군에 대해 잘못 알려진 ‘상식’을 바로잡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임 소장은 “이순신이 불리한 전력으로 우세한 적을 맞아 전세를 뒤집고 승리했다는 것이 상식으로 통하고 있다”며 “이는 이순신을 영웅화하기 위해 신화적으로 각색한 이야기로 사실은 정반대”라고 말했다. 단 13척으로 수백 척의 적선과 싸운 명량해전을 제외하면 거의 항상 조선 수군이 전력의 우위를 점했다는 설명이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조선 수군은 모든 전력을 집중시킨 반면, 일본 수군은 부대별로 분산돼 제각각 움직였기 때문이다. 임 소장은 “이순신 장군이 위대한 이유는 싸우기 전에 이미 승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한 것”이라며 “한산대첩에서도 주력 전투함으로만 비교하면 조선 수군 58척(거북선 3척 포함) 대 일본 수군 36척으로 조선이 크게 우세했다”고 지적했다.
명량해전에서 좁은 바닷길에 철쇄를 걸어 적선을 침몰시켰다는 ‘철쇄설치설’에 대해 임 소장은 “구전 설화일 뿐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민웅 해군사관학교 교수도 지난 4월 발표한 논문에서 “『선조실록』이나 『난중일기』에는 철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며 “임진왜란 이후 150년 정도 지난 18세기 중반 실학자 이중환이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듣고 『택리지』에 수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란 ‘상식’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거북선 전문 연구자인 정진술 전 해군사관학교 교수는 최근 논문에서 “거북선이 철갑선이었다는 언급은 1905년 미국인 헐버트의 책에서 처음 나오고, 1929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고 소개하고 있다”며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 옛 문헌에서 철갑선이란 근거를 찾긴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순신의 기록에는 거북선의 등에 철첨(쇠송곳)을 꽂았다고 돼 있다. 정 전 교수는 “이를 볼 때 목선에 약간의 철판을 가미한 형태로 거북선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며 “그렇더라도 철갑선으로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통영=주정완 기자
그날로부터 7주갑(육십갑자가 일곱 번째 돌아오는 해)을 맞은 한산도 앞바다는 평화로웠고, 물결도 잔잔했다. 전쟁의 참화는 긴 세월 파도에 실려 아득히 떠내려가고, 흰 갈매기 떼만 날개를 펄럭이며 먹이를 찾아 열심히 돌아다니는 모습이었다. 지난 18일 한산도가 속한 경남 통영시를 찾았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통영시 태평동의 향토역사관. 임진왜란 직후부터 구한말까지 약 300년 동안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역사의 현장이다. 김홍란 해설사가 반가운 얼굴로 맞아줬다. 그는 조선시대 통제영과 주변 지형을 그린 대형 옛 지도를 가리키며 “영·호남을 잇는 길목에 위치한 통영은 예부터 남해의 패권을 좌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에 따라 한산대첩의 승패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판도를 좌우하게 됐다”고 말했다.
통영 여객선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적지(사적 113호)가 있는 한산도 제승당으로 갔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대첩문·충무문을 지나 수루(戍樓)로 향했다. 수루의 계단을 오르니 커다란 현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나라의 운명을 근심하며 잠 못 들던 충무공의 탄식이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현재의 누각은 1976년 복원사업으로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수루를 내려와 제승당 건물로 갔다. 이순신 장군이 부하 장수들과 함께 군사작전을 상의하던 곳으로 역시 76년 복원됐다. 이곳에서 한산대첩도를 감상한 뒤 충무공 영정이 있는 충무사로 발길을 돌렸다. 영정 속 충무공의 냉정한 표정, 굳게 다문 입술에선 420년 전 한산도대첩이 있던 그날의 비장한 결의가 느껴졌다.
이날 오후 6시엔 통영시 망일동 이순신공원에서 통영 시민과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관람객 등 1만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산대첩 재연 행사가 열렸다. 한산대첩기념사업회 주최로 지난 14일부터 닷새간 진행된 ‘제51회 통영한산대첩축제’의 하이라이트였다. 먼저 조선 수군선처럼 꾸민 해양경찰 경비정들이 왜선을 유인하러 견내량으로 향했다. 견내량은 경남 통영시 용남면과 거제시 사등면을 잇는 거제대교의 아래쪽에 위치한 좁은 해협으로 ‘겨냇도’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잠시 후 유인작전에 걸려든 일본 수군 함대가 전력질주로 한산도 앞바다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숨어서 기다리던 조선 수군 함대가 학익진으로 포위해 공격을 벌였다. 거북선(모형)을 포함해 해경 경비정과 각종 어선 등 140척의 배는 함포 사격을 재연했다. 바다가 불꽃으로 물드는, 실감나는 장관이었다. 전투가 끝난 뒤에는 승리를 축하하는 해상 불꽃놀이가 펼쳐져 관람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행사를 총괄한 류태수 축제 집행위원장은 “임진왜란 당시 바람 앞에 등불 같았던 조선의 운명은 바로 여기 한산도 앞바다에서 결정됐다”며 “한산대첩이 없었다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스러운 역사가 1910년에서 300년 이상 앞당겨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아름다울 뿐인 이 바다가 선조들의 고결한 피와 땀이 어려 있는 역사의 바다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순신 장군이 남긴 『난중일기』에는 한산대첩에 대한 부분이 유실돼 전하지 않는다. 대신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견내량에서 왜병을 쳐부순 장계(見乃梁破倭兵狀)’란 보고서가 남아 있다. “8일 이른 아침 적선이 머물러 있는 곳을 향해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러 바라본즉, 큰 배 36척, 중간 배 24척, 작은 배 13척이 진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먼저 판옥선 5~6척으로 적의 선봉을 쫓아가 습격할 기세를 보이니 왜적들이 일제히 돛을 달고 쫓아왔습니다. 바다 가운데에 와선 학날개처럼 진을 치고 일제히 진격해 각종 총통을 쏴 2~3척을 깨뜨리니 왜적들이 기가 꺾여 도망갔습니다. 장수와 군사와 관원들이 승리의 기세를 타고 앞을 다투어 돌진하며 화살과 총알을 퍼부으니 그 형세가 바람과 우레 같아 적을 쳐죽이기를 일시에 거의 다 해버렸습니다.”
이날 전투에서 이순신은 왜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이끄는 적선 73척 가운데 59척을 격파했다. 조선 수군은 단 한 척도 피해를 보지 않은 완벽한 승리였다. 이틀 뒤 안골포(경남 창원시 진해구)에서도 적선 42척을 만나 크게 무찔렀다.
승리의 비결은 함포 사격이었다. 상대적으로 사정거리가 긴 함포를 가진 조선 수군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집중 사격을 가해 적선을 격침시키는 전술을 썼다. 반면에 일본 수군은 빠른 속도로 상대의 배에 접근한 뒤 배 위에 올라 백병전을 펼치는 등선육박(登船肉薄)이란 구식 전법을 고집했다. 권투로 치면 조선 수군은 아웃복서, 일본 수군은 인파이터였던 셈이다. 결과는 조선 수군의 연전연승. 고려 말 최무선 장군이 화약과 화포를 개발해 왜적선을 무찌른 이후 200년이 넘는 함포 사격의 노하우가 축적된 덕분이었다.
일본 수군의 연전연패 소식을 보고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어쩔 수 없이 “조선 수군을 만나면 싸우지 말고 무조건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길목을 막고 있는 한, 육군과 수군이 함께 치고 올라간다는 히데요시의 야심 찬 계획(수륙병진책)은 실현불가능한 공상이 되고 말았다.
『이순신, 승리의 리더십』의 저자인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은 “한산해전의 승리는 조선 수군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서 모두 이길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드웨어는 당시로선 첨단 무기체계와 함선을 갖춘 조선 수군의 우수한 전투력이고, 소프트웨어는 이순신이란 지휘관의 탁월한 리더십이라는 얘기다.
임 소장은 “이순신 리더십의 핵심은 ▶최고의 전략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전문성 ▶거북선·학익진 등을 창안한 혁신 마인드 ▶정의를 위해 사익을 버리는 가치관과 역사의식”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주요 정당이 당리당략에 얽매여 정쟁에 몰두한다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 기득권층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당파싸움을 벌였던 것과 다를 바 없다”며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당파를 초월해 진정으로 국가·국민·미래를 생각하는 리더십”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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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연구소에선 그동안 이순신 장군에 대해 잘못 알려진 ‘상식’을 바로잡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임 소장은 “이순신이 불리한 전력으로 우세한 적을 맞아 전세를 뒤집고 승리했다는 것이 상식으로 통하고 있다”며 “이는 이순신을 영웅화하기 위해 신화적으로 각색한 이야기로 사실은 정반대”라고 말했다. 단 13척으로 수백 척의 적선과 싸운 명량해전을 제외하면 거의 항상 조선 수군이 전력의 우위를 점했다는 설명이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조선 수군은 모든 전력을 집중시킨 반면, 일본 수군은 부대별로 분산돼 제각각 움직였기 때문이다. 임 소장은 “이순신 장군이 위대한 이유는 싸우기 전에 이미 승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한 것”이라며 “한산대첩에서도 주력 전투함으로만 비교하면 조선 수군 58척(거북선 3척 포함) 대 일본 수군 36척으로 조선이 크게 우세했다”고 지적했다.
명량해전에서 좁은 바닷길에 철쇄를 걸어 적선을 침몰시켰다는 ‘철쇄설치설’에 대해 임 소장은 “구전 설화일 뿐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민웅 해군사관학교 교수도 지난 4월 발표한 논문에서 “『선조실록』이나 『난중일기』에는 철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며 “임진왜란 이후 150년 정도 지난 18세기 중반 실학자 이중환이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듣고 『택리지』에 수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란 ‘상식’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거북선 전문 연구자인 정진술 전 해군사관학교 교수는 최근 논문에서 “거북선이 철갑선이었다는 언급은 1905년 미국인 헐버트의 책에서 처음 나오고, 1929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고 소개하고 있다”며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 옛 문헌에서 철갑선이란 근거를 찾긴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순신의 기록에는 거북선의 등에 철첨(쇠송곳)을 꽂았다고 돼 있다. 정 전 교수는 “이를 볼 때 목선에 약간의 철판을 가미한 형태로 거북선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며 “그렇더라도 철갑선으로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