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 16시 이후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닥치는 대로 살상·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결과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광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계엄군은 5월 21일 13시경 전남대학교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 외곽도로 봉쇄작전상무충정작전
10일에 걸친 광주 민주화 운동 결과 사망자 166명, 행방불명자 54명, 상이 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 등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후 호남 전역에서 전두환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과 강원대학교성조기 소각사건을 비롯, 1980년대부터 2000년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5·18, 광주항쟁(光州抗爭), 광주학살(光州虐殺), 광주사태(光州事態), 광주민중봉기(光州民衆蜂起), 광주시민항쟁(光州市民抗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명칭은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5월 21일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라고 군부 발표에서 언급한 것이 처음으로, 이후 신군부[10][11] 이는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을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로 왜곡한 신군부의 주장에 근거한 호칭으로 제5공화국 기간 내내 사용됐으며, 현재는 당시 호칭에 익숙한 노년층이나 신군부를 지지하는 일부 우파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신군부의 군사독재와 폭력
1980년 5월 초순경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12]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국가보위 비상기구를 설치해 신군부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탄압하면서 신군부가 정국을 주도하고, 국회 폐쇄와 정치인 체포로 신군부의 안정적인 정국 장악을 담보한다는 것이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한 의도였다.
중앙정보부는 일본 내각조사실의 첩보를 토대로 5월 10일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고, 5월 12일5월 13일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은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이 청와대[13] 훗날 남침설을 제보했다고 알려진 당시 일본의 내각 조사실 한반도 담당반장은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 적도, 그런 정보도 없었다"라고 밝혀 신군부가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악용했던 '북괴남침설'은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14]
한편 같은해 5월 중순부터 정부와 국회에서는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고 있었다. 5월 12일 신민당과 공화당[15] 같은날 신현확[16]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이루어질 조치에 대한 반대 집회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전두환(보안사령관)·황영시(육군참모차장)·정호용[18]
1980년 3월 4일 ~ 3월 6일 수도경비사령부에서는 '제1차 충정회의'에서 군의 투입을 요하는 사태 발생 시 강경한 응징조치가 필요하다고 내려졌으며, 이미 80년 초에 학생 시위가 가열될 것을 대비해 전국 군 부대에 충정훈련
광주 시내에서의 시위 진압에 투입된 한 공수부대원은 시위진압이 해산 위주가 아닌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격진압이 발생했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계엄사령부와 2군사령부 등 체포 위주로 진압하라는 상부의 지시는 공수부대원들의 과격진압을 부채질했다. 광주에서 시위가 계속되자 계엄부사령관인 육군 참모차장 황영시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5월 18일 당일 아침 9시 이후, 텔레비전 방송, 라디오, 신문[22], 이로 인해 공수부대 측에 부상자가 발생하자, 이에 분개한 공수부대원에 의해 학생들은 구타를 당했고[23] 일부 학생들은 금남로로 이동했다. 전남대 학생 300여명은 가톨릭회관에 집결해 시위했다. 이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을 시도했다.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
신군부는 신속하고 강력한 시위진압을 위해 5월 18일[24] 제7공수여단은 시위 학생이 아닌 일반 행인들에게도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했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25]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무차별 살육을 가한 사례들이 이러하다.
북동 276번지 3층 건물에서 2층에는 동아일보 광주지사가 있고, 거기에는 정은철 총무와 배달학생들과 도망 온 시민 3명이 있다. 공수부대원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와 도망 온 시민 3명을 짓밝고 개머리판으로 짓이긴 뒤 데리고 갔다. 한참 뒤, 두 군인들은 다시 들어와 정은철 총무 뒷덜미를 낚아챈다. 정은철 총무는 업무를 보던 상태였다. 정 총무는 의자와 함께 넘어졌고 두 군인들은 정 총무를 마구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정 총무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꿈틀거렸고, 두 군인은 정 총무의 두 발을 양쪽에 하나씩 붙잡고 끌고 갔다. 머리는 땅바닥에 끌린채였다. 그 뒤, 두 군인들은 또 들어와서 담당구역 수금하고 들어왔던 배달학생 박준하 씨를 진압봉으로 수도없기 때리고 짓밟은 뒤에 정 총무처럼 끌고 나갔다. 박준하 씨는 계단에서 실신했고, 두 군인은 그대로 팽개쳐두고 내려갔다.[26]
군인들은 부부들이 탄 택시를 붙잡았다. 부부들은 끌려나왔고 군인들은 몽둥이와 장작개비와 군홧발 세례를 먹인다. 신부는 치마저고리가 갈기갈기 찢기고 신랑은 아프다며 소리를 질렀다. 군인들은 '빨리 꺼져'라고 소리를 질렀다.[26]
군용트럭이 11대가 줄을 지어서 행렬해 있다. 그 대열에서 마지막 차량에 젊은 여성은 옷이 갈기찢겨 젖가슴이 보일정도였고, 그 옷은 피투성이였다. 병원 옷을 입은 사람이 하얀 간호사 가운을 들고 나왔다. 병원 옷을 입은 남자는 옷을 여자에게 주려다 군인들에게 붙잡혀 군홧발과 몽둥이 세례를 받았다.[27]
조선대 의대 4학년 재학중이던 이민오 씨는 광주일고에서 하는 동문 체육대회에 참여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쫓아왔다. 이민오씨는 교장관사까지 도망쳤지만 거기까지 쫓겨 구타당했다. 췌장과 비장이 파열됐다.[28]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구타를 당한다. 그 결과 뒤통수가 깨지고 눈이 터졌으며 팔과 어깨가 부셔졌고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지는 부상을 당했다. (후두부 찰과상과 열상, 뇌안상검부열상, 우측 상지전박부 타박상, 좌견갑부 관절부 타박상, 진경골부, 둔부와 대퇴부 타박상)[29][30][31][32] 그는 광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뇌출혈로 이튿날 새벽 결국 사망했다.[33]
전개 과정
광주 시민의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19일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들과 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19일 오후 시위에 참가한 시민은 최소 3천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계엄군의 진압은 가혹하게 변했다. 공수부대는 학생, 시민, 남녀노소, 행인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가했다. 20일 시위대의 규모는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광주 시내 택시, 일부 시내·시외 버스 200여 대가 계엄군의 진입로를 가로막기도 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을 진압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옷을 벗기는 등 과격진압을 자행했다.[33] 일부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지휘를 맡고 있던 전투교육사령부를 찾아가 직접 항의를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보안사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시위대는 광주 MBC광주역[21] 발포 이후 2군 사령부로부터 발포금지와 실탄 배분 금지 명령이 떨어졌지만, 11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하고 실탄을 분배했고, 다음날인 5월 21일에는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연결됐다.[34]
계엄군의 발포 및 광주 시민 학살
5월 21일 오전 전남도청과 전남대학교[33] 이 날 광주시내 120여 개의 병원과 보건소·3개의 종합병원 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상자들이 몰려들었다.
광주 시민의 항쟁
집단 발포가 일어난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전라남도나주시, 화순군아시아자동차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했다. 21일 저녁 시민군은 계엄군이 물러난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21일 저녁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정도영 준장은 자위권 발동을 경고하는 담화문을 계엄사령관 이희성
22일 이후 광주[36] 시민 자치 기간에도 광주 시민의 협력으로 행정기관의 역할이 상당 부분 유지됐다. 당시 전라남도 부지사 정시채를 비롯한 공무원도 전남도청에 정상 출근했다. 공직자들은 5·18 당시 양곡 방출이나 부상자 처리 등의 행정업무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37][38] 이 기간은 '광주해방구' 또는 '해방광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부 지식인들은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 당시 광주를 프랑스 시민들의 자치가 시행된 파리 코뮌 당시의 파리
평화집회
'해방광주'로 불리는 동안 일부 시민들은 스스로 계엄사에 무기 자진 반납을 했으나 일부 시민들은 지속적인 투쟁을 주장하며 계속 무장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수차례에 걸친 내부 대책회의와 협상 끝에 계속 무장을 해야 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평화적 시위는 계속됐고 〈애국가〉와 〈울 밑에선 봉선화〉 등을 부르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화집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광주 시민은 "김일성은 오판 말라"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39]
5월 21일 이후 미국은 신군부와 신군부에 반대하는 대한민국 국민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입장 표명의 압력을 받았는데,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
우리는 광주에서의 시민 분쟁(civil strife)에 경악하고 있음(alarmed)
모든 관련 당사자들이 극도의 자제심을 발휘, 평화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대화를 추진할 것을 촉구함
글라이스틴의 제안대로 이튿날인 5월 22일 오전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글라이스틴의 문안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 성명을 발표했으나 언론을 통제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신군부는 미국의 이런 입장이 일반인에게 전달되는 길을 봉쇄해 버렸다. 글라이스틴과 위컴위컴[42]
5월 22일 오후 미국에서 열린 정책 검토 위원회(Policy Review Committee)는 "지금까지 우리가 취해온 행동 이상의 일은 할 필요가 없다는 데에 동의. 우리는 온건한 방법을 선택할 것을 조언했으나, 대한민국 국민이 질서 회복의 필요를 느낄 경우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았음"이라는 광주 상황에 대한 방침을 정했다.[43]
10시 00분: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11공수여단 위력 시위 이후 착검한 상태로 진입, 대검으로 인한 자상자 발생. 11공수여단 약 천여 명이 강경 진압을 강행했고, 3~4명이 한 조가 돼 골목마다 누비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행.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사망자 및 행방불명자는 약 200여 명이고 부상자 등 피해자는 약 4,300여 명이다. 광주광역시[46][47] 1994년 검찰은 사상자 수를 발표했지만,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와 같은 핵심 쟁점이 밝혀지지 않으면서, 5·18이 발생한 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이 문제는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5·18 민주화 운동 관련 보상자 통계를 보면, 사망자 240명, 행방불명자 409명, 상이 2,052명 등 총 7,716명이 보상금을 신청했으며, 이 중 인정된 보상자는 사망자 154명, 행방불명자 70명, 상이 1,628명 등 총 5,060명이다. 보상금 수령자 총 5,060명 중 중복 지급자 698명을 제외할 경우, 보상금 수령자는 4,362명이다.[48]
1988년 광주 청문회 당시 진압군 부대 지휘관들은 암매장이 없었다고 진술한 것과 다르게, 진압에 참가했던 공수부대원에 의해 2001년[50]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경찰 및 군인 중 사망자는 경찰 4명, 군인 22명으로, 이들은 1980년6월 21일국립서울현충원
5·18 민주 유공자 유족회와 부상자회, 5·18 기념재단 등 4개 단체가 공식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5·18 사망자는 모두 606명으로, 이 가운데 165명은 항쟁 당시 숨졌고, 행방불명이 65명, 상이 후 사망추정자는 376명 등이다.[51]
1980년대 중반에는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과 무차별적인 연행으로 인해 사망자가 2천여 명에 달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제로 5·18 종료 직후에 정부에 신고된 사망추정자, 실종추정자는 2천여 명에 달했고, 일부 학생운동권이 이를 인용한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1985년 윤성민[52]
5·18에서 3천여명에 달하는 수많은 시민이 계엄군에 의해 폭행 당하고 트럭에 실려 광주교도소·상무대에 연행됐다. 연행자는 영창으로 넘겨지기 전 보안대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다. 5·18 과 사실상 연관이 없는 김대중[55]
정동년은 "보안대 조사관들이 잠을 재우지 않고 조사를 하면서 무릎 사이에 곤봉을 끼우고 밟고 군홧발로 짓이기는 등의 고문을 자행했다"라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또한 그는 "경찰이나 중앙정보부처럼 기술적인 고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보안대 조사관들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56]
한국인권의료복지센터 부설 '고문 정치폭력 피해자를 돕는 모임'은 1980년 5·18 당시 연행 또는 구금됐던 피해자가 1인당 평균 9.5회의 고문을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중 물고문, 매달기, 구타, 비생리적 자세 강요, 강제 급식, 밥 굶기기, 의료 기회 박탈 등 신체적 고문이 62%를 차지했다. 수면 박탈, 복종 강요, 지각 박탈(암실 가두기) 등 심리적 고문은 38%를 차지했다.[57]
연행자는 "워커발로 얼굴 문질러버리기",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요리'", "사람이 가득 찬 트럭 속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두 사람을 마주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자기 오줌 싸서 먹이기",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끝에 똥 묻혀오게 하기", "송곳으로 맨살 후벼파기", "대검으로 맨살 포 뜨기", "손톱 밑으로 송곳 밀어넣기" 등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58]
전두환 정권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의 사주에 의해 발생한 소요사태로 조작했다. 하지만 1988년5공 청문회를 거치고 1995년12월 21일국회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해, 계엄군의 진압 과정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피해 배상을 위한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60] 되면서 전두환 정권의 비(非)민주성과 폭력에 맞서 싸운 민주화 운동으로 다시 평가받았다. 광주 시민들을 학살전두환, 노태우는 1997년 대법원[60]
광주 민주화 운동은 다른 국가의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네스코는 광주민주항쟁은 1980년대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필리핀, 타이,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등지에서 일어난 여러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사건 당시 언론에 의한 왜곡
신군부는 보안사를 중심으로 '언론반'을 구성해 계엄사령부 보도처의 신문·방송·라디오·잡지 등 모든 매체에 대한 보도검열을 시행해 100만 건 이상을 조종 감독했다. 신군부는 'K공작계획'으로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언론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5월 17일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와 함께 보안사에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표하면서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조치를 내리면서 보도검열 위반 시 폐간 조치하겠다고 위협했다.
당시 상황을 보도하지 못하게 되자,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집단사표를 쓰고 이를 약 2만 장 인쇄하여 금남로에서 시민들에게 배포했다.[63]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년 5월 20일 전남매일신문 기자 일동 전남매일신문사장 귀하 — 《진실, 광장에서다: 민주화운동 30년의역정》김정남
2012년 5월 20일 광주KBS·광주MBC는 32년만에 5·18 왜곡보도 반성문을 썼다. 이들은 '32년 만에 쓰는 반성문'에서 "시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그 때 당시 우리는 언론이 아니었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무릎을 꿇고 진실을 알리지 못했던 저희의 잘못을 반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라고 밝혔다.[65]
한편 전두환과 5공의 핵심인사들은 2016년 6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5·18 당시 광주 지역 계엄사령관, 2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계엄 상황의 군 명령 체계에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나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의 월권 행위는 있을 수 없다며 5·18에 대한 신군부[75]
지만원의 북한 특수부대 개입 주장
2002년 이래 극우 성향의 논객 지만원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폭동"으로 부르는 한편, 조선인민군[76] 자유북한군인연합도 북한 인민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됐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2006년 12월 20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5·18 광주사태는 (북한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백색테러이자 김정일[77][78][79] 이날 기자회견에는 지만원, 서정갑 등 극우 성향의 인사가 대거 참석했으며, 기자회견 내용을 계기로 '전두환 군부의 명예'가 회복될 것이라는 주장이 나와, 기자회견의 정치적 배경을 의심케 한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79]
공작부대 개입설을 둘러싼 논란과 반박
일부 단체는 시민군이 광주민중항쟁을 유혈 진압하는 계엄군의 학살과 폭력에 맞서 무장했다는 사실만을 근거로 5·18 민주화 운동을 북한인민군[80]
일부 단체는 계엄사 및 제5공화국 정부의 발표를 인용해, 5·18 민주화 운동에서 희생된 광주 시민 중에 계엄군이 주로 사용하던 총기인 M16 소총보다 시민군이 주로 사용하던 총기인 카빈총카빈M16보다는 M1이나 카빈[81]
5·18 당시 계엄군의 작전보고·전투상보에 광주 시민을 살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국회 광주특위·검찰·국방부는 대한민국 계엄군 기록을 토대로 진상규명을 했다. 진상규명 결과 무차별 연행과 과잉진압에 의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 광주역·전남대·전남도청에서의 집단 발포, 광주외곽봉쇄작전 과정에서 일어난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 광주국군통합병원 진로개척 작전, 송암동 학살 사건 등과 같은 무차별적 발포, 전남도청 재진입 작전[82]
일부 단체는 북한이 5·18을 기념한다는 것을 문제삼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5·18 민주화 운동 뿐만 아니라 4·19 혁명(남조선 인민 봉기), 6·3 항쟁(남조선 청년 학생 봉기), 6월항쟁(6월 인민 항쟁), 부마항쟁(10월 민주 항쟁) 등 남한의 주요 민주화 운동반미투쟁[83] 광주에 취재를 위해 잠입했던 조갑제는 5·18 당시 많이 불리고 큰 박수를 받았던 구호가 "김일성[39]
5·18 민주 유공자 유족회의 정수만 회장은 2006년 12월 21일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인터뷰에서 북한군 개입설을 반박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에서 "북한군 사망자가 민주화 투사로 둔갑된 사례가 있다."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희생자 중 한 명이 북한군이라고 지목을 했는데, 정수만 회장은 이날 인터뷰에서 지목된 인물은 1980년 5월 22일 광주국군통합병원 앞에서 20사단 61연대의 작전 도중 사망한 고등학생 임00라고 밝혔다. 당시 사망자 검시 기록을 보면 임00이 끝까지 군을 추격하기에 계엄군이 사살했다고 한다.[84]
5·18 당시 북한의 특이 동향은 없었다. 한미연합사령부와 육군본부[85] 5월 20일 한미연합사령부에서 미국에 보낸 전문을 보면, 그 시점까지 북한군의 어떤 동향도 확인되지 않았다. 5·18을 진압했던 계엄군은 부상자와 연행자 수천 명에 대해 조사 과정에서 대공 판단서를 첨부했다. 여기에는 대공 용의점을 철저히 조사해서 대공 유무를 기록하게 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이상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86]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일성이 5·18 민주화 운동을 전후해 루마니아
자유북한군인연합은 탈북자 사이에서 5·18 북한 개입설은 상식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 조선로동당 비서 황장엽[89] 북한군 특수부대에서 사관장 계급으로 복무했던 한 탈북자는 "특수부대 병력이 600명이나 내려왔다면 그것은 게릴라 작전이 아니라 전면전에 해당된다"며 "한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에 특수부대 군인들을 대거 보내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라고 잘라말했다. 그는 "소문에 불과한 얘기를 증거나 확인 없이 그대로 전달하면서 거짓이 진실이 됐다"며 "주목을 끌고 싶은 일부 인사가 잘못된 발언을 해 광주 시민들에게 상처를 줬다"라고 강조했다. 20년간 국가보위부와 정찰국 장교로 복무한 한 탈북자는 "북한군이 만약 5·18 당시 개입했다가 북한에 돌아왔다 하더라도 해당 군인들이 전역할 때는 작전에 대해 비밀에 부치는 서약서를 쓴다"며 "더구나 대대급 규모의 작전이었다면 처음부터 극비리에 진행되기 때문에 소문이 날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북한재향군인협회는 "상당수 회원들이 북한개입설을 허황된 발언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더 이상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라고 밝혔다.[90]
1980년 당시 광주는 전라남도 산하의 일개 시로서 서울에서 남쪽으로 300 km 정도 떨어진 소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그다지 큰 가치가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북한 측에서 광주에 개입한다고 해서 별다른 이익을 얻거나 대한민국 정부에 커다란 타격을 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특히 과거에 군사분계선 인근 지역에 무장공비가 출몰했을 때와 김신조
또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조차도 모르게 북한군이 개입했다면, 오히려 대한민국이 전복될 뻔한 위기를 신군부가 자초했다는 얘기가 되고, 결과적으로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우익 단체가 스스로 전두환
특수부대 개입설 및 탈북자 주장에 대한 판결
2013년 5월 15일 서울중앙지법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 김일성 주석과 짜고 보낸 북한의 특수부대였다는 글을 쓴 지만원[91]
여타 보수 인사들의 입장
2007년 3월 우파언론인이며 조선일보 원로 기자인 조갑제조갑제는 자신이 직접 5·18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상황과 정황에 따른 논리적 판단을 토대로 5·18을 '반공민주화 운동'이라 평가했고[92], 일부 우파에서 제기한 북한인민군 개입설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이러한 주장이 결국 좌파[93] 이에 대해 북한 인민군 개입설을 주장한 탈북자 단체 및 이에 동조하는 우파 세력이 조갑제를 비난하는 등의 일이 빚어지기도 했다. 조갑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어 애국단체들이 북한군 개입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94]
광주시민 수십만 명과 진압군이 목격자이고, 기자 수백 명들이 취재한 목격자가 많은 사건이다. 5·18을 취재했던 어느 기자도 북한군 부대가 개입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투를 벌였을 당시 진압군(계엄군)의 장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북한군의 출현에 대해서 보고하거나 주장한 사람이 없었다.
1980년[97] 또한 진압 당시 죽은 군인들에 대해 "대부분이 동료들의 오인 사격에 의해서 죽은 거예요. 두 번에 걸쳐서 오인사격이 있었는데, 광주보병학교와 11공수여단 사이에 5월 24일에 교전이 있었고, 또 한 번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31사단과 교전이 있어서 오인 사격으로 죽었지 정작 시위대와 충돌해서 죽은 군인들은 굉장히 소수였어요"라고 증언했다.[98]
피고인들이 국헌을 문란케 할 목적으로 시국수습 방안의 실행을 모의하고, 모의할 당시 그 실행에 대한 국민들의 큰 반발과 저항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해 '강력한 타격'의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도록 평소에 훈련된 공수부대 투입을 계획한 후, 이에 따라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진압봉이나 총 개머리판으로 시위자들을 가격하는 등으로 시위자에게 부상을 입히고 도망하는 시위자를 점포나 건물 안까지 추격해 대량으로 연행하는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였으며, 이와 같은 난폭한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분노한 시민들과의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함으로써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그후 일부 시민의 무장저항이 일어났으며, 나아가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귀중한 국민의 생명을 희생하여서라도 시급하게 재진입작전을 강행하지 아니하면 안될 상황이나 또는 광주시민들이 급박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있다고도 볼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위를 조속히 진압하여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아니하면 내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계엄군에게 광주 재진입작전을 강행하도록 함으로써 다수의 시민을 사망하게 하였다.[126]
5·18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록물은 2011년 5월 25일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 심의를 통과함에 따라 세계기록유산[127][128]
5·18 민주화 운동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 유산 등재가 최종 심사 결과만을 남겨 두고 서석구, 지만원[129] 유네스코는 국내외 검증 절차를 거쳐 '북한군 개입설'이나 '폭동설' 등은 허위라고 결론짓고 2011년 5월 25일 심사위원 14명의 만장일치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130]
유네스코는 5·18 민주화 운동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전환점이였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를 이루는데 기여했으며, 나아가 냉전 체제를 깨트리는데 도움을 줬다고 평가했다.[131][132][133]
편철 4,271권, 8,580,904페이지, 네거티브 필름 2,017컷과 사진 1,733장, 영상 65작품, 1,471명의 증언, 유품 278점, 연구물 411개, 예술작품 519개 등[134]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5·18 관련 기록물은 다음의 9개 주제로 구분되어 있다.
국가기관이 생산한 5·18 민주화 운동 자료(국가기록원, 광주광역시 소장)
군 사법기관 재판 자료,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료(육군본부 소장)
시민들이 생산한 성명서, 선언문, 취재수첩, 일기(광주광역시 소장)
흑백필름, 사진(광주광역시, 5·18기념재단 소장)
시민들의 기록과 증언(5·18기념재단 소장)
피해자들의 병원 치료 기록(광주광역시 소장)
국회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 회의록(국회도서관 소장)
국가의 피해자 보상 자료(광주광역시 소장)
미국의 5·18 관련 비밀해제 문서(미국 국무성, 국방부 소장)
특히 여고생이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적은 일기장은 언론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일기를 적은 인물은 이를 유네스코 등재 위원회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135]
앞으로 시민과 해외 선교사 등을 대상으로 자료 수집 운동을 펼쳐 수집된 자료를 추가 등재할 계획이며[137], 이와 함께 광주가톨릭센터에 5·18 아카이브의 구축을 통한 기록물 디지털화, 기록물의 국가문화재 지정과 또한 5·18의 헌법전문 명시, 유네스코와 협력하여 인권평화상의 제정 등이 추진된다.[136][138]
5·18 민주유공자 예우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은 1990년 제정된 뒤 2000년 법률 제6122호까지 4차례 개정되었다. 유족의 범위와 보상지원을 위한 위원회 설치, 보상금과 각종 지원금 등에 관한 규정을 담고 있다. 2002년 1월 26일 광주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법률 제6650호)로 제정된 뒤 2004년 개정되면서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139] 유공자와 그 유가족에 대해 교육지원, 취업지원, 의료지원, 대부, 양로지원, 양육지원 및 기타 지원을 실시한다. 민주화운동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각종 기념 추모사업을 실시하며 국립 5·18묘지를 설치한다.[140]
5·18 현장에 있었던 많은 증인은 진압군의 입에서 술 냄새가 났다는 등의 증언을 하고 있다.[142] 술 취한 군인이 연행자를 살해한 사건도 발생했다. 1980년 5월 22일쯤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전투발전부장 김순현 준장과 전교사 작전참모 백남이 대령 등은 전교사 연병장에서 공수부대원이 헬기에서 내리는 연행자의 왼쪽 귀 뒷부분을 칼로 찌르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 부상자는 헬기로 광주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됐으나 몇 시간 후 병원장에게 확인한 결과 사망했다. 김순현 준장은 당시 공수부대원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했으나 이들은 자신에게 대들었으며 술 냄새가 났다고 증언했다.[143]
5·18 당시 '여학생 유방 난자'라는 유언비어와 관련해, 5월 20일 밤과 5월 21일 오전의 가두방송을 주도하며 관련 내용을 방송했던 전옥주는 민화위에 출석해 "여학생의 유방이 찔렸다는 말이 유언비어라지만, 나는 여자의 가슴이 칼에 찔려 유방이 드러난 것을 봤다"라고 증언했다.[144] 이에 국회 광주 민주화 운동 특위는 1989년 1월 16일 항쟁 당시 부상 시민들을 수술했던 전남대병원과 적십자병원, 기독병원과 종합병원에 대한 문서 검증을 해 항쟁 초기 단계에 공수부대원의 대검과 진압봉에 의해 자상과 타박상을 입은 부상자들을 확인했다. 그 결과 전남대 흉부 외과의사였던 오봉석 씨의 증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댓글 5 . 18 광주 민주화 운동 사망자 개죽음 ... 지금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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