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성탄절을 앞두고 거리는 한결 붐볐고 들떠 있었다. 현란한 대형 트리와 네온사인이 회색의 도시를 화려 하게 수놓고 있었다. 화려하다기보다는 어수선했고 어 지러웠다. 거리는 사람과 차량의 행렬로 넘쳐 흘렀다. 아스팔트 길은 거대한 도시가 내뿜는 열기와 매연으로 가득했다. 짜증스러웠고 숨이 막혀 왔다. 저녁 8시께에 김강민과 민하경은 서울을 벗어나고 있었다, 죄악의 도성(都城), 소돔과 고모라를 벗어나듯 이. 운전은 하경이 했다. 차는 그녀가 새로 마련한 우리 시대 최고의 승용차 로 알려진 서독의 BMW! 메르세데스 벤츠가 고풍의 귀족적 이미지를 나타낸다면 BMW는 신흥귀족의 이 미지를 나타낸다. 모델 750IL에 12기통의 하경의 BMW는 그 가격이 무려 1억 6천 5백만원! 그 최고속도는 시속 250킬로미 터. 누구나 손에 넣고 싶은 최첨단의 차라고 할 수 있 다. 차의 색깔은 오팔 베이지! 제3한강교를 지나 경부고속도로에 접어들었어도 차 량의 정체현상은 여전했다. "제기랄!" 강민이 혀를 찼다. 하경이 그러한 강민을 토닥거렸다. 그녀는 조금도 서둘 게 없다는 낯빛이었다. 톨 게이트를 지나서야 비로소 숨통이 터지는 느낌이 었다. 하경은 지긋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리고 주행 선에서 추월선으로 차선을 바꾸었다. 뛰어난 순발력과 가속능력을 지닌 차는 그 속도가 금세 100킬로를 넘고 있었다. 아니 150킬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경으로서는 200킬로를 밟을 수 없는 고속도로 사 정이 안타까왔으리라. 아무튼 하경은 한껏 신명이 나 있었다. 강민은 일순 뒤돌아 보았다. 백미러에 비친 톨 게이 트가 저만치 멀리 뒷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강민은 톨 게이트를 벗어나며 알지 못할 감회에 젖 었다. 그게 벌써 한 달쯤은 되었을 것이다. 용인별장에서 하경과 일종의 피가름의 제전을 치르고 엄대진의 시신 이 기다리는 서울로 돌아갔던 때가 말이다. 서울의 관문이라고 할 톨 게이트를 지나며 루비콘 강을 건너는 심정이었다. "강민씨, 우린 마침내 승리했어요. 우리가 도전했던 게임에서 말예요." 내내 말이 없던, 침묵 속에 운전에 전념하던 하경이 불쑥 말했다. 어찌 하경에게도 감회가 없으랴. "우린 해냈어요. 어김없이 해냈다구요." 하경은 되풀이해서 그녀의 대사를 말했다. 아마 몇 번이고 되풀이하고 싶은 대사이리라. 얼마나 숨가쁜 모험이었던가. 그동안 들킬 뻔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고 그래서 가 슴 조인 일도 한 두 번이 아니다. 하경은 그녀의 현 남편과 전 남편 모두를 살해했고, 그녀의 친구인 설지숙을 비롯한 세 명의 장례팀도 장 사지냈다. 무엇보담도 모건을 없앤 일은 후환을 없애 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하경은 늘 그녀의 이성이 명하는 바에 따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일을 처리했 다. 그러나 너무 모질다. 너무 어기차다. 그들은 이윽고 용인의, 숲이 우거진 산골짜기에 자 리잡은 그들 두 사람의 별장에 당도했다. "우리 건배해요." 그들은 크리스탈의 올드 패션 글라스에 차가운 샴페 인을 가득 따라 건배를 했다. "우린 마침내 승리했어요." 그들은 한껏 그들의 승리를 구가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꼬박 사흘낮 사흘밤을 보냈다. 그 들은 벽난로에 불을 지폈고, 그들의 육체에도 불을 지 폈다. 그들은 그들의 사랑에 물입했다. 특히 하경은 모 든 것을 잊으려는 듯이 몰입하는 것이었다. 보들레르가 성교를 대중의 서정이라고 했던가. 그리 고 미식과 스피드도. 그런데 하경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식 은 땀을 흘리며 허위적거렸고 비명을 지르며 팔딱였 다. "당신, 왜 이러는 게요?" 강민은 몇 번이고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오, 미치겠어요." 하경은 끝내 깊은 잠에 빠지지 못했다. 알콜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누구든지 손에 피를 묻히고는 편안한 잠을 잘 수가 없나 보았다. 비정하고 냉혹하게만 보이는 하경도 필경은 섬세한 신경줄을 지닌 연약한 여자인 듯했다. "우릴 불안하게 하는 요인들은 말끔히 제거되었소. 그러니 마음 쓸 일이 하나도 없다구. 이지적이기만 한 당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강민은 하경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강민씨, 나의 이성은, 게임은 끝나지 안았다고 말을 하고 있어요. 아직도 뭔가를 경고하고 있다구요. 그게 뭔지 나도 모르겠어요." 하경의 차갑기만 한 이성은 뭔가 불안을 경고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게 뭘까. 설지숙이 남겼다는 메모 때문일까? 엄대진의 시신이 불태워졌다는 불확실한 언질 때문 일까? 아무튼 하경은 모든 불안한 요인이 말끔히 가시지 않고는 비록 모건마저 살해했어도 잠을 잘 수가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제 누굴 더 살해해야 하는 걸까? 그나저나 하경의 불안의 정체는 뭘까? 마동권인 걸까? 그의 손길이 끝내 우리한테도 미치는 걸까? 며칠 후 강민의 예측은 적중하는 듯만 싶었다. 강민이 하경을 그녀의 서울집에 바래다주고 그의 독 신자아파트에 돌아왔을 때였다. 강민은 그의 아파트에 배달된 여러 장의 크리스마스 카드 속에서 익명의 카드 하나를 발견했다. 정확하게 는 익명이 아니었다. M이라는 영어 대문자가 적혀 있 었던 것이다. M! 바로 마동권의 이니셜인 것이다. 살인자 마동권의 이니셜 M! 강민은 일순 소름이 돋았다. 오한이, 아니 전율이 등 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강민은 재빨리 사각의 흰 봉투를 뜯어 보았다. 봉투 안에서 흘러나온 것은 트럼프 카드였다. 그것 도 스페이드의 퀸이었다. 죽음의 카드로 일컬어지는 스페이드의 여왕 말이다. 이건 무엇을 뜻하는 걸까? 마동권이 그에게 죽음을 예고하는 걸까? 이건 어떻게 보면 낡고도 치졸한 수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동권이 그의 살의를 확고하게 전달하는 메시지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카드는 나한테만 배달된 걸까? 두 번째로 강민의 뇌리를 스친 상념이었다. 강민은 천천히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다이얼 을 눌러 하경에게 물어보았다. "저에게도 배달되었어요." 하경의 지체없는 대꾸였다. "으음." 강민은 무섭게 신음소리를 토했다. "우린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어요." 하경의 말투는 뜻밖에 침착했다. "마동권이 우리한테 그럴 순 없소. 왜냐하면 우리와 그의 동생을 연결하는 사슬이 단절되었기 때문이오." "어쨌거나, 강민씨, 우리의 적의 정체가 분명한 것은 좋아요." 하경은 도전받은 사실에 대해서만 민감하게 반응했 다. "강민씨, 아시겠어요? 눈 앞의 살아 있는 적도 좋다 구요." 하경이 실상 그토록 불안에 떨 수가 없었는데, 정식 으로 도전을 받으면 이 여진 강해지고 담담해지는 듯 싶었다. "그나저나 강민씨, 이걸 알아 보세요." "뭘 말이오?" "엄사장의 시신이 그날 어김 없이 화장되었는지를 말예요." 하경을 늘 사로잡는 생각은 엄대진의 시신이 모건의 말처럼 과연 불태워졌느냐 하는 점인 듯했다. 독살된 시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만 주었다면 뭘 더 겁낼 것 이 있겠는가. "한번 알아보리다." "그것이 확실하면 우린 경찰을 끌어들일 수도 있어 요. 이 협박 사건예요." "알겠소." "그리고 이건 누구의 장난인지도 몰라요." "이런 짖궂은 장난을 누가?" "글쎄요. 그럼 내일 봐요." 하경은 알지 못할 여운을 남기고는 먼저 전화를 끊 는 것이었다. 강민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것이 누군가의 장난이라면 어느 누구의 짓일까? 한순간 엄효진의 해맑은 인상이 눈 앞에 떠올랐다. 엄효진? 이건 그의 치졸한 일종의 복수극일까? 글세, 그럴지도 모르지. 다음날 아침. 강민은 곽만길 씨를 그의 집무실로 불러냈다. 그도 어김없이 스페이드의 퀸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는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안았다. 둔감해서라기보 다는 그 카드에 담겨진 불길한 뜻을 모르는 듯했다. "모건이 죽기 전에 한 말을 곽씬 기억하시죠?" "무슨 말이던가요?" "엄사장의 시신이 이미 불태워졌다는 얘기 말이 오......" "아, 그거요......" "가짜 시신을 불태우던 그날 아침에 함께 태웠다 는...... 10번 화구에서던가......" "네, 그렇게 말했었지요." "곽씨가 기술적으로 한번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그 게 사실인지......" "그러죠, 뭐......" "부탁합니다." "알았어요." 그런데 곽씨의 조사결과는 모두를 크게 실망시켰다. 실망시켰다기보다는 난감하게 했다. 그날 10번 화구에선 한 구의 시신도 불태우지 않았 다는 것이었다. 그 까닭은 그날 10번 화구가 고장이 나서라고 했다. "그럼, 이건 어떻게 된 거죠?" 강민은 일시에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글쎄요." 곽씨도 미간에 한껏 주름을 잡고 있었다. "어디 띠로 숨겨놓은 게 분명해요." "그런가봐요." 강민으로서는 엄대진의 시신이 청평호반의 별장의 뜨락에, 아니 정확하게는 풀장의 밑바닥 가랑잎과 얼 음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청평의 별장 어딘가에 어떤 형태로든지 숨겼 으리라는 생각은 했다. 별장의 지하실 어딘가에 숨겼을 공산이 커보였다. 아니면 철제관을 납땜해서 호수 속에 잠기게 했던 가...... "곽씨, 저하고 청평에 좀 다녀오도록 합시다." "거긴 왜요?" 곽만길 씨와 김강민이 청평호반의 별장을 수색하고 있을 즈음해서 황정빈 박사는 민하경으로부터 그랜저 의 열쇠를 건네받고 있었다. "박사님, 제 작은 선물이에요." "아니, 뭘, 이런 걸......." 황박사는 아침나절에 하경으로부터 점심이나 함께 하자는 전화를 받았었다. 그래서 메트로 폴리탄 클럽 에서 양고기로 점심을 하게 되었는데 식사가 끝날 즈 음해서 하경이 자동차 열쇠 하나를 건네주는 것이었 다. "늦었어요. 크리스마스 전에 드리고 싶었는데...... 차 색깔은 백옥색이에요. 취향에 맞을는지 모르겠네." 하경은 내트킨으로 그녀의 입술을 훔치며 말했다. 그녀의 루즈가 지워진 입술이 유난히 핏기가 없어 보 였다. 그러나 도톰한 그 입술은 여전히 선정적이었고 도발적이었다. "이걸 어쩌지요. 난 아무것도 준비 못했는데......" 황박사가 애써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경은 그러한 황박사의 제스처에 둔감한 듯이 말을 이었다. "실은 벤츠라도 선물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너무 눈 에 띌 것 같아서......" "하하, 네에." "달리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 요. 뭣이든지요." "뭐, 없어요." 황박사는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경은 그들 부부에게 너무나 잘해 주었다. 아내 엄채영에게는 영동의 큰 백화점을 물러주었고, 그에게는 국내 굴지의 심장재단 건립을 약속해 놓고 있다. "사양마시고, 뭣이든지요." 하경은 어느새 그녀의 백에서 루즈를 끄집어내 입술 을 고치고 있었다. 황박사 앞에서 취하는 그녀의 태도 는 스스럼이 없어 보였다. "그럼, 어디......" 황박사가 잠시 망설임을 보이더니 입을 떼었다. "말씀하세요." 하경은 루즈를 백 속에 챙기더니 한 쪽 손에 턱을 고이며 황박사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녀로서는 황박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의 전폭적인 협 력이 없었다면 이번 계획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며 성 사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나에게 이 열쇠를 주신 것, 비밀로 해주세요. 내 아 내에게두요." "어머, 왜죠?" 하경이 일순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뭔가를 깨닫는 듯이 보 였다. "네, 알겠어요." "흐음." "지금 아무도 몰라요. 그리고 앞으로도 아무도 모를 거예요. 제가 장담해요." "고맙습니다." 황박사가 씽긋 미소지었다. 그러자 하경도 덩달아 웃음짓고 있었다. 그것도 화려하게...... 어떻게 보면 공 모자들끼리 나누는 은밀한 미소라고 할 수 있었다. 황박사는 하경한테서 그랜저의 열쇠를 건네어받는 순간 대뜸 백난옥(白蘭玉)을 머리에 떠올렸다. 강남의 '왕족(王族)'이라는 이름의 A급 룸 살롱의 마담 백난 옥의 얼굴을. 그는 아침에 난옥한테서도 전화를 받았었다. "박사님, 오늘 스케줄이 어떠세요? 제거 점심을 대 접하고 싶어요." 난옥의 어딘가 비음에 가까운 목소리가 귓전에 간지 럽게 울렸을 때 황박사의 가슴은 반가움에 두근거렸 다. 난숙한 미모와 특출한 사교술을 지닌 여자! 뭇 사내들이 도전해도 끄덕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여인! 그런 탓일까. 도전할 가치가 있는 여자로 장안에 소 문이 나 있었다. 황박사도 꾸준히 도전했었다. 오늘까지요. "오늘 점심은 곤란한걸. 선약이 있군 그래." 황박사는 하경과의 약속을 떠올리며 못내 아쉬워했 다. "어머, 그래요오." 난옥의 과장된 실망을 담은 목소리가 이내 전해져왔 다. "미스 백, 즈녁은 어떻소? 시간이 있는데......" 황박사는 난옥이 금세 전화라도 끊을 듯 싶어서인지 다급한 목소리로 제의했다. "저녁엔 가게에 나가야죠. 그럼 어쩌나......" "내일 점심은?" "네, 좋아요. 그럼 내일 점심에 만나요. '보뜨르'에서 요. 실은 제가 박사님께 드릴 선물이 있어서 그래요. 좋지요?" "좋군." 선물이라! 무엇을 선물하려는 걸까? 기껏해야 챨스 줄단의 구두표 아니면 카운테스마라 의 넥타이 정도겠지. 하지만 이쪽은 그동안 왕창 밀린 외상 술값을 갚아 야 할 것이다. 하경과 황박사는 그 뒤 죽음의 카드라고 할 스페이 드의 여왕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박사도 그 많은 연하장과 함께 받았다는 것이다. "난 누군가의 장난으로 봅니다." 황박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비록 미간에 어두 운 그림자를 드리우고는 있었으나 그는 그다지 심각하 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박사님, 그건 왜죠?" 하경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황박사가 벌벌 떨리라고 생각했었다. 필경은 나약한 지성인이 아니던가. "난 마동권의 짓으로는 보지 않아요." "글세, 왜 그렇게 생각하시냐니까요?" "우리 말고도 곽만길 씨도 받고 심지어 윤세화 씨도 받았다면서요?" "네, 그래요. 윤언니까지두요?" "그 여자가 우리 일을 거든 건 사실인가요?" "네게. 그 언니가 음식에 비소를 탄 걸요. 그 사람이 즐겨먹는 버섯요리에요." "마동권이 그 사실까지 알수가 있을까요? 그의 처지 에서 말입니다." "하긴요......" "하경씨, 엄격하게 말해서 그는 국외잡니다. 우리 모 두를 알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지 않다는 얘깁니다." "그럼?" "이건 우리 내부의 실정을 잘 아는 우리 혈족 중에 서 누군가가 한 짓입니다. 내 말 알아들어요?" "그가 누구지요?" "내 입으로 누구라고 꼭 말해야 되겠습니까?" "으음." 황박사가 엄효진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임엔 틀림없 었다. 엄효진이라면 민하경이 끌어들였을 법한 집안 사람들에 대해 눈치를 챌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 친구가 말씀예요. 경찰을 이 사건에 개입시키려 다 실패하자 이런 수법을 쓰는지도 모릅니다." "흐음." "하지만 언젠가는 모든 걸 단념하고 돌아올 날이 있 을 겁니다." "박사님, 우린 그 사람을 위해 문을 열어놓고 있어 요." "재산도 떼어주기도 했구요. 하경씨, 그렇지요?" "네, 그래요. 박사님......" "우린 어쨌거나 그 친구를 포용해야 합니다. 뒤탈이 없자면요." "네, 그렇게 해야해요." "그러나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러나 염려하지 않을 일이 아니었다. 황박사의 냉 철하기까지한 이지적인 판단과는 달리 살인자는 착실 히 그의 죽음의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말하자면 M의 이름으로 죽음을 예고한 사람들의 사형집행을 준 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살인자의 첫 번째 표적은 황박사였다. 황정빈 박사! 그의 비중이 이 사건에서 높을수록 그의 표적으로서 의 가치도 높았다. 그러나 지금 황박사의 머리를 지배하는 것은 내일로 예정된 백난옥과의 데이트였다. 다음날. 황박사가 강남에 자리잡은 프랑스식 레스토랑 '보뜨 르'에 도착해 보니 백난옥이 몰고온 성싶은 새도우 블 루의 콩코드가 눈에 띄었다. 룸 살롱의 어지간한 마담들은 한결같이 고급승용차 를 몰고 다닌다고 했었다. 월수입도 천만 원을 웃돈다고 했다. 그들을 스카우 트하자면 그 비용이 1억 원을 호가하는 경우도 있다. 주말은 물론 골프로 시간을 보내고 말이다. 이건 물론 지금은 새로운 신화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이젠 단순히 호스티스라고 부르기보다는 비 즈니스 우먼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었다. "박사님, 여기예요." 창가에 자리잡은 난옥이 황박사를 향해 손을 들어보 였다. 단정하게 빗어내린 생머리카락에 화장기라고는 없는 얼굴. 여성적이면서도 클래식한 라인을 드러낸, 심플한 느 낌의 모스 그린의 정장. 누가 보아도 창가의 귀부인석에 귀부인이 자리하고 있다고 할 것이었다. 큼직한 눈매에, 신의 솜씨라기보다는 예술가의 솜씨 로 빚은 듯이 상큼하게 솟은 콧날. 그런데 그 입술만 은 요즈음의 유행에 따라 빨갛게 칠해져 있었다. 그녀 의 고혹적인 입술에서 비로소 그녀의 직업을 겨우 엿 볼 수가 있었다. "오랜 만이군." 황박사는 눈이 부신 듯한 모습으로 마주 앉는 것이 었다. "오랜 만이예요." 난옥은 그 하얀 손을 내밀며 살레살레 눈웃음치고 있었다. 그것은 직업여성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잘 계산된 도발적인 눈웃음이었다. 황박사는 아름다운 난옥의 손을 마주 잡으며 그도 모르게 희심의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졌다. "나도 미스 백을 위해 선물을 하나 준비했소." 황박사는 선수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이 재빨리 말 하는 것이었다. "어머, 그래요?" 난옥이 조금은 호들갑스럽게 반응해 보였다. "뭔지 맞추어 보겠소?" "그 전에 제 선물부터 받아주세요." 난옥도 선우를 빼앗길세라 재우치듯 말했다. "그래, 어디?" 황박사가 눈을 빛냈다. "박사님도 한번 맞춰보시겠어요? 뭔지......" 난옥이 그녀의 가지런한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물었 다. "글세, 뭘까? 이브 생 로랑의 넥타이? 아니면 구찌 의 벨트?" 황박사는 여전히 빙글거렸다. "시시하긴." 난옥이 대뜸 새초롬한 표정이 되더니 눈을 흘겼다. "시시하다구?" "골프채예요. 골프채." "골프채라구?" "그것도 핑아이II예요." "세상에." 이런 어떻게 된 걸까. 벨트에서 골프채로 갑자기 격상되다니! 그것도 핑아 이II이든 아니든간에. "왜, 마음에 안 드세요?" "내가 왜 갑자기 부상(浮上)했을까? 살롱 '왕족'에서 말야." "아주그룹의 새로운 실력자라면서요? 박사님은......" "맙소사." "엄효진 상무가 거세(去勢)되고 박사님이 새로 부상 했다면서요? 아주그룹에서요. 어때요? 정보 한번 빠르 죠." "정보가 빠른 건 인정해야겠군. 하지만 서운한걸." "그건 왜죠?" "이건 비즈니스가 아니요." "아무려면 어때요. 박사님께 좋은 선물을 드리게 된 걸요. 늘 뭘 드릴까 했어요. 비즈니스 때문만은 아니 구요." "그 말 믿어도 될까?" "믿지 못할 무슨 이유라고 있나요?" "흠, 어쨌거나 고맙소." "내가 박사님을 좋아하고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에요." "그럴까?" "사람들은 심지어 우리가 무슨 깊은 관계라도 있는 줄 알아요. 억울한 얘기지만요." "난옥은 진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그것이 비록 직업적인 눈길이고 대사일지라도 황박사는 싫지 않았 다." "근데 나한테 주실 선물을 뭐예요?" 난옥이 여전히 야실거리며 물었다. "별거 아니요." 황박사는 호주머니 속에서 열쇠 뭉치 하나를 끄집어 내더니 난옥의 눈 앞에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대수 롭지 않은 모습에 예사스런 동작으로 건네어 주는 것 이었다. "어머, 이거 차 열쇠 아녜요?" 난옥이 그녀의 아름다운 눈을 크게 떴다. "그것도 그랜저의......" 난옥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지고 있었다. "그렇소." "어머, 이걸 어쩌지요?" 난옥은 일순 당혹해 했다. 과분한 선물인 것이다. 끝 내는 그녀를 속박할 것이고 숨막히게 할 것이다. 그녀 의 이런 이성적인 판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내부에서 기쁨이 솟구쳤다. "어쩌긴...... 그냥 받아요. 금년도 신형이오." 황박사는 난옥이 나타내 보이는 미묘한 반응에 만족 해했다. 그의 입귀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나, 차 있어요. 아시잖아요." 난옥은 아직도 어쩔 줄 몰라했다. "모두가 한결같이 그랜저를 몰고 다니더군. 거기 말 고는......" "그건 그래요." "살롱 '백조'의 윤마담도. '환희'의 채마담도, '요하'의 오마담도 말이오." "으음." "우리 '왕족'의 백난옥이 그랜저가 없다는 것이 화가 나더군. 누구보다도 특출한 미모를 지녔는데......" "화가 나요?" "내가 공연히 모욕당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더군. 우리가 어떤 사이요?" 물론 아무 사이도 아니다. 다만 소문만 무성한 사이일 뿐이다. "나 참 박사님두......" "받아주겠소?" "암요, 박사님, 고마워요." 난옥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차의 열쇠를 받기로. 아니 사계의 내노라 하는 심장전문의를 애인으로 삼기 로. 별로 나쁜 일은 아니니라. 어딘지 모르게 그녀의 지 적인 콤플렉스를 충족시켜줄 듯만 싶었다. 난옥은 그랜저의 열쇠를 가만히 백 속에 집어넣었 다. "우리 식사해요, 박사님." "그럽시다." "와인은 뭐가 좋죠?" "와인? 헝가리 상품이 어떨까? 이곳에도 있는지 모 르겠군." "있을 테죠." 그후 두 사람은 점심을 들며 신졍연휴를 함께 보낼 계획을 자연스레 화제에 올렸다. "나한테 좋은 계획이 있어요." 난옥이 말했다. "좋은 계획?" 황박사가 눈을 빛냈다. "제주도로 골프투어를 떠나면 어떻겠어요?" "그것 나쁘지 안군. 하지만......" "하지만?" "사람들이 모일 만한 곳은 싫군." "그럼 설악산은 어때요?" "거기두......." "그럼?" "속리산이 어떻소? 호젓하고......" "사람의 눈을 겁내는군요. 박사님은......" "난 괜찮소. 자랑스럽기도 하니까." "근데요?" "미스 백, 거길 위해서요." "고마워요." "그럼 내가 다시 전화하리다." 그들은 잠시 서로가 비밀스런 눈길을 주고 받으며 후일을 기약했다. 황박사가 속리산에서 그가 소속한 무슨 학회의 모임 이 있다며 서울을 떠난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의 오후 세 시 반께였다. 그들은 반포의 팔레스 호텔 커피숍에서 합류했다. 난옥이 그녀의 새로운 그랜저를 몰고 왔다. 진한 코발 트의 롱코트를 걸친 그녀의 모습은 백옥색의 그랜저와 강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강렬한 이미지로 부각될 수가 없었다. '흐음, 괜찮군 그래.' 황박사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신음소리를 토했다. 그는 알지 못할 성취감과 쟁취감을 맛보았다. 그리고 하루 아침에 젊어지는 느낌이었다. 그 시각에, 아니 황박사가 그의 집을 떠나고 있을 즈음해서, 곽만길씨는 어디엔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다이얼의 보턴을 누르는 그의 손은 리드미컬하게 움직 이고 있었다. 막상 그는 즐겁기만 했다. 그는 지금 음 모자와도 같은 즐거움에 도취되어 있었다. 한낮인데도 그의 방은 어두컴컴했다. 그는 그의 방 을 굳게 잠궈놓고, 커튼도 내려놓고 있었다. 그의 목소 리도 비밀을 속삭이는 듯했다. "나, 곽입니다, 곽." "말씀하시오." 시그널이 네 번 울리자 전화기 저편에서 저음의 목 소리가 되돌아왔다. "황박사가 방금 떠났어요." "흐음." "속리산에 가나 봐요. 무슨 세미나가 있다고 했어요. 정초에...... 그곳 관광호텔에서요." "......" "어떤 여자와 함께 나가 봅니다." "......" "물론 부인은 아니예요. 엄채영 씨는......" "......" 그런데 상대방은 끝내 뭐라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황박사의 비밀스런 데이트엔 흥미가 없나 보았 다. 다만 황박사의 정확한 행선지가 필요한 듯했다. "차는 백옥색의 그랜저예요. 차 넘버는 서울 G의 5050!" "......" 곽씨는 그의 정보제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기는 소리를 들었다. 메마르다고밖에 달리 여겨지지 안는 상대방의 거동이었다. 전화의 상대방은 바로 곽씨 자신을 비롯해서 하경의 공모자들에게 죽음의 카드라고 할 스페이드의 퀸을 M 의 이름으로 보낸 살인자였다. 곽만길씨는 말하자면 살인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었다. 곽씨가 죽음의 카드를 받고도 태연했 던 이유를 이제사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살인 자가 하경의 공모자들을 빠짐없이 알 수 있었던 사연 도 말이다. 하경의 공모자들 입장에서 보면 곽씨는 어김없는 배 신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무엇이 그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했을까? 돈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그의 호주머니는 지금 듬뿍 채워져 있는 처지이다. 그럼 M의 협박 때문이었을까? 어쨌거나 곽씨는 M 의 살인에 전폭적으로 협력하고 있었다. 그것도 즐거 운 마음으로. 살인자는 그 순간 탁자 위에 놓인, 그의 상표라고 할 검은 색안경을 집어들고 있었으며, 트레이드 클럽 의 제품인 듯싶은 검은 캐시미어의 코트를 걸치고 있 었다. 그는 숄더 호울스터에 그가 애용하는 부로우닝 하이파워도 챙기고 있었다. 살인자는 이윽고 그의 아파트들 나섰다. 유엔 빌리 지에 위치한 외인전용 아파트를. 아파트의 수위는 절룩이며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기 는 검은 색안경에 검은 캐시미어 코트를 걸친 사나이 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특히 수위는 걸음을 절며 내는 구둣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이 상하게 여운을 남기는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이윽고 마동권의 소유인 제로 넘버의 볼보는 외인아 파트를 뒤로 했다. 볼보가 사라지며 내는 백파이어 소 리도 수위 영감의 귓전에 오랜동안 머물렀다. "무슨 노래를 좋아하시죠, 박사님은?" 백난옥이 모는 그랜저는 시내를 벗어나 어느새 경부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그녀가 카 스테레오용 테이프 를 고르며 묻고 있었다. "아무거나......" 황박사는 그냥 그저 꿈꾸는 듯한 모습이었고 마냥 즐겁기만 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난옥이 마침내 고른 테이프는 나나무스쿠리의 "스카 보로우의 추억"이었다. 그 시각에 그랜저의 뒤를 쫓는 살인자도 카세트 테 이프 하나를 고르고 있었다. 살인자의 카 스트레오에 서 잠시 후 흘러나온 노래는 강은철의 "삼포로 가는 길"이었다. 오후 네 시께에 차가 톨 게이트를 지나자 비가 내리 기 시작했다. 그것도 제법 내렸다. 겨울비! 여느 때 같으면 차창을 때리는 겨울비란 을씨년스리 웠을 테지만 지금의 황박사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다. 빗속의 낭만적인 여행! 이렇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더구나 젊은 연인과 함께 하는 비밀스런 여행이다. 다섯시께에 천안을 지날 즈음해서는 비가 진눈깨비 로 바뀌고 있었다. "어렵소,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눈이 내리는군 그래." 황박사가 한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렇네요." 운전대를 잡은 난옥은 와이퍼의 인터벌 간격을 좁히 며 장단을 맞추듯 말했다. 옥산휴게소에 들렀을 때는 거센 눈발을 헤치며 화장 실로 뛰어 가야 했다. 두 사람은 처마 밑에서 거세어지는 눈길을 바라보며 따끈한 커피를 나누기도 했다. "제법 오려나 봐요." 난옥의 얼굴에 얼마간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고 있었 다. "그러려나 보군." 황박사는 여전히 즐겁기만 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그들의 시선을 끄는 사람이 있었다. 회색의 외제 차가 멎는가 싶더니 검은 색안경에 검 은 코트를 걸친 사나이가 눈발을 헤치며 걸어오고 있 었다. 이 눈길에 검은 색안경이라니! 그런데 사내는 절뚝이며 걸어왔다. 두 사람의 눈길은 잠시 그 유별난 모습의 사내에게 머물렀다. 사내도 커피를 청해 처마 밑에서 들고 있었 다. 옥산 휴게소를 떠나며 운전은 황박사가 했다. 길엔 눈도 쌓이고 미끄러웠다. 언제나처럼 경부고속도로는 정체현상을 나타냈다. 잘못하면 고속도로 선상에서 몇 시간이고 갇힐 형편이었다. 그러나 황박사는 여전히 휘파람이라도 불 것 같은 신명나 하는 모습이었다. 살롱을 연상케 하는 아늑한 공간, 그 속에 울려퍼지 는 감미로운 음악, 그리고 차 속엔 술로 있었다. 뭐니 뭐니해도 옆자리에 앉은 아름다운 여인의 존재와 그들 을 기다리는 겨울밤의 정사! 무엇을 걱정하며 두려워하랴. 그런데 검은 코트의 사나이가 모는 회색 볼보가 그 들의 시야에 자주 얼씬거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 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들을 꾸준히 미행하는 것처럼 보였 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선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니 어둠속에 잠겨버린 것이다. 자기 갈 길을 갔나보 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들이 보은에 도착한 것이 밤 9시께였다. 그러니 고속도로에서 여러 시간을 갇힌 셈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 버스정류장에서 회색의 볼보를 다시 보게 되었다. 검은 코트의 사나이가 차를 세워놓 고 체인을 감고 있었다. 그래, 말티 고개를 넘자면 체인이 필요하리라. "우리도 고개를 넘으려면 체인을 끼워야 해요." 난옥이 근심스런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어쩐지 이 번 여정에 알지 못할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흐린 날씨 탓이라기보다는 여성 특유의 불안을 냄새 맡은 예민한 후각이 작용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 차엔 스노우 타이어가 장착되어 있는걸." 그러나 황박사는 닥쳐올 위기에 둔감하기만 했다. "저 차도 스노우 타이어인걸요." "염려하지 말아요. 내가 있잖소." "하지만......" 그러나 난옥의 염려와는 달리 그들은 무사히 눈에 덮인 말티 고개를 넘었다. 얼마간 엉거주춤 기어가듯 하긴 했었다. 그리고 체인으로 무장한 회색 볼보가 그 들을 보란 듯이 추월할 때는 조금 속이 상하긴 했었 다. 마침내 그들의 종착지라고 할 속리산 관광호텔이 저 만치 눈에 들어왔다. "박사님, 제가 방을 두 개 예약해 놓았어요. 신경을 쓰시는 것 같아서......" 난옥이 황박사의 무릎에 정감이 담긴 손을 얹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까지......" "금세 갈께요. 샤워를 끝내고......." 난옥은 가만히 웃음지었다. "그나저나 저녁부터 들어야 할 텐데...... 배가 고프 군." "우리 저길 가요. 산채나물이 맛이 있기로 소문 난......" "그럽시다." 그들이 거리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끝내고 호텔에 여장을 푼 것은 이래저래 밤11시께였다. 그들은 거리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끝내고 호텔에 여장을 푼 것은 이래저래 밤 11시께였다. 그들은 마치 타인처럼 행동했다. 그것이 얼마나 호 텔종업원들에게 어색하게 비치는지도 모르고. 그러나 방을 두 개 예약한 것은 난옥으로서는 다행 스런 일이었고 현명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의 생명을 보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황박사는 뜨거운 샤워의 물길 속에서 몸의 긴장을 풀었다. 눈길 헤처오며 사실 무척이나 긴장했었다. 달 게 무르익은 공상과 함께 나른한 피곤도 몰려왔다. 샤 워들 끝내고 시원한 맥주를 들자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새롭게 힘이 솟는 듯만 싶었다. 황박사는 나이트 테이블의 시계를 쳐다보았다. 밤 11시 반! 5분 아니면 10분 내에 난옥이 나타나리라. 그토록 정감이 풍부하고 자상한 성품의 그녀가 그를 오래도록 기다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의 눈앞엔 난옥과 의 황홀한 하룻밤이 펼쳐지며 지나갔다. 그의 가슴은 천천히 박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술집 여자들 가운데 오히려 불감증의 여자들 이 많다고들 했다. 아마도 그녀들의 불규칙적인 그리 고 불안정한 성생활 탓인가 보았다. 더구나 얼굴이 팔 린 여자일수록 함부로 내돌리지를 못한다. 난옥은 그 세계에서는 그래도 최고급 여자 중의 한 사람이다. 최고급이라기보다는 최고가의 여자일 것이 다. 믿지 못할 이야기지만 겉으로는 화려해도 뜻밖으 로 그 방면엔 순진한 여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근데, 난옥의 경우는 어떨까? 그녀에게 남성기피증이 있다는 말이 언뜻 머리에 떠 올랐다. 아직도 오르가즘을 경험하지 못한 건 아닐까. 그래서 그것이 화제가 되는 걸 싫어하는 건 아닐까. 아무튼 오늘 이렇게 따라나선 것은 결벽증이 있는 그녀로서는 여간 큰 결단이 아니었으리라. 황박사는 갑자기 그가 행복하게 해주어야 할 여자를 만난 느낌이었다. 그러자 더욱 기다려졌다. 그때 도어의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 "문 잠그지 않았소." "......" 도어가 천천히 열렸다. 황박사는 그가 걸친 나이트 가운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곳에, 문가에, 엉뚱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 다. 바로 회색 볼보의 사나이였다. 검은 색안경에 검은 코트를 걸친 사나이가 두 손을 호주머니 속에 질끈 쑤 셔넣고 서 있는 것이다. "당신, 누구요?" 황박사는 그 자신도 모르게 겁먹은 목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기계적으로 한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검은 옷에 감싸인 사내한테서 알지 못할 음습한 냉기를 느 꼈다. 이 사낸 누구일까? 이 사낸 혹이 아내 엄채영이 파견한 미행자는 아닐 까? 서울을 떠날 때 눈을 하얗게 흘기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의 내부에서 이내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이 새는 단순한 미행자도 감시자도 아니라고 말이다. 일순 뭔가 치명적인 오산이 있었다는 생각이 그의 뇌 리를 스치며 그것이 그를 못견디게 했다. 사내가 등 뒤의 문을 닫으며 록장치를 누르는 소리 가 분명히 들렸다. "황정빈 박사시던가?"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선 핏기도 생기도 찾을 수가 없었다. 창백하기만 했다. 그 의 목소리에서도 감정도 리듬도 찾을 수가 없었다. 메 마르기만 했다. "그래요, 근데 댁은?" 황박사의 억양을 잃은 듯한 목소리가 떨려왔다. "내가 누구라고 하면 아시겠소? 당신한테 스페이드 의 퀸을 보낸 사람이요." 사내의 목소리가 잠시 뭔가를 애무하듯 했다. "으음." 황박사의 얼굴에선 상실감이 번지고 있었다. 그는 말도 잃고 있었다. "내가 찾아온 사연은 이미 짐작하고 일을 게요." "......" "황박사! 안 됐지만 죽어주어야겠소." "......" "이건 지금까지 누려온 즐거움에 대한 합당한 보상 이오." 사내의 목소리는 여전히 비정했고 냉혹했다. 그러나 그는 더는 그의 대사를 늘어놓지 않았다. 그는 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있었다. 아니 무기를 끄집어내 고 있었다. 바로 부로우닝 하이파워였다. 그 총구에는 소음기도 꽂혀 있었다. 검고 둔탁하게 빛나는 그 총구는 분명히 황박사의 가슴팍을 겨냥하고 있었다. "제발, 잠깐 내 말을 들어보시오." 황박사는 일순 두 손을 내밀며 허위적거렸다. 살인자는 그러나 더는 말미를 주지 않고 있었다. 그 의 총구는 가차없이 불을 뿜는 것이었다. 황박사는 기습적인 카운터 펀치를 맞은 복서처럼 일 순간에 무너져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독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