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라는 영인본 (외 1편)
변희수 빛의 소용돌이 속에서 까마중의 검은 뺨이 익어갔다
관심 밖에서 자라는 여름의 열매들을 펼치면 빛에 시달린 그림자가 누워 있었다 더 이상 꺼낼 게 없어질 때까지가 여름입니다 초록이 떨어트린 답안지처럼 밖을 다 사용해버리고 난 다음과 귀와 눈이 멀어버린 마지막이 열매라고
여름을 읽고 베끼던 손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이 열매는 모좁니까 아니오 복삽니까 아니오 빛이 스쳐 간 결괍니다 손바닥을 펴면 진위가 궁금하지 않은 오종종한 말들이 검은 알약 같은 얼굴로 굴러다녔다 파악만 해도 되는 페이지에 붙잡혀 있었다
sharp #
레몬에게서 노랑을 멀리 떼어놓으면 레몬은 울겠지 마트에서 아주 명랑한 노랑 말고 조금만 밝은 레몬을 고른다 웃었는가 싶으면 울었는가 싶은 레몬을 데리고 집으로 간다 푸른 얼룩이 몽고반점처럼 남아서 쓸쓸해지려는 노랑을 흰 접시에 담아둔다 레몬을 달래려고 무채색 그림자가 어리는 걸 보여준다 아주 말고 그냥 조금 딱 한 조각만 웃어도 된다고 레몬의 귓불을 살짝 당겨 놓는다 상한 늑골 아래 시큼한 레몬즙을 똑 똑 떨어뜨리며 감정의 밸런스를 맞춘다 이 집에서 레몬은 절대로 생략하면 안 된다고 베갯잇에 레몬을 그려놓고 자면서도 웃는 연습을 한다 울다가 웃으면서 생긴 털을 뽑아낸다 레몬의 볼에 얽은 자국이 생긴다
ㅡ 계간 《가히》 2024년 가을호 ------------------------- 변희수 / 1963년 경남 밀양 출생. 2011년〈영남일보〉 신춘문예, 201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아무것도 아닌, 모든』 『거기서부터 사랑을 시작하겠습니다』 『시민의 기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