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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막상 황박사의 충격과 공포의 순간은 짧았다. 그것
이 살인자의 유일한, 그리고 마지막 자비이기도 했다.
황박사의 눈은 최후의 단말마적인 순간에서조차 뭔
가를 탐색하려고 애쓰는 듯이 보였다.
'누가 보낸 살인자인 걸까?"
하고......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아무튼 황박사의 무지개꿈이 포말처럼 스러지는 순
간이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하경의 공모자들에 대한 M의 첫
번째 사형집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편 난옥으로서는 황박사의 비참한 죽음을 알 길이
없었다. 그녀가 그녀의 방을 나선 것은 살인자가 황박
사의 방에서 물러난 다음이었다. 그녀는 다만 검은 코
트의 사내가 어두운 복도를 저만치 절뚝이며 사라지는
뒷모습만을 얼핏 보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저 사람 너무 불길하고 너무 음침해'라는 상
념만을 떠올렸었다.
황박사의 죽음의 소식은 여러 사람을 놀라게 했고
어리둥절하게 했다.
김강민은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도 마동권이 그의 동생을 죽인 사람들
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
다. 그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듣는 이야기였다. 빗겨지
나가기를 간절히 바랐던, 검은 운명의 손길이 그를 엄
습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동권이 어떻게 알 수가 있었을까?'
그들과 마동권을 잇는 인연의 고리는 모건의 죽음으
로 해서 단절된 것이다. 마동권으로서는 알래야 알 수
없다는 의혹이 꼬리를 물었다.
'이건 혹시 엄효진의 짓은 아닐까? 그 친구가 행여
마동권을 가장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현 시점에서의 그의 당면과제는 속리산에 내려가보
는 일이었다. 황박사의 시신도 인수해야 하고 장례도
치러야 했다. 그것은 이제 모두 그의 소임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수께끼도 풀릴는지 몰랐다.
한편 종로서의 범도일 경위는 현지서에서 보고를 받
았다.
그도 영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황박사의 죽음이 도대체 뜻밖인 것이다. 그의 죽음
자체도 뜻밖이었으나 그의 죽음의 방식이 범경위의 상
상을 뛰어넘었다.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그것도 범죄조직의 서울책 진웅을 저승으로 보낸 무
기와 동일한 무기인 부로우닝 하이파워도 사살된 것이
다.
모든 정황이 마동권에 의해 살해되었음을 입증하고
있었다.
황정빈 박사와 조직의 암살자 마동권!
범경위로서는 두 사람을 엮는 인과관계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범경위도 속리산을 향해 떠났다. 그는 현장에서 정
확한 정보를 얻고 싶었다. 그러나 현장에서도 그의 의
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유일한 현장의
증인은 룸 살롱 '왕족'의 얼굴마담 백난옥이었다.
"검은 코트의 사내가 줄곧 따라왔어요."
"......"
"검은 색안경을 끼었구요. 발도 절룩거렸어요."
"......"
"네, 물론 차로 따라왔어요. 차는 볼보였어요. 회색
빛깔의......"
"......"
"차 넘버는 정확하게 기억못해요. 다만 끝번호가
007로 끝나는 것만은 알아요. 네, 분명해요."
백난옥이 울먹이며 진술한 내용이었다. 몇 번 묻고
다그쳐도 그 이상은 밝히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발
견한 것이라고는 현장의 벽면에 남겨진 살인자의 서명
이었다. 빨간 사인펜으로 휘갈긴 듯 싶은데 그 색조는
선명하고 강렬했다.
그것은 바로 살인자의 이니셜 M이었다.
모든 사람이 아름다운 증인 백난옥에 매달리고 있을
때, 범경위는 김강민의 소매를 끌었다. 도 사람은 자연
스레 커피솝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 툭 터놓고 이야기합시다."
창가의 테이블에 마주 앉으며 범경위가 말했다.
"이 지경에 이르러 뭘 감춘다는 건 피차에 이로울
게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강민의 얼굴에 뭔가 결단하는 듯한 빛이 감돌았다.
그는 마동권을 상대하는 데 경찰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동권은 말하자면 1급 킬러인 것이다. 그것도 살아
서 이미 신화를 창조하고 있는 아스팔트의 도살자인
것이다.
그들 아마추어로서는 다루기가 벅찬 존재다. 그러나
프로를 끌어들여야 한다. 프로는 프로로 대적해야 할
것이다.
강민은 경찰에 어느 선까지는 털어놓으리라 작정했
다. 민하경과 공모해서 엄대진을 독살한 사실만을 감
추고 말이다.
그것은 무너져서는 안되는 그들의 최후의 '마지노선'
이었다. 경찰이 언젠가는 얼마만큼 진상에 다가설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후의 저지선만은 지켜야 했다.
강민은 범경위에게 그들이 마동권한테서 죽음의 카
드를 받은 사실에 대해서 우선 털어놓았다.
"죽음의 카드라구요?"
범경위가 미심쩍어 했다.
"스페이드의 퀸 있잖습니까, 죽음의 카드로 상징되
는......"
"흐음, 그래서요?"
"그 사람이 우리 모두에게 죽음을 선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요?"
"흐음."
"하필이면 마동권이 당신들한테......"
범경위로서는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었
다. 그는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이곳 속리산까지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김강민은 일순 침묵했다.
다만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 카락을 쓸어 올리고 있
었다. 그러나 이내 한숨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
다.
"자기 동생의 죽음에 우리가 책임이 있다고 보는 거
지요."
"당신들이 그의 동생의 죽음에 책임이 있습니까? 마
동림의 죽음에......"
"그럴리가요."
"그럼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요?"
"난 이렇게 봅니다."
잠시 미간을 모으며 고뇌에 찬 표정을 짓던 강민이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계산된 효과를 노리는 듯한 표
정이었다.
"누가 마동권을 가장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누가요?"
"엄효진!"
"엄효진?"
"전 황박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대뜸 이
죽음의 시나리오는 그 친구에 의해 만들어졌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흐음."
"그 친구가 이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경찰에서도 이
해하실 겁니다. 재산을 빼앗겼으니까요."
"......"
"민하경 씨와의 싸움에서 졌으니까요. 법적으로요."
"......"
"이제 그에게 남은 방법은 뭐죠?"
"살인 말입니까?"
범경위가 일순 빙긋했다.
"네에, 살인 말입니다."
김강민도 덩달아 빙긋했다.
"김강민씨, 그 사람이 그럴 수는 없어요."
범경위가 단언하듯이 말했다. 그는 물리칠 수 없는
확고한 자신을 그 얼굴에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건 왜죠?"
"황박사를 살해한 총기가 홍콩의 범죄조직이 즐겨
사용하는 부로우닝 하이파워라는 건 아시죠. 바로 진
웅을 살해한 무기와 동일하다는 사실을요. 엄효진이
조직의 암살자일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요......"
"말씀하세요."
"회색의 볼보가 마동권의 소유임이 밝혀졌어요."
"그런가요?"
"틀림없어요."
"그럼 이건 어떻게 된 거죠?"
"글쎄요......"
범경위는 말을 흐리며 탁자 위의 커피잔을 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커피가 차가웠다. 강민은 시름겨운 모
습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의 강민을
범경위는 지긋이 훑고 있었다.
이 잘생긴 사내가 정부와 짜고 그녀의 남편을 살해
한 걸까? 그리고 지금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걸
까?
"근데 죽음의 카드를 받은 사람이 누구누구라고 하
셨지요?"
잠시 후 범경위가 말문을 열었다.
"제가 받았고 민하경 씨가 받았습니다. 곽만길 씨에
윤세화씨두요. 물론 황박사도......"
"김강민씨, 당신 생각으로는 다음 표적은 누구라고
생각됩니까?"
"으음."
강민이 일순 무서운 신음소리를 토했다. 그가 처한
냉혹한 현실세계에 대한 새삼스러운 인식 때문인 듯했
다.
"그걸 알아야 우리가 대비할 수 있어요."
"글쎄올시다."
글세 과연 누구일까?
나라면 다음 표적으로 누굴 선택할까?
민하경만큼은 마지막 순간까지 남길 것이다. 충분히
고통을 주기 위해서다. 끝없이 불안에 떨게 하고 전율
을 맛보게 할 것이다. 그녀는 최후의 희생자로 희롱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김강민 그도 마지막 대결의 인물로 꼽을 수가 있다.
라스트 신에서의 마동권과의 총격전도 머리에 스쳤다.
그렇다면 이젠 결론이 나온다.
곽만길씨나 윤세화가 희생자로 선택될 공산이 크다.
특히 윤세화의 가능성이 높다. 얼마 전에 그녀는 평창
동 집을 떠났었다. 이제 그녀의 임무는 끝난 것이다.
엄대진을 간호하는 일도 또한 그를 독살하는 일도 말
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돈도 생겼으니 앞으로 즐거운
독신생활이라도 즐겨 볼 일이었다.
그런데 어디로 옮겼다고 했던가?
'아, 그래. 목동 아파트단지라고 했었지. 집도 장만했
으니 이제 남자도 고를테지."
윤세화는 아직도 홀로 지내는 처지였다.
일순 강민의 시야에, 어둠이 깔린 아파트의 숲을 거
닐고 있을 윤세화를 향해 마동권의 총구가 불을 뿜는
광경이 어른거렸다. 이윽고 강민이 말했다.
"다음 표적은 윤세화라고 봐야 합니다. 그 이유
는......"
강민은 마동권의 다음 표적이 윤세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범경위에게 설명했다.
"그럴 법하군요."
범경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려보이며 금세 동조
했다. 그거 범인이라고 해도 그런 순서를 밟을 것만
같았다.
"지금 벌판이라고 할까, 숲속을 혼자 배회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니 겨냥당하기엔 안성맞춤의 표적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때 강민의 머릿속에 잔인한 계략이 꿈틀거렸다.
윤세화를 희생양으로 삼자는......
윤세화를 미끼로 해서 마동권을 유인하는 것이다.
그는 필연적으로 그의 먹이에 다가서려 할 것이다.
그래, 덫을 놓자.
그리고 완전무장한 경찰로 하여금 덫을 지키게 하
자.
이 일엔 경찰의 힘들 빌려야 한다. 경찰도 기꺼이
참여할 것이다.
마동권에게 앉아서 고이 당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무슨 수를 써도 써야 한다. 아니면 미국에라도 줄행랑
치던가.
"어떻게요?"
범경위가 물었다.
"덫을 놓고 기다리는 거지요. 말하자면 윤세화가 사
는 아파트의 길목을 지키자는 얘깁니다."
"흐음."
"경비원을 가장하든가 판매원을 가장하든가 하세
요."
"그래서요."
"절름발이에다가 여러모로 특징이 있는 사람이니까
잘 감시하면 접근하는 걸 포착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
체포하든가 사살하든가 하는 거지요. 우린 인상착의를
알고 있다는 강점이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요."
"그는 반드시 접근할 겁니다. 설사 우리가 감시하고
있다는 걸 안대도 말입니다. 그는 자기자존심을 지킬
줄 아는 진정한 프로다운 프로니까요."
"으음."
"요는 경찰이 마동권과 대결할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의지도 있느냐 하는...... 왜냐하면
그는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프로페셔널한 암살자
니까요."
강민은 눈 앞의 젊은 경찰간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 같은 아니 도발하는 말을 했다. 그러나 범경위는
눈살을 찌푸르지도 않았고 발끈하지도 않았다. 덤덤한
표정 그대로였다.
"그건 염려마세요. 우리도 이래봬도 고도로 훈련된
시스템을 갖고 있으니까요. 장비도 좋구요. 저격수도
있습니다. 그 능력도 보통은 넘습니다. 저만해도 백 야
드 전방에 놓인 전구를 부수는 재간쯤은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 손으로 마동권을 잡을 수 있겠군
요."
강민은 애써 '우리'라는 말을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비록 모살자와 경찰관이라는 입장에서 마주앉아 있기
는 하나 그들은 동년배의 전향적인 자세의 이를테면
야심찬 청년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금세 죽이 맞을
수 있는 처지인 것이다.
"좋습니다. 우리 서울에 올라가서 다시 상의하도록
합시다."
범경위는 강민과의 회견을 끝내며 말했다.
"그러죠, 그럼......"
강민도 자리를 떴다.
민하경의 평창동 집.
저녁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강민과 하경은 거실
에서 마주앉아 있었다. 널찍한 거실에는 그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샹들리에를 밝히지 않은 거실은 어두
웠다.
그들은 불을 밝힐 엄두도 내지 못하고 숙의를 거듭
하고 있었다.
"강민씨, 내가 조직에 도움을 청했다는 말을 했던가
요? 홍콩의 조직에 말예요."
"조직에 도움을 청해?"
"우리가 중요한 거래선이라고 하는 걸 그들은 잊지
않고 있어요. 그것도 대단히 중요한 거래선이라는
걸...... 늘 도움이 필요하면 청하라고 했어요."
"흐음."
"그들은 나를 높이 사고 있어요. 나의 능력을요. 강
민씨, 아시죠?"
"알고 있소"
그래, 그들이 민하경의 능력을 높이 사는 건 사실이
다. 그녀의 미모와 함께.
엄대진이 살아 있을 때부터 그들은 민하경과 손잡고
싶어했다. 무서울이 만큼 비상한 능력을 속 깊이 간직
한 여자라는 걸 일찌감치 간파했던 것이다.
"강민씨, 이건 그들의 일이기도 해요. 그들도 마동권
의 죽음을 원하고 있어요. 그것도 막다르게요. 그들도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거든요."
"진웅의 죽음 때문이겠지."
"그들이 전문적인 살인지를 보낸다고 했어요. 그것
도 하나의 팀을 편성해서요."
"흠, 그것 한 번 대단하군."
"강민씨, 그들과 손잡고 행동하세요. 윤세화의 아파
트를 감시하는 일부터요."
"알겠소."
"우린 조직도 끌어들였고 경찰도 끌어들였어요. 그
러니 너무 염려마세요."
"흐음."
"그래도 이 싸움에서 우리가 진다면 그땐 별 수 없
는거 아니겠어요. 감수해야지요. 그게 우리 운명이라면
요."
언제나처럼 하경은 도전받을수록 그리고 적의 정체
가 분명해 질수록 강인해지는 것 같았다. 강민은 내심
크게 혀를 내둘렀다. 그런 그녀를 찬탄한다고나 할까
외경한다고나 할까.
범도일 경위는 서울에 올라와서 색다른 보고를 받았
다.
청평호수에서 건져낸 청룡문신의 모건이라는 이름의
사나이가 민하경의 전 남편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니, 뭐라구? 모건이 민하경의 전 남편이었다구?"
"네, 그렇답니다."
"으음, 뭔가 이제사 풀리는 것 같군."
"그렇습니까?"
범경위는 비로소 마동권과 민하경을 잇는 인연의 고
리를 찾아낸 듯한 느낌이었다.
마동권의 동생 마동림을 살해한 모건이 민하경의 전
남편이라면 마동권은 의당 민하경에게 눈길을 돌릴 것
이다.
그렇다면 민하경이 모건으로 하여금 마동림을 살해
케 한 걸까?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그때 퍼뜩 범경위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마동림을 위시한 세 명의 남녀가 앰블런스로 시신을
운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청평검문소의 검문
에도 걸렸었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그럼 그건 누구의 시신이란 말인가?
그때 갑자기 이 일련의 사건의 살인방정식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건 엄대진의 진짜 시신인지도 모른다는 해답이었
다. 그리고 그 시신이 청평호반 어딘가에 숨겨졌을 거
라는 해답이다.
그런데 지난번 수색에선 찾지를 못했다. 범경위 그
도 직접 현장에 가서 찾아봤었다. 집안팎도 샅샅이 살
폈고 천정에 지하실까지도 살폈었다.
아무 흔적도 없었다.
그렇다면 호수 속에 수장한 걸까? 아무튼 찾아봐야
한다.
그것이 엄대진의 시신이라면 아름다운 미망인을 교
수대 위에 세울 수가 있다.
그나저나 당면과제는 마동권을 잡는 일이다.
범경위는 일단 윤세화를 감시하는 일에 매달리기로
했다.
살인자 M으로 통하는 마동권을 생각하면 범경위 그
도 피가 끓어올랐다. 그는 그 자신이 도전받은 것처럼
몸을 떴었다.
목동지역이 그의 관할은 아니었으나 관할서와 협력
해서 마동권을 검거하라는 윗분의 내락도 떨어진 처지
다.
"범경위, 자네가 팀장이 되어 그 친구를 잡게나. 나
도 마동권의 얼굴이 보고 싶군. 그 전설적인 암살자의
얼굴이 말야. 그리고 함부로 총질하게 내버려 둘 순
없잖은가."
시경의 수사담당 부국장의 말이었다. 범경위는 일순
그개 재콜를 죽자꾸나 쫓던 파리 시경의 르베르 총경
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윤세화는 목동 13단지의 K동의 10층에 살고 있었는
데 어디에서나처럼 그곳도 회색의 콘크리트 숲을 이루
고 있었다.
신정경찰서에 임시 수사본부가 마련되었다.
형사 세 사람이 우선 아파트 경비원으로 가장해서 3
교대로 아파트 출입구를 지키기로 했다. 그리고 판매
원으로 가장한 형사들이 유동순찰을 했다. 그리고 마
침 마주보이는 건너편 아파트 10층에 비어 있는 방이
있어 그곳에서 김강민이 윤세화의 일거일동을 쌍안경
으로 감시하게 되었다. 홍콩에서 온 살인자들과 함께.
홍콩에선 세 명의 사나이가 파견되었다.
유가인(劉家仁)이라는 이름의 사내가 리더였다. 그는
지금까지 미주지역에서 활동했다고 했다.
40대 초반은 되었을까
어딘지 모르게 허무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는
데, 한눈에 그가 비정의 세계에서 살아온 냉혹한 살인
자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볼에 난 칼자국도 그의 스
산한 반생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그는 말이 없었다.
강민은 비로소 듬직한 사내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
다.
두 사람의 유가인의 부하는 새파랗게 젊은 친구들이
었는데 무엇이 무서운지조차 알지 못하는 듯했다. 맹
목적으로 치닫는 친구들처럼 보이는 것이다.
"우리한테 맡기시오. 이건 프로들이나 하는 일이오."
유가인은 조용해 애무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의 요원 두 사람을 아예 윤세화의 이웃집에
입주케했다.
그러니 근접 경호를 비롯해서 외곽경비에 이르기까
지 윤세화는 철통 같은 경비하게 놓였다고 할 수 있었
다.
이 이상 잘 될 수 없다고 생각될 만큼 철저한 경호
경비태세가 갖추어진 것이다.
윤세화는 현명하게도 그녀에게 닥친 상황을 잘 이해
했고 잘 수용했다.
"내가 팔딱거려 봤자예요."
그녀는 강민에게 말했었다.
"이것이 숙명이라면 받아들여야지요. 설사 죽음으로
마감한데두요."
"으음."
강민으로서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도 같은 처지
에 같은 운명인 것을.
"내가 위험부담도 없이 이 일에 뛰어들었겠어요. 그
렇담 너무 염치가 없는 거지요."
"......"
"강민씨, 나로선 어차피 한 번은 도박을 했어야 했
어요. 새로운 전기를 모색하자면요. 한 번이라도 비상
(飛翔)할 생각이었다면요."
"......"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막대한 돈을 손에 쥐었잖아
요. 새로운 인생도 설계할 수 있게 되었구요."
"......"
"그만한 대가는 치러야지요."
윤세화는 제법 달관한 듯이 말했다. 오히려 그녀가
강민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사실 그녀로서는 그녀의
숨막히는 상황에서의 탈출이 필요했으리라. 누구든지
자신의 동지에서의 비상을 꿈꾸는 것이다.
윤세화는 아침마다 창문에서 강민을 향해 손을 흔들
어 보였다.
밤새 별일이 없었다는 신호인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 사내가 그녀의 아파트에 드
나들고 있었다.
제법 멀끔한 중년이었다.
그 사내가 마동권이 아님은 분명했다. 아마 윤세화
가 그동안 숨겨놓았던 남자인 듯싶었다. 그걸 지금에
사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소리 소문 없이 밀
애하던 사내가 있었던가 보았다.
"어렵쇼!"
강민은 쌍안경으로 윤세화의 아파트를 감시하다가
신음이랄까, 찬탄이랄까 그런 소리를 냈다.
윤세화가 중년의 사내와 벌이는 진한 러브 신이 눈
에 들어온 것이다.
창문을 가려서는 안 된다는 엄명에 윤세화는 창문마
다 커튼을 활짝 젖혀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러브
신이 낱낱이 들어날 수밖에.
처음엔 입맞춤 정도를 나타내 보이더니 점차로 대담
한 신을 드러내 보였다. 윤세화는 심지어 노브라에 팬
티 차림의 나신마저 드러냈다. 그녀가 그토록 가슴이
풍만하리라고는 예전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
다.
그들이 어떤 코스를 밟아 베드 신을 벌이는지를 능
히 짐작케하는 그런 광경이 점철되어 부각되고는 했
다.
"눈요길 시켜주는군."
유가인이 그 실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우리의 수고에 대한 보답인가 보오."
강민도 장단을 맞추었다.
그나저나 윤세화는 대담했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
는 상황이어서일까, 하루하루를 한껏 즐기려는 자세가
완연했다. 사람이면 얼마간 지니기 마련인 관음증(觀
淫症)에 규시증(窺視症)을 그들 두 사람이 지녔다면
윤세화는 노출증을 지녔다고 볼 수 있었다.
이것도 일종의 정신질환이라고 했었다.
"아무려면 어떻소."
그렇게 팽팽한,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알 수 없는
긴장을 잉태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그 불길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소식은 엉뚱한 곳에서 날아왔다.
곽만길 씨가 김포공항을 탈출하려다가 어처구니없게
도 마동권의 총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었
다. 그 소식은 주말의 저녁 8시께에 전해졌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강민으로서는 그건 일단은 뜻밖의 소식이었다. 곽만
길 씨가 서울을 탈출하려 했다는 소식도 뜻밖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건 현명한 생각일는지 몰랐다. 마동권
의 총격을 죽치고 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을 것이었다.
나라고 한들 한 번쯤 서울 탈출을 생각해보지 않았
겠는가.
탈출의 시기도 적절했다.
지금 모든 사람의 시선이 윤세화에게 쏠려 있지 아
니한가.
곽씨의 결정은 모든 점에서 현명한 듯이 보였다. 그
러나 살인자가 보다 현명했다. 굳이 경찰이 철통같이
경비하는 표적을 겨냥할 건 또 뭐 있겠는가. 그나저나
마동권은 곽만길 씨가 극비리에 진행시킨 탈출계획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차! 이런 바보!"
유가인도 낮게 울부짖었다.
홍콩에서 파견된 1급킬러인 유가인도 부질없이 윤세
화를 감시하는데 시간을 보낸 실수를 깨닫는 듯이 보
였다. 그도 그녀의 진한 러브 신에 정신을 빼앗겼다고
할 수 있었다. 매사에 예비적인 조치를 취했어야했다.
그런 점에서는 신정경찰서에 위치한 범도일 경위의
경우도 같았다.
"이런 빌어먹을! 허를 찔렀군."
범경위도 그의 실수랄까, 오산이랄까를 뼈저리게 깨
달았다. 그는 또 누구보다도 분해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날아온 속보가 그들에게 얼마간
위안을 주었다. 아니 큰 기쁨을 주었다. 그것은 마동권
이 공항경비대의 포위망 속에 갇혀 있다는 소식이었
다. 원래 김포국제공항은 만약의 테러사태에 대비해서
적잖은 병력의 경비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브 머신으로 무장했을 뿐만 아니라 고도로
훈련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마동권은 그의 살인무대를 잘못 골랐다
고 할 수 있었다.
"좋았어!"
목동에서 김포공항까지는 사이렌이라도 울리고 달리
면 10분 내에 당도할 수 있는 거리다.
범경위는 그개 애용하는 군용 파카를 재빨리 걸쳤
다. 워커슈즈도 신었다. 경위 계급장이 부착된 작업모
도 눌러 썼다. 물론 38구경 리벌버로 챙겼다.
"자, 우리도 출동하자구."
범경위는 검은 짚차에 오르며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면 마동권의 얼굴을 볼 수가 있다.
과연 어떤 모습의 사내일까?
그의 사인은 그의 수중에도 경찰에도 없다. 다만 그
의 인상착의를 알 뿐이다. 검은 색안경에, 검은 캐시미
어의 코트를 걸친 사나이!
한쪽 발은 절룩인다고 했고, 늘 부로우닝 하이파워
를 사용한다고 했다.
진웅도 황박사도 부로우닝의 세례를 받았다. 아마
곽만길씨도 부로우닝 총구 앞에서 쓰러졌을 것이다.
어쨌거나 경찰사상 유례 없는 테러리스트와 겨루게
된다.
"자, 우리도 거길 가봅시다. 여기서 가깝다지요."
유가인도 자리를 떴다. 그도 몹시 허둥댔다. 아마도
그는 그의 손으로 마동권의 운명을 마감하고 싶은 듯
했다. 그도 필경은 국제사회에 이름난 1급킬러인 것이
다. 그의 자존심이 그를 허둥대게 했다.
"네, 10분이면 달려갈 수 있을겁니다. 가까우니까
요."
강민도 경황이 없었다. 그는 내심 30분은 족히 걸리
겠지 하고 생각했다.
"우리 아이들한테 좀 연락해주시오. 이 아래 주차장
으로 집결하라고 말이요. 어서요."
유가인은 윤세화의 아파트에 침투시킨 그의 수하들
을 데리고가려 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하리다."
"잠깐!"
유가인은 방을 나서려다 말고 돌아섰다.
"김강민씨! 당신은 이곳에 남으시오. 만일을 대비해
서......"
"알겠소"
"그럼, 좋은 소식이나 기다리시오."
그렇게 유가인도 움직였고 범경위도 움직였다. 가히
질풍처럼 움직였다고 할까.
현장에 당도한 그들은 더욱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마동권이 공항터미널 건물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었다.
범경위를 맞는 사람은 주말의 경비책임자로 보이는
그와는 같은 계급의, 전투복차림의 경찰관이었다.
그의 이름은 최강일(崔剛一).
건강한 체구의, 그러면서 날렵한 느낌을 주는 인물
이었다.
"아마 청사 내의 어느 사무실 속에라도 숨었을 거
요. 아니면 주방이나 화장실 속에라도...... 숨을 곳이
워낙 많아서 걱정이요."
최경위가 말했다. 굵직하나 억양이라고는 없는 목소
리였다.
"아무려면 어떻소. 시간은 우리 편인걸. 차근차근 뒤
집시다. 병력도 충분하겠다......"
범경위가 의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의 지휘권
은 범경위에게 있는 듯이 보였다.
"그나저나 일반 손님들은 어떻게 하겠소."
범경위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로비 저편에 스
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경찰 보호하에 몰려 있었다.
그런데 모두가 성년의 남자들뿐이었다.
"1차로 부녀자들은 돌려보냈소. 물론 아이들하구요.
그리고 노인네들도......"
"흐음."
"2차로 외국인을 돌려보냈소. 여권을 지닌......"
"잘 하셨소."
"3차로 돌려보낸 사람은 오늘 입국자 명단에 기재된
여행자들이요. 이제 남은 사람들은 저 사람들뿐이오.
저 사람들도 알고보니 모두 신분이 확실한 사람들이
오. 그들 속에 마동권은 없을 거요."
"그럼, 우리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요?"
범경위는 공항에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을 걸어보
게 하고 뛰어보게도 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절룩이
는 사람은 없었다. 범경위는 그들 모두를 석방했다. 아
니 돌려보냈다.
"자, 이제 뒤지도록 하세."
"그럽시다."
"여간 보통내기가 아니오. 말하자면 제콜 갈은 사내
요. 공연히 생포할 생각은 않는 게 쫓을거요."
"알겠소."
그들은 그들의 서브 머신을 둘러멨다. 그러나 그들
은 알지 못했다. 살인자가 이미 탈출한 것을. 그는 도
아께 가쓰미라는 일본인 이름의 일본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곽만길 씨가 2월 초순의 주말의 오후에 김포공항에
도착한 것은 저녁 6시께였다. 그는 밤 비행기로 서울
을 뜨려 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살인자 M에게 협력하고 있었다.
그는 그 자신만큼은 비록 죽음의 카드라고 할 스페이
드의 퀸을 받았다고 해도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
다. 그리고 그런 언질도 있었다.
"당신은 나의 평생 친구요."
살인자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나 필경은 M에게 살해될런지도 모른다는 의혹
이 고개를 들었다.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없애는 것이
범죄사회의 법칙이다.
곽만길씨는 서울 탈출을 극비리에 추진시켰었다. 나
찌의 아이히만처럼 남미에라도 가서 몸을 숨기리라 다
짐했다. 그는 그의 탈출계획을 아무도 알지 못할 거라
고 생각했다. 어벙하게만 보이는 그가 실상 가장 현명
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공항에 살인자가 모습을 나타냈을 때는 질겁
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검은색 안경에 검은 코트 차림
이었다. 그리고 발을 절룩이며 다가왔다.
"어딜 가려는 게요?"
그는 어금니를 물고 웃고 있었다.
"아무도 서울을 벗어날 수는 없을 텐데......"
그는 조롱하듯이 말했다.
"여보시오, 난 다만 잠시......"
"이건 나에 대한 배신이오."
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배신?"
"난 배신자에 대해 늘 이렇게 대접해 왔소."
그는 애무하듯이 말했다.
그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호
주머니에서 무기를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그가 애용하
는 구경 9밀리의 자동 권총 부로우닝 하이파워를.
곽씨는 그러나 일단은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득실거려서다. 더구나 서브 머신을
옆에 낀 공항경비대원들이 그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어
서다.
그러나 살인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었다. 그
는 화려하게 펼쳐보일 심산인 듯했다.
사람들은 총성도 들었고 곽만길씨가 피를 흘리며 쓰
러지는 것도 보았다. 주말의 살육에 모두가 비명을 질
렀고 우왕좌왕 했다.
그 혼란을 살인자는 이용하려 한 듯했다. 그래서 과
장스레 연출한 것 같았다.
두 경위가 이끄는 공항경비대가 밤새 수색을 끝내고
발견한 것이라고는 그 특색 있는 색안경과 코트뿐이었
다.
"빌어먹을! 깨끗하게 벗어났군 그래."
그들의 울분 속에 감추어진 심리는 살인자 M의 초
능력에 가까운 행동반경에 대한 외경스러움이다.
한편 김강민은 모두가 떠난 빈 자리에서 쌍안경을
통해 건너편 아파트의 윤세화의 동태를 감시했다.
그녀의 아파트는 거실의 스탠드만을 밝혀놓고 있었
고, 그녀는 창가에 서 있었다. 그녀는 쌍안경 렌즈의
반짝임을 보고 강민이 그녀를 바라보는 사실을 아는
듯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오늘따
라 희미한 플로어 스탠드 불빛 속에 아련히 서 있는
그녀는 한결 쓸쓸해 보였고 희미해 보였다.
하얀 나이트 드레스 위에 길게 흘러내린 그녀의 검
은 머리카락에도 적막감이 깃들어 있어 보였다. 그녀
도 좌절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얼굴은 그만하면
반반했고 생활력도 있었다. 그런데 사내들은 그녀 곁
에 오래 머물지를 않았다.
그것이 그녀를 화나게 했다.
아무튼 그녀에게 새로운 전기가 필요했었다.
강민은 언제부터인가 윤세화가 완벽하게 무방비상태
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그녀의 중년의 연인이라도 이럴 때 다녀갔음 얼마나
좋을까.
윤세화는 창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피워문
담배불만이 유난히 어둠 속에서 빨갛게 타올랐다. 강
민도 창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강민의 일종의 텔레파시를 통해 그녀와 대화를 나누
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외토리요. 끝내는 우린 언제나 홀로요.'
강민이 일순 감상적인 생각이 사로잡혀 있을 때 윤
세화가 창가에서 사라졌다. 연기처럼 사라졌다는 표현
이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홀연히 사라진 것이
다.
누가 찾아오기라도 한 걸까?
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한 그녀의 연인이라도 말이다.
윤세화가 이윽고 그 모습을 다시 나타냈다. 그리고
그녀를 따르는 검은 실루엣도 보였다.
'그래, 알맞게 나타나 주었군.'
그러나 그녀의 연인은 아닌 듯 싶었다.
윤세화가 침입자한테서 멀어지려는 동작도 언뜻 눈
에 띄었다.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있
었다. 그것은 줄행랑치는 것보다 더 필사적인 행동으
로 비쳤다.
그러나 물러나봤자였다.
그녀가 이윽고 당도한 곳은 거실 창문께였다. 아니
테라스 창문께였다. 그곳이 그녀의 한계였다.
거실의 검은 실루엣도 점차 뚜렸한 모습으로 부각되
어 다가왔다.
그렇다. 윤세화가 살인자와 마주 서 있는 것이다. 그
것도 비정하기 이를 데 없는 살인자 M하고 마주 선
것이다.
'구원의 길은 없는 걸까?'
지금 이 순간 강민, 그로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뛰어내리라구! 뛰어내려!'
그래봤자 목숨은 보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강민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부짖었다.
일순 윤세화가 테라스의 유리창문에 거미처럼 납작
하게 달라붙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순
간 창문의 대형 유리가 산산히 부서지고 있었다. 그
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불링장에서 핀들이 볼에
정통으로 맞아 쓰러지며 내는 파괴음과도 같은 소리로
들렸다. 여느 때 같으면 시원했으리라.
대형 유리의 파편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는 광경
도 보였다. 10층에서 콘크리트의 지상으로. 물론 하얀
나이트 드레스를 걸친 윤세화의 몸뚱이와 함께. 그것
은 상처입은 한 마리 비둘기가 푸득이며 지상에 떨어
지는 모습과 흡사했다.
강민은 그 모든 광경을 쌍안경을 통해 미친 듯이 지
켜보았다. 그것은 모두가 슬로우 모션의 영상처럼 그
의 망막에 극명하게 새겨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민이 보다 빨리 본 것은 섬광이었다.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섬광이었다. 아마도 침입자의 무기가
윤세화를 향해 불을 뿜은 듯했다. 역시 일종의 환청일
테지만 강민은 총소리도 들었다고 생각했고 윤세화를
길게 꼬리를 무는 비명도 들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찰나적인 한순간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오, 이런 일이 있나!"
강민은 심한 허탈감을 느꼈고 상실감을 느꼈다. 그
는 맥없이 허물어지려는 자신을 간신히 지탱했다.
잠시 후 창가에 한 사나이의 모습이, 아니 도살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부서진 창문을 통해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건너편 아파트에서 감시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을 아는 듯했다.
거실의 스탠드 불빛이 그를 부각시키고는 있었으나
음영이 짙은 그의 영상은 분명치가 않았다. 다만 그가
권총을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가 이쪽을 지긋이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했
다.
강민은 살인자가 김포공항에서의 살육을 끝내자 재
빨리 이곳으로 달려와서는 윤세화를 저격한 사실을 알
게 되었다. 이곳을 일시에 무방비상태로 만들어 놓고
말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사실은 살인자가 밀리터리
룩의 파카를, 말하자면 군용의 야전파카를 걸치고 있
다는 사실이었다. 여느 때의 검은 코트 차림이 아니었
다.
어쨌거나 그는 하룻밤 사이에 두 사람을 살해한 것
이다. 그것도 경찰이 출동하고 있는 삼엄한 상황에서
다.
'다음은 자네 차례라구!'
'......'
'마지막 차례는 자네 여자구 말씀이야!'
'......'
건너편 창가의 사내는 이편을 향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강민은 창가에서 천천히 벗어났다. 그리고 커튼을
내렸다. 그는 이제 민하경과 그 자신만이 M의 손에
남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청평호반의 빨간 벽돌집.
그곳에 마련된 풀장에 담겼던 물은 일단 얼어붙긴
했으나 얼마 안 가서 녹아버렸다. 올해의 이상난동 현
상 탓이었다. 그 녹아버린 물로 며칠 후 증발해 버렸
다. 관을 덮었던 가랑잎도 바람에 휘날렸다. 그래서 엄
대진의 철제관은 풀장 바닥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누구든지 호반의 별장에 한발 들어놓으면 댕그마니
그 모습을 드러낸 철제관을 한눈에 발견할 수 있을 것
이었다. 말하자면 봄을 기다리지 않고 엄대진의 철제
관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니 민하경과 김강민
의 운명은 풍전등화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청평호반을 향해 야전파카 차림의 범도일 경위가
검은 짚차를 몰고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지나간 일에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곽만길씨의 죽음도, 윤세화
의 죽음도 막상 그에겐 큰 충격이었다. 그들의 죽음
자체보다도 그들의 죽음을 집행한 M의 냉혹하기도 빈
틈없는 솜씨에 충격을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금세 모든 것을 훨훨 떨쳤다.
그는 청평호반의 별장에서 이 일련의 사건의 수수께
끼에 대한 참다운 해답을 얻으려 했다.
'그게 혹시 엄대진의 진짜 시신은 아닐까?'
앰블런스로 운반되었다는 철제관이 늘 그의 신경에
와 닿았다.
세 명의 남녀에 의해 운반되었다고 했던가.
그들은 공교롭게도 엄대진의 발인의 날에 운구했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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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가
늘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즐독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