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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8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 : 1열왕 5,1-15ㄷ
복 음 : 루카 4,24ㄴ-30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잔 루이즈 칼망(Jeanne Louise Calment)은 1875년 2월 21일에 태어나
122세였던 1997년 8월 4일에 사망했습니다.
장수하셨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장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녀는 85세부터 펜싱을 시작했고, 110세까지 자전거를 탔다고 합니다.
이렇게 운동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녀는 21세부터 117세까지 흡연을 했다는 것입니다.
담배가 몸에 아주 안 좋다고 하지만, 그녀는 100년 가까이 담배를 피우면서도
영화배우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아주 열정적으로 사셨습니다.
단순히 오래만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중 최고령 생존자였던 리처드 오버틴은 112세까지 사셨습니다.
그에게 장수비결을 묻자, 담배(하루 10개피)와 위스키
그리고 커피(설탕 세 스푼을 넣은 커피)를 말했습니다. 모두 건강하고는 거리가 있는 조건입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음을 깨닫습니다.
따라서 미래에 대해서 미리 단정하는 삶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열정적으로 그리고 힘차게 살아가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이 거룩한 예언자나
아주 비범한 인물에게서 이루어지리라고 믿었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 기준에 예수님을 놓고 보니,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목수인 요셉의 아들로 어렸을 때부터 쭉 봐 왔지만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그릇된 확신을 깨버리십니다.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에게만 갔고, 엘리사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쳐 주셨다고 하십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맞아들이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자기 생각에 갇혀서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세상의 관습에 얽매여서는 주님이 옆에 계심에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주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열린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늘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열린 마음을 갖고 열정적으로 지금을 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시면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루카 4,29)
이는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으실 배척을 예고해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성문 밖으로 내몰리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밖으로 당신 구원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예시해줍니다.
곧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이게 될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미리 가리켜줍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실로 당신은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그러기에,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고집할 때,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은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를 믿음에로의 초대입니다.
주님! 오늘 제가 결코 당신을 배척하지 않게 하소서!
저에게서 결코 당신을 배척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제 형제를 배척하는 바람에 당신을 배척해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주님!
원하시어 붙잡히시고 원하시어 빠져나가신 당신께서는
원하시어 고난을 받으시고 원하시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벼랑에 내몰려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셔야 할 길을
유유히 가시는 당신을 따라 유유히 걷게 하소서.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저도 원하게 하시고,
당신이 원하시면 저도 따라 걷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한국에서 교포사목으로 오신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10개월 정도 늦게 미국에 도착했습니다.
조금 먼저 온 선배로서 환영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영화대사 중에 ‘살아있네’라는 말이 기억납니다.
신부님은 눈빛이 살아 있었습니다. 마치 물을 만나 물고기 같았습니다.
거침이 없었고, 걱정도 없었습니다.
혼자서 요리도 잘 하고, 본당을 소개하면서 앞으로의 계획도 이야기하였습니다.
신부님과 대화를 하면서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신부님은 예전에 호주에서 5년 동안 현지인들을 위한 사목을 하였다고 합니다.
영어에 어려움이 없었고, 외국 생활에서의 적응에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예전에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준비된 교포사목 신부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부님과 신부님께서 함께 하실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저도 16년 전에 캐나다에서 3년 지냈었습니다. 그 경험이 미국에서의 생활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캐나다의 제도와 문화는 미국과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교포사목 신부님들은 준비가 덜 되었어도
주교님의 인사이동에 따라서 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파리 외방선교회 신부님들도 조선에 대한 지식이 없었지만 먼 길을 기꺼이 떠나올 수 있었습니다.
외모가 달랐고, 언어가 달랐지만 신부님들은 열정적으로 사목하였고, 순교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비록 말이 서툴러도, 문화의 차이가 있어도, 음식이 맞지 않아도
대부분의 교포사목 신부님들은 잘 적응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파리외방 전교회 신부님들이 그랬듯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맡기는 것입니다.
토비야가 맡겨진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천사 라파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협조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겸손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경청하면 엉킨 매듭이 하나둘 풀리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어 주셨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십자가의 무게를 견길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갈등과 분란은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을 믿지 않았습니다.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선행을 베풀었던 사렙타의 과부는 기근 중에서도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겸손했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나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사순시기입니다.
신앙의 길도 멀고 험난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 감사드리며, 기뻐하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그 길을 충실하게 걷다보면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느끼며, 세상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감동과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희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 30)
한상우 바오로 신부
비난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선입견이 만들어 놓은
아픈 우리의 현실이다.
지나친 과신은
언제나 금물이다.
나의
시각과 관점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선입견은
더더욱
소중한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드는
걸림돌이 된다.
우리를
겸손으로 초대하시며
새 길을 여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진실을 가리는
선입견의 꺼풀을
벗겨내신다.
남의 삶에
소금을 뿌리는
삶이 아닌
축복하는
기도의 삶이 되게 한다.
선입견은
또 다른
폭력이다.
구원의 역사는
편견이
만들어가는
역사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만들어가는
가능성의 역사이다.
중요한 것은
출신배경이
아닌
건강한 삶의 방식이다.
너무나 많은
비판과 비난
험담과 왜곡의
피곤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사순시기는
과감하게
삶의 방식을
바꾸는 시간이다.
십자가의 겉모습이
아닌
십자가의 마음을
만나는 것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는
선입견을 가로질러
복음이 필요한 이들을
향해 떠나가신다.
미움 받을 용기는 소속감에서 나온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실 뻔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당시는 가문과 동향인들의 공동체가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가족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미움에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단한 ‘홀로서기의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홀로서기의 힘’이란 무엇일까요?
어른으로서 세상 어떤 힘에도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나아가는 힘입니다.
나를 돈으로 유혹해도 내 가치관과 맞지 않으면 흔들리지 않고,
나를 명예나 인기, 혹은 애정으로 유혹해도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힘입니다.
이 홀로서기의 힘이 부족한 사람들은 어떤 것에든 집착합니다.
자신이 휘청거리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 휘청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사람들을 등쳐먹는 사기꾼들도 많이 생깁니다.
찰스 폰지는 최초 다단계 금융사기 발명가입니다.
처음엔 자신도 이것이 먹힐 줄 알았습니다.
그는 ‘45일 안에 50%, 90일 안에 100%’의 수익을
무조건 올릴 수 있는 투자를 사람들에게 제안하였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통용되는 국제반신우표권(IRC)이라는 것을 사서
통화가치가 높은 미국에서 팔면 무려 300%나 높은 수익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투자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문제는 미국에서 그렇게 많이 수입된 IRC가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IRC를 팔 수 없게 되자 새로운 투자자들의 돈을
이미 투자한 사람들에게 갚는 식으로 더 투자자들을 늘렸습니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투자자들이 더 많이 늘어나라는 법도 없습니다.
투자자들이 줄어들자 기존 투자자들에게 이익을 지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사기극으로 인해 8개월 동안 5개의 은행이 파산했고,
나라가 휘청거릴 정도의 액수의 돈이 증발해버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4~2008년까지 조희팔 씨가 전국에 10여 개의 피라미드 업체를 차리고
의료기기 대여업으로 30~40%의 고수익을 보장한다고 속여서 3만여 명의 투자자를 모았고
4조 원을 가로챈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로 남는 것은 고통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홀로 설 줄 모르고 세상 것에 집착하고 휘둘리는 이유는
홀로 설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게 만들어줄 가족과 같은 공동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홀로 설 힘은 가족공동체의 소속감에서만 나옵니다.
아이들이 어디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부모와 형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하기에 아이들은 세상 유혹에 혹하는 일이 없습니다.
부모와 형제라는 공동체가 아이들이 세상에서 홀로 설 수 있게 만드는 근원적 힘입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의 격리 원숭이 실험에서
새끼 원숭이가 젖을 주는 철사로 된 엄마보다 젖은 주지 않아도 따듯함을 주는
수건으로 감긴 것을 엄마 원숭이로 인식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는 원숭이는 살아갈 힘을 먹는 것보다 소속감에서 더 얻으려 한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원숭이가 그렇다면 사람은 더 그러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부모님이 주는 힘, 가족이 주는 힘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춘기가 되면 부모보다도 친구 공동체에 더 속하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고,
결혼하면 자신이 만든 가족을 위해 부모를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배우자에게 이용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교회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소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에너지를 받을 수 있어야
세상 어떤 애정에도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이 공동체는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힘을 줍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공동체는 그런 힘을 주는데 지쳐있는 모습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신천지에 빠질 뻔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기 어렵고 적응하기 힘들 때 교회공동체는 어떠한 힘도 주지 못했습니다.
병이 들고 힘들어도 관심을 두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2~3년 동안 자신이 신천지인지 밝히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따듯하게 말해주는 상담 선생님에게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다른 친구들도 소개해 주며 힘을 주었습니다.
세상 어떤 공동체에서도 힘을 얻지 못할 때 따듯함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니 보통사람 같으면 어떻게 그 집단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삶의 힘은 사랑의 공동체에서 나옵니다.
물론 위 자매는 신천지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가톨릭에서 힘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신천지인 것을 알게 된 이후로 그들과의 관계를 끊은 것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신천지에 가지 말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람들을 이끄는 모습에서도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소공동체’라는 좋은 제도가 있지만 실상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소공동체가 가족공동체의 모습을 띠어야 소속감과 홀로 설 힘,
더 나아가 미움 받을 힘을 줄 수 있는데 지금의 소공동체는 그런 모습을 많이 잃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한 번 봅시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4-47)
이 모습이 하느님을 부모로 둔 교회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이상입니다.
이처럼 완전한 믿음을 가질 수는 없을지라도 교회 안에서 가족이라는 따듯함을 느낄 수 없다면
성당에 나오더라도 여전히 세상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소속감이 큰 것과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것은 비례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성령, 그리고 사도단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당신 모든 것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 공동체의 힘으로 동향인들이 당신을 다 미워해도 당당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살아갈 힘은 바로 가족공동체의 소속감에서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족은 다 내어놓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본당 공동체에 십일조를 하는 것을 넘어서서
소공동체도 서로 가족과 같은 따듯함을 줄 수 있는 나눔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복음 묵상 나누기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그 실천이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오는 힘이 없이는 교회도 힘을 잃고 그러면 응집력이 약해져
성당에 나오는 숫자도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코로나 시기가 교회공동체의 쇄신을 추구하는데 매우 적합한 시기일 수도 있습니다.
본래 성찬(하느님과 하나 됨)과 만찬(형제들 간의 친교)은 하나였습니다.
사이비에 빠지지 말라고 할 것만이 아니라 우리는 신천지에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할
따듯한 공동체가 준비되어 있는가를 되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