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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애가 1:17~24
17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18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19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20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21 길보아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니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같이 됨이로다
22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23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24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요나단을 기념하는 다윗 1:25~27
25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26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27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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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다윗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요나단을 애도합니다.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고 한 이 노래는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광,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한 두 용사가 산 위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사랑함이 여인의 사랑보다 더했던 요나단 때문에 애통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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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애가 1:17~24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위한 애가를 부릅니다. ‘야살의 책’(18절)은 영웅들의 업적을 기리는 고대 서사시를 담은 책으로, 여호수아서에도 언급됩니다(수 10:13). 히브리어로 ‘야샤르’는 ‘고결한’ 혹은 ‘노래하다’라는 뜻입니다. ‘오호라’(히, 에크)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란 의미로, 애가에 자주 나오는 감탄사입니다(19, 25, 27절). 비록 사울이 실정을 하고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왕으로서 블레셋에 맞서 이스라엘을 지키다 죽었기에 다윗은 그를 영웅으로 평가해 ‘두 용사’가 죽었다는 말을 반복합니다(19, 21, 25, 27절).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한 용사였다고 칭송합니다. 또 사울 덕에 이스라엘이 풍요를 누렸다며 그의 업적을 높게 평가합니다.
● 더 깊은 묵상
다윗은 애가에서 사울을 어떤 인물로 평했나요?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나는 그 사람을 진심으로 칭찬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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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을 기념하는 다윗 1:25~27
다윗은 요나단을 특별히 더 추모합니다. 애가의 제목인 ‘활 노래’에서 ‘활’은 요나단을 상징합니다. 사울에 대한 복잡미묘한 마음과는 달리 요나단에 대한 다윗의 마음은 심장을 쥐어짜는 듯 슬픕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26절)라는 말은 ‘당신은 나에게 기쁨입니다.’ 혹은 ‘당신은 나에게 매우 소중합니다.’라는 의미로, 자신도 요나단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의 사랑이 기이하고 여인의 사랑보다 더한 이유는 정적일 수도 있는 자신을 사울의 손에서 구해 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 진심으로 슬퍼하며 마지막 예의를 다합니다.
● 더 깊은 묵상
다윗이 요나단의 죽음을 더욱 슬퍼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게 진정한 사랑을 가르쳐 준 이의 죽음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가요?
한절묵상:사무엘하 1장 18절
살아생전 사울은 다윗에게 원수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사울의 죽음 앞에서 다윗을 그를 기리는 슬픈 노래를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고 명합니다. 사울의 죽음을 공동체의 슬픔으로 확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몸을 이루는 성도 개개인의 슬픔은 그만의 문제일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한 사람'의 슬픔에 주목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슬픔에 함께 아파하는 성도는 공동체를 사랑과 회복으로 선한 영향력 발휘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종인 되는 관건은 한 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크고 위한지 깨달았는가에 있다_옥한흠
오늘의 기도
하나님! 다른 사람의 실패를 제 성공처럼 여기고, 그들의 슬픔을 입술로만 위로했던 제 완악함을 회개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따지기보다 하나님이 그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시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하소서.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주님의 그 마음을 닮아 가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540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하나님은 진한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뒤로하고, 새롭게 회복되고,
새롭게 도모하실 놀라운 인생을 꿈꾸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진한 안타까움과 아쉬움에 너무 천착하지 말고, 새롭게 시작될 인생,
새롭게 도모하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자
우리가 지탱해 왔던 과거의 일들을 새롭게 만들어갈 미래를 위한
토대와 동력으로 삼아 더욱 더 새로운 모습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하자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인생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우리를 통해 새롭게 도모하시고, 새롭게 만들어 가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자
애가의 제목을 "활"이라 한 것은 요나단과 사울이 활 잘 쏘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고,
요나단이 다윗에게 도망하라고 알려줄 때 활을 사용했고,
사울이 적의 화살에 피격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슬픈 노래를 지어 조상함
애도를 권면
패배한 이유와 각성
개인적인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의 관점에서 깊이 애도함
자신을 끊임없이 죽이려 시도한 사울을 관대한 마음으로 추억함
다윗의 깊은 슬픔이 주는 교훈
1) 자신에게는 잘못했지만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2) 요나단과 다윗 자신은 절친한 친구였다.
3) 잘못된 왕의 죽음이어도 그것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위기를 의미했다.
4) 그들의 죽음은 블레셋에 대한 이스라엘의 굴욕적인 패배를 뜻했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인의 자세 롬12:9~21)
롬12: 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공감능력의 상실(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말세의성품 자기만을 사랑)
다윗이 왜 왕이 되어야 했는가 ?
섬기라고 (신정국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라)
이렇게 훈련을 시키시는 하나님의 의도
세상의기준,관점으로 보지말고
하나님의 관점,기준,마음,시선으로 보라~~
마 5:44: 없는 것,용서할수없는 것을 사랑하라~~
우리역시 은혜,축복의통로 하나님이 부르심
빌2: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선한사마리아인 10:25~37
17,18절 다윗은 직접 애가를 지어 모든 유다 족속에게 가르칠 것을 명합니다. 다윗이 먼저 공동체 입장에서 애도를 독려했기에 백성은 유력한 차기 왕인 그를 의식하지 않고 슬픔에 동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진영이나 국경을 초월하여 참된 애도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애도는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를 위한 것입니다. 눈물도 분노도 억누른다고 잠잠해지진 않습니다. 애가는 상실을 경험한 자들에게 또 다른 치유의 과정이자 앞으로의 삶을 위한 성찰의 시간입니다.
19~25절 다윗은 애가를 통해 사울과 요나단을 진심으로 칭송합니다. 애가 어디에도 사울의 허물과 약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전장에서 누구보다도 강한 용사이고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한날에 두 용사를 한꺼번에 잃은 것은 국가적인 슬픔이고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은 두 용사의 죽음이 블레셋의 비방거리가 되지 않길 원하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를 담아 애도를 표현합니다. 나도 내 감정과 이해관계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상대를 평가합니까?
26절 요나단은 다윗에게 각별한 존재입니다. 가장 힘든 시기에 요나단이 보여준 믿음과 지지는 다윗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요나단이 사울의 아들이어도, 그가 왕위 서열 이인자여도 둘 간의 우정은 변치 않았습니다. 경쟁만이 살길인 양 몰고 가는 세상에서 경계를 허물고 어깨동무할 수 있는 관계가 있습니까? 또 교회 안에서 나의 교우 관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17~18절).
아말렉 청년을 통해 사울과 요나단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은 다윗은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여 조가를 지었습니다(17절). 그리고 부끄럽고 슬픈 일이긴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후손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18절).
사울 왕과 이스라엘의 죽음은 결국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입니다. 무지한 믿음, 잘못된 믿음이 성도들을 영적으로 메마르게 하고 삶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큰 혼란 속으로 빠져들 수 있음 또한 말씀을 통해서 경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며 간과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 말씀을 통해 잘 배우고, 잘 가르쳐야 합니다. 익히 알고 있는 것도 행하지 않고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기억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반복해서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19~21절).
다윗은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을 이스라엘의 영광이 무너지는 것으로 행각하고 깊은 애도를 표(19절)하며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19젏)라며 깊은 애도를 표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다윗은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기뻐할 것을 염려해서 가드와 아스글론에 전하지 말라고 합니다(20절).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길보아 산에 이슬과 비가 내리 않을 것이라고 저주합니다. 즉,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그 땅에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21절). 이는 곧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렸던 영광을 잃어버린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공동체는 더 이상 교회로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은 과거에 힘 있는 용사요, 민족적인 영웅이었으나, 이제 그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참으로 인생의 무상함과 권력의 허무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으니 참으로 주의 날과 같지 않습니다(욥 10:5;시 103:1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리면 온전한 믿음 안에서의 삶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주님의 뜻을 헤아리면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경외하여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22~27절).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이 지금은 영광을 잃어버려 슬프지만, 과거에 대단히 용맹스럽고 날쌘 자들이어서 대적에게 칼을 휘두르거나 활을 쏘면 반드시 승리를 얻었다라고 말합니다(22,23절). 뿐만 아니라 사울과 요나단은 살아 있는 동안에 아버지와 아들로서도 서로 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들이었다고 말합니다(23절). 이스라엘에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었던 사울을 애도하며 슬피 울라 합니다(24절). 나아가 다윗은 자신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요나단의 죽음을 따로 애도하는 각별함을 보입니다(26~27절).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하는 교회 공동체는 세상이나 악한 영이 삼키거나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움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러한 교회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 평강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더욱더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성도들이 한 몸을 이루는 사랑과, 서로를 향한 희생과 섬김을 통해 행복이 넘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나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누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 속으로 흘려보내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마음을 아프게 했던 과거의 그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잘 살피고, 가르쳐서 삶을 돌아보는 디딤돌로 삼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경외하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므로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17,18절 :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슬픔을 가르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이 온 이스라엘이 함께 슬퍼해야 할 사건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슬픔을 억누르지 않고, 도리어 애가를 가르쳐서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며 백성의 슬픔까지 통제하려는 옹졸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19-25절 :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공동체의 입장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무고한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울을 하나님이 벌하실 것을 알고 있었으며(삼상 26:10), 사울의 손에서 놓여나는 것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해했습니다(삼하 22:23).
그렇지만 그는 사울의 죽음을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지 않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입장에서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울과 요나단은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강하고 용맹한 전사였으며, 전리품을 나눠 주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번영과 안정을 안겨 준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사울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영광이 스러진 비극이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에게 패한 국치 (國恥)의 사건이며, 기근과 다를 바 없는 재앙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사람으로서 다윗은 개인의 감정을 뛰어넘어 이스라엘 백성의 슬픔과 상실감을 헤아리고, 그 슬픔에 공감했습니다.
26,27절 :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사랑하고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의 슬픔을 헤아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자신이 누구보다 슬펐기 때문입니다. 여인과의 사랑보다 뛰어난 사랑과 우정을 나눈 요나단, 친형들보다 더 친밀하고 가까웠던 요나단의 죽음은 다윗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이고 아픔이었습니다. 공동체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먼저 자기 자신이 진정한 사랑과 우정을 나눌 줄 알아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을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까운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어야 공동체의 마음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다윗은 나라만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원수일지언정 나라의 왕인 사울이 죽은 것이 나라의 큰 손실이요 위기라고 보았기에 큰 슬픔으로 애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넬이 죽었을 때도 애가를 지었던 것이고, 이스라엘 나라 전체에 애도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삼하1:19~24) 왜냐하면 나라가 있고 개인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앞세우기 원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그러므로 우리 나라에 합당한 자로 인정 받도록 고난도 견디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살후1:5) 그리하면 영원한 우리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될 줄 믿습니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11)
육신의 부모의 삶이 자식과 동떨어져 있고 공감해 주지 못함으로 외면된 관계로 남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생명의 뿌리가 되고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버팀목이 되어 주신 은혜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금도 지키시고 영적 전투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친구되시며 목자 되신 독생자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에 동참하고 그 부활의 승리와 능력을 덧입는 주님의 자녀 되길 소망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브리서 12:11
하나님 아버지 이시간
슬픈 노래를 지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의 인간미와
그의 덕망을 기록한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사울은 생전에 다윗을 죽이려 몰두했지만,
사울이 죽었을 때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비참한 죽음의 결과를 슬퍼합니다.
이런 다윗의 행동은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음이옵니다.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정적을 직접 제거하는 허물없이 왕으로 세워주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다윗의 삶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도 원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옵고 교훈하시옴을 감사드리옵니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심령으로 끊임없이 주의 법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를 사용하시는 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의 말씀을 지켜 순종하는 일에 익숙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원수가 누구인지 영적으로 분별하게 하시옵소서
사울 왕은 원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결국 비참한 인생을 마치었나이다.
사울이 왕으로 치리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붉은 옷을 입고 옷에 노리개를 하여 부유하게 하였으나 그의 죽음은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지 아니한 자 같이 된 결과를 다윗은 슬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 나라의 시민권을 갖고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성도된 우리들도 진정한 원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전도해야 할 대상을 향해 반목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주의 십자가로 이룬 하나님과의 화목이
우리를 성도로 부르시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 하셨는데 ...
인생의 결국은 그 마지막에 나타나게 됨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었다가 사울처럼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지 아니함 같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주의 말씀과 거룩한 성령으로 깨어 있지 아니하면
원수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울 같지 되지 않겠는지요?
우리의 원수 사탄은 성도도 미혹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죄 중에 죽는 일에서 돌이키지 못하도록 미혹합니다.
이 멸망 받을 일에서 벗어나도록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후대에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기 원하옵고 간구합니다.
이 세상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일을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하는 열심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