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암 터
정신문화연구원의 박성수 교수는 평생을 우리 문화 연구를 하시는 분이다. 황학산의 산신령과 관련한 전설이 있었기 때문에 직지사의 삼성각을 방문한 후에 쓴 글을 읽어 보았다..
절의 뒤편의 구석자리에 있는 삼성각으로 안내하는 직지사의 젊은 스님은 삼성각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직지사의 삼성각에는 칠성님과 산신님 그리고 나빈 존자를 모신다. 칠성은 천신을 말하고 산신은 지신이다. 나빈 존자는 무엇을 상징하는 지는 애매하지만 중국의 성인이므로 일반적으로 인간을 뜻한다. 어쨌거나 天, 地, 人의 삼신 사상을 담고 있다.
“산신은 아직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 하였으므로 그 고리를 끊어버리고 해탈을 한 부처님에 비하면 아래 이지요.”
‘삼성’은 당우의 이름이 당이든, 사가 되든 우리의 신앙터에 붙이는 이름이다. 젊은 스님의 말마따나 부처님보다 한 수 아래라서 절 집에 모시면서도 전(殿)의 이름을 얻지 못하고 각(閣)이 되었다. 젊은 스님의 말이 옳다, 옳지 않다는 평가 이전에 토속의 기도처에 모시는 신은 신분이 하강하여 절 집의 뒤쪽으로 밀려나 있다. 그뿐 아니고 이제는 자리마저 없어져버려 그 터가 어딘지도 모르고 있다.
삼성이 우리의 토속 신앙 터에 붙였던 이름이었다면 서봉 아래에 있는 삼성암 터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지가 궁금하여 찾아 갔다. 초여름 날이었다. 수태골로 길을 잡았다. 팔공산 순환도로의 양켠에는 주차한 차들로 빈 자리가 없었다. 모두가 등산객이 몰고 온 차들이다. 산은 지금도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는 힘을 갖고 있다. 그 힘이 무엇에서 생겨 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를 삼성암 터로 올라가게 하는 힘은 바로 토속의 신령님이 분명하다.
산의 초입에는 길을 메운 등산객들이 떠드는 소리로 소란하였다. 산을 오를수록 사람의 수는 줄어들고 심산의 신비로움이 나를 감쌌다. 삐죽삐죽 솟아난 바위 틈 새로 비집듯이 지나가기도 하고, 밧줄을 타고 팔 힘까지 쏟으면서 바위를 타고 기어오르다 보니 온몸이 나른하고 기진할 지경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무슨 사연이 그리도 애절하여 이 험한 산길을 타고 올라갔을까? 절집을 두고 훨신 더 높은 곳이라 오르기 힘이 드는 이곳을 찾아왔을까? 사연이 궁금하다. 숨길이 목구멍까지 닿아 헉헉거리면서 삼성암 터라는 곳에 닿았다.
그리 넓지는 않았으나 펑퍼짐하여 인공적으로 다듬은 흔적이 보였다. 한 무리의 등산객이 둘러앉아서 시끄럽게 떠들면서 쉬고 있었다. 아주 얕았지만 축담이 가지런한 채로 남아 있어 오래지 않은 시기까지 건물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을 하였다. 나는 열심히 사진을 찍으면서 주변을 샅샅이 둘러보았다.
여기가 절터라고? 우선 땅부터 살펴보았다. 축담의 바로 앞은 낭떠러지였다. 일반적으로 절이라면 기본 구조가 있다. 절문이 있고, 마당이 있고, 탑이 있고, 법당이 있다. 암자라서 모든 규격을 갖추지 못 하더라도 축담의 바로 앞에 낭떠러지로 이어진 건물의 구조라면 절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집의 삼성각은 토속신을 모시므로 그런 구조를 무시해 버렸다. 토속신앙을 모시는 당우는 절집 같은 구조가 아니므로 축담 앞이 좁아도 괜찮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뒤편은 바위의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이 바위들이 바로 삼성봉의 바위 덩어리와 연결된다. 암벽의 바로 아래에는 아직도 물이 솟는 샘이 있다. 샘의 바위 옆, 그리고 조금 높은 위치에 바위들이 얼기설기 모여서 만든 굴이 있었다. 두 세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큼의 좁은 터였지만 굴이 분명하였다. 절집이라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는 집터의 구조, 그리고 바위 벽, 샘, 굴이 있는 이곳이 삼성암이라고 불렀던 절터라는 주장에 고개를 흔들었다.
서거정 선생이 절과 삼성사의 당우를 구분하지 못 하였을 수도 있고, 토속신을 모신 삼성사를 후대의 사람이 절집으로 잘못 인식하였을 수도 있다.
우리의 신앙지에는 샘이 한 몫을 한다. 샘은 생명이 태어남을 상징한다. 박혁거세도 나정에서 태어났다. 용이 사는 샘이라 하여 용정이라 부르는 곳이 많다. 용의 신비한 능력을 지닌 샘이라는 뜻이다. 분황사에도 용이 사는 우물이 있다. 부석사에는 선묘정이니 식사용정이니 하여 용의 전설을 안고 있는 우물이 있다. 부석사의 스님에게 식사용정에 대하여 물어 보았더니 ‘글쎄요, 요사체의 자리에 있었던 우물이라 하던데------’라며 말을 흐리더라는 글을 읽었다.
절에서 용의 위치는 8부신중의 하나일 뿐 신분이 높지 않다. 스님으로서는 부처님의 집에서 용 타령은 무슨 당치도 않는 말이냐,는 뜻일 게다. 그러나 부석사에 서려 있는 용의 전설은 절 자리가 원래 토속 신앙의 기도처였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어쨌거나 삼성암 터에 샘이 있다는 것은 토속 신앙 터의 여건을 잘 갖추었다고 하겠다. 지금도 샘에서는 맑은 물이 솟아 올라 등산객의 목을 추겨준다.
바위 절벽은 우리의 산악신앙, 거석신앙과 관계있다. 마을 사람이 촛불을 준비하여 산을 찾을 때는 거의 대부분이 바위 앞에다 자리를 잡고 빈다. 바위에 틈새가 있거나 굴이 있으면 신성한 장소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만큼 바위는 우리 토속 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에서도 보았다. 나는 사진기를 들고 이곳저곳에서 삿터를 누르다 바위벽에 새겨져 있는 칠성(七星)이라는 글을 보았다. 가까이 가서 유심히 살펴보니 명필은 아니었다. 비뚤비뚤한 글씨는 이름 없는 백성이 쓴 글자처럼 보였다. 대중이 모신 부처님은 아무렇게나 만들어서 길가에 두고 절을 하였으므로 민불이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명필이 아닌 글씨를 민필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